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6.16 INEB 3일째, 불국사, 운문사, 두북 수련원
“술자리를 너무 좋아해서 남편과 아이들이 불안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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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INEB 방문단이 정토회 견학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INEB 방문단을 맞이하기 위해 불국사로 향했습니다. 새벽 4시 30분에 문경 수련원을 출발한 INEB 방문단은 오전 7시 30분에 불국사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매년 INEB 방문단에게 정토회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사찰도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일주문 앞에 세워진 지도 앞에서 스님의 설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의 나라’라는 이름을 가진 ‘불국사’라는 절입니다. 대부분의 절이 스님이 중심이 되어 창건한 절인데 이 절은 신도가 중심이 되어서 창건했습니다. 스님이 중심이 되면 자신의 종파에 이름을 걸고 절을 짓는데, 이 절은 신도가 만든 절이기 때문에 여러 종파의 사상을 통합해서 절을 지었습니다.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경전이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입니다. 불국사는 세 가지 경전 속에 담긴 사상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해가 떴으면 아주 더웠을 텐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 둘러보기에 적당했습니다. 스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국사를 안내하지만, 올 때마다 듣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새롭게 안내해 줍니다. 오늘은 동남아 스님들이 알아듣기 쉽게 불교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팔리어를 섞어가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국보 청운교와 백운교 앞에서 스님은 축대에서 배울 수 있는 모자이크 붓다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을 보기 위해 대웅전 앞마당으로 올라갔습니다. 회랑을 지나자 좌경루에 큰 목어가 달려 있었습니다. 스님은 목어를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목탁 소리 들어보셨죠? 목탁의 원형이 여러분 앞에 보이는 목어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법문을 들을 때 조는 제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졸다가 부처님께 지적을 받은 후 잠을 자지 않고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아니룻다입니다. 옛날 선조들은 물고기는 자지 않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물고기 모양의 목어를 두드리는 이유는 졸지 말고 항상 깨어있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점점 발전해서 목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만 알아듣잖아요. 사람뿐만 아니라 뭇 생명들에게도 법을 전하기 위해 범종, 목어, 법고, 운판 등 다양한 소리를 내게 된 겁니다.”

대웅전을 참배한 후 다보탑과 석가탑을 둘러보고 무설전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담장 너머로 불국사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담겼습니다.

“이곳이 한국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 개의 처마가 한꺼번에 보이죠?”

“Very beautiful.”


스님은 가는 곳마다 참배를 한 후에 꼭 보시를 했습니다. INEB 스님들도 스님을 따라 보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관음전을 보고, 비로전을 지나, 나한전을 본 후 마지막으로 안양전을 보고 연화교와 칠보교 앞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불국사를 배경으로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개인별로도 기념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불국사를 두 시간 동안 둘러보고 두북 수련원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버스 안에서는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대부분이 테라밧다 불교를 공부한 분들 이어서 대승불교에 기반해서 지어진 불국사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나 봅니다. 스님은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이 설명을 하는 동안 버스가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10시 30분에는 대강당에서 다 함께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발우공양을 시작하기 전에 스님이 한 가지 안내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발우공양이 빨라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오늘은 천천히 드시기 바랍니다.”(웃음)




소심경 독송에 맞춰 발우를 펼친 후 고요한 가운데 식사를 마쳤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이 두북 수련원에 상주하는 대중을 한 분 한 분 소개해 주었습니다. 운문사로 출발할 시간이 되어서 간단히 소개만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버스가 두북 수련원을 출발하자 스님이 운문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운문사는 한국에서 가장 큰 비구니 사찰입니다. 현재 비구니 스님들이 100명 정도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250명 정도가 살았는데 요즘에는 많이 줄었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의 수가 계속 줄어드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저출산으로 인해 젊은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둘째,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셋째, 절 안에는 아직도 위계질서가 남아 있어서 민주적인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적응하기가 힘듭니다. 특히 비구니 스님들은 비구 스님들에 비해 약간 불평등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더욱더 그 수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승가 대학은 입학하는 학생이 없어서 문을 닫을 지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교육 분위기도 많이 바뀌고 있고, 휴일, 외박, 외출이 허용되는 등 전통적인 수행 문화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덧 운문사에 도착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고 대웅전을 참배한 후 운문사 대경 스님의 안내로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인 금당을 비롯하여 수행 대중이 발우공양을 하고 자자와 포살을 하는 청풍료 등 비구니 스님들의 생활공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늑하고 정갈한 도량의 모습에 모두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경내를 둘러보던 중 나한전 앞에 도착해서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오백 명의 아라한을 모신 나한전입니다. 내 얼굴이 어디 있나 한 번 찾아보세요.”


동남아 스님들은 각양각색의 아라한 중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보며 즐거워했습니다. 이어서 강당으로 들어가 운문사 학인 스님 50여 명과 INEB 동남아 스님들이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이 자리를 준비해 준 운문사 측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INEB 방문단을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까지 정토회의 환경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빈곤퇴치 사업들을 견학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제일 관심 갖는 곳이 어디일까요?”

“운문사입니다.” (웃음)

“네, 맞습니다. 현재 태국 등 남방불교에서는 여성이 출가하는 비구니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스리랑카에서는 사실상 비구니 제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남아 여성들이 주로 스리랑카에서 비구니계를 받은 다음 각 나라로 돌아옵니다. 태국에서는 아직 사회적 인정을 전혀 못 받고 있고요, 부탄은 작년에 국가에서 처음으로 비구니 제도를 인정했습니다. 작년에 140명 정도가 비구니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운문사처럼 비구니 스님들이 운영하는 큰 도량과 승가대학이 이분들에게는 하나의 큰 희망이 될 것입니다. 또한 최근에는 동남아에서도 여성 불교 신자들의 활동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국가마다 여성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고요. 이런 이유 때문에 INEB 견학 프로그램에 운문사를 꼭 넣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운문사 대중 스님들은 부담이 좀 되시겠지만, 세계불교와 동남아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준비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서로에 대해 소개를 한 후 궁금한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학인 스님들과 보살님들이 차를 비롯하여 다과를 정성껏 준비해 주었습니다.


다양한 질문이 오가는 가운데 운문사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동남아 스님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비구니 승단의 복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비구니 승단이 없는 나라의 비구 스님들은 비구니 승단 설립과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스님이 동남아 스님들을 대신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젊은 스님들은 대부분 비구니 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호응을 하시는데, 승단의 상부에 해당하는 고위층에서는 반대가 심합니다. 제가 스리랑카와 태국의 고위층 스님들을 만나봤는데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여기 오신 비구 스님들에게 비구니 승단의 복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직접 한번 물어보세요.” (웃음)

운문사 학인 스님은 동남아에서 온 스님들에게 직접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What do you think about the restoration of the nun order?”
(비구니 승단의 복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미얀마, 태국에서 온 스님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태국이나 스리랑카는 비구니 제도가 이미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스리랑카에는 천 명이 넘는 비구니 스님들이 계시고, 태국에는 3백에서 4백 명 정도의 비구니 스님들이 활동하고 계십니다. 모두 테라밧다의 계를 받으셨습니다. 지난 4월에도 스리랑카에서 9명의 여성이 비구니 계를 받으셨습니다.”

“승단의 고위층 비구 스님들이 비구니 제도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제 주위의 비구 스님들은 모두 비구니 제도를 지지합니다. 그리고 많은 비구니 스님이 삼장(三藏)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계율도 잘 지킵니다. 그래서 저는 비구니 제도가 충분히 확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특히 여성 신도들의 어려움은 비구 스님보다 비구니 스님들과 의논하고 도움 받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교육과 지원을 좀 더 받으면 얼마든지 비구니 제도가 확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문사 학인 스님들은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비구니 제도에 대한 대화는 활발하게 이어졌습니다. 이어서 스님도 비구니 제도 논쟁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비구니 제도에 대한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 역사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합니다. 인도에서 비구니 제도가 소멸한 뒤에 불교가 인도에서 태국과 미얀마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남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비구니 제도를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비구니 제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년의 전통을 이어온 승단이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부처님 당시부터 비구니 제도가 있었다는 점과 현대 사회가 바뀌었다는 점,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설득해 나간다면 대화의 여지가 생길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태국에는 비구니 스님이 약 3백 명 정도가 있는 반면에 스리랑카에는 비구니 스님이 1천 명이 넘습니다. 스리랑카에는 비구니가 된 아쇼카 왕의 공주가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에는 비구니 제도가 있었다는 게 역사적으로 확실합니다. 그런 영향으로 아직 공식적으로 비구니 제도를 인정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구니 스님이 많고 비구니 절도 많습니다. 공식적으로나 문서상으로 비구니 제도가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으로는 모두 인정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역사적인 부분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동남아 지역을 돌아보면서 비구니 제도가 어느 정도 허용이 되고 있는지 확인해 본 결과 역사적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운문사 학인 스님이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비구니 제도 인정을 위해 한국에서 어떤 지원을 해주면 좋을까요?

“한국의 비구니 승가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이 조직화되어 있고, 살기 좋으며, 수행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그 위상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희 한국 비구니 스님들은 남방불교 비구니 스님들의 상황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INEB 방문단 중에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온 비구니 스님이 없어서 스님이 대신 짧게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지금 부탄 왕의 어머니가 넌(비구니) 재단의 이사장입니다. 그분이 왕에게도 영향을 주고 정부와 승단도 설득해서 비구니 제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작년에 처음 비구니 수계식을 진행했고, 내년에 또 수계를 합니다. 그러면 남방불교에는 여자 수행자가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구니라는 용어를 못 쓰게 하고 황색 가사를 못 입게 하지만 흰 옷을 입고 머리를 깎은 ‘넌’이라고 불리는 많은 여성 수행자들이 있습니다. 태국에서 고아원도 운영하며 많은 사회사업을 합니다.

‘넌’이라고 부르면 비구 아래 소속이 되지만, ‘비구니’라고 부르면 남녀가 동등하게 독립적인 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비구니 제도가 인정되지 않는 겁니다. 정부나 승단의 인가 없이 여성들이 절을 짓고 운영해야 하다 보니 우선 경제적으로도 어렵습니다.

또 학교에서는 어린 사미니가 황색 가사를 공식적으로 못 입게 되어 있습니다. 흰옷을 입고 ‘넌’의 신분으로는 학교에 다닐 수는 있지만 비구니 옷을 입고는 학교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에 갈 때는 가사를 벗었다가 학교를 마치고 와서 가사를 입으면 되지 않나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가사를 안 벗겠다고 합니다. 부탄도 마찬가지예요. 부탄도 출가하면 일단 세속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못 다닙니다. 성인이 되어서 출가하면 학교 교육을 받을 수가 있는데, 어린아이 때 출가하면 학교 교육을 못 받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승려의 입학을 허용하거나, 스님들만 모아서 가르치는 학교를 별도로 세워야 합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고 절 안에 학교를 운영합니다.

절 안에 학교를 짓는다면 경비가 많이 들어가겠죠. 이런 부분들을 살펴서 한국의 비구니회가 그 경비를 지원하는 방안이 있습니다. 꼭 경제적 지원이 아니더라도 초청해서 격려하고, 서로 교류도 하면서 교육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부탄의 넌들은 운문사에 다녀오면 운문사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지 질문을 많이 합니다. 이런 기회를 제공해 준다면 참 좋겠죠.

부처님 당시에 비구니 제도가 처음 생긴 곳이 바이샬리잖아요? 제가 오래전부터 바이샬리에 비구니 절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비구니가 되겠다는 여성들이 모두 바이샬리에서 계를 받으면 명분이 좀 더 생길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경전에 부처님이 바이샬리에서 어머니와 아내 등 오백 명의 여성에게 계를 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니까요.

남방불교의 고위직 스님들을 설득할 수 있는 비구니 제도에 대한 역사적 근거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부처님의 어머니와 오백 명의 여성들은 부처님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머리를 깎고 부처님을 따라갔고, 나중에는 여성 출가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동남아에 가보니까 한국에 와서 비구니계를 처음 받아 가서 활동을 점차 확대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하는 게 필요합니다. 꼭 절을 짓는 일만 할 게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들을 지원해 주면 그 나라에서 비구니 스님들의 사회적 역할이 커집니다. 비구 스님들은 주로 절을 짓고 목에 힘주며 사는데, 비구니 스님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돕기 때문에 사회적 역할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비구니회가 이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예년과 달리 스님이 얼마 전 동남아 국가들을 답사한 덕분에 한국에서 지원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제안들을 해주셔서 더욱 뜻깊은 토론이 되었습니다.

환대를 해준 운문사 스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스님은 얼마 전 열반하신 운문사 주지 운산 스님을 화장하고 나서 유골을 뿌려 놓은 수목장을 참배했습니다.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누구보다도 정토회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분이셨지만 스님이 동남아 답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장례식에 참석을 못했습니다. 스님은 수목장에서 해탈주를 독송한 후 고인의 뜻을 기리며 화장터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스님은 다시 동남아 스님들과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방금 운문사에서 대화를 나눌 때 방글라데시와 부탄에서 온 비구니 스님들이 아무런 질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감이 어땠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각각 짧게 소감을 한 마디 해주었습니다.

“운문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정말 잘 조직된 곳이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 돌아가면 운문사의 방식을 꼭 적용해보고 싶습니다.”

“마침 제 옆에 영어를 잘하는 비구니 스님이 계셔서 저는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질문을 안 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비구니 제도가 발전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알게 되어 좋았습니다.”

“네, 소감을 잘 들었습니다. 또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방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곧바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부산울산지부에서 온 봉사자들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 준 덕분에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 5시 30분부터는 두북 수련원의 농사, 유통 등 스님이 지금 실험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소개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두북 수련원에서 하고 있는 실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곳 두북 수련원에서 하는 활동들을 보면 여러분들도 ‘나도 이렇게는 할 수 있겠다’ 하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두북 수련원에서 활동을 하는 방식은 특별히 투자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건물은 월세가 조금 나가지만 일단 사용하지 않은 폐교를 빌려서 쓰고 있어요. 논밭은 연세가 많아 더 이상 농사를 짓지 못하시는 노인들이 놀고 있는 땅을 빌려줘서 사용하고 있고요. 그리고 창고에서는 대부분 사용하지 않고 버리는 것들을 가져와서 재활용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 또한 돈이 특별히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마음만 먹으면 다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이유

앞으로 정토회는 이곳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물질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아이디어를 내어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정토회가 하고자 하는 미래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가 왜 서울에 있는 정토회 본부나 문경 수련원에 있지 않고 이곳 시골에 와서 사느냐고 묻곤 합니다. 물론 저도 나이가 들었으니 은퇴를 해야 되겠지만, 이 나이에 맞게 시골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구색을 다 갖춘 후에 일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지금 이곳에서 새로운 모델을 구상해서 실험 중에 있습니다. 이 실험의 성공 여부는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청년들이 계속 이곳에서 살 건지 아닌지를 보면 성공 여부를 알 수 있어요. 여기에서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일은 하지만 수행은 안 됐다는 반증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농사도 짓고 수행도 하는 것이 가능한지 지금 실험 중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가능한가

세속의 직위를 버리고 정토회에 들어와서 법사가 된 후 정토회 회원들을 수행 지도하며 사는 사람들을 ‘법사’라고 합니다. 법사가 되어 사는 수행자들은 앞서 문경 수련원에서 만날 수가 있었죠. 하지만 젊은 수행자가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사는 것이 가능하느냐 하는 것은 지금 이곳 두북 수련원에서 실험하고 있습니다. 실험을 시작한 지 지금 3년이 되었습니다.

제 옆에서 통역을 하고 있는 이 수행자도 이곳에서 산 지 3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1년은 적응을 못 해서 몇 번이나 이곳을 떠나려고 했어요. 이제 조금 안정이 된 경우입니다. (웃음)

가난한 나라에 파견되어 구호활동을 하면 수행자들이 비교적 잘 견디어 냅니다. 보람도 느낄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그곳의 환경이 워낙 열악해서 자극을 계속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이곳 한국 사회에서는 승려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법사도 아닙니다.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어서 농사를 담당하고 있는 행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무엇이 힘들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행자님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INEB 스님들도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그리고 때에 따라 일어나는 일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것들을 우리는 계속해서 해결 가능한 방향으로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수행자로서의 자격은 없어요.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든 수행자라는 관점을 제일 앞에 둬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없는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자기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해요.

농사 지을 땅이 많아졌는데 왜 괴로운가

수행적 관점으로 이 수행자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봅시다. 이 수행자는 농부입니다. 농부는 땅이 필요하겠지요. ‘땅이 많은 게 좋은가? 땅이 적은 게 좋은가?’ 하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농부는 땅이 많은 것이 좋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농사를 안 짓는 땅을 얻어 와서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청년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우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땅이 너무 많아서 힘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농부는 땅이 많아야 좋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면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느냐?’

이럴 때 수행자는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땅이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순을 관찰해야 합니다. 선(禪)이라는 것은 번뇌가 일어날 때 바로 그 모순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성제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는 교리와 생활이 따로 놉니다.

수행자라면 지금 울고 있더라도 제가 지적했을 때 금방 알아차리고 눈물을 딱 멈춰야 해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웃음이 나와야 합니다.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땅이 많은 게 좋은 거네요’ 하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 많은 땅에 어떻게 농사를 짓나?’ 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농사를 지금 당장에 짓는 것도 아닌데 괴로움이 발생한 겁니다. 한마디로 지금 여기에 깨어 있지 않은 겁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땅만 얻어 왔을 뿐이고, 이 또한 말에 불과한데 이 청년은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생각이 ‘내년에 농사를 어떻게 짓지?’ 하며 미래에 가 있는 겁니다. 생각이 과거에 가면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생기고, 미래로 가면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있기

이 수행자는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법문으로 수없이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지금 여기 깨어 있지 못하고 놓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년에 농사를 짓다가 다 못 지으면 그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에요. 내년에 한번 농사를 지어 본 후 ‘시간이 없어 다 못 지었습니다’ 하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제가 농사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봐서 인력이든 기계든 지원을 해주겠죠. 그렇지 않으면 ‘농사를 더 이상 짓지 못하겠구나’ 하고 판단이 되면 그 땅은 그만두자고 얘기를 할 겁니다. 그런데 이 수행자는 세상 모든 일을 자기가 다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지금 번뇌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통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고 못하고는 별로 큰일이 아니에요. 많은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당장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그는 일이 없어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 일이 있든 없든 또 많든 적든 그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일이 없으면 한가하게 놀면 되고, 일이 많으면 세상에 잘 쓰여질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지요.

수행적 관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에서 수행적 관점을 잘 놓치죠. 놓치면 다시 알아차리는 것을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꾸준히 정진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곳 정토회에서는 많은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귀국해서 많은 실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어떤 건 성공하고 어떤 건 실패했는지 그 실험의 결과를 가지고 더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시간이 다가와서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하고 마쳤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방송실에서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INEB 방문단은 수신기를 끼고 통역을 들으며 생방송을 함께 시청했습니다. 63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먼저 지난주에 스님이 모를 심고 풀을 베고 농사일을 했던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본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이 셋을 둔 엄마였는데 술자리 모임을 좋아해서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지 질문했습니다.

술자리를 너무 좋아해서 남편과 아이들이 불안해해요

“저는 아이 셋을 둔 엄마입니다. 평소에는 아이들과 신랑을 위해서 집안 살림과 아이들을 열심히 보살피는데 성격이 좀 외향적이라 모임이 많습니다. 특히 술자리를 좋아해서 한 번 나가면 아이도 생각 안 날 정도로 절제가 잘 안 돼서 가정에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그래서 신랑과 자주 다투고, 아이들은 저를 비난하고, 저는 또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짜증을 냅니다. 신경정신과에서 알코올 문제로 치료받기도 했고, 예전에 가본 점집에서는 신기가 있다고 해서 교회에도 3년 동안 꾸준히 다녔는데 그때뿐이고 항상 제 마음에는 공허함과 분노가 일어납니다. 제가 마음을 다잡아 가정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술 먹고 취해서 남편하고 싸우고, 애들한테도 비난받는다고 하면서 나도 편안하고 애들도 남편도 편안한 방법을 원하고 있어요. 스님이 무슨 신도 아니고 그런 요구를 어떻게 한꺼번에 들어줄 수 있습니까? 너무 원하는 게 많으면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우선 한 가지만 명심해 보세요.

어릴 때 부모님 때문에 아이의 심리가 위축되거나 상처를 받으면 나이가 들어서도 힘들게 살아가게 되잖아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엄마가 아이들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하면 엄마 자격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남편에게 ‘나는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 하고 사표를 내세요. 아이들에게 새엄마를 구해주든지, 남편에게 구하라고 하든지 해야죠. 아이들이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 상처 없이 자라기가 어려우면 남편하고 의논해서 전문가들이 아이들을 보살펴줄 수 있게 질문자가 양육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합니다.

나 혼자의 인생이라면 그런 증상이 있더라도 괜찮아요. 질문자도 술을 먹고 싶어서 먹나요? 속이 답답해서 친구와 어울리다 보니까 술에 빠지게 되는 거겠죠. 나쁜 짓을 하려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스트레스가 있으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한 인간으로 보면 질문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러나 세 아이의 엄마로서는 자격이 없습니다. 엄마는 목숨을 버려서라도 아이를 보살펴야 합니다. 물론 ‘나도 내 인생이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아이의 엄마라면 아이가 우선입니다. 여성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생명이 어릴 때는 어미가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새끼를 보호하는 것이 모든 자연계의 원리입니다. 병아리를 한번 건드려 보세요. 옆에 있던 어미 닭이 막 덤빕니다. 새끼를 보호하고자 하는 모성애가 작용하기 때문에 각 생물종이 소멸하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는 거예요.

질문자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세 아이의 엄마라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해서는 안 됩니다. 개선이 어려우면 양육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안 주려면 ‘술자리에는 절대 안 나간다’ 하는 입장을 분명하게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는 도저히 못하겠거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짓은 안 해야 되겠다.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밥은 좀 못해 주더라도, 빨래는 좀 못 해주더라도,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확실한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못 견딜 정도로 불안하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세요. 관점이 딱 잡혔어요? 안 그러면 양육권을 빨리 포기하셔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아이들을 잘 키우겠습니다.”

“양육권을 왜 포기하지 않으려고 그래요? 양육권을 포기하면 마음껏 살아도 돼요. 술 먹고 놀아도 괜찮다니까요.”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죠. 스무 살까지는 아이들을 양육해야 할 의무를 지키겠습니다.”

“엄마니까 아이를 위해 희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양육권을 포기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다. ‘왜 여자라는 이유로 희생하며 살아야 합니까?’ 하고 생각한다면 마음대로 사세요. 대신에 양육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의 엄마가 되겠다고 선택했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행동은 삼가야 합니다.

그러니 도저히 힘들면 술을 먹지 말고 정신과 병원에 다니든지, 절이나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든지 해서 극복을 해야 합니다. 지금의 행동은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줍니다. 이 문제로 부부가 싸우면 아이들의 심리가 불안해져요. 술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 ‘아, 이것은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 하고 자각을 해야 합니다. 그 충동에 따라가면 안 돼요. 충동을 몇 번만 극복하면 그다음에는 극복하기 쉽습니다. 충동이 일어날 때는 절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병원에 가든지 해서 충동대로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도저히 안 되면 어떻게 하라고요?”

“양육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 아이란 것이 따로 없어요. 어떤 아이도 태어난 아이는 상처 없이 자랄 권리가 있습니다. 남의 아이라고 해서 상처를 줘서도 안 되고, 내 아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상처를 줘서도 안 돼요. 아이는 독립된 생명입니다. 그것이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관계하지 말고 모든 아이는 상처를 입지 않도록 우리가 보살펴야 합니다.”

“아이들의 엄마로서 제 본분을 잘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충동이 일어날 때마다 기도하겠습니다.”

“양육권을 포기해도 된다고 했는데도 질문자가 그 길을 선택한 거예요?”

“네!”

이 외에도 세 명의 질문이 더 있었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 부닥쳐도, 어떤 조건에 놓여도,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안 죽고 살아있다면 나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너무 지레짐작하거나, 포기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지금 여기 나에게 깨어있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밤 9시가 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INEB 방문단을 안내하느라 법문도 많았고 설명도 많았습니다. 아주 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비구니 스님이 운영하는 요양 병원을 방문하고, 오후에는 INEB를 지원해주고 있는 원만성 보살님을 방문한 후 부산 바닷가 산책을 하고, 저녁에는 JTS 구호활동에 대해 소개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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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생각이 과거에 가면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서 괴로움이 생기고, 미래로 가면 미래의 일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게 됩니다."

2023-08-25 00:01:05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3-06-26 10:41:50

보각

감사합니다

2023-06-21 08: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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