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6.17 INEB 4일째, 농사 체험, 요양 병원, JTS 소개
“법륜 스님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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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INEB(참여불교국제네트워크) 방문단이 정토회 견학을 시작한 지 4일째 날입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다 함께 새벽 예불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모두 테라밧다의 예식을 하는 스님들이지만 INEB 방문 기간에는 정토회 방식으로 새벽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6시부터 농사 체험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INEB 방문단은 따뜻한 죽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스님과 농사팀 행자들은 30분 일찍 앞밭으로 나와서 울력을 준비했습니다. INEB 방문단과 함께 할 울력은 감자 수확입니다. 방문단이 도착하면 감자를 수확할 수 있도록 비닐을 걷어냈습니다.

6시가 되자 승복 위에 장화, 앞치마, 장갑을 갖춰 입은 동남아 스님들이 활짝 웃으며 밭으로 걸어왔습니다. 스님도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INEB 방문단이 모두 도착하자 밭에 동그랗게 둘러섰습니다. 농사 담당 행자님이 감자를 수확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한 가지 과제를 주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자기 동작에 깨어있어 보세요. 그리고 종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1분 간 명상을 합니다.”

“Yes!”(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명심문을 함께 외쳤습니다.

“Everything has its place.”(만물에는 제 자리가 있습니다.)

관리기가 땅을 뒤엎자 감자가 알알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관리기가 지나가면 곧바로 INEB 참가자들이 호미로 감자를 골라냈습니다. 보물이라도 줍듯 모두 신나는 얼굴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순식간에 감자가 사라졌습니다.



밭일을 많이 해보지 않은 참가자들이 눈에 보이는 감자만 줍고 말자 스님이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호미로 땅을 더 파서 감자를 찾아야 해요. 단, 감자가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해요.”


INEB 참가자들이 감자를 한쪽에 모아두면 한국인 봉사자들이 크기별로 상자에 담았습니다.


신나게 감자를 줍고 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1분 후 다시 종소리가 들리자 멈추었던 밭이 다시 살아 움직였습니다. 순식간에 일곱 고랑의 감자를 수확했습니다. 감자 상자는 트럭으로 옮겨 실었습니다.



7시가 되어 울력을 마쳤습니다. 울력이 길어지면 참가자들이 힘들어할 것을 염려해 스님이 딱 한 시간만 울력을 하도록 했습니다. 밭을 떠나기 전, 감자를 하나씩 손에 쥐고 ‘감자’를 외치며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용한 도구와 장화는 빗물에 깨끗이 씻어 원래 있던 제자리에 두었습니다. 농사일을 처음 해보는 참가자들은 울력을 하는 과정을 놀이처럼 재미있어 했습니다.

“힘들지 않았어요?”

“재밌었어요. 더 할 수 있어요.”


농사일을 마치고 비닐하우스를 둘러본 후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재활용 운동을 하고 있는 살리고 센터를 둘러보고 유통 담당자에게 설명도 들었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은 각양각색의 재활용 물품들과 두북 수련원에서 생산한 농산물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재활용이 곧 지구를 살리는 환경운동이 된다는 설명에 모두가 공감하며 다양한 재활용 물품들을 구경한 후 강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오전 9시 30분부터는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스님은 식사를 하기 전, 동남아 스님들을 배려해서 너무 빨리 식사하지 않도록 안내했습니다.

“동남아에서 온 스님들은 발우공양이 오늘 마지막 식사이니까 천천히, 그리고 많이 드세요. 오늘 일을 해서 더 배가 고플 거예요.”

동남아 스님들은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평소에 공양을 하는 시간보다 두 배도 더 오래 식사를 했습니다. 퇴수통에 담긴 물에 늘 찌꺼기가 보였는데 오늘은 깨끗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이 잠시 후 방문할 예정인 자재병원에 대해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침에 농사일은 할 만 했어요? 테라밧다 스님들은 평소에 일을 안 하시는데 힘들지는 않았어요?” (웃음)

“It's okay. It was fun.”(괜찮습니다. 재밌었어요.)

“우리가 오늘 첫 번째로 가볼 곳은 자재병원입니다.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호스피스 활동을 아주 작은 규모로 시작했고, 30년 동안 노력해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큰 병원을 일구었습니다. 도움을 전혀 안 받았다는 말은 큰 절이나 종단에서 지원하지 않고 오직 자원봉사자들을 모아서 개인이 일구어 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한번 방문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오늘 함께 가보려고 합니다.

그 비구니 스님이 정토회의 멤버가 되어 활동을 하다가 출가를 했기 때문에 단체의 이름을 ‘정토마을’이라고 붙였습니다. 병원이 정토회와 상호 우호적인 관계이기는 하지만 정토회는 아닙니다. 정토회에서 농산물을 많이 수확하면 그 병원에 나눠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어서 식재료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한국에 오셨으니까 부산에 가서 바다를 한번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부탄에서 오신 분들은 꼭 바다를 보셔야 해요. 부탄에는 바다가 없잖아요.” (웃음)

발우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비구 스님들에게 면도기가 필요한지 물어보았습니다.

“이건 제가 쓰는 면도기예요. 일회용 날이지만 열 번은 쓸 수 있어요. 필요하면 제 것을 빌려드릴게요.”

“아직 괜찮습니다.”

11시에는 비구니 스님이 모금을 하여 세운 병원인 자재병원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은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 대화를 나누려고 했지만, 대부분 자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마이크를 내려놓았습니다.

“일을 해서 피곤한가 봐요.”(웃음)


2013년 개원한 '정토마을 자재병원'은 그동안 말기암 환자 등을 돌보는 호스피스 요양병원으로 운영됐으며, 최근에는 입원형 16 병상과 호스피스 완화의료 병동 25 병상을 갖춘 호스피스 전문병원으로 확장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이사장을 맡고 있는 능행 스님이 반갑게 INEB 방문단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교육관 강당에서 차담을 나누며 능행 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능행 스님을 소개했습니다.

“저희가 도착한 이곳은 정토마을 자재병원입니다. 원래 호스피스 병원으로 시작했습니다. 옆에 계시는 비구니 스님이 창립자이자 원장이십니다. (모두 박수)

여기에 오신 분들은 국제참여불교 네트워크(INEB)에 소속된 분들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 제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구니 스님들이 운영하는 도량인 운문사를 어제 방문했는데, 오늘은 비구니 스님이 하는 사회 활동을 살펴보려고 이곳에 방문하게 됐습니다.”

능행 스님은 병원 건립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그 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연히 지인의 병문안을 하러 천주교 병원에 들렀다가 말기암 환자들이 겪는 고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스님은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병원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합니다. 1997년 호스피스 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을 시작했고, 병원을 세운 후 급한 마음에 맨 땅에 천막을 치고 환자들을 들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2000년이 되어서야 어느 정도 시설이 갖춘 호스피스센터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불교계의 무관심 속에서도 능행스님은 30년 세월을 주저 없이 굵은 궤적을 그려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특히 참가자들은 여성 출가자가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다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는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자재병원을 나왔습니다. 병원 옆에 새로 지은 적멸보궁을 참배한 후 병원을 나오며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을 때 비구니 제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헤어질 무렵 능행 스님은 부탄에서 온 비구니 스님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특별히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12시 40분에 자재병원을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려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해마다 INEB 동남아 스님들이 정토회를 방문할 수 있게 재정 후원을 해주고 있는 원만성 보살님을 찾아가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원만성 보살님은 광안리에 위치한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자 휠체어를 타고 있는 보살님이 INEB 방문단을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스님이 보살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경비는 이 보살님이 보시를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소개가 끝나자 동남아 스님들은 선의를 베풀어준 보살님에게 기도를 해주고 싶다고 하면서 다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의 정성스러운 기도를 받고 원만성 보살님도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원만성 보살님의 오빠 되시는 분은 인도에 만인 공양한 사진을 보고 보살님이 무척 기뻐하셨다고 하며 추가로 보시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파키스탄 수해, 시리아 지진 피해 소식을 전하며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곳을 알려주었습니다.

보살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마침 병원 앞에는 광안리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온 김에 바다 구경을 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푸른 바다와 광안대교가 눈앞에 펼쳐지자 동남아 스님들은 모두 카메라를 꺼내 열심히 바다 풍경을 사진 속에 담았습니다.


태국에서 온 스님은 해변에서 미역을 줍고 나서 무척 기뻐했습니다.

10분간 바닷가를 즐기고 오후 3시 30분에 광안리 해수욕장을 출발하여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두북 공동체 행자님들과 부산울산지부의 봉사자들이 맛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해 놓고 INEB 방문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성껏 차려진 음식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은 후 저녁 6시부터는 방송실에서 JTS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스님이 JTS의 구호 활동에 대해 전체적으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정토회에서 하고 있는 사회활동은 환경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구호활동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구호활동은 기본적인 생활에 해당하는 의식주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관점을 가지고 하고 있습니다. 더 잘 살게 해주는 개발 원조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에 제가 부탄을 방문하고 나서 부탄의 한 개의 주를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개발 원조하는 방식을 검토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구호활동은 JTS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사업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JTS가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프로젝트는 북한 주민들의 영양 상태를 개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의 불가촉천민 마을과 필리핀의 민다나오 분쟁지역인 무슬림 마을과 원주민 마을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각각의 활동을 소개하는 영상을 본 후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JTS 전체 소개 영상과 작년에 인도, 필리핀, 로힝야 난민캠프를 방문하고 온 영상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각각의 구호 사업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올해 시리아 지진 피해 지역, 파키스탄 수해 지역을 지원하고 온 영상도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고 스님은 JTS 활동을 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JTS 활동은 재정 확보가 제일 큰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재정 확보보다는 봉사자 확보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JTS는 ‘모든 활동을 자원봉사 방식으로만 진행한다.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 하는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JTS 활동을 할 때 가장 어려운 점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구호활동을 하려면 한국에서도 어렵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더욱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반드시 인건비가 포함되어 있는데 JTS는 인건비를 포함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니까 현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슨 이런 단체가 있나?’ 하면서 너무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JTS가 어떤 일을 할 때는 자신의 돈과 시간을 내어서 남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먼저 찾습니다. 자신의 돈과 시간을 내어 남을 돕고 싶은 사람에게는 그 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JTS가 지원합니다.

JTS 활동을 하면서 보수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단체들에 비해 굉장히 비효율적입니다. 이것이 지금 JTS의 가장 어려운 점이에요.”

여기까지 JTS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다시 강당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예불을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예불은 태국 방식으로 드렸습니다.


“제가 외울 게송은 모든 생명을 이 자리에 초대해 법문을 듣도록 청하는 내용입니다.”

예불을 드린 후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스님은 법륜스님이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 질문했습니다.

법륜 스님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무엇이었나요?

“스님께서는 정말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평범한 스님이었다가 지금과 같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하고 계시는 스님으로 변화하게 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있었나요?”

“저는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관심이 적었습니다. 어릴 때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옆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계신 불심도문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난 인연으로 어떻게 보면 반강제적으로 출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붓다 담마가 좋아서 출가를 했지만, 스승님으로부터 아주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출가를 하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웃음)

붓다 담마는 정말 좋았지만 막상 절에 들어와서 스님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많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개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불교 개혁 운동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서 일정 정도 포기를 하고, 그다음에는 대학생 청년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한테 두 번째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서암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암 큰스님은 미국 LA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때는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LA에 있는 반지하 공간에 한국 절을 운영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거기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서암 큰스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분이 저를 보더니 ‘여기에 하루라도 먼저 온 사람이 주인이니까 내가 당신을 접대하겠네’ 하며 밥을 해주셨습니다. 침대가 하나 있었는데 자기는 나이가 많아서 침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저한테 침대를 내어 주고 큰스님은 바닥에서 주무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이 분은 다른 스님들과는 많이 다르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렇게 같이 저녁을 먹고 노스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한참 동안 한국 불교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서 두 시간 동안 말을 했어요. 그러나 노스님은 한 마디도 안 한 채 그냥 듣고만 계셨습니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아무 이야기를 안 하고 다 듣고 계시더니, 제 이야기가 끝나니까 이렇게 한 마디를 하시는 거예요.

‘여보게, 어떤 사람이 말이야. 논두렁 밑에 앉아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네. 그곳이 절이야. 그것이 불교라네.’

그 말씀이 저한테는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상에 집착하지 말라’ 이런 내용들이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모든 상은 다 공하다’ 이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지적을 받고 저를 돌아보니까 저는 머리를 깎은 사람이 스님이고, 스님들이 사는 기와집이 절이고, 그것이 불교라고 상을 짓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허상에 집착했기 때문에 ‘스님들이 문제다’, ‘절이 문제다’, ‘불교가 문제다’ 하고 불평을 늘어놓게 된 거죠. 그런데 그분의 말씀은 마음이 청정한 사람이 스님이고, 그 사람이 머무르는 곳이 절이고, 그것이 불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너는 지금 형상에 집착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꿈같은 소리 그만해라’ 하는 뜻처럼 들렸습니다. 선불교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을 표현할 때 허공의 헛꽃을 꺾으려고 한다고 표현합니다. 꽃이라는 게 없는데도 있다고 생각하고 꺾으려 한다는 거죠.

그때 서암 큰스님의 말씀은 제가 활동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우선 기존의 불교에 대해서 더 이상 불평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스님이라는 이름, 절이라는 이름, 불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시비할 이유가 없어진 거죠. 그러자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하면 그가 곧 스님이기 때문에 스님을 따로 찾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머무르는 곳이 절이니까 절을 따로 지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이것은 붓다가 이미 자신의 삶을 통해 직접 보여준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붓다가 나무 밑에 앉아서 지내던 그곳이 지금은 성지가 되었잖아요. 아쇼카왕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기념탑이나 건축물도 없었습니다. 아쇼카왕이 붓다를 기념하기 위해서 처음 탑을 세웠을 뿐입니다. 또 스님들이 사는 집을 지은 것도 불멸 후 500년이 지난 다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마음을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스님이고, 어느 곳이든 우리가 담마를 이야기하는 곳이 곧 절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쉬운 게 없었습니다. 준비할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가정집에 모여서 담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토회는 처음에 가정집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모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가정집에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해서 ‘비용을 나누어 내고, 건물에 공간을 하나 빌려서 법당을 운영하자’ 하는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차츰 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만들어진 법당이 코로나 이전에 200여 개가 되었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법당이 전법을 하는데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 팬데믹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모일 수가 없으니까 200여 개의 법당을 모두 없애고 온라인으로 전환했습니다. 즉, 각자 자기가 사는 집을 절로 만들자는 취지였습니다. 정토회는 시작부터 건물을 짓거나 형상을 갖추는 것부터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 만들어진 것이 정토회이기 때문에 저는 정토회 멤버들을 신도라고 부르지 않고 수행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승단을 개혁하려고 하다가 멈춘 것이 오히려 새로운 불교 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종단을 개혁하려면 일단 비판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정토회가 그동안 해온 일은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좋다는 판단이 들면 따라오도록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종단을 시비할 일이 없었습니다. 저를 출가시킨 불심도문 큰스님은 당시 불평하는 저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탑 앞의 소나무가 되어라’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어린 소나무가 탑이 자기를 가린다고 불평만 하는데, 어린 소나무가 크면 소나무의 그늘이 탑을 가리게 됩니다. 탑 앞의 소나무가 되라는 말은 탑을 시비하지 말고 자신을 성장시키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남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고 너나 잘하라는 뜻이죠. (웃음)

이것 말고도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일을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 꼭 잘못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실패를 한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Thank you.”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INEB 방문단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대화가 점점 깊어가는 가운데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내일 서울 올라가서 또 이야기 나눕시다.”

INEB 방문단의 4일째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늘도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두북 수련원을 출발하여 서울로 이동한 후 정토사회문화회관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외국인 노동자, 불교 NGO 활동가와 불교언론인, 정토회 활동가들을 차례대로 미팅하고, 저녁에는 스님과의 대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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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최근에 제가 부탄을 방문하고 나서 부탄의 한 개의 주를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개발 원조하는 방식을 검토해보고 있는 중입니다." - 기대되는 마음입니다.

2023-08-25 14:34:39

정종숙

"탑 앞의 소나무가 되어라" 불심도문 큰스님의 말씀과 서암 큰스님의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을 잘 살펴 개인 법당에서 매일 수행 정진하도록 널리 법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 _()_

2023-07-14 23:21:54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3-06-26 10:5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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