스님의하루

2023.6.25 용성조사 탄생 제159주기 기념법회, 대전충청지부 회원의 날
“이 분은 한국 불교의 중흥조이자 민족 독립운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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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장수 죽림정사에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근대불교의 중흥조이신 용성조사님의 탄생 제159주기 기념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기념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5시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3시간 동안 달려 8시에 장수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기념법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재를 지냈습니다.


다례재를 마치고 9시부터 죽림정사 인도교 준공식을 했습니다. 죽림정사와 물빛공원을 잇는 인도교를 장수군에서 건설했습니다.

장수군 군수님, 부의장님, 면장님, 이장님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현수막 앞에서 커팅식을 했습니다.

“하나, 둘, 셋!”


인도교를 등지고 한 컷, 인도교를 바라보고 한 컷을 촬영한 후 직접 인도교 위를 걸어서 물빛공원 쪽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죽림정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죽림정사에서 물빛공원으로 가려면 빙 둘러서 가야 했는데 인도교가 튼튼하게 잘 놓여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물빛공원과 죽림정사를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애써준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다 함께 요사채로 이동하여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그분이 하신 업적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분의 업적이 사실대로 알려지면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불러야 할 분입니다. 그래서 물빛공원에 용성기념관을 세우려고 하는데, 알려진 내용과 알려지지 않는 내용을 어떻게 감동적으로 소개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가능한 지자체에 부담이 안 되도록 정토회에서 사후 관리를 잘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국가 예산을 함부로 쓰면 안 되고 가능한 절약하고 효과적으로 써야 하잖아요.”

“네, 백 퍼센트 공감합니다.”

“용성조사님의 삶과 사상은 불교에 국한되지 않고 전 국민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진행할 만합니다. 학생들이 물빛공원으로 소풍을 와서 용성조사님의 삶과 사상도 학습할 수 있게 하면 참 좋지 않을까 싶어요. 함께 연구해 나갑시다.”

“잘 알겠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앞으로 기후 위기와 관련하여 장수군이 친환경 청정 지역을 잘 유지하면 오히려 경쟁력이 생길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어떻게 하면 장수군이 더 발전할 수 있는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시스템을 잘 만들어주시고, 저는 사람들이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해서 대한민국이 더욱 발전할 수 있게 함께 노력하면 좋겠어요. 용성조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내년부터 국운이 융창한다고 해요. 그러니 내년에는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며 국운이 융창하기를 기원하는 대법회를 이곳 장수에서 열면 좋을 것 같아요. 많이 협조해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법회를 시작할 시간이 되어 서둘러 교육관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대전충청지부에서 300여 명의 정토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10시 정각에 기념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 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해 묵념을 한 후 참석한 내빈 소개를 하고, 다 함께 ‘온 겨레의 노래’를 제창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백용성조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스님이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근세 한국 불교의 중흥조이시고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시며 독립운동의 막후 기둥이셨던 백용성 조사님의 탄생 15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내년이면 160주년이 되기 때문에 일만 명이 모여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며 대한민국의 국운 융창을 발원하는 대법회를 열려고 합니다.

어려운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간 어린 시절

용성조사님은 1864년 이곳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탄생하셨습니다. 14살에 남원 덕밀암에 계시는 혜월 선사를 은사로 출가를 하시고, 스승의 지도로 전국을 다니시면서 선정을 닦는데 집중을 하셨습니다. 용성조사님의 스승이신 혜월 선사는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창시하고 법을 선포하자 많은 사람이 따랐지만 감영에서는 불온한 이야기를 한다고 체포를 했습니다. 다행히 초기였기 때문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고, 이후 최제우 선생은 ‘법은 동쪽에서 이루었지만, 법을 펴는 것은 서쪽으로 가야겠구나’ 하고 경주를 떠나서 전라도 남원으로 왔고, 덕밀암을 찾아가서 혜월 선사에게 방을 하나 빌려서 1년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동학의 많은 사상을 정립하고 저술했습니다. 그리고 경주로 돌아가 법을 전파하다가 체포되어 혹세무민(惑世誣民) 한다는 죄목으로 순교를 하셨습니다. 최제우 선생의 신상을 숨겨줬다고 해서 혜월 선사는 승적이 말소되고 가택연금을 당했습니다. 그런 때에 용성조사님이 그곳으로 찾아가서 그분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혜월 선사와 최제우 선생은 선천시대는 왕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시대였지만, 후천시대에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얘기를 서로 교감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이 곧 하늘이다’ 하는 가르침을 편 것이 동학이었기 때문에 동학은 조선왕조에서 많은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 용성조사님은 어릴 때부터 민족사관이 또렷했고, 어려운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자비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기에 그분은 세상에 관여하지 않으시고 줄곧 수행 정진하셔서 도를 이루셨습니다. 그 도를 완전히 자기화하기 위해 오랜 기간 보림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선방의 조실이 되셔서 많은 제자들에게 그 가르침을 전수하셨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와 평생 동안 나라의 독립을 향해

그러나 그분도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사실상 일본에 빼앗긴 상황에서 더 이상 수도만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오셨습니다. 먼저 중국으로 건너가서 나라가 실질적으로 멸망하면 임시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상해에 임시정부를 마련할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겉으로는 중국의 고승들과 대담을 나눈다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실제로는 임시정부를 구성할 기반을 갖추는 일을 하셨습니다.

1910년에 한일 합병이 강제되자 용성조사님은 서울로 올라오셔서 종로의 가정집을 사서 ‘대각사’라는 절을 창건하시고, 지금의 서초동 우면산에 위치한 백제불교 초전법륜 성지인 대성초당에 은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다니시면서 옛날에 정승을 했거나 육판서를 했거나 8도 감사를 했거나 고을의 사또를 한 조선왕조 관리들을 찾아가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당신들은 그동안 나라의 녹을 먹고 잘 살지 않았냐. 이제 나라를 빼앗겼으니 여러분들이 나라를 되찾는 일에 나서 달라. 직접 참여하지 못하면 재정을 지원해 달라.’

6년을 전국으로 다니시면서 설득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 하며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라도 남원 땅에 사는 만석꾼 임동수 거사만이 용성조사님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동참을 했다고 합니다. 그분의 후원을 받아서 종로 대각사를 창건하고 새로운 불교를 홍보하는데 힘쓰는 한편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손병희 천도교 교주를 만나서 나라의 독립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손병희 교주가 ‘사실은 천도교에서 이미 은밀히 독립을 선언할 준비를 하고 있다’라고 해서 두 분은 의기투합을 하게 됩니다. 스승과 스승 사이에서는 최제우 선생과 혜월 선사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며 협력을 했고, 대를 이어서 손병희 교주와 용성조사님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서로 은밀히 협력을 하게 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천도교가 중심이 되고 불교와 기독교가 함께 협력하여 3.1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지도급 인사라고 하는 관료 출신들은 아무도 독립운동에 뜻이 없었고, 일반 백성들은 먹고살기 급급해서 독립운동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용성조사님은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서 3.1 운동을 주도하게 하였고, 당시의 젊은 학생들이 광범위하게 이 운동에 호응하면서 3.1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당시에 우리나라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였는데 2백만 명이 참여했다는 것은 일제의 무력탄압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낸 엄청난 성과였습니다. 이것은 중국에도 영향을 주어서 5.4 운동이 되고, 베트남과 인도에도 영향을 주고, 멀리는 이집트까지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타고르는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찬미했습니다.

이렇게 3.1 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용성조사님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국가보안법 혐의를 받고 6개월의 조사와 1년 6개월의 형을 받아서 만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출옥을 하게 되어 나오니까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은 제자들이 종로 대각사를 팔아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민간인 집에 은거하면서 후원자들의 협조를 얻어서 다시 대각사 창건을 하셨습니다. 당시 기존의 불교는 대부분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을 했기 때문에 불교라는 이름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셔서 아예 새로운 이름인 ‘대각교’를 창시하셨습니다. 불(佛)이란 대각(大覺), 즉 크게 깨달은 자라는 뜻입니다. 인도 말로 번역하면 ‘마하보디’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바로 세우고, 법을 전하고, 경전을 번역하고, 올바르게 수행하는 재가 수행자들의 길을 여는 등 불교를 바로 세우는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이유

또 한편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여러 지원 활동을 은밀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불교가 그래도 국민에게 조금이라도 체면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용성조사님께서 3.1 운동에 참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의 불교는 친일 행각을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불교 입장에서는 친일 행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조 500년간 너무 탄압만 받았는데 일제 강점기에 와서 일본이 불교를 약간 옹호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협조하면 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불교의 발전과 자신의 안위만 생각했지 ‘나라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백성을 어떻게 편안하게 할 것인가?’ 하는 큰 안목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용성조사가 계시지 않았다면 한국 불교는 해방 이후에 부끄러워서 얼굴도 제대로 들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렇게 용성조사님은 불교의 발전만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불교의 중흥조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고도 볼 수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점은 용성조사님의 활동에 비해 그 평가는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방 이후 좌우 대립으로 인해 나라가 분단이 되면서 그 업적을 사실대로 평가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6·25 전쟁까지 치르면서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많은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단 이후에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는 지금까지도 많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물론 민주화 이후에 일부 명예 회복을 하신 분들도 있지만 아직은 많은 분들이 명예 회복을 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또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정부의 수반(首班)이 되지 못하면서 그 법통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용성조사님의 업적들은 더욱더 제대로 평가되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라에서 못했다면 불교 안에서라도 용성조사님에 대한 독립운동사를 높이 평가해주어야 했는데 친일 행적을 했던 사람들이 종단을 계승하는 바람에 용성조사님의 불교 개혁운동에 대한 것은 일부 평가를 했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는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어요.

대한민국의 국운 융창과 한반도의 평화를 발원하며

그렇지만 용성조사님께서 말씀하셨던 불교의 지성화는 바른 불교로, 불교의 대중화는 쉬운 불교로, 불교의 생활화는 생활불교로, 많은 정토회 회원들이 재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대중이 주체가 되어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실현하고 있고, 또한 기후 위기를 막는 환경실천, 한반도의 평화, 빈곤퇴치,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실현하는 일도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진행해 왔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 100년 전에 꿈꾸셨던 일들이 오늘날 정토회를 통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년에는 용성조사님의 탄신 160주년을 맞이해서 대한민국이 통일의 희망을 품고 전 세계인들이 동경할 수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해 국운 융창을 선포하는 대법회를 열려고 합니다. 이 도량에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참가하여 발원하는 대법회를 열어서 국민의 행복과 나라의 발전,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염원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뜻깊은 행사에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서 각 종교의 지도자와 정부의 주요 인사도 참석하도록 해서 용성조사님의 큰 꿈이 실현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내년 음력 5월 8일은 무조건 시간을 비워 놓으셔야 해요. 아시겠죠?”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그날 아프면 앰뷸런스를 타고 오고, 들것에 실려서라도 오고, 청년들은 그날 결혼식을 잡지 마시고요. 해외 출장이 있으면 취소하세요. 만약 그날 돌아가시는 분이 계시면 장례식을 하루 앞으로 댕기든지 뒤로 미루든지 해서라도 다 함께 모여서 160주년 대법회를 기념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 160주년 대법회를 기약하며 기념 법회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중들은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삼삼오오 모여서 맛있게 식사를 한 후 다시 교육관에 모였습니다.

오후 1시부터는 대전충청 지부 회원의 날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용성조사 탄신일을 맞이하여 지부 전체 회원이 으뜸절에서 소통과 화합의 장을 갖기 위해 마련된 시간입니다.


지부장님의 인사말을 들은 후 지부법사단을 소개하고, 지회별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온라인으로만 만나다가 3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게 된 회원들은 반가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지회별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개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오늘을 기념하며 축하 공연도 선보였습니다. 교육관 실내는 뜨거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회원들은 동작을 함께 따라 하며 신나는 노래 속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명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사회자가 곧바로 질문을 받으려고 하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인사할 시간은 주셔야죠.”(모두 웃음)


스님은 대중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후 대전충청지부 출신으로 대표가 된 전해종 님에게 인사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또 지부장과 2차 만일결사의 꽃인 모둠장도 일어나 인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어서 두 시간 동안 스님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곱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주로 실천 활동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몇몇 단체에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며 시국선언을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하는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최근 우리나라에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고 있다고 합니다. 각계각층의 여러 분야에서 정권의 부조리에 대한 시국선언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은 매우 불안하고 걱정스럽습니다. 불교 교리의 관점으로 시국선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사회변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부분 다 자기 인생살이가 바쁘고 힘들어서 질문을 많이 하는데 질문자는 이렇게 세상의 문제가 염려되어서 질문을 하니까 아주 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웃음)

각 개인이 ‘민주주의가 위기다’, ‘국가의 환경정책이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정책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쪽 보다 가진 자를 위하는 정책으로 가고 있다’ 하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해서 비판하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입니다. 개인으로서는 누구나 그런 비판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행동을 하라고 하거나 하지 말라고 얘기하지 않으셨어요. 다만 그런 일을 할 때는 폭력적으로 하지 말고 평화적으로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라고 하신 말씀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비판은 하더라도 욕설은 하지 말고 좀 더 객관적인 정보를 갖고 해야 합니다. 풍설이나 유언비어를 사실인 것처럼 퍼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토회는 사회변화를 목표로 하는 시민단체 또는 정치 단체가 아니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행복해지는 것을 가르치는 수행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은 마음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먼저 내가 괴롭지 않도록 하는 것을 바탕에 깔고 그다음부터는 선택 사항입니다. 기후 위기를 극복하는 일을 하든, 평화를 정착시키는 행동을 하든, 어려운 사람을 돕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을 하든, 이런 일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 사항입니다. 물론 정토회에서는 이런 사회실천을 권장하는 편입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당시에서는 성차별이 너무 심해 여성의 출가를 허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셨습니다. 계급 차별도 극심했지만, 천민들의 출가도 허용해서 계급 차별이 없는 상가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또 전쟁이 일어나려고 할 때도 전쟁을 일으키려는 쪽을 찾아가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활동들을 하셨어요. 부처님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셨지만 평화적으로만 활동하셨습니다.

만약 국민의 절대다수가, 최소한 3분의 2 이상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정토회도 함께 나설 수가 있습니다.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이라면 한반도 평화를 주장해야 하고, 기후 위기가 막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면 환경 실천을 국민들에게 호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토회는 수행공동체이지만 사회 정의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정토회 회원들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국민 다수의 여론을 지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국민의 5퍼센트 정도밖에 안 되는데 정토회가 나설 수는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런 사회운동을 하는 단체가 있긴 하지만 그 단체는 그런 활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예요. 이런 것을 선구적 역할이라고 하는데 국민 전체의 지지하고는 관계없이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면 선도적으로 나가서 활동을 하는 거죠. 물론 정토회도 수행에 대해서는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다른 종교에서는 모두 복을 비는데 정토회는 그런 것을 하지 않습니다. 정토회에서는 봉사하면 복을 준다든지, 기도하면 죽어서 극락에 간다든지, 이런 얘기를 안 하죠. 사실은 종교계 안에서 이런 주장을 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기복적인 얘기를 하지 않고는 종교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토회는 기복적인 활동을 안 하고도 지금 이렇게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수행의 관점에서는 정토회도 일종의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토회가 설립한 단체 중에는 ‘평화재단’이라는 단체가 있어요. 평화재단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선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또한 구호 활동을 하는 ‘JTS(Join Together Society)’라는 단체에서는 다른 단체들이 못하는 활동들을 선도적으로 합니다. 파키스탄까지 가서 구호 활동을 하고, 미얀마에 싸이클론 피해가 심하지만 반군 지역이라 정부군이 못 가게 하는 시트웨이(Sittway)까지도 가서 구호 활동을 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구호 활동 분야에서는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대부분이 생각하는데 ‘에코붓다’라는 단체를 설립해서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것도 환경 운동 분야에서는 일종의 선구적 역할입니다. 소비주의와 맞서서 싸우고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정토회는 정치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선구적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활동을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그런 일을 하고 싶으면 정토회의 이름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면 됩니다. 개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유입니다. 그러나 정토회 회원은 모두 수행자기 때문에 수행자로서 꼭 지켜야 할 규범이 있습니다. 첫째, 폭력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둘째, 욕설을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에 해당합니다.

어떤 정치적인 요구를 하는 것은 정토회 회원으로서가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그 권리를 행사하겠다는데 왜 정토회가 반대하겠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수행자이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한다거나, 욕설을 한다거나, 술을 마시고 취해서 행패를 피우거나,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거나, 이런 행동을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수행자의 규범에 해당하는 것은 개개인이 다른 사람과 같이 일을 할 때도 반드시 지켜줘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전 신청 질문자가 모두 질문을 하고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 현장에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분은 스님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다며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제가 스님 덕분에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중은 큰 박수로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한 분의 질문을 더 받고 즉문즉설 법회를 마쳤습니다. 법문이 끝나자 대전충청지부 회원들은 준비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지회별로 한 명씩 태극기를 들고 일어서서 실천과제를 크게 외쳤습니다. 마지막 구호를 외칠 때는 모든 회원들이 일어나 함께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지역실천 활동! 으뜸절 가꾸기! 세계전법! 청년전법! 한반도의 평화! 세상을 행복하게! 우리가 하겠습니다!”

이어서 한 가지 퍼포먼스를 더 했습니다. 오늘은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날입니다. 사회자가 “한반도의 평화를!”이라고 외치자 회원들이 ‘위하여!’를 세 번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행사를 마치고 다 함께 대웅전 앞으로 나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찍는 단체 사진이었습니다. 이어서 지회별로도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촬영을 마치고 스님은 멀리까지 걸음해주신 노보살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노보살님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에게 인사를 한 후 곧바로 차에 올랐고, 대중은 도량의 구석구석을 정비하는 울력을 함께 했습니다.

죽림정사를 출발한 스님은 다시 3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가지 업무들을 본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비닐하우스에서 풀매기를 하고, 결사행자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한 후, 오후에는 논에 피를 뽑는 울력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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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지역실천 활동! 으뜸절 가꾸기! 세계전법! 청년전법! 한반도의 평화! 세상을 행복하게! 우리가 하겠습니다!”

2023-08-25 22:32:50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3-07-05 11:42:07

자재왕

내년 용성조사님 160주년 대법회 음력 5월8일 참석을 발원하옵니다.

2023-06-30 17: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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