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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데카비스티에 있는 차크마족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이곳 이주민들은 2년 전까지는 인도 산림청이 소유한 테동날라 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부에 의해서 35년을 살아온 집에서 쫓겨나고 데카비스티에 있는 산등성이로 이주를 당했습니다. 이곳 이주민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은 이 마을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8시 30분에 데카비스티로 출발했습니다. 어제 만났던 NGO 가루아의 대표 아쉬스씨와 두 명의 활동가도 동행했습니다.
데카비스티에 도착하니 차크마족 마을 사람들이 스님을 반겨줬습니다. 마을에는 대나무와 흙으로 만든 작은 절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법당으로 가서 참배를 했습니다.
마을 공터에 큰 텐트를 쳐 놓고 주민들 40여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바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생활이 많이 어렵지요? 그러나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로 넘어간 로힝야 난민 캠프에 가보면 여러분보다 더욱 어려운 상황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러분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도 있기 때문에 먼저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지고 희망을 잃지 말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인사말을 한 후 스님은 마을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지대가 높다 보니 물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을 어떻게 구하고 있습니까?”
“1km 떨어진 곳에서 물을 길어오고 있습니다.”
“집은 어떻게 지어서 살고 있습니까?”
“텐트를 지어서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많이 보이는데 아이들이 다닐 학교는 있습니까?”
“네. 3~4km 떨어진 곳에 사립학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당장 먹고 입을 돈도 없어서 아이들 학교 보내는 것은 거의 포기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물, 집, 학교, 도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인도 국민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는 앞으로 여러 지도자들과 함께 논의하면서 찾아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온 가루아 같은 NGO에서도 도와줄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마시고 살기 바랍니다. 필요한 것들을 함께 의논하면서 만들어 나가봅시다.”
대화를 마치고 스님은 마을 사람들이 준비해 준 차와 다과를 먹었습니다. 스님은 마을 사람들과 쿠키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마을도 둘러보았습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땅은 집 지을 터뿐이어서 농사지을 땅도 없는 데다 땅이 척박했습니다. 인근에는 물탱크나 수도시설도 전혀 없었습니다. 어제 방문했던 차크마족 마을보다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
스님은 새로 짓고 있는 집도 살펴보았습니다. 지붕 상태는 어떠한지, 집을 전부 대나무로 엮었는데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부엌 상태는 어떠한지 등 꼼꼼히 물어가며 답사를 했습니다.
학교부지로도 가 보았습니다. 땅만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을에 있는 절의 주지 스님을 만났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일구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스님이라고 목에 힘주지 말고 마을주민들을 잘 보듬어 주세요. 절보다는 사람들이 살 집을 먼저 지읍시다.”
스님을 만나고 나오는데 한 여성이 다가와 스님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스님, 정말 고맙습니다. 스님이 여기까지 알고 찾아오시고 저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괴로움이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꼭 저희 마을에 다시 방문해 주세요.”
“네, 희망을 잃지 말고 사세요.”
마을을 나와 지역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폭우 피해를 입은 마을을 둘러보러 갔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전기줄이 바람에 끊어졌는지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슬레이트 지붕이 휘어지거나 날아가고, 집 위로 큰 나무가 쓰러져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곧 정부 지원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스님은 당장 생활이 불편할 지붕 피해를 입은 2가구에 격려금을 전달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이틀 동안 함께 마을을 답사한 차크마족 청년 포도람, 피리요 스님과 차크마족 마을을 어떻게 지원하면 좋을지 회의를 했습니다.
“첫째, 식량을 지원하면 좋겠습니다. 둘째, 집 지을 재료를 지원하면 좋겠습니다. 셋째, 지하수를 파고 언덕 위에 물탱크를 설치해서 물을 끌어 올리고 가능하면 상수관을 설치하면 좋겠습니다. 넷째, 학교를 짓고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청년이 일단 가르치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다섯째, 지역 NGO와 함께 지방 정부에 전기, 도로 설치를 요청하면 좋겠습니다.”
5시 30분이 되어 회의를 마치고 기차역으로 이동했습니다. 포도람과 피리요 스님은 기차역까지 배웅을 나왔습니다. 피리요 스님은 그 사이 정이 들었다며 헤어짐을 아쉬워했습니다.
6시 30분에 기차를 탔습니다. 차창 밖으로 인사를 하는 사이 기차가 천천히 출발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새벽 4시 30분에 인도와 부탄의 국경 가까운 곳인 뉴알리푸르아르까지 이동합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국경까지 이동한 후 부탄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주 금요 즉문즉설에서 있었던 내용을 전하며 글을 마칩니다.
“올해 26세인 아들은 인성 바른 모범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공익근무를 하다 엄지손가락이 뒤로 넘어가는 의료사고를 겪은 뒤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타인을 탓하고 과거를 후회하며 부모를 원망합니다. 다니던 학교도 휴학했습니다. 남편이 혼을 내고 난 이후에는 아버지와 관계도 단절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얼마 전에는 휴대폰이 망가져 초등 여학생에게 휴대폰을 빌리려다가 그 부모에게 고소를 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다행히 무죄로 밝혀졌지만, 아들은 카카오톡에 중요한 내용 10년 치가 사라졌다며 괴로워하고 집착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듭니다. 상담도 권해보았지만 거부하고 집에만 있습니다. 이런 아들을 보기가 몹시 괴롭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아들을 도와야 예전처럼 남과 어울리며 밝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들이 옛날과 다른 모습이어서 질문자가 실망 했을 뿐입니다. 질문자는 지금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게 된 아들을 두고 매일 우는 부모와 같아요. ‘아들이 사고만 안 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생각에 빠져서 매일 울고 있는 거예요. 엄마라면 아들이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게 됐더라도 ‘그래도 너는 행복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아들은 지금 정신적으로는 병을 앓고 있어요. 환자로 생각하고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치료를 받아도 옛날 모습을 100퍼센트 회복하지 못할 수가 있어요. 실제로는 80퍼센트만 치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100퍼센트 회복이 되도록 계속 노력하다가 그렇게 안 되면 실망해야 할까요? 아니에요. 80퍼센트밖에 회복이 안 되었다면 ‘80퍼센트만 회복해도 너는 행복할 수가 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편안해질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들이 옛날처럼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생각에 집착하면 죽을 때까지 아무 문제도 해결이 안 됩니다. 아이도 괴롭고, 질문자도 괴롭게 살아야 해요. 나이가 육십이 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옛날처럼 젊은 피부를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이 생각에 집착하면 죽을 때까지 괴롭게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어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입니다. 집을 사서 집값이 떨어졌는데 ‘어떻게 하면 옛날 집값으로 되팔 수 있을까?’ 이런 집착에 빠지면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서 정신적인 질환에 대해 치료를 받으세요. 치료를 받더라도 옛날처럼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옛날처럼 돌아와도 좋고, 옛날보다 10퍼센트 부족해도 좋고, 20퍼센트 부족해도 좋아야 합니다. 치료 결과가 어떻든 ‘이만하길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치료를 받아서 회복한 그 선에서 아이가 살아갈 수 있게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지금 아들이 문제가 아니고 엄마의 욕심이 문제예요. 질문자의 입장에선 ‘아들이 옛날처럼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왜 욕심입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는 두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게 된 아이가 다시 두 다리로 걷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돈을 많이 벌려는 것도 아니고, 높은 지위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나이가 육십이더라도 마흔처럼 젊은 피부를 갖고 싶은 것뿐인데 그게 무슨 욕심입니까?’ 이렇게 주장하는 것과 같아요. 아들이 예전과 같기를 바라는 건 아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질문자의 괴로움은 아이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남편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의 어리석음 때문에 오는 거예요.
첫째,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서 진찰을 받고, 진찰 결과에 따라서 치료를 해나가야 합니다. 그 치료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아이가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면 아이가 특별히 과격한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강제로 입원시키는 것은 인권 침해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방에 두면 됩니다. 그 모습을 못 봐내면 그것은 자기 문제이지 아이의 문제는 아니에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져서 괴로운 것이지 아이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 아이를 저렇게 내버려 두란 말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럼 저렇게 안 두면 어떻게 할 거에요?
한 달, 두 달, 1년, 2년, 3년을 기다려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자연치유가 되어 증세가 좋아져서 방에서 나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다행이잖아요. 그런데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나빠지면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상한 행동을 하면 강제 입원이 가능합니다. 병원에 얘기하면 입원이 필요하다고 결정을 해서 강제 입원을 할수 있게 됩니다. 병원에 입원하면 치료가 될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 아들의 상태가 나빠져도 나쁜 게 아닙니다. 더 나빠지면 강제 입원이 가능해지고, 자연 치유가 되면 더더욱 좋은 일입니다.
자꾸 아이가 옛날처럼 되기를 원하면 아이의 상태가 더 나빠집니다. 나빠지지도 않고, 좋아지지도 않고, 그대로 있으면 어떡하냐고요? 그냥 그대로 두면 됩니다. 그러면 아이의 미래는 어떡하냐고요? 아이가 죽어도 내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냥 그 상태로 두고 나는 내 인생을 살면 됩니다. 그런 아이를 둔 나도 내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거예요.
남편이 죽어도 아내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부모가 죽어도 자식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자식이 죽어도 부모는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의 부모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 권리는 인간의 신성한 권리입니다. 아이가 옛날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사주팔자도 아니고 전생의 죄도 아니고 하느님의 벌도 아닙니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미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됐는데 계속 얼음 타령을 하는 것과 같아요. 질문자가 지금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자기 인생을 괴롭히고 있는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아이 탓을 그만 하셔야 해요.”
“아들이 손을 다치고 난 후에 어딘가에 부딪히기만 해도 다친 것 아니냐고 겁을 먹습니다. 저에게 물어보면 괜찮다고 대답을 해주는데,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제가 어떤 기도를 해야 아이한테 도움이 될까요?”
"아이가 어디인가에 부딪혀서 다친 것이 아니냐고 물어볼 때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면 아이가 상처를 받습니다. 먼저 ‘아팠구나’, ‘그랬구나’ 하고 공감을 먼저 해줘야 해요. 그런 다음에 ‘그래도 괜찮아. 큰 문제는 없어’ 이렇게 말해주면 돼요.”
‘우리 아들은 괜찮습니다.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그런 아들을 둔 나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래, 그 정도는 괜찮아. 이것 봐. 엄마도 이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너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엄마가 모범을 보여줘야 하는데, 엄마부터 온갖 근심과 걱정 속에 살고 있어요. 그렇게 살면 자녀도 정신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과거에 잘못한 것은 되돌릴 수가 없잖아요. 지금부터라도 얼굴을 밝게 하고 웃으면서 살아가시면 좋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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