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3.1.3 정토경전대학 육조단경 5강
“모든 불교 경전의 요지는 이겁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겨울 날씨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오늘은 아침 기온이 영하 4도로 떨어졌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은 원고 교정과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오후에는 경전대학 수업 준비를 하다가 오후 4시부터 인도성지순례 준비팀과 화상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전체 프로그램이 거의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세부 일정을 검토하고, 네팔 국경 통과 방안, 코로나 환자 발생에 대한 대비책에 대해 의논한 후 네팔 룸비니를 답사하고 온 결과를 보고받고 함께 점검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선불교의 핵심 사상이 담긴 육조단경에 대한 다섯 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스님은 먼저 경전을 올바르게 읽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많은 지식을 갖는 것이 과연 불교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인가’ 하고 성찰해봐야 합니다. 절이 많이 지어지고, 승려가 많아지고, 사찰 경제가 부유해지는 것을 불교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경전을 올바르게 읽는 방법

그렇기 때문에 권위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종교의 모습으로 빠져버린 불교를 반성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선(禪) 불교가 탄생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육조단경을 읽어야 글이 이해가 되지,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글자만 읽으면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건 마치 길을 묻는 사람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알아야 방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을 물을 때, 그 사람이 지금 인천에서 출발한다는 걸 알아야 동쪽으로 가라는 말이 이해가 되겠죠. 그 사람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모르고 그냥 ‘동쪽으로 가라’는 말만 들으면 ‘서울 가는 길은 동쪽이다’ 또는 ‘진리는 동쪽이다’ 이렇게 그릇된 관념을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늘 질문을 하는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인 상황이 어떠했는가, 당시 사회적 문제가 어떠했는가, 어떤 고뇌 속에서 그들의 질문이 나왔는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질문에 대해 답하는 본문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육조 혜능 대사를 찾아온 당시 많은 수행자들은 이런 기존 불교에 대해 회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짐작됩니다. 또한, 수행을 마음공부라기보다 경전을 많이 읽는 것을 기준으로 수행을 판단하거나, 신앙적인 믿음이 강한 것을 수행의 잣대로 삼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판적인 말씀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경전의 문답을 들어야 금방 이해가 되지,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하고 들으면 핵심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육조 혜능 대사를 찾아와 문답을 하면서 깨우치는 ‘참청인연’에 대해 설명을 이어 나갔습니다. 첫 번째로 법해 스님과의 문답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선불교에서 ‘마음밖에 부처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당시 불교인들은 불경스럽고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법해 스님이라는 분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뜻을 가르쳐주십시오.’

혜능 대사가 대답했습니다.

‘전념(前念)이 나지 않는 것이 곧 마음이요, 후념(後念)이 멸하지 않는 것이 곧 불(佛)이니라. 일체상(一切相)을 이룸이 곧 마음이요, 일체상을 여읨이 곧 불이니라.’

여기에서 핵심은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무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불(佛)이니 마음이니 하는 말도 다 한 생각 일으켜서 일어난 것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후념이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념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후념이 멸할 게 없다는 뜻입니다. 이 생멸이 없는 도리가 바로 불이라는 거죠. 세상에 온갖 것을 만드는 것이 마음이고, 마음이 사라져 버리면(무념) 곧 불이지, 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법해가 언하에 대오하고 게송을 지어 찬탄하였다.
이 마음이 원래 불(佛)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스스로 굴(屈)하였네.
내 이제 정과 혜의 근본을 알아서 쌍으로 닦으니 모든 상을 여의노라.

“이 마음이 원래 부처인 것을 모르고 밖에서 부처님 찾아 헤매면서 스스로 굴러다녔다는 거예요. 이것이 법해와의 참청기연입니다."

스님은 혜능 대사와 ‘법달’이라는 분과의 문답을 소개하면서 수업을 이어갔습니다.

“법에 통달했다고 해서 이름이 ‘법달’인 사람이 혜능 대사를 찾아왔어요. 일곱 살에 출가해서 엄청나게 공부를 해서 그 긴 법화경을 3천 번을 읽고 달달 외울 정도로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자기는 경을 3천 번을 읽어도 지금 못 깨달았는데 저 남쪽에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깨우쳤다고 하니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가 답답하니까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거예요. 그래서 혜능 대사를 찾아와서 절을 하는데 마음이 썩 내키지가 않으니까 이마가 땅에 안 닿았어요. 혜능 대사가 가만히 이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예배는 본래 아만(我慢) 콧대 꺾자는 것
어찌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아(我)가 있으면 곧 죄가 생기고
공(功)을 잊으면 복이 한량없네
너의 지금 이름이 법달이라 하나 부지런히 외울 뿐 쉬지를 못했네.
공연히 외우면 소리만을 따르는 것.
마음을 밝혀야만 보살이 되느니라.
너 나와 더불어 인연 있으니 내 이제 너 위하여 설하노라.
다만 부처님의 말 없음을 믿으면 연꽃이 입에서 피어나리라.

법화경을 3천 번 읽었다는 생각조차 잊어야 복이 한량없다는 얘기입니다. 경을 소리로만 외웠을 뿐, 아직 마음이 쉬지를 못했다는 거죠. 부처님은 본래 한 말씀도 하지 않고 다만 중생의 근기 따라 설하셨습니다. 거울은 한 그림도 그린 바가 없지만은 사물이 오면 다만 비출 뿐인 것과 같습니다. 이런 도리를 알면 그 가르침이 어렵지 않죠. 법달이 교만을 피우다가 지적을 받고 혜능 대사에게 말합니다.

‘제가 법화경을 3천 번 읽었는데 도무지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좀 가르쳐 주십시오.’
‘나는 글자를 모르니 네가 읽어라. 그럼 내가 듣고 해설해 주리라’

법달이 읽는 경을 듣고 혜능 대사가 이 경의 요지를 말해 주었습니다.

‘부디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불(佛)과 더불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 까닭에 '불지견을 열라' 하신 것이며 나 또한 모든 사람에게 권하기를 '자기 마음속에서 항상 불지견을 열라' 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연한 까닭은 부처의 지견을 열기 위함이라고 나오잖아요.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그 지견을 다만 열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나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혜능 대사가 이어서 말하죠.

‘세간 사람은 마음이 삿되고 어리석으며 미혹하여 죄를 짓되, 입은 선하고 마음은 악하며 탐심, 분노, 질투, 아첨, 아만 등으로 남을 침해하고 일을 해쳐서 스스로 중생지견(衆生知見)을 여느니라. 만약 능히 마음을 바르게 하고 항상 지혜를 내어 자기 마음을 비추어 보아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이것이 스스로 불지견을 여는 것이니라.’

괴로움과 슬픔, 분노와 질투, 남을 해치는 마음, 이런 마음을 내면 중생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놓아버리고 지혜를 내어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그것이 바로 불지견을 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경』이 나를 굴리고
마음을 깨달으면 내가 『법화경』을 굴린다
아무리 경 외어도 자성을 밝히지 못하면
뜻과는 오히려 원수같이 등을 지네

내가 지금 법화경을 읽고 따르는 것은 내가 지금 법화경에 굴림을 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자신이 세상을 굴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육근 경계에 끄달려서 세상에 굴림을 당하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남이 뭐라고 하면 성내고,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면 욕심내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조정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 돼서 세상을 굴려야 합니다.

무념(無念)이면 생각이 바르게 나아가고
유념(有念)이면 생각이 삿된 길을 이루며
유념 무념 모두 다 헤아리지 않으면
백우거(白牛車)를 타고서 길이길이 노니네

백우거는 법화경에 나오는 말이죠. 백우거를 탄다는 것은 부처의 길을 간다는 뜻이에요. 법달은 가르침을 받고 환희용약하며 게송을 지어 찬탄합니다.

『법화경』 삼천 번 읽는 것이 조계(曹溪)의 한마디에 없어졌도다.
부처님 오신 뜻을 밝히지 못하면 다생의 미친(狂) 짓을 어찌 쉬리오.
양거, 녹거, 백우거로 방편을 삼아 초(初), 중(中), 후(後)로 잘도 설했네.
누가 알리요, 화택(火宅) 속의 이 몸이 원래부터 법왕(法王)인 것을.

조계의 한마디라는 것은 조계산에 살고 있는 혜능 대사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화경에서는 화택 속에 있는 이 몸이 화택에서 나와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선의 가르침을 통해 화택 속에 있는 그대로 부처임을 알게 된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한 내용입니다.”

이어서 육조 혜능 대사를 찾아와서 깨우쳐가는 여러 제자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중 후대에 선불교를 크게 일으킨 남악 회향 대사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남악 회양이라는 분은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몇 날 며칠 동안 먼 길을 걸어서 고단한 몸으로 혜능 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스승만 만나면 깨달음을 얻어 생사 고뇌에서 벗어난다는 희망을 품고 스승을 찾은 거예요. 방문을 열고 안으로 탁 들어가려는데 스승이 벽력같이 고함을 쳤어요.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그러자 말문이 콱 막혀버렸어요. 이 말은 ‘네가 누구냐?’라는 물음이죠. ‘법륜입니다’ 하고 답하면 ‘그게 네 이름이지 너냐?’라고 되물을 수 있습니다. 만약 ‘몸이 왔습니다’ 하면 ‘시신이 왔느냐?’라고 할 거잖아요. ‘회양이 왔습니다’ 하면 ‘이름이 왔느냐?’ 이럴 거잖아요. ‘스님입니다’ 하면 ‘그것은 네 직업이지, 그것이 너냐?’라고 할 겁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꽉 막혀버렸어요.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는 물음에 분명히 오기는 왔는데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모르는데 책을 보고 경전을 보고 스승을 찾아간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 뭣고?’

돌아가서 계속 탐구를 했어요. 시간이 하루가 지났는지 한 달이 지났는지 10년이 지났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언하에’, ‘한 달 만에’, ‘일 년 만에’ 이렇게 시간이 중요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 뭣고?’ 하는 의문에 확 사로잡힌 사람은 시간을 잊어버립니다. 밥을 먹어도 먹는 게 아니고, 길을 가도 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갈 뿐이고, 먹을 뿐이죠. 마치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처럼 남하고 말을 해도 따끔따끔하고, 잠을 자도 따끔따끔하고, 밥을 먹어도 따끔따끔하고, 화장실에 앉아도 따끔따끔했어요. 마치 뱉아도 뱉아지지 않고, 넘겨도 넘겨지지 않는 목구멍에 탁 걸린 생선 가시처럼 ‘내가 누군가?’ 하는 것에 온 마음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남악 회양 스님이 물음을 던진 스승에게 찾아가서 대답했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기록에는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니까 언하에 깨쳐서 ‘설사 한 물건이라도 맞지 않습니다’ 하고 단박에 대답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관념의 벽을 타파하고 나중에 남악에 가서 법을 크게 펼쳤기 때문에 ‘남악 회양’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탁 깨닫고 그 자리에서 법을 펼치러 나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년 넘게 스승 밑에서 시봉하며 기다린 사람도 있는데, 남악 회양 스님은 15년이나 스승을 시봉 하며 아무 말 없이 기다렸습니다. 이런 시기를 ‘보림(保任)’이라고 하죠. 육조 혜능도 단박에 깨치지만 16년 동안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육조단경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대사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단정히 앉아서 삼경(三更)이 되니, 홀연 문인에게 이르기를 “나는 간다” 하시고 훌쩍 천화(遷化)하셨다. 조사의 춘추는 76세였고, 24세에 의발을 받으셨고, 39세에 축발 하셨고, 법을 설하여 중생을 요익하심이 37년이었다. 종지宗旨를 얻어 법을 이은 제자는 43인이고, 도를 깨쳐 범부의 자리를 넘어선 자는 그 수를 알 수가 없다.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조사들은 수평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선법(禪法)과 심법(心法)을 제대로 체득하여 전할 수 있는 법제자를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많은 사람을 교화하지 못하더라도 이 심법을 제대로 증득하여 법을 이을 제자 한 명을 키워내는 것이 자기 임무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족보를 이어나갈 때 아들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데, 어찌 보면 중국 문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무협지를 봐도 권법을 대를 이어 제대로 전할 수 있는 제자 한 명 키워내는 것에 더 주력하죠. 일본에도 이렇게 대를 잇는 문화가 있습니다. 선(禪) 불교에도 이러한 문화가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두고 ‘중국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게 아닌가’ 하고 비판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문화가 언제부터 있었느냐’, ‘불교에 원래 이런 문화가 있었느냐’ 하고 논쟁을 하는데, 이게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선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런 자기 정체성을 갖고 수행 정진을 한다는 것입니다. 선불교는 이러한 믿음과 정진을 통해 결국 역사 속에서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선(禪)을 시작할 당시에는 조그마한 세력이었는데, 결국 중국 불교의 중심이 되었고, 나아가 중국 사상계와 동양 사상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든 불교 경전의 요지는 이겁니다

육조단경은 간곡함과 절실함으로 내 마음을 깨닫고, 괴로움이 없는 삶,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내 마음을 깨닫고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살라고 수도 없이 이야기하는데, 이 말을 아무리 해도 중생은 여전히 ‘이걸 배우면 복을 빨리 얻을 수 있는가’, ‘이걸 배우면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가’, ‘이걸 배우면 돈을 더 벌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을 깨우쳐서 부처가 되는 길은 가지 않고, 그저 한 자리 받을 생각만 하죠. 수행자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주지스님이 되어야겠다’, ‘조실스님이 되어야겠다’, ‘방장스님이 되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어찌 조사(祖師)의 법을 계승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근본불교의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하고,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 대승불교의 경전도 공부하고, 육조단경 등 선불교의 경전도 공부하고 나면, 결국 대승이냐 소승이냐 선(禪)이냐 교(敎)냐 하는 구분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 전부를 꿰뚫는 요지를 파악해야 해요. 그 요지는 여러분 각자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점입니다. 나 스스로 아무런 모자람이 없고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모든 불교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늘 헐떡거리고 위축되어서 살아가죠. 반대로 돈이 조금 있다고 해서 목에 힘을 주고 다니고, 지식이 조금 있다고 해서 목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리고 살아갑니다. 이런 삶을 산다면 어찌 죽음 앞에 여여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다음 시간에는 선불교가 어떻게 중국 불교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선불교의 발전에 대해 공부하기로 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서울로 이동하여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내일부터 인도성지순례 출발 전까지는 서울에서 인도성지순례 준비와 2차 만일결사 준비를 위한 각종 회의들을 해나갈 계획입니다.

전체댓글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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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옥

돌아서면 까먹기는 하지만 하나씩하나씩 눈에 들어오는 게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입으로만 선을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몸으로 익혀 나가겠습니다.

2024-01-12 20:13:58

세등명

정토회안에서 무언가 되고싶다고 했던 그 마음 내려놓고 갑니다. 감사합니다._()_

2023-01-15 03:22:48

박은경

감사합니다 익히고 실천하겠습니다

2023-01-12 09: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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