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3.10 농사일, 금요 즉문즉설
“소통이 안 되는 남편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안녕하세요.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맺혔거나 새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따뜻한 봄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봄을 맞이하여 농사일을 하고,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기 시작하자 농사일을 시작했습니다. 지난주에 텃밭마다 상추, 아욱, 고수, 치커리, 겨자채 등 다양한 채소 씨앗을 심었는데요. 오늘은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호스를 연결하는 일을 했습니다.


나사를 풀고 조이고 호스를 연결하여 텃밭 곳곳에 물을 줄 수 있게 장치를 했습니다. 비닐을 걷어내자 벌써 푸른 새싹이 많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스님은 텃밭에 물을 흠뻑 주었습니다.

이어서 구덩이를 파서 겨우내 묻어 두었던 국화를 다 꺼냈습니다.

다행히 국화들이 땅 속에서 생명을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화분에 흙과 퇴비를 골고루 섞어 넣고 땅속에서 꺼낸 국화를 모두 화분에 담았습니다.


국화 화분을 여러 개 만든 후 다시 구덩이를 덮고 오전 울력을 마쳤습니다.

법신스님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인도, 네팔의 불적지에 대해 이야기한 후 오후에는 산 위에 만들어놓은 과수원에 올라갔습니다. 2년 전에 심어 놓은 과실수가 잘 자라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있어서 지지대로 세워준 후 전지가위로 가지치기를 해주었습니다.


복숭아나무, 매실나무, 호두나무, 모과나무, 여러 가지 나무들을 가지치기해준 후 산을 내려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4,9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이 끝나고 화면에 스님의 모습이 비치자 스님은 반갑게 웃음을 건네며 봄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아주 따뜻한 봄날이죠. 이곳 두북 수련원에는 산수유가 피어 있습니다. 매화는 이미 활짝 피었고요. 이렇게 날씨가 따뜻하면 진달래도 얼마 안 있어서 필 것 같습니다. 지난겨울에 많이 추웠는데도 봄은 이렇게 일찍 오네요. 그러나 봄이 왔나 싶으면 다시 몇 차례 추위가 찾아와서 꽃샘추위라고 이름하죠. 이렇게 날씨는 늘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추웠다 더웠다 하면서 점점 따뜻해지고,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서늘했다가 따뜻했다가 하면서 점점 추워지죠. 일직선으로 쭉 가는 것은 아니에요.

마음의 봄은 어떻게 찾아올까요?

마음 날씨도 바깥 날씨하고 성격이 참 비슷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악심을 품는다고 해서 당장 나쁜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점점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을 맑고 밝게 가지는 수행을 한다고 해서 금방 좋아지는 게 아니에요. 날이 갈수록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루하루 매 순간은 오르락내리락해가면서 좋아지는 겁니다.

바깥 날씨가 따뜻한 오늘처럼 마음 날씨가 따뜻하지 않으면 옛날 사람들은 '봄은 왔으되 봄이라 할 수 없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바깥의 봄과 마음의 봄을 함께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무조건 자기가 이겨야 하는 남편의 일방적인 태도에 분노가 올라온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소통이 안 되는 남편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소통이 잘 되지 않는 남편과 꽤나 오랫동안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 결혼이 유지되는 데는 무한한 저의 인내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은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무엇이든 자기가 이겨야만 하는 강박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정말 힘들어 보여서 저는 그냥 대충 맞춰 가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게 오래되다 보니 마음은 허한 듯 하지만 나름 편해지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남편의 일방통행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제 평생 처음으로 욕이 입에서 술술 나오고 미친 사람처럼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저는 제가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내공이 제법 쌓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제 건강을 잃을까 봐 너무 걱정이 됩니다. 수시로 분노가 올라오고 머리가 뜨거워져서 일상이 힘들어집니다. 저는 남편과 살아갈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는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잘 버텨내고 마무리를 잘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저의 분노하는 마음을 좀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을까요?”

“남편이 질문자의 얘기를 잘 들어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한 대로 너무나 일방적으로 움직입니다.”

“질문자의 얘기를 잘 안 들어준다는 거죠?”

“항상 본인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질문자도 남편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편이에요?”

“저는 언제부터인가 남편의 생각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냥 인정하고 가는 것 같습니다.”

“왜 인정하고 갑니까? 시끄러운 게 싫어서 그렇습니까?”

“시끄러운 게 싫어서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소통을 잘한다고 할 때, 국민들이 대통령의 말을 잘 이해하고 들어줄 때 소통을 잘한다고 합니까? 대통령이 국민들의 얘기를 잘 들어줄 때 소통을 잘한다고 합니까?”

“전자인 것 같습니다.”

“전자라고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소통을 제일 잘하는 대통령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거나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거나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겠네요. 그분들이 이야기하면 밑에서 99% 이상이 찬성하고 따르잖아요.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란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소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질문자가 소통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질문자는 남편이 내 말을 잘 들어주면 소통이 잘 된다고 생각하고, 남편이 내 말을 안 들어주면 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이야말로 독재자의 근성에서 나오는 겁니다. 남편이 내 말을 안 들어주니까 ‘남편은 소통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가 남편의 얘기를 잘 들어줘야 해요. 남편이 내 얘기를 들어주든 안 들어주든 그건 관계가 없습니다. 내가 남편의 얘기를 잘 들어주면 나는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반대로 남편이 내 얘기를 잘 들어주면 ‘우리 남편은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다’라고 질문자가 생각하게 될 것 아닙니까? 이렇게 자기 위주로 소통이란 말을 쓰는 거예요. 내 말을 잘 들어주면 그 사람과 소통이 잘 된다고 말하고, 내 말을 안 들어주면 그 사람은 소통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치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바로 질문자예요. 남편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질문자도 본인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만 남편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관철하는 사람이고, 질문자는 남편을 싸울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고 무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부딪칠 때마다 ‘알았다’ 하고 그냥 적당하게 넘어가는 겁니다. 한마디로 남편을 아예 무시하는 거예요.

지금 질문자는 그동안 남편과 같이 살아본 경험을 토대로 ‘아이고, 저 인간은 대화가 안 되는 인간이야, 저 사람하고는 그냥 대충 맞춰주고 살면 돼’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은 주장을 하든 싸우든 어떻게든 질문자와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하는데, 질문자는 남편을 아예 무시하고 지내는 겁니다. 질문자와 같은 관점을 갖고 계속 살아가면 나중에 화병(火病)이 생기기 쉬워요.

참고 참는다는 것은 결국 내가 옳다는 겁니다. 내가 잘못했는데 참을 게 뭐 있어요. 잘못했으면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하면 끝이죠. 그러니 질문자가 참고 참았다고 하는 건 '본인이 옳고 옳았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분노가 억눌려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나면 어느 순간 분노가 폭발을 하게 되죠. 이런 상황이 더 지속되면 화병(火病)이 되는 겁니다.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화병(火病)이 많죠. 요즘은 조금 덜하지만 조선시대에만 해도 여성은 그저 참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빨래터에 가서 빨래방망이로 막 빨래를 때리면서 남편을 욕하고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던 거예요. 욕을 하면서 빨래방망이로 때리는 행위는 심리적으로 남편을 때리고 시어머니를 때리는 것과 똑같거든요. 일종의 응급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 돼요. 참는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생각을 똑같이 갖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참는 것은 세상의 윤리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는 선한 행위인지 몰라도 수행적으로는 괴로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럼 수행은 어떤 것일까요? 화를 내는 것은 자기 성질을 따라가는 것이니까 수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을 것이 없고, 화날 일이 없어야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럼 나는 다 틀렸고, 상대만 옳으냐?' 하고 반문할 수 있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이 본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이에요. 남편의 관점에서는 그런 생각,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내 관점에서는 이런 생각,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를 뿐이에요.

‘저 사람은 저런 관점을 가지고 있구나’

이렇게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당신 말이 무조건 옳아' 이렇게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라는 거예요.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겁니다.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화날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짜증이 나고 화가 날 수가 있어요.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이건 내가 옳은 거야, 네가 틀렸어' 하고 사로잡히기 때문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겁니다. 지금 질문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네 가지 길이 있어요.

첫째, 이혼을 하는 길이 있습니다. 질문자가 병이 안 나고 명대로 살기 위해서 아예 그 사람과 대면을 안 하는 겁니다. 수로 보면 제일 하수(下手)이지만,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에요.

둘째,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길이 있습니다. ‘너도 화를 내는데 내가 왜 화를 못내?’ 하고 화를 자꾸 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최소한 화병(火病)은 안 납니다. 압력을 참지 말고 화를 내버리세요. 그러면 상대는 주먹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겠죠. 그럴 때는 바로 경찰에 신고하면 돼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딪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인생이 엄청나게 피곤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해야 합니다. 이제 애들도 다 컸는데 더 이상 참고 살 필요가 뭐 있습니까? 까짓것 뭐 부딪쳐 보는 겁니다.

셋째, 지금처럼 참고 사는 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꾸 다투면 내 인생이 피곤해지니까요. 경찰에 신고하면 괜히 남들 눈치도 보이게 되고, 한 대 맞으면 나만 손해이기 때문에, 그냥 지금처럼 참고 사는 겁니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점점 쌓여서 결국 화병이 나겠죠. 그래도 뭐 싸우는 것보다는 병이 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사는 길도 있는 거예요.

넷째, 헤어질 게 아니고 어차피 같이 살 바에야 남편을 이해하고 수용해서 사는 길이 있습니다. 싸우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참고 살아서 병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그래, 네가 옳다’ 하고 확실하게 남편을 인정해 주는 겁니다. 네가 옳다는 말은 내가 틀리고 네가 옳다는 뜻이 아니에요. ‘당신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인정해 주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길이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혼했기 때문에 같이 살아야 한다’ 이런 것이 아니에요. ‘같이 살 수밖에 없거든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해라. 그러면 내가 괴롭지 않다’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서로 싸우면서 살아도 힘들고, 참고 살아도 힘듭니다. 그러니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라는 거죠.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만 그러고 삽니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 헤어지면 됩니다. 헤어지지 못하고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은 성격 면에서는 안 맞지만 자녀 문제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고, 체면을 차려야 하는 문제도 있고, 고려해야 할 게 많다는 겁니다. 특별히 질문자가 선해서 그렇게 산 것은 아니에요. 자기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려서 이익이 되는 게 있으니까 같이 살아온 거예요. 그래놓고 무슨 희생양인 것처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남편과 같이 살면서도 싸우지도 않고 화병도 안 나는 방법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한 것이라면, 그 방법이 있습니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하든지 ‘당신이 옳습니다’ 하고 사는 겁니다. 어차피 같이 살아야 한다면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화날 일이 없어져요. 질문자가 여자라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남편과 같이 살 수밖에 없다면 그럴 때 내가 괴롭지 않게 사는 방법이 그 방법이라는 거예요.

나는 죽어도 그렇게 못하겠다면 남편과 싸우면 됩니다. 싸워서 집안이 시끄러워지는 게 싫으면 헤어지면 됩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니까 도저히 못 헤어지겠다면 지금까지 산대로 그냥 참고 살면 됩니다. 참고 살려니 화병이 날 것 같다면 수행을 하는 길이 있다 이런 말입니다. 어차피 자기주장이 센 인간하고 같이 살 수밖에 없다면 ‘그래. 당신 말이 맞습니다’ 이러면서 같이 살면 된다는 거예요. 겉으로만 그렇게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야 해요. 나는 틀리고 네가 옳다는 뜻이 아니라 ‘남편의 가치관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겠네’ 이렇게 인정하고 살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하자는 대로 무조건 다 해야 하느냐? 그런 뜻은 아니에요. 남편을 이해하기 때문에 화는 나지 않지만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니까 행동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남편이 ‘외출하지 마라’ 그러면 남편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요’ 하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남편이 나간 뒤에 나는 외출을 해버리면 됩니다. 내가 외출을 하든 말든 남편이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남편의 노예가 아니잖아요. 나중에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 ‘너! 왜 내 말을 안 듣고 그렇게 했냐?’ 그러면 남편의 입장이 이해가 되잖아요. 아침에 외출을 안 한다고 했는데 외출을 했으니까요. 그러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볼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하고 사과를 하면 됩니다. 남편이 ‘내일부터는 나가지 마!’ 하면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돼요. 그래서 내일 나갈 일이 없으면 안 나가면 되고, 나갈 일이 또 생기면 당당하게 나가면 됩니다. 다음날 주먹이 날아오면 한 대 맞으면 되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로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무리 화를 내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하면 돼요. 남편이 또 때리면 그때는 경찰서에 조용히 전화해서 ‘우리 집에 미친 사람이 하나 있어서 폭력을 행사하는데 좀 조치를 취해 주세요’ 하고 신고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남편이 감옥에 가게 되면 면회를 가면 돼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남편이니까 면회는 가야 할 것 아닙니까? 면회를 갔더니 ‘제발 좀 꺼내달라’ 하고 빌면 ‘아무리 부부라도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꺼내주면 안 되잖아요. 당신은 감옥에 좀 살아야 해요’라고 말해주면 됩니다. 이 정도로 배짱이 있어야 해요. 남편이 폭력을 행사한다고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좋은 일만 생기도록 바라고 있으면 안 돼요. 관점을 딱 바꾸셔서 네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날씨가 춥다고 항의를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됩니까? 덜덜 떨고 있는다고 해서 해결이 됩니까? 추우면 외출을 안 하든지, 그래도 외출을 해야 된다면 두꺼운 옷을 입고 나가든지 해야죠. 무슨 욕을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아무 노력도 안 하면서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없어요. 남들이 이룬 성과만 보면 저절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식민지 지배를 받고 전쟁까지 한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사는 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말하죠. 남들이 보기에는 기적처럼 보여요.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밤낮을 안 가리고 엄청나게 일해서 여기까지 발전해 온 겁니다. 또 많은 젊은이들이 감옥에 가거나 엄청난 희생을 당해서 오늘날의 민주화가 이뤄진 겁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 공부시킨다고 허리띠 졸라매고 일을 한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겁니다. 즐길 것 다 즐기고 어떻게 이런 발전을 이루었겠어요? 변화를 도모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스님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남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노력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새겨서 많이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할 게 없어요. 서로 다르다고 그냥 보면 되지 이게 노력해야 될 일입니까?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 하면 되는데 노력할 게 뭐가 있어요? 그냥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이렇게 말한 거예요. 자꾸 노력하고 애쓴다는 생각을 하면 결국 또다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겁니다.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을 사실대로 확인하는 겁니다.

‘남편은 저렇게 생겼고, 그래서 저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면 갈등이 안 생겨요. 각자 자기주장을 하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밤을 너무 먹고 싶다고 합시다. 가시에 찔리면서 껍질을 까든지, 가시에 찔리기 싫으면 안 먹든지, 이 외에 다른 길이 있겠어요? 학문에 왕도가 없는 것처럼 방법은 너무 분명한 거예요. 앞에서 말한 네 가지 길 중에 자기가 좋은 것을 선택해서 가면 됩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 돌아본 것 같기는 한데, 아직도 노력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눈이 번쩍 안 뜨였어요. 지금이라도 눈을 번쩍 뜨세요. 이불 밑에 누워서 ‘일어나야지!’ 각오만 하고 있지 말고, 알림 소리가 따르릉 하면 그냥 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벌떡 일어나면 각오하고 결심할 것도 없어져요.”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최근에 고3 담임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일어났습니다. 저를 포함해 열댓 명의 학생들이 엉덩이를 막대기로 맞은 적이 있는데, 저에게만 유독 심하게 가해진 체벌에 억울하고 분합니다. 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장사가 안 됩니다. 그만 두기도 힘들고, 빚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픈 의지가 생기지 않고 너무 힘듭니다.

  • 유방암 진단을 받은 이후 재발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치료 중에 매주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구원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길까요?

대화를 마치고 질문자들의 소감을 한 줄씩 들어보았습니다. 소감을 듣고 나서 마지막으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나를 아름답게 가꾸는 방법은 나를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사업이 안 돼서 괴롭다’, ‘남편이 어째서 괴롭다’ 이렇게 자꾸만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이유를 갖다 붙이는데, 제가 듣기에는 ‘괴로운 게 그리 좋나?’ 이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나는 안 괴로울 수가 없다고 핑계만 대고 있지 말고 핑계를 모두 버리세요. ‘나도 행복할 수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밝은 얼굴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오늘도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괴로움이 없는 길로 한 발자국 나아가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내일은 오전에 행복학교 특강을 생방송하고, 오후에는 전북 완주군에 있는 금산사 혁신도시 포교당에서 초청법회를 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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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인

스님은 결혼을 안해봐서 저렇게 말할수밖에 없겠네요
질문자분이 너무 가엾네요 차라리 이혼을 하고 마음의 병으로부터 자유로워 지세요 내가 살아야 종교도 있는겁니다

2023-05-08 08:33:30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3-03-28 11:11:55

참을것이 없어야겠습니다.
어리석음의 끝이 안보입니다.
참회합니다.

2023-03-27 17: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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