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3.11 행복학교 특강, 수현사 초청법회
“사람들에게 맞춰줬더니 저를 만만하게 봐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오전 10시에 행복학교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행복학교 참가자들이 수업과정 중에 생긴 궁금증을 해소하고 다음 과정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시간입니다.

행복학교 특강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을 시작하자 3,1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이 환한 웃음과 함께 두북 수련원의 봄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연단에 노란 꽃이 피어 있죠? 산수화인데요. 산에 있는 나무에서 피는 꽃 중에 제일 먼저 핍니다. 여기는 남부지방이어서 뜰에 매화가 핀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요즘은 산수화가 한창 피고 있습니다.

날씨도 낮에는 20도가 넘어서 아주 완연한 봄날입니다. 봄이 조금 일찍 온 것 같다가 다시 꽃샘추위가 한두 번 몰아칠 것 같습니다. 내일모레는 다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니까요. 그런 가운데서도 땅속에서는 새싹들이 힘차게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어제는 나무에 가지치기를 하면서 유심히 살펴보니까 나뭇가지 속에 물이 많이 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봄날에 여러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행복학교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이었는데요. 즐거움과 괴로움의 출렁임을 줄여나가는 것이 행복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출렁임을 줄이려면 어떡하죠?

“저는 행복의 본질을 깨달아 주위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 위해 행복학교에 들어왔는데요. 행복학교 마음편 수업을 듣다가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감정을 수치화해서 그래프를 그린 후 감정의 출렁임을 읽어내는 것은 즉시 적용할 수 있어서 명쾌했습니다. 감정이 적당히 출렁이는 상태가 고요함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행복과 불행의 간격을 줄이기 위한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수행을 통해서 좋고 나쁨을 한 단계 위에서 지켜보는 것이 맞는 방법인 것 같아 연습을 해보지만, 매번 잘 적용이 되지는 않습니다. 행복학교에서 ‘행복’, ‘행복’을 계속 이야기하는데요. 이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한 행복을 양적으로 많이 알아차려서 상대적으로 불행이 적어지는 것인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바뀌는 것인지,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뒤바뀌지 않도록 수행해서 점점 감정의 격차가 없어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걸어 다니는 것보다 자전거를 타면 좀 편리해요?”

“편리하죠.”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운전해서 차를 몰고 다니면 좀 편리해요?”

“차가 더 편리합니다.”

“자전거를 타면 더 편리하다고 해서 자전거가 곧바로 타집니까? 처음에는 걸어다니는 것보다 못할 정도로 자전거 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합니까?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자전거를 타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처럼 지금 수행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이 경험될 수는 없습니다. 자전거를 구입하는 경비가 필요하고, 자전거를 타는 연습이 필요하듯이,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면 훨씬 좋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연습 없이 곧바로 되는 방법이 없느냐고 묻는데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자동차를 타면 빨리 가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돈이 없으면 자동차를 구입하지 못하는 것이고, 구입해도 운전할 줄 모르면 자동차를 못 타는 겁니다. 결국 걸어 다니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나 자동차를 타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구입을 하든지 연습을 하든지 할 거 아니에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까 훨씬 좋아 보여서 구입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집을 살 돈과 옷을 살 돈을 줄여서 자동차를 사야 하는 겁니다. 다른 시간을 줄여서 운전 연습도 해야 하는 겁니다.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면 그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그런 것처럼 마음을 바로 알아차리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늘 남 탓만 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이 안 된 겁니다. 아무리 날씨가 춥다고 외친들 추위가 없어진게 아니라는 거죠. 외출을 안 하든지, 외출을 하려면 옷을 많이 입든지,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가뭄이 들었다고 합시다. 하늘을 보고 원망한다고 비가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까 지하수를 팔 건지, 농작물을 구황작물로 바꿀 것인지,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남편이 성질을 자주 내고 인색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그 사람을 욕한다고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하고 나는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내가 결정해야 해요.

날씨가 추우니까 외출을 안 하듯이 관계를 안 맺겠다고 하면 이혼을 해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생활은 해야 한다면, 맨날 상대를 욕하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런 사람을 대할 때 내 마음을 내가 잘 다스려야 합니다.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일기예보를 보고 비가 적게 온다든지, 비가 많이 온다든지, 기온이 낮아질 것이라든지, 이런 예측들을 참고해서 농작물을 조정하는 것처럼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옛날에 농사 짓던 사람들은 그런 기술들을 하나도 쓸 줄을 몰랐잖아요. 그저 씨앗을 심어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공부를 하면 상대가 누구든 대응을 해야 내가 나 자신을 보호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바꾸는 과정이 필요해요.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우듯이, 자동차 운전을 배우듯이, 스마트폰을 배우듯이, 뭔가 예전에 대응하던 방식을 바꾸려면 새로운 방식을 배우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건 옛날 사람들이 농사 짓듯이 그냥 살아온 거예요. 성질내고, 남 탓하고, 욕하고,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하면서 ‘전생의 죄를 지어서 그런가’, ‘하나님이 나만 벌을 주나’, ‘사주팔자가 나빠서 그런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지난 세월을 살아 온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지하수 파는 법도 생겼고, 댐을 만드는 법도 생겼고, 드론으로 약을 치는 법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때 기후의 영향을 덜 받게 되었어요. 그것처럼 마음이 작용하는 원리를 알게 되면, 그런 남편을 두고도 내가 거기에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훨씬 더 안전하게 내 삶을 영위해 나갈 수가 있어요.

행복해진다는 것은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괴로움을 줄여 나간다는 뜻이지 기분 좋음이 더 늘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건강한 것인가요? 얼마나 키가 커야 하고, 얼마나 무거운 물건을 들어야 하고, 얼마나 달리기를 잘해야 하고, 이런 것이 건강의 지표가 아니잖아요. 아프지 않은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행복이란 괴롭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꾸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기 때문에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서 즐겁다면 반드시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괴로워지게 됩니다. 비가 와서 즐겁다면 비가 안 오면 괴롭게 됩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어떤 것을 너무 좋아하면 반드시 반대급부로 그 문제가 상실 되었을 때는 그에 비례하는 괴로움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괴로움이란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슬퍼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뜻합니다. 이런 감정들이 줄어 들면 일상에서도 기뻐할 만한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밥을 못 먹어보면 밥 먹는 것이 얼마나 기쁜 줄 알게 되고, 추위에 떨어 보면 따뜻한 것이 얼마나 기쁜 줄 알게 되고, 몸이 아파 보면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게 됩니다. 일상의 99%가 행복인데 이것을 버리고 다른 어떤 것을 추구하고 사는 게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그러다가 일상의 행복을 잃어버리면 큰 고통을 겪게 되죠.

아이의 학교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고 괴로워하는데, 아이가 학교를 안 간다고 하는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 아이가 학교에 안 간다고 하는 것은 사고를 쳐서 감옥에 가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큰일이라고 하는 것도 그 사건이 실제로 큰일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기대한 대로 안 되었을 때 큰일이 되는 겁니다. 일 자체는 큰 일과 작은 일이 없고, 좋은 일과 나쁜 일도 없어요. 그냥 사건이 생겼고, 그 사건이 나에게 큰 일이 되는 것은 내가 어떤 기대를 가졌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런 원리를 알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냥 평정심을 갖고 볼 수 있어요. 교통사고가 나면 빨리 입원시켜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지 걱정하고 근심하고 욕을 하고 화를 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인생에 엄청나게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남편도 문제이고, 자식도 문제이고, 친구도 문제이고, 시부모도 문제이고, 친정부모도 문제이고, 온갖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죽고 나면 문제가 없어질까요? 그러면 왜 그 사람들이 죽은 것이 문제가 될 때는 살아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말은 내가 100을 원하는데 80밖에 이익이 안 주어지고 20만큼은 자기 뜻대로 안 되었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상대가 죽어 버려서 80의 이익도 같이 없어지니까 후회가 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다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말을 알아 듣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상대에게 문제를 삼는다는 것은 다 아직 이익이 남았다는 거예요. 남편하고 못 살겠다고 하면서 계속 살고 있는 것은 속된 말로 아직도 뜯어 먹을 게 좀 있어서 그런 겁니다. 만약 손해가 더 크다면 스님한테 물을 일이 뭐가 있어요. 자기가 알아서 이혼을 했겠죠. 스님한테 와서 물을 때는 손익이 반반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스님한테 이런 질문을 하면 여러분이 아무리 심각하게 물어도 웃으면서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하고 말하는 겁니다. 답변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손익이 반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괜찮고, 어느 쪽을 선택해도 후회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계속 같이 살면 ‘그때 헤어질 걸’ 하고 후회하게 되고, 헤어지고 나면 ‘그때 고비를 넘길 걸’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이익이 반반이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컵에 물을 담아서 길을 가다가 넘어졌다고 합시다. 컵에 담긴 물의 절반이 쏟아졌을 때 ‘반이나 쏟아졌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그래도 반은 남았네’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긍정적 사고는 주어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도 반은 남았네’ 이렇게 보면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 수 있는 겁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보고 더 필요하면 노력을 해나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아프지 않는 것이 건강한 것처럼 괴롭지 않으면 행복한 것입니다.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이라고 여겨서 기분이 좋은 것을 자꾸 추구하면, 기분이 나쁜 것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는 누구든지 도달할 수 있어요.

‘어떻게 되는 것이 건강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죽을 때까지 건강을 얻기 어렵지만 ‘아프지 않는 것이 건강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만 주의를 하면 누구나 건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좀 조절하고, 운동을 적당하게 하면, 아프지 않는 상태를 누구나 유지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자연생태계가 원래 아프지 않도록 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원래 괴롭지 않도록 살게 되어 있어요. 과로를 하거나 운동 부족이 심해서 병이 나듯이 마음도 욕심을 내거나 어리석음에 빠지기 때문에 괴로움이 발생하는 겁니다.

기분이 좋으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기분 좋음에 너무 집착하지 않게 되면 괴로움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집착을 하니까 그렇게 안 되었을 때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세상 일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한다면 노력을 해라는 것이지 노력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에요. 이런 관점을 가지면 인생에서 괴로울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그냥 세상 일은 늘 일어나는 것이지 그게 괴롭냐 즐겁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선거를 해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진 일이 벌어졌다면, 자기가 누구를 지지했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괴로워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일은 사람이 하고 뜻은 하늘이 이룬다고 했어요. 하느님 마음대로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오래 살려고 바둥거릴 필요도 없어지고, 그렇다고 일부러 빨리 죽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집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성적이 10등 밑으로 떨어지면 막 화가 났는데, 수행자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적이 떨어져서 네가 기분이 안 좋겠구나.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 테니 힘내. 성적이 큰 대수는 아니야. 그러나 네가 원하면 다음에 조금 더 열심히 해보렴.’

야단치는 엄마와 비교했을 때 차원이 다르잖아요? 우리는 얼마든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어요. 물론 그렇게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매번 그렇게 되겠습니까? 안 될 때마다 ‘아직 내가 부족하구나’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질 수도 있다는 거예요. 넘어졌다고 자전거를 버려버리고 자전거를 다시는 안 탑니까? 이럴 때는 ‘넘어졌네’ 하고 다시 자전거를 타면 됩니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자유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속박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시소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처럼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겁니다. 마음 작용의 원리를 조금만 알면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어요. 괴로움과 얽매임은 밖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떤 관점을 갖느냐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옥에 있을 때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싫은데 집어넣으니까 속박이지 않습니까? 감옥에서 나오고 싶은데 못 나오게 하니까 속박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감옥에서 만난 사람이 불교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스케줄을 짠 후 한참 동안 그 사람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공부하면서 재미를 붙였는데, 갑자기 감옥에서 나가라는 거예요. 그런데 공부가 끝나려면 한 달쯤 더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검사한테 ‘좀 더 있다가 나가면 안 됩니까?’ 하고 물으니까 ‘여기가 당신 집인 줄 아느냐!’ 하면서 어이가 없어 했어요. 그러니 내가 그곳에서 할 일이 있으면 그곳은 아무런 속박이 안 됩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움도 사라지고 얽매임도 사라집니다.

그렇다고 마음만 깨달으면 될까요?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대한민국 법에 기록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민주화도 이뤄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제도가 바뀌고 경제가 풍요로워져도 오늘날 우리의 고뇌가 해결이 안 되는 것은 바로 자기의 욕망, 욕구, 성질로부터 지금 속박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둘째, 사회적 차별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가뭄이 들면 종자를 바꿔서 심는 조치도 있어야 하지만, 댐을 막고 수로를 파는 작업도 해야 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바꿔서 자유로워지는 수행과 바깥에 있는 환경을 조금씩 바꿔서 자유로워지는 사회변화,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의 본질은 괴로움을 줄여가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행복이라는 상에 대해 너무 매몰되어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서 좀 부끄럽습니다. 제 마음을 괴로움이 없는 상태로 유지해서 주위 사람들한테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나중에 해야 할 일입니다. 우선은 내가 약을 먹어보고 좋아야 합니다. 내가 약을 먹어 보고 내 병이 나으면 누가 안 시켜도 저절로 약을 소개하게 됩니다. 배운 대로 연습을 해서 내가 먼저 좋아져야 됩니다. 내가 좋아지면 전법은 저절로 됩니다. ‘좋은 영향을 주어야지!’ 이렇게 각오나 결심을 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좋아지면 눈치를 안 보고 기쁜 마음으로 전법을 하게 됩니다.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가 별로 안 좋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예요. 스님은 아무나 만나도 전법을 하잖아요. 왜냐하면 이 법이 좋은 줄을 내가 이미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학교의 관건은 홍보를 많이 하느냐가 아니고 이 행복학교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행복해진 사람이 얼마나 많이 생기느냐 입니다. 저는 강연하고 나서 돈을 안 받습니다. 그럼 무료일까요? 아니에요. 후불제입니다. 우선 약을 먹어보고 좋거든 나중에 약값을 내라는 입장이에요. (웃음) 그래서 약값이 얼마라고 책정도 하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종교가 선불제로 운영되는데 정토회는 후불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정토회는 약에 대해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저는 말투가 예쁘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상냥하게 말하는데도 다들 말이 쎄다, 화가 난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사람들이 저의 말투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 행복 연습 중 말을 할 때마다 알아차리는 연습을 했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은 ‘피곤해’, ‘짜증나’ 입니다. 알아차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만 쓰려는 노력도 같이 하는 게 좋을까요?
  • 행복학교 수업에 참여할 때는 조급해하지 않고 지켜보면서 연구하는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막상 그 상황이 반복되면 지켜보는 게 안 됩니다. 어떻게 개선하죠?
  • 지금껏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짜증날 때 신경을 안 쓰려고 하는 게 오히려 감정을 애써 외면하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알아차리면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질문에 답변을 하고 나니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달 행복학교 특강을 기약하며 12시가 다 되어서 생방송을 종료했습니다.

공양간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한 후 12시 30분에 전북 완주로 출발했습니다. 3시간을 달려 전북 완주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 혁신도시 포교당 수현사에 도착했습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스님은 차 안에서 기다렸다가 수현사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도법스님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전화를 받고 바로 포교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도법스님은 따뜻한 차를 내주셨습니다. 수현사 주지 응묵 스님은 법륜스님을 초청한 이유와 함께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수현사를 개원한 지 5년이 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가 좀 완화되고 5주년 법회를 기획하면서 스님을 1순위로 모시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감히 요청드릴 수 없어서 도법 스님께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가 성사됐습니다. 오늘을 법륜스님의 법문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차담을 나누는 사이 강당에는 3백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부터 어린아이까지 온 세대가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5시가 되어 스님이 강당으로 들어서자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하고 도법스님이 먼저 인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법륜 스님은 굳이 소개할 필요 없겠죠. 저에게 불교 수행자가 어떻게 살고 어떤 역할을 해야 바람직하겠느냐 이렇게 질문한다면 복잡하게 설명하기보다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법륜스님을 봐라’ 이렇게 말하면 간단합니다. 국내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국제적으로도 법륜스님을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시라고 요청하는 것 자체가 늘 미안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 지역은 이 지역대로 법륜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하는 바람이 간절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 법륜스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박수 한번 부탁드립니다.” (모두 박수)

도법스님의 인사말씀에 이어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왔습니다. 스님은 연단 위 법상으로 가지 않고 대중 가까이에 섰습니다. 먼저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대중이 편안하게 질문할 수 있도록 스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습니다.

“도법 큰스님께서 너무 과분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가볍게 대화를 할 생각입니다. 마이크를 주면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뭐든지 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따르는 부처님께서 마지막 열반하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물을 게 있으면 물어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 그때 물어볼 걸 하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러니 의문이 나는 점이 있다면 지금 물어보아라.’

그러자 아무도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그렇게 물어라’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질문이 없었고, 부처님께서는 무려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의문이 나는 점이 있으면 물으라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아무런 질문이 없자 아난 존자가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처님의 바른 법을 많이 들어서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신 뒤 45년 동안 설법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주변에 있던 대중들은 대부분 출가수행자들이었으니까 부처님의 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실제로 행하는 일만 남았기 때문에 더 이상 물을 게 없다고 말씀을 드린 겁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부처님과 같이 위대하신 분도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물으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오늘 우리도 이 자리에서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하든 친구가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대화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물어도 되고, 가정사에 대해 물어도 됩니다. 여러분이 질문을 한다고 해서 제가 모든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질문을 한다는 건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 꼭 정답을 이야기하는 자리는 아니니까 편안하게 질문을 해주세요.”

한층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곧바로 한 청년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한 질문이 끝나면 빈틈없이 다음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맞춰주다 보니 저를 우습게 봐요

“저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나 누구에게 다가갈 때 일부러 저를 낮추고 가볍게 할 때가 있는데, 간혹 어떤 분들은 저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갑자기 제 감정이 주체가 안 될 때가 있고, 앞으로 계속 볼 사람들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마음이 불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들어보니까 자기를 낮춘 게 아니네요. 진정으로 자기를 낮췄으면 상대방이 나를 가볍게 본다는 생각이 안 들어야죠.”

“그렇네요.”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본다고 느꼈다는 건 ‘내가 실제로는 큰데, 네가 나를 낮게 보네’ 하는 뜻이잖아요. 진정으로 자기를 낮췄다면 나를 무시한다고 느낄 수가 없죠.”

“한 예로, 제가 분위기를 재미있게 하려고 웃겼는데, 상대방은 광대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저를 대했어요.”

“원래 웃기는 사람을 광대라고 하잖아요. 사람을 웃기는 사람이 광대이지 그 외 다른 뜻이 뭐가 있겠어요. 만약 제가 법문을 재미있게 하면 여러분도 ‘스님은 참 법문을 광대같이 하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죠. 그게 왜 나쁜 말이에요?

원효대사는 불교를 대중들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서 불교 용어를 쓰지 않고 최대한 쉬운 생활 용어로 포교를 했습니다. 민중들에게 다가가서 그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최대한 쉽게 불교를 설명도 했는데, 이상하게 처음 모일 때는 사람이 많다가도 법문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고 해요. 원효대사는 이상하게 생각을 했죠. 왜냐하면 자기 나름대로는 아주 쉽게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들에게는 쉽게 다가가지가 않았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가보니까 그곳에서는 광대가 춤추고 노래를 하면서 사람들을 웃기고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이 더 모여드는 거예요. 자기가 법문을 할 때는 처음에 조금 모였다가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이 사라지는데, 여기는 점점 더 모였습니다. 결국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 사람들이 모인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뭔가를 오래하려면 유익함도 있어야 하지만 재미도 있어야 합니다.

방송에서 보여주는 법문을 보면, 가끔 큰스님들이 법상에 앉아서 말씀을 하시는데 큰스님은 허공을 보고 말씀을 하시고, 법문을 듣는 대중은 전부 땅바닥을 보고 있어요. (웃음) 이 역시 법문을 하는 방식이고, 많은 사람들이 큰스님을 친견한 것만으로도 만족하지만, 여기에는 대화가 오가는 소통은 없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말씀을 잘 새기면 듣는 이에게 유익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법문에 집중해서 잘 듣게 하려면 재미도 있어야 해요.

원효대사가 광대를 보고 얻은 아이디어가 바로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습니다. 대신 노랫말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녹여서 노래를 하고, 춤도 자유롭게 췄습니다. 그래서 원효대사의 노래를 걸림이 없는 노래라고 하여 ‘무애가(無碍歌)’라고 하고, 원효대사의 춤을 ‘걸림이 없는 춤’이라고 하여 ‘무애무(無碍舞)’라고 합니다. 그렇게 노래를 하고 춤을 추니까 대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원효대사는 부처님의 법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광대의 길을 가신 겁니다.

그러니 질문자에게 광대라고 말한 건 사실 굉장한 칭찬입니다. (웃음) 그런데 질문자 스스로 ‘광대는 낮은 거야’라고 생각을 하니까 자기를 광대라고 부를 때 기분이 확 나빠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질문자를 낮게 본 게 아니라, 질문자가 광대를 낮게 보고 차별하고 있는 겁니다. 질문자가 그 사람들을 웃겼으니까 광대의 역할을 한 게 맞죠.

오히려 ‘제가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공손하게도 대해보고 재미있게 다가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솔직한 겁니다. 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상대에게 맞추는 형식도 취해보고, 웃기는 형식도 취해봤는데, 어떤 사람은 웃기니까 광대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숙이니까 오히려 밟으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질문자가 의도한 것과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니까 고민이 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낮췄다고 말하는 건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의도한 것과 그 결과가 맞지 않게 된 이유는 질문자가 욕심을 낸 것에 대한 역효과라고 할 수 있어요. 즉, 질문자가 어리석었다고 할 수 있죠. 질문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얄팍한 수를 써봤는데, 사람들이 현명해서 안 넘어온 거죠. 그러니 자꾸 얄팍한 수를 써서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사세요.” (웃음)

“네, 생긴대로 살겠습니다.” (모두 웃음)

한 질문자는 스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아이가 법륜 스님의 사진을 보고 좋은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과 2학년인 딸이 있는데, 저는 아이들이 법륜 스님의 좋은 영향을 많이 받게 하고 싶습니다. 아쉽게도 사람의 수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스님을 영원히 만날 수도 없고, 오늘 기회가 된다면 제 아들과 딸이 스님과 사진을 한 컷 찍을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 사진을 평생 간직하면서 힘들 때마다 보고 좋은 영향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법륜스님과 가까이 있는 시간이 많을까요, 부모님과 가까이 있는 시간이 많을까요?”

“물론 저하고 있는 시간이 많지만, 저보다는 스님께서 훨씬 지혜로우시니까요.”

“아이들은 누가 지혜롭고 누가 지혜롭지 않은지 몰라요. (웃음) 아이들 입장에서는 법륜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을까요,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을까요?”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 같아요. 대신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더 이상 뭔가를 더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질문자는 아무런 노력을 안 하고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겁니다. 본인은 아이들한테 나쁜 영향을 주면서, 아이들에게는 법륜스님 사진을 보고 착하게 살아가라고 말하고 있네요. 그런 바람은 이치상 이뤄질 수가 없는 일이에요. 이런 걸 두고 나무 위에서 생선을 구한다고 해서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해요. (웃음)

사진이야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만 오늘은 법담을 나누는 자리니까 이치를 말씀 드릴게요. 아이들은 스님을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잘 되기 위해서는 누가 바른 길로 가야할까요?”

“부모님이요.”

“부모가 바른 길을 가면 아이는 저절로 바른 길을 갑니다. 그러니 아이가 법륜스님을 알고 모르고, 법륜스님을 만났고 안 만났고는 하등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불자라면 우리가 사진으로 모시고 늘 존경심을 내면서 따라가려고 해야 하는 사람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누굴까요?”

“부처님이요.”

“부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중간에 자꾸 다른 사람을 넣으면 머릿속에서 헷갈려요. 그러니 굳이 아이들이 사진을 간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부모님 사진과 부처님 사진이면 충분합니다. 괜히 다른 사람 사진을 끼워 넣으면 아이들만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정말 좋은 영향을 받기를 바란다면, 자기 스스로 불법을 잘 배워서 자기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불법을 깨우쳐서 내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은 채 스님의 사진을 걸어두는 건 오히려 상(相)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상에 집착하게 됩니다. 사진을 찍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사진을 걸어두고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려고 하는 건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정작 본인은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줘놓고 나중에 아이가 제대로 안 되면 스님한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포석을 깔고 있는 거예요. 스님은 영리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부탁은 일절 안 받아들입니다.” (모두 박수)

박수 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질문자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우선 사진을 찍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웃음) 저는 법륜스님이 부처님을 가리키는 디딤돌이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부처님이 정말 위대한 존재라는 걸 알까 하는 걱정도 되니까 법륜스님을 통해서 부처님을 접하길 바랬습니다.”

“아이들은 그냥 각자 살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게 좋아요. 자꾸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어 하거나, 불심을 심어주려고 하거나, 이런 행동들은 모두 어른들의 욕망입니다. 아이들에게 기독교의 믿음을 주입한다거나 불교의 믿음을 주입하는 건 실제로는 인류 평화를 위해 도움이 안 됩니다. 어릴 때는 그저 자유롭게 놀고, 즐겁게 뛰어다니고, 마음껏 공부하는 게 좋아요.

게다가 불법은 깨우치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성인이 된 다음에 접할 수 있게 하는 게 좋습니다. 불교는 습관을 깨우치는 것이지 습관을 들이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습관도 습관을 들이는 건 까르마에 속하지 깨우침이 아니에요. 그런 관점에서 법륜스님을 좋아하는 건 좋지만 지금 질문자가 하려고 하는 건 수행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어요.”

“네, 말씀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저는 화가 많아요. 어떻게 화를 다스려야 하나요?
  • 대학생입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 어렸을 때부터 싸우는 부모님을 중재하고 살았어요. 지금도 제가 중재를 해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요.
  • 취업준비생입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별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어떻게 깊은 우울감을 떨쳐내고 성장할 수 있을까요?
  • 행복해지려면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비교를 통해 행복을 얻기도 합니다. 스님은 비교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이 나라를 위해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지 한 말씀 해주세요.
  • 새로운 일을 할 때 너무 긴장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요. 어떻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나요?

아쉽지만 약속한 7시가 넘었습니다. 8명의 질문까지 받고 강연을 마쳤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가까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8시 30분이 되어 두북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다시 3시간을 달려 11시 30분이 되어 두북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온라인으로 전법행자대회를 하고 저녁에는 일요명상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93

0/200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0

2023-04-01 10:30:49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3-03-29 06:35:23

박강희

즉설해주시는 스님말씀에 괜히 제 속마음도 들킨것 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가 이내 아… 나도 잘보이려고 이러는구나 잠시나마 자각하게 됩니다🙏

2023-03-28 23:40:42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