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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성도절입니다. 보통은 연초에 있는 날인데 올해는 연말에 성도절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새벽기도와 명상 후 오전에 일찍 회의를하다가 10시에 성도절특별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토행자 여러분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성도절입니다. 기념일이라는 것은 그날이 맞느냐가 아니라 한 날을 정해서 기념한다는 거죠. 우리나라는 기본일정을 양력으로 하니까 음력으로 하는 성도절은 12월 8일 임에도 연초에 성도절을 맞아왔는데 올해는 정말 드물게 연말에 성도절이 됐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탄생일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중요시 합니다. 그런데 불교인들은 ‘부처님’이니까, 태어난 날 열반하신 날보다도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성도일을 중요시합니다.
원래는 성도 전야에 다 같이 철야 정진을 하는데 올해 연말에는 우리 정토행자가 3년 휴가 기간이 되다보니 철야 정진도 못 하고 이렇게 기념 법문과 기도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짧은 시간이지만 정성을 기울여서 부처님의 성도를 기념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이 오감을 통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몸입니다. 그러니까 몸이 시작되는 날을 중요시해서 태어나신 4월 초파일을 가장 성대하게 치르죠. ‘부처님이 태어나셨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날이 아닙니다. 고타마 싯따르타라는 한 사람이 태어난 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에 있는 수보리와의 대화에서도
‘이 몸이 부처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전륜성왕이 부처겠구나’
‘아닙니다. 이 육신으로는 부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육신이 부처가 아닙니다. 깨달음의 지혜가 부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법을 생각한다면,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은 부처님이 도를 이루신 날, 깨달음을 얻으신 날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자 그때부터 우리는 ‘부처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일이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날, 부처님 되신 날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태어나신 날, 성도하신 날, 열반하신 날을 다 같은 날로 하고 있지만 우리는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날은 성도 일입니다. 물론 태어나신 날도 기념을 해야 되겠죠.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성도를 했겠어요.
그러나 부처가 ‘부처’인 것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님이시고 법을 설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자가 가져야할 부처님의 기준은 부처님의 태어남도 아니고 열반도 아닌 ‘성도(成道)’와 ‘초전법륜(初轉法輪)’입니다."
그러면 성도, ‘깨달음’이 왜 중요할까요. 태어난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하게 태어납니다. 키가 작든 크든 남자든 여자든 얼굴 색깔이 희든 검든 관계없이 대부분 건강하게 태어납니다. 그런데 살면서 병이 들죠. 우리가 병들도록 태어났다기보다 몸을 잘못 사용해서 병이 듭니다.
자연에 사는 동물들도 병이 들긴 하지만 사람보다는 병드는 것이 적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이라는 것은 원래 건강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비만하거나, 사물을 너무 가까이 봐서 눈이 나빠지거나 여러 이유로 몸이 병들게 됩니다. 그러나 잘못 사용한 원인을 찾아서 그것을 치료하면 원래의 건강을 회복하죠.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저 동물들처럼 본래 괴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그때 잠시 놀라기는 하지만, 일상적으로 괴롭거나 지나간 과거, 오지도 않는 미래로 불안하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동물보다 더 괴로워하고 미움도 크고 화도 더 내고 차별도 더 하죠. 우리 존재 자체가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육신이 병들듯 마음이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병든 원인 즉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서 고치면 누구나 괴로움이 없는 삶,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음 작용의 원리를 탐구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성차별, 계급 차별, 인종차별은 신에 의해서도 아니고 전생에 의해서도 아니고 사주팔자에 의해서도 아니다. 우리 마음이 어리석어서서 그렇다.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면 마음속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면 누구나 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하셨습니다.
이 길을 열었기 때문에 ‘성도’는 종교적인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 최고의 발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2600년 전에 이미 이 길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문명은 자유와 행복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도 어리석음을 조장하는 흐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주 너머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미세한 티끌 내부구조까지 아는 인류가 자기 마음의 병을 못 고치는 것은 마음이 밖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피부 빛깔로 차별하고 계급을 만들어서 차별하고 성차별하고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복수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하느님이 벌 한다.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 사주팔자다’ 하는 허황한 논리를 내세워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해서 생긴 고통을 합리화했습니다.
부처님이 서서 태어나셨다 옆구리로 태어나셨다 하는 것이 강조된다면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에 어긋나는 불교가 세상을 뒤덮자 달마대사가 마음 밝히는 법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하는 획기적인 인간 존중을 선언한 것입니다. ‘왕도 대신도, 양반도 상놈도, 남자도 여자도 관계없다. 지식의 많고 적음도 상관없고 신체장애의 유무도 상관없다. 누구나 자기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그러니 글을 모르는 사람이 깨달아서 조사가 되기도 하고 한센병 환자가 깨달아서 조사가 되기도 하는 선불교가 동아시아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토든 정토든 부처든 중생이든 다 내 마음 가운데 있다 내 마음 어리석으면 중생이요 내 마음 깨달으면 부처다. 내 마음 어리석으면 번뇌가 일어나고 내 마음 깨달으면 번뇌가 사라진다.’ 하는 선불교의 종지, 불교의 본래 가르침이 오늘날 이 민주적인 사회에 가장 부합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세상 사람을 평등하게 봅니다. 그가 무슨 종교를 믿든 그가 남자든 여자든 승려든 아니든 어떤 권위도 차별도 두지 않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어떤 차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부족한 가운데 목표를 향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족한 것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못 하면 돌이켜 참회하고 부족한 줄 자각해야지, 그것을 합리화하고 방어하고 자기 기준과 다른 타인을 비판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지럽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이렇게 이런 일 저런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보고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거나 근심하거나 걱정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해서 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내버려두란 이야기도 아닙니다. 홍수가 나면 둑을 막아야 하고, 전쟁이 나면 멈추게 해야 하고,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하고 인권이 침해받으면 시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가야 할 마땅한 길이기에 어떠한 어려움과 비난이 닥치더라도, 그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 가야합니다.
비난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마음공부가 부족한 것이고 비난한다고 가지 못한다면 보살의 길이 아닙니다. 가야 할 길이라면 꿋꿋이 가야 합니다. 오늘 성도절을 맞아서 부처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깨달은 후 어떠한 일생을 살아가셨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고 불자로서 부족하지만, 지향은 분명히 하고 수행자의 관점을 다시 한번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정토행자들은 성도재일을 맞아 10분 석가모니불 정근과, 30분 명상을 이어갔습니다. 법문을 마친 스님도 자리에서 내려와 방석을 깔고, 정토행자들과 함께 성도재일 특별 정진을 했습니다.
스님은 몇 개의 회의를 마치고, 원고를 교정한 후 저녁 즉문즉설 방송을 했습니다.
몇 달 전 둘째 딸이 자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딸은 평소에 시댁 어르신과 사이가 안 좋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술을 많이 마시다가 간경화가 왔습니다. 같이 병원도 다녀보았지만 알코올 중독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남편과도 매일 이혼 이야기를 하며 싸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재 11살 손자는 아빠와 떨어져 친할머니 댁에서 지내고 있는데 엄마가 살아있을 때는 저를 잘 따르더니 지금은 잘 오려고 하지 않고 어색하게 대합니다. 앞으로 손자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그리고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좋을지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게 되면 부모의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죠. 그걸 몇 마디 위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고 돌이킬 수가 없는 일입니다. 내가 슬퍼한다고 살아온다면 내가 슬퍼할 수도 있고 내가 죽는다고 살아온다면 죽을 수도 있고 돈을 얼마 낸다고 살아온다면 전 재산을 팔아낼 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 어떤 것을 하더라도 되돌릴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집착하고 연연해서 이렇게 울고 있으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살고 있는 가족에게도, 질문자에게도, 손자에게도 도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백해무익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에요.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어리석은 짓은 안 하는 게 좋죠. 질문자 입장에서는 매우 아쉽지만, 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었기 때문에 어쩌면 하루 종일 스트레스 받고 알코올 중독인 상태를 끝내버렸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문제지, 이걸 자꾸 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딸이 죽어서 내가 슬픈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관점으로 이 문제를 빨리 극복하는 게 좋습니다.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아쉬움에서 우는 것이라고 자각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손자 문제인데요. 아이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엄마 손에 자라는 게 가장 좋습니다. 엄마가 키울 수 없는 조건일 때는 아버지가 키우는 게 좋고요. 아버지도 키울 수 없는 조건이 될 때는 할머니가 키울 수밖에 없죠. 할머니도 없다면 이웃집 아주머니라도 키워야 합니다.
현재 손자를 친할머니가 돌보고 있다면 엄마가 키우는 것보다는 못 할지 몰라도 순서상 최선입니다. 만약 친할머니가 없다면 외할머니가 키워도 되겠죠. 그래서 아이가 친할머니 댁에서 학대받는 게 아니라면 질문자가 걱정할 일은 아니에요. 아이가 친할머니 댁에서 적응하면서 잘 사는 게 좋은 겁니다. 친할머니랑 살면서 외할머니를 자꾸 그리워하면 질문자는 기분 좋을지 몰라도 아이의 성장에는 좋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큰 문제가 없는데 나를 안 좋아한다고 문제 삼는 것은 질문자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가장 큰 문제는 죽은 딸의 문제도 아니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손자의 문제도 아니고 내 집착이에요. 죽은 딸에 대한 집착을 못 버려서 괴로워하고 손자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것은 내 문제라는 관점을 딱 가져야 정신을 차릴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은 집착을 놓고 질문자의 인생을 사세요.”
"딸이 자다가 각혈 때문에 숨이 막혀서 갔습니다. 제가 그날 토요일인데 직장 때문에 아픈 딸을 놔두고 출근했습니다. 그게 너무 가슴에 걸려서 지금까지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그건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래요. 스무 살이 넘은 딸은 더 이상 엄마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결혼한 딸이 어떻게 죽었든 그건 질문자 책임하고는 무관하다는 걸 자각하셔야 해요. 미국 이민 초기에 간 엄마들이 아이가 어쩌다 사고가 나서 죽었는데 관습적으로 ‘아이고, 내가 우리 애 죽게 했다’고 말해서 감옥 간 사람이 많습니다.
딸은 죽을 때가 돼서 죽은 거고 그때 누가 응급구호를 했다면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죽인 게 아니면 질문자 책임이 아니에요. 본인 책임이 아닌 걸 자꾸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해서 울 필요는 없어요. 조금 아쉬움이 남겠지만 아까 얘기한 대로 알코올 중독이고 또 피를 토할 정도면 그렇게 계속 사는 게 과연 나은 삶인지도 좀 생각해 봐야 해요.
그렇다고 죽이거나 방치하면 안 되지만 그렇게 하다가 이미 죽었잖아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면 내생이 있든 없든 마음은 ‘하루빨리 건강한 몸 받아서 병 없이 잘 살아라.’ 하며 기꺼이 보내주는 게 가장 좋은 일이에요. "
"머리로는 되는데 마음이 안 됩니다. 그날만 생각하면 제가 출근하지 않고 딸애를 병원에 데려갔으면 낫지 않았을까 싶고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프고 힘듭니다. "
“자식을 잃었으니까 마음 아픈 것이 현실입니다. 이태원 참사에 자녀를 잃은 부모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겠어요? ‘그날 나가겠다는 걸 내가 말렸으면 됐는데’, ‘그날 내가 집에 있어서 못 나가게 했으면 됐는데’ 하고요. 또 세월호 사건의 모든 부모도 ‘수학여행을 안 보냈으면 됐는데’, ‘애가 안 가겠다는 걸 가라고 해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후회하잖아요. 이미 일어나버린 일을 그렇게 하나하나 후회하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올바른 자세는 아니에요. 중생은 그런 마음의 미련 때문에 인생의 괴로움이 끝이 안 나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것은 질문자 책임이 아니라는 거예요.”
"손자는 엄마 생각난다고 아빠 집에는 아예 안 가고 저까지 등한시해서 괜히 서운했어요.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친할머니하고 잘 살면 되지, 외할머니 보고 싶다고 매달리면 또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병원 안 갔던 것이 너무너무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서 제가 슬프기는 해도 스님 말씀 들으니까 많이 위로가 됐습니다. 살아서 그렇게 고생할 바에는 또 어떻게 보면 좀 나은가 하고 이렇게 생각을 돌려봅니다. 스님, 오늘 말씀 감사하고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렇게 죽거나, 아프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거나 하는 온갖 일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런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비 오는 날 비 맞으면서도 살고 추운 날 떨면서도 살고 등산하려면 가파른 절벽을 오르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하루하루의 삶에 편안하게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니까 삶을 힘들어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의 조건에서 행복하지 못하고 ‘이러이러한 조건에서 행복해지겠다’라는 조건부 인생을 살면 죽을 때까지 불평불만 속에 살다가 불행한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현재 주어진 조건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별일 아니다’, ‘내 생각대로 안 된다고 별일이라고 하는 거지, 생각만 멈추면 아무 일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조금 더 자기 삶을 아끼고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 지난해는 다 놓아버리고 새해 새로운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은 오전에는 공동체 행자들과 산책을하고 저녁에는 경주불교학생회 동문들 만남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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