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1.10 정토경전대학 한국불교의 역사 1강
“주어진 삶을 불평하면서 어떻게 자유와 행복이 가능할까요?”

안녕하세요. 서울 정토회관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은 오전 10시부터 인도 성지순례 실무준비팀과 회의를 했습니다. 인도 성지순례 출발을 앞두고 요즘은 날마다 성지순례 준비 회의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라나시에 도착한 후 차량별 일정과 프로그램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바라나시에 27일에 도착하는 팀과 28일에 도착하는 팀으로 나뉘어 있어서 강가강을 둘러보는 프로그램과 박물관을 관람하는 프로그램을 팀별로 어떻게 다르게 배치할지 조정하고, 델리공항에서 바라나시까지 버스로 이동하는 일정을 어제에 이어서 다시 한번 세부적으로 보완했습니다.

점심 식사는 간단하게 김밥으로 하고, 곧바로 12시 30분부터는 인도JTS 활동가들과 온라인으로 회의를 이어나갔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 개교 29주년 기념식 날에 성지순례 참가자들이 둥게스와리 마을 주민 1만 명에게 공양을 올리는 만인 공양 프로그램에 대해 인도JTS 활동가들이 초안을 발표하고, 어떤 부분을 더 보완할지 다 함께 검토했습니다.

쌀을 어느 위치에 쌓고, 만 명의 주민들을 어떻게 안내해서 질서 있게 쌀을 배분할 수 있을지, 내외빈들의 자리 배치는 어떻게 할지 꼼꼼하게 점검을 한 후 스님도 몇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둥게스와리 주민 만 명에게 쌀을 나눠줄 때 배경에 현수막을 하나 걸면 좋겠어요. 부처님이 6년 고행 끝에 네이란자라 강에 쓰러졌을 때 수자타 여인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덕분에 부처님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수자타 여인에게 큰 은혜를 입은 거예요. 그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를 담아서 부처님의 후손인 우리들이 수자타 여인의 후손인 둥게스와리 주민들에게 만인 공양을 올리는 겁니다. 그리고 정토회가 1차 만일결사를 만인에게 회향하는 의미도 담고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만인 공양을 올린 사람들의 명단이 현수막에 들어가면 좋겠어요.”

만인 공양 프로그램에 대한 점검을 한 후 내일은 바라나시에서 수계식 프로그램을 점검하기로 하고 오후 2시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후 3시에는 평화재단으로 이동하여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계속했습니다. 오후 5시에는 손님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눈 후 다시 정토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여섯 번의 강의를 통해 경전대학 학생들은 중국 불교가 ‘선불교의 흥기’라고 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불교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한국에 불교가 가장 처음 전래된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AD 67년 후한 명제 때입니다. 그리고 중국 불교가 발전하게 된 시기는 경전 번역 작업이 일어난 남북조 시대입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시기는 중국이 5호 16국 시대였을 때입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고 300여 년이 지난 뒤였어요. 역사 기록에는 북방민족이 세운 전진이라는 나라의 왕 부견(苻堅)이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견 왕은 전진에 구마라습 대사를 초빙해서 금강경 등 많은 불교경전을 번역하고 불교를 부흥시켰습니다. 또 주변 나라에도 불교를 전했습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고 순도 화상을 보내서 처음으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했어요. 2년 후인 374년에는 아도화상이 고구려에 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순도화상과 아도화상 두 분의 스님이 머무시도록 고구려 최초의 절 초문사와 이불란사가 지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불교는 16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당시 지금의 서울인 위례성이 수도였습니다. 백제는 바다 건너 남조의 동진과 교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중국 동진에 와 있던 서역승 마라난타 대사가 바다로 배를 타고 건너 지금의 영광군 법성포에 도착해서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했습니다. 이때가 384년입니다. 이렇게 고구려 불교와 백제 불교는 공식적인 역사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중국보다 먼저 한국에 전해진 불교

삼국사기에 가야에 불교가 전래된 기록은 없지만, 삼국유사에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AD 48년에 금관가야로 불교가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받은 것이 아니라 인도로부터 바로 불교가 전래된 거예요. 즉 육상이 아닌 해상을 통해 인도에서 가야로 곧바로 불교가 전해졌다는 겁니다.

인도의 중북부에 있는 아유다국의 공주가 같은 왕족인 장유화상과 함께 배를 타고 먼 길을 돌아서 가야로 왔습니다. 그 공주가 김수로왕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가야는 건국 초부터 완전히 불교 국가가 됐습니다. 만약에 이 기록대로라면 중국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먼저 들어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중국보다 먼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졌다고 할 수가 없다고 봤어요. 그렇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한국불교사는 고구려와 백제를 기준으로 1600년이 되는 겁니다. 가야 불교를 공식화한다면 한국불교 역사는 2천 년이 됩니다.

인도로부터 바로 뱃길을 통해서 전래된 가야 불교는 지금의 김해 지역에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장유폭포와 장유면은 장유화상을 연상케 하는 지명입니다. 김수로왕과 결혼을 한 아유다 공주 허황옥은 열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김해 김 씨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고, 두 명의 아들은 김해 허 씨를 이었습니다. 나머지 일곱 명은 출가해서 장유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했어요. 지금도 지리산에 가면 일곱 분이 득도했다고 해서 칠불암이라고 부르는 절이 지금도 있어요.

장유화상은 지금의 창원 지역에 ‘가야정사’라는 최초의 절도 지었습니다. 그러나 가야가 멸망하고 그 절도 폐허가 됐다가 신라 말엽에 그곳에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봉림산문이 들어섰습니다. 현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사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봉림사지터는 원래 가야불교 최초의 절터인 가야정사터라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가야는 한 소녀가 법을 전하기 위해서 장유화상이라는 전법사와 함께 멀고 먼 길을 건너와서 결혼을 한 인연에서부터 불교가 시작됐습니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김해, 마산, 부산 이 지역은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심이 깊어요. 아마도 이런 역사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해봅니다.

나중에 신라와 가야가 통합할 때 가야는 신라에게 불교를 공인하라는 조건도 내 걸었습니다. 신라는 그 제안을 수용해서 불교를 공인했어요. 이렇게 가야는 완전한 불교국가였고, 문명이 아주 발달했습니다. 특히 철기 문명이 아주 발달했던 나라였지만 역사의 주역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가야 역사의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야 지역 터에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가야 문명이 아주 발달된 문명이었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삼국 시대의 불교 발전사, 고려 시대의 불교 발전사에 대해 설명을 계속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에 불교가 탄압을 받게 된 역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불교를 탄압했습니다. 고려 말기에 이성계를 앞세워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신진사대부라고 불리는 유생들이었습니다.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같은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유생들은 불교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도 해롭고 나라에도 해롭다고 봤습니다. 그들은 출가하는 것을 부모가 물려준 머리를 깎고 부모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비록 국가 정책은 불교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그전 왕조인 고려는 독실한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세종 그리고 세조까지도 개인적으로는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글이 처음 창제되었을 때도 간경도감을 두고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만큼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국가 정책은 불교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갔지만, 신앙으로서의 불교는 크게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왕사 역할을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500년 동안 이어진 불교 탄압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종파가 크게 11개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태종 이방원 때 이것을 7개의 종파로 강제 통폐합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세종 때 7개 종파를 다시 선종과 교종이라는 2개의 종파로 통폐합시켰습니다. 즉, 국가에서 선종과 교종이라는 2개의 종파만 허락했습니다. 이 두 가지 종파에 각각 18개의 절을 전국에 둘 수 있도록 하고, 승려의 수도 제한해서 선종에 1950명, 교종에 1800명까지 허락했습니다. 그러니 전국에 3750명의 승려만 두도록 하고, 절에 소속된 토지도 선종 4200 결, 교종 3700 결 도합 7900 결로 제한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고려시대에 비해 사찰이 보유하고 있던 땅이 10분의 1로 줄어드는 불교 억압 정책이었습니다.

이렇게 서서히 불교 탄압이 이루어지다가 성종 때 와서 심하게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승려들을 환속시키고, 도성의 4대문 안에는 승려가 아예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4대문 안에 있는 절도 모두 없앴습니다. 산속에 남아있는 승려들도 모두 노비로 신분을 전락시켜 버리는 역사 속에서도 전대미문한 탄압을 했어요.

연산군 다음으로 중종이 즉위했는데, 중종도 불교 탄압의 기조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중종의 부인인 문정왕후가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였습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을 거쳐 명종이 즉위했는데,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 뒤에서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했습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다시 선종과 교종의 승과 제도를 시행했고, 그 과정에서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명종 다음에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그때 바로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당시 발굴된 많은 승려들이 승병을 일으켜서 나라를 지키는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유생들은 사명대사를 암살하고, 다시 불교를 탄압하는 방향을 이어갔습니다.

이와 같은 탄압이 500년 동안 지속되면서, 불교는 서민과 대중의 삶에 접근한 복을 비는 종교로서만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불교를 공식적으로 탄압하면서 승려를 천민이라고 야유의 대상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을 ‘중놈’이라고 불렸습니다. 조선에는 일곱 가지 천민이 있었는데 승려를 여덟 번째 천민으로 신분을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승려들이 가지고 있던 대중을 위한 지도력이나 영향력도 상실하게 되었죠.

남자 양반 중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고, 여성들과 평민 이하 사람들 사이에서만 불교를 믿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진리로서의 법(法)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복을 비는 민간 신앙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니까 불교의 가르침이 격하되었습니다. 토속신앙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지배 계층의 불교가 민중의 불교로 전환되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법을 중심으로 한 불교가 아니라 복을 비는 불교로 격하되는 단점이 있었어요.

조선시대에 불교가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하면서 불교의 이미지는 점차 세속을 피하는 삶, 도피적인 삶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절도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산속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어요.

이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심지어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불교와도 전혀 다른 모습이에요. 현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도 부처님 당시의 불교나 신라의 불교 또는 고려의 불교보다는 조선시대 이후로 불교가 갖게 된 이미지가 더 익숙합니다. 그러다 보니 진리에 대한 법문을 하거나 실생활에 밀착된 법문을 하면 ‘원래 불교가 이런 것이었나’ 하는 반응을 보입니다.

이렇게 500년 동안 탄압을 받다 보니 불교에서는 사회를 이끌 정신적, 사상적 비전이 퇴색했습니다. 비록 조선말기에 들어서면서 탄압은 줄었지만 역사적 사명을 제대로 이끌지는 못했어요. 다시 말해, 승려의 도성 출입 제한이 풀리고 여러 가지 제도적인 불교 탄압이 없어졌지만, 500년 탄압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불교 스스로 본래 모습을 찾아가거나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조선말기 개화기로 접어들면서 불교 탄압은 거의 없어졌지만 동력을 잃은 불교는 서양에서 들어오는 개신교에게 밀리고, 천주교에게도 밀렸습니다. 역사적 비전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원래 불교의 모습으로 회복해 나가려는 노력들

개화파의 거두인 유대치, 이동인과 같은 인물들도 모두 중인 신분이면서 불교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 백용성, 한용운 스님이 민족의 독립과 함께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키면서 지금의 한국불교가 갖고 있는 위상과 명분을 위한 기틀을 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가 한국에 들어오고 2천 년의 역사가 지났습니다. 불교는 비록 다른 나라에서 전해졌지만 우리 민족의 문화와 하나가 되어 역사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동시에 조선왕조 500년 탄압의 역사가 제대로 정화되지 않아서 여전히 불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안고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근대화 이후로는 서양 문물과 기독교가 전해지면서 ‘우상 숭배’,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불교 스스로도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용성 스님의 불교 혁신 운동을 시작으로 해서 불교는 점차 원래 불교의 모습으로 회복해 나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용성 스님의 불교 개혁운동과 민족 독립운동에 대해서 깊이 배워보기로 했습니다. 2천여 년 전에 한국에 전래된 불교가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에 전래되고, 조선조 말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들에게 전해져 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역사에 대한 설명만 있었기에 끝으로 스님은 원효 대사가 출가한 수행자를 위하여 저술한 불교서인 ‘발심수행장’을 낭독해 주었습니다.

‘... 얼마나 산다고 빈 몸으로 일생 수행하지 않는가.
몸에는 반드시 끝남이 있다.
그 뒤의 몸은 어찌할 것인가.
급하지 않는가, 급하지 않는가.’

“원효 대사는 그냥 저절로 위대한 수행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수행뿐만 아니라 후세에 수행하는 대중들을 위해 이렇게 간곡한 글을 남겼습니다. 물론 현대인에게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설령 이렇게 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의 삶에 대해 불평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어진 삶에 불평을 하고 있다면

모두 버리고 출가해서 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이 삶을 불평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인생의 해방과 해탈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이번 주 수행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교실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나누기를 이어나가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와 화상으로 회의를 한 후 인도성지순례 실무 준비 회의를 하고, 오후에는 평화재단에서 손님들과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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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덕환

스님 감사합니다.
한국불교의 역사를 알면서 훌륭하신 스님들의 노력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제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불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2024-01-23 06:27:43

한상연

한국불교가 많은 탄압속에서 복을 비는 종교로서 명맥을 유지해 나간점들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올바르고 나를 찾아가는 수행의 불교로 나아갈수 있게 길을 제시해주고 이끌어주시는 분들의 노고로 지금 의 내가 존재함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024-01-20 10:26:06

자연아

감사합니다
우리나라 불교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4-01-19 15: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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