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1.19. 키스 루스(NCNK) 미팅, 정토경전대학 세계불교 2강
“문명의 전환기, 불교의 역할과 비전”

안녕하세요. 서울 정토회관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 스님은 새벽 기도를 마친 후 오전 7시부터 평화재단에서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했습니다. 최근 북한의 경제와 군사 동향에 대한 분석과 향후 북핵 정책의 기조에 대해 토론한 후 모임을 마쳤습니다.

오전 9시부터 한국을 방문 중인 NCNK(전미북한위원회) 사무총장 키스 루스(Keith Luse) 님과 미팅을 했습니다. 키스 루스(Keith Luse) 님은 정부와 민간이 함께하는 북미 대화에 참여한 경험이 많을 뿐만 아니라 스님과 북한 인도적 지원 문제에 대해 20여 년 간 정보를 교류해 오고 있는 분입니다. 오늘은 한국의 북한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해서 지금의 북한 상황을 진단하고, 서로 궁금한 점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약 두 시간 동안의 대화를 통해 안타깝지만 남북의 긴장 고조와 북미 관계의 악화로 인해 갈수록 북한 주민들의 고통만 더욱더 가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I was so happy to meet you in person after seeing you online only.”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뵙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서 저도 너무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동안 북한의 인도적 지원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같이 활동해 온 서로에게 깊은 애정과 존경을 표하며 모임을 마쳤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스님은 키스 루스(Keith Luse) 님과 둘이서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후 다음에 스님이 미국을 방문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습니다.

다시 정토회관으로 돌아온 스님은 12시부터 인도 성지순례 실무준비팀과 회의를 했습니다. 내일 선발대로 법사단과 실무자 몇 명이 인도로 출국을 하기 때문에 전체 일정을 최종적으로 다시 점검했습니다.

둥게스와리 마을에서 만인 공양 준비 상황을 비롯하여 각 성지별로 세부적으로 점검할 내용을 검토한 후 1시 30분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법사님들 중 일부는 내일 인도로 들어가죠? 그럼 인도에 도착하고 난 다음 모레 델리에서 한국과 화상으로 연결해서 회의를 합시다.”

곧이어 결사행자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여했습니다. 2차 만일결사 시작을 앞두고 조직 개편과 선거 관련하여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에서 많은 안건들을 올렸습니다. 오후 5시까지 심의 안건과 보고 사항을 다룬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시작한 경전대학 강의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세계 불교에 대한 마지막 강의인데요. 스님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불교 혁신 운동 중에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는 운동들을 총괄적으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불교를 신봉하고 있던 동남아시아 국가는 대부분 서구열강의 침략을 받아서 식민지 지배를 당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식민세력과 같이 들어온 가톨릭이나 개신교에 의해서 동남아시아의 많은 국민들이 강제로 개종을 당하거나,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개종이 되면서, 동남아시아 전통불교는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불교 혁신 운동

이런 시대에 ‘어떻게 불교의 정체성을 확보할 거냐’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불교혁신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와 결합해서 자기 신앙이나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운동으로 발전했어요. 동시에 서구로부터 들어온 과학이나 기독교가 가진 선교 방법, 사회봉사, 학교 교육 등을 벤치마킹해서 새로운 불교로 거듭나려고 했습니다.

불교 자체를 새롭게 하는 혁신 운동은 불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서 농촌운동, 지역사회개발운동, 환경운동 등 사회문제도 껴안고 그에 대한 대안을 내놓고자 하는 불교 사회운동으로도 확산되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그중 비교적 성공적이었거나 세계에 알려진 운동을 하나씩 소개해 주었습니다. 인도에서 일어난 암베드카르의 신불교운동,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아리야라뜨네 박사의 사르보다야 운동, 태국의 산띠 아속 운동, 베트남 출신 틱낫한 스님의 플럼빌리지 운동, 대만에서 증엄스님이 일으킨 자재공덕회, 일본에서 일어난 창가학회와 입정교성회, 티벳 달라이라마의 평화운동이 각각 어떤 배경에서 일어났고, 지금 현황은 어떠한지 자세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불교운동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국제참여불교연대(INEB)라는 단체를 소개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함께 활동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바로 국제참여불교연대(International Network of Engaged Buddhists, INEB)입니다. INEB는 새로운 불교 운동 중에서도 사회참여를 하는 불교인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태국의 불교경제학자인 슐락 박사님이 창립했고 정토회도 연대해서 함께 활동하고 있습니다. 2022년 10월에는 한국에서 정토회가 INEB 대회를 주관했습니다. ‘분열된 세계에서 불교의 역할’을 주제로 평화, 평등, 환경 등에 대한 다양한 발표와 토론, 행사들을 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미래 사회에 불교가 어떤 사회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앞으로 불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이제 지구는 하나의 공동체가 됐잖아요. 이제 우리끼리만 폐쇄적으로 살 수가 없어요. 유튜브만 봐도 스님 법문, 목사님 설교, 무슬림 교리 등 다양한 종교 영상이 나옵니다.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이며 오락 등 온갖 종류의 영상이 있어요. 한국 사회 내에서도 다양한 사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젊을 때 즐기자고 하는 YOLO족(You Only Live Once, 인생은 오직 한 번뿐)도 있고, 절대로 물건을 안 사고 사더라도 중고를 사면서 아주 아껴서 조기은퇴를 하려는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도 있습니다. 종교도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 무슬림, 불교 등 다양합니다. 불교 안에도 남방불교, 북방불교, 밀교 등 온갖 다양한 종파가 있습니다. 한편 종교를 안 가진 사람도 우리나라 성인 인구의 절반이 넘어요. 사상도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등 다양하고, 철학도 유물론자, 유신론자, 무신론자 등으로 다양합니다.

문명의 전환기,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

이렇게 다 다른 사상, 종교, 철학이 융합이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사상, 철학, 종교가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이 모두를 뛰어넘는 길을 가야 할까요, 서로 배척하는 길을 가야 할까요, 모두를 포용하는 길을 가야 할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양성의 관점에서 통찰을 해야 합니다. 첫째,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 하는 관점은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 사회에 많은 위기가 있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관점이어야 합니다. 우선 현재 닥친 가장 큰 위기는 기후위기죠.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기후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이대로 두면 결국 인류는 모두 공멸할 거예요. 미래의 대안은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또 다른 위기는 빈부격차입니다. 전 세계 80억 인구 중 10% 정도가 아직도 절대빈곤에 놓여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외면하는 길이 미래사회에 비전이 될 수 있을까요?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다면 사회는 붕괴될 것입니다.

다른 위기는 차별 문제입니다. 인종, 계급, 남녀, 신체장애, 성애 등 어떤 차별도 용인하지 않고 누구나 사람으로서 존중한다는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전 세계적으로 자국이기주의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핵전쟁의 위험도 있잖아요. 핵전쟁이 나면 대량살상이 일어날 거예요. 또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해서 어떤 위기에 처할지도 모르는 문제들도 있고, 자살, 고독사, 정신질환, 마약 등 여러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런 다양한 사회 이슈들 중에서 더 큰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가치관과 윤리의 붕괴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모든 철학과 사상, 사회제도의 근본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점점 발전해서 말도 하고 심부름도 하고 운전도 하고 있죠. 인공지능이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오는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 생명의 정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유전자 조작이 가능해지면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던 철학이 다 붕괴됩니다. 지금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서 수정란이 되고 태아로 성장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하나의 수정란을 세포증식을 해서 3개나 4개로 만든 후에 각각 다른 자궁에 넣어서 출산을 한다면,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같은 유전자를 갖게 됩니다. 이들은 같은 사람일까요,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일까요? 이들을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같은 사람으로 만든 걸까요? 윤회를 한다면, 이들이 같은 사람일까요?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어느 시점부터 윤회를 한다고 봐야 할까요?

우리가 지금 안고 있는 이런저런 주장은 마치 옛날에 태양이 ‘지구를 돈다, 안 돈다’를 두고 논쟁했던 상황과 같습니다. 실제로 태양은 뜨고 지는 것도 아니고 지구 주위를 도는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태양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까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했던 거예요. 이처럼 앞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관의 기반이 다 흔들릴 거예요. 이런 시대에 과연 모순 없이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철학이 무엇일까요?

부처님 당시에 육사외도(六師外道), 62견(見), 360이설(異說)이 나와서 변화된 세상을 설명하려고 했듯이, 앞으로 우후죽순처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해석을 시도할 사람, 철학들이 나올 거예요. 그중에 어느 것이 맞느냐, 모두가 다 틀렸느냐, 모두 다 일리가 있다면 어떤 것이 바르냐 이런 문제들이 제기되겠죠.

우리는 지금 마치 부처님 당시처럼 어떤 문명의 전환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눈을 떠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한 나라의 전통이 다른 나라의 문명을 받아서 충격을 받은 경험은 무수히 많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과학기술의 변화로 겪게 될 충격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닐 거예요.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오고 주장해 왔던 것들을 송두리째 흔들 지도 모릅니다. 그때 나는 무엇으로 내 삶의 정체성을 삼을 것 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즉, 나와 내 후손이 지속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요.

저는 연기적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연기적 관점에는 시간적 연기와 공간적 연기가 있습니다. 시간적 연기는 ‘원인과 결과’, ‘어제와 오늘’이 연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공간적인 연기는 ‘나와 너’가 연기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 연기법을 알아야 해요. 나만 좋고 타인에게 손해 나는 일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타인에게 이익인데 나는 손해라면 희생이고 헌신이라고 칭찬받을지 몰라도 오래가지는 못합니다. 참다가 참다가 터져요. 그러니까 지속가능하려면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해요. 자리이타(自利利他)에요. 지속가능하려면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아야 돼요.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아야 돼요. 지금 좋은 것이 원인이 되어서 나중에 결과가 나빠진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나중에 좋더라도 지금 고생하고 괴롭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아야 지속가능합니다.

지속가능한 삶은 연기적 세계관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의 개념도 알아야 해요. 어떤 존재도 인연 따라 일어나지, 존재 자체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변하는 존재는 없어요.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이를 파푸아뉴기니 원주민이 키우면 원시문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거고, 일본에서 키우면 일본인이 되는 거고, 프랑스에서 키우면 프랑스인이 되는 거지, 사람이 원래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것이 다 해석이 되려면 무아와 무상의 철학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에 일어날 문제들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무조건 좋다는 게 아니에요. 복 빌고 극락 가는 불교를 얘기하는 것도 아니에요. 부처님 본래 가르침인 연기(緣起)적 세계관, 중도(中道), 팔정도(八正道),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현상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파악해서 원인을 소멸할 때 현상이 사라진다’고 하는 사성제(四聖諦)적 사고방식 등이 미래 사회를 이해하고 능히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이제는 ‘종교 중에 어느 종교가 좋으냐’ 이런 주제는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종교가 진리의 왕좌에 있었지만 그 자리를 뺏긴 지 오래됐습니다. 진리의 왕좌는 이미 돈에 빼앗겼고, 철학적으로는 과학에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어떤 얘기를 하다가 ‘그것은 비과학적이야’ 하면 신빙성을 잃어버리잖아요. 비과학적이라는 말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옛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말씀인지 아닌지가 진리의 기준이었고, 옛날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법인지 아닌지가 진리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과학적인지 아닌지가 진리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미 진리의 중심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 되었고, 그나마 남은 종교도 물질이나 돈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복을 받느냐’, ‘절에 다니면 복을 받느냐’, ‘이 절에 가면 복을 더 받느냐’, ‘저 절에 가면 복을 더 받느냐’ 이런 것이 종교 선택의 기준이잖아요.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이 세상에는 종교가 돈교 하나밖에 없다고 하죠. 돈교 밑에 온갖 종파가 있어서 ‘우리 종파에 오면 제일 복을 많이 받는다’ 하고 경쟁을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느 종교에 속하는지, 어느 종파에 속하는지가 이제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지금 종교 인구가 전반적으로 줄어서 종교가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50%가 안 되고, 특히 젊은 MZ세대는 종교 인구가 10% 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기독교가 잘하냐, 불교가 잘하냐를 따지겠어요. 이런 시대는 지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도 불교와 기독교가 다투고, 불교 안에서 어느 종파가 최고인지 따지고, 어떤 불교가 진짜 불교라고 논쟁을 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음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불난 집에서 아직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수준입니다.

불교가 미래 문명의 중심이 되려면...

기후 위기로 지구가 불타고 있고, 사람들의 정신이 욕망에 찌들어서 자아를 상실하고 있고, 인류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고, 지구환경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불교가 여기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때 미래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해답이 어디에서 나올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정토회는 그런 문제의식 위에 서 있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문제의식 위에 과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하는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토회는 지난 30년 동안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두 명에서 세 명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복을 빌지 않고도, 죽음을 팔아서 죽은 뒤에 어디 간다는 얘기도 하지 않고, 돈의 노예가 되는 길도 거부하고, 오직 이런 문제의식 위에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어떻게 우리 사회가 좀 더 민주화 되느냐.’
‘어떻게 우리가 사람으로서 존중받느냐.’
‘어떻게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지구환경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느냐.’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도 문화라는 신화적인 그릇에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신화적인 요소를 걷어내고 부처님의 담마만 추려서 현대사회에 맞는 새로운 그릇에 담아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자는 것이 ‘바른 불교’입니다. 공연히 어려운 말을 하지 말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생활 언어를 쓰자는 것이 ‘쉬운 불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불교를 해야지 죽은 뒷얘기나 공허한 얘기를 하지 말자는 것이 ‘생활불교’입니다. 이렇게 정토회는 실천불교를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경전대학 공부를 마치게 되는데요. 경전대학 공부를 마친 사람 중에 기독교 신자가 있다면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하고, 유교 신자는 논어를 다시 읽어야 하고, 종교가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자기 삶을 다시 돌아봐야 됩니다. 이제 뭐가 옳으니 그르니 하는 얘기를 넘어서서, ‘과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한쪽이 살기 위해 다른 한쪽이 죽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는 두 나라가 똑같이 부처님께 이기게 해달라고 빌면서 서로 죽인다면, 이게 과연 불교일까요? 그런 것을 넘어서는 진리의 길로 함께 가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부처님은 그 당시 혼란기에 어떻게 이런 진리에 눈을 뜨고 진리의 길을 제시했느냐.’
‘기존의 불교가 부처님 법에서 벗어났을 때, 대승불교인들은 어떻게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켰느냐.’
‘기존의 불교가 부패하고 타락하고 관념적으로 변했을 때, 선불교인들은 어떻게 새로운 불교를 일으켰느냐.’

이것이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옛날 역사를 공부하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역사학자나 전문 지식인이 되려는 게 아닙니다. 역사를 공부해서 역사적 교훈을 얻고, 그걸 기반으로 해서 ‘지금 우리는 어떤 길로 가야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서 경전 공부를 한 겁니다. 이제 경전대학 공부를 마쳤으니 그동안 배운 것이 나의 문제로 돌아오기를 당부드리면서 마지막 수업을 마치겠습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다음 주부터는 예불문 강의가 이어진다는 것에 대해 소개하고,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즉문즉설 시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생방송 수업을 모두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차를 타고 서울을 출발하여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4시간 동안 달려 새벽 1시가 다 되어 두북 수련원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설날을 앞두고 은사 스님이신 도문 큰스님을 찾아뵙고 새해 인사를 드린 후 저녁에는 두북 수련원에서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0

0/200

명덕

감사합니다_()_

2024-01-26 15:13:35

김희복

스님 감사합니다~()

2023-01-28 04:36:11

무량음

감사합니다

2023-01-26 16: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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