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2.29. 경주남산 종주 산행, 정토경전대학_육조단경4
“우리가 이렇게 경문을 읽는 이유는”

스님은 오늘 일찍 두북수련원에 남아있는 행자들과 함께 산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휴가기간에 학교에 남아 있는 행자들에게 마음이 쓰여서 일정을 조금 조정했습니다. 남아있던 행자들도 신이 나서 산에 올라갈 채비를 하여 오전 7시부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지도 앞에 서서 스님은 오늘 걸을 코스를 안내했습니다. 오늘은 경주남산 종주를 해보려 합니다.

“스님 그러면 복귀시간은 몇 시쯤일까요? ”

“모르죠. 가봐야 알 것 같아요(웃음)”

일단 시간의 기약 없이 시작했지만 오전 중에는 내려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출발했습니다

대나무숲을 지나서, 능선을 따라 걷기도 하고, 골짜기를 걷기도 하고, 산길로 걷기도 하고, 걷다 보니 산길이 아닌 곳으로 걷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5시간이 훌쩍 지나 12시쯤 목표지에 도착했습니다. 하산한 곳은 신라 개국 공신 정씨 씨족의 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스님은 행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회의를 하고 경전대 수업준비를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경토경전대학생 여러분, 오늘은 중국 불교 또는 선불교 네 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선불교의 일어난 배경, 그리고 선불교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육조 혜능 대사의 법을 얻는 파격적인 과정, 그리고 그분의 설법, 이렇게 세 번의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은 혜능 대사의 설법을 더 살펴보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과의 만남, 즉 제자들과의 만남에 대해서 함께 대화해보겠습니다”

선지식이여, 만약 수행하기를 바란다면 재가在家라도 깨달을 수 있나니 절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재가인이라도 잘 수행하면 마음이 착한 동방 사람과 같고, 절에 있으면서도 닦지 않으면 마음이 악한 서방 사람과 같으니라. 다만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자성이 곧 서방극락이니라.

"마음이 청정하면 스님이라는 관점이기 때문에 장소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재가니, 출가니 이런 것을 구분 지을 필요가 없는 거죠.

정토회 초기에 서암 큰스님께 우리나라 불교와 스님, 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스님께서는 마음이 청정한 자가 스님이고, 청정한 수행자가 사는 곳이 절이고 이것이 불교라는 파격적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 오늘 우리 정토회는 종교, 성별, 국적 등 그 어느 것도 관계없이 ‘지금 내가 마음을 맑고 밝고 가볍게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곧 수행자고 보살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머리를 깎고 절에 살더라도 돈에 욕심을 내고 욕망을 일으키고 자기 성질대로 하면 그것은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어느 곳에 있더라도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마음에 거짓이 없고 욕심이 없고 화내고 짜증 내고 성질내고 미워하지 않는 상태의 마음가짐이라면 지금, 이 순간 청정한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앉아 있는 그곳이 바로 도량이자 법당이고 이것이 불교입니다.”

마음이 평등하니 어찌 힘써 계戒 가지며
행실이 정직하니 선禪을 닦아 무엇하랴
은혜 알아 부모님께 효성 다해 봉양하고
의리 지켜 위아래가 서로 돕고 사랑하라

“일체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마음,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는 남을 해치고 물건을 훔치고 성추행하고 거짓말을 하며 삿된 소견을 갖고 술이나 마약에 취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이미 삶 자체가 여여하기 때문에 힘써 계를 지킬 것도 없고, 이미 행실이 정직하니 애써 선을 닦고 공덕을 쌓을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일상에서 수행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지 계를 지키기 말라거나 선을 닦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

예양禮讓을 알아 위아래가 서로서로 화목하고
인욕한 즉 나쁜 일도 걸릴 것이 하나 없네
만약 능히 나무 비벼 불을 내듯 할지면
어김없이 흙 속에 붉은 연꽃 피어나리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사랑하며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인욕한‘ 이란 내가 원하는 게 안 이루어지더라도 내 생각대로 안 되더라도 조금 참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 내 성질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만 하면 나쁜 일에 걸릴 것이 하나 없네,
나무를 비벼서 불을 내려면 굉장히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정신을 모아 간절하면 어떤 업식이나 장애도 극복이 가능하다는 거죠."

입에 쓰면 몸에는 반드시 양약良藥이요
거슬리는 말은 필시 마음에 충언忠言이라
허물을 고쳐가면 틀림없이 지혜가 살아나고
허물을 두호하면 어진 마음 사라진다

"내가 욕심 많으면 ‘아! 내가 욕심이 많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합니다.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허물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을 본다’는 말이 있잖아요. 내가 얘기를 할 때 조금 강하게 말하는 편이라면 상대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기분 나빠하면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좀 강했죠.” 이렇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허물을 두호하면 반드시 타인을 탓합니다. “내가 언제 성질냈나, 너는 뭐 성질 없나?” 이렇게 말합니다. 부드럽게 말하면 좋지만, 자신의 허물을 알고 있으면 그렇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변명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일용생활 어느 때나 남 이롭게 할지니라
도道 이룸은 돈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라
보리도는 한결같이 마음 향해 찾을 것을
어찌 힘써 밖을 향해 현玄을 구해 헤맬쏜가
이 말 듣고 이를 따라 수행하면
천당 극락 훤출하게 눈앞에 드러나리

"욕심 덜 내고 고집 덜 하고 자연스럽게 살면 꼭 남을 위해서 베풀려고 하지 않아도, 내가 하는 일,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내가 괴롭지 않은 것을 최우선으로 삼습니다.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슬퍼하면 내가 괴롭습니다.
첫째는 내가 괴롭지 않아야 하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남한테 도움받고 보살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잘 쓰이자고 얘기하는 겁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향해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선사들의 어록을 보면 밖을 보지 말고 안을 보라고 스승이 늘 깨우쳐주잖습니까? 마음이 불안하다는 사람에게는 ‘불안한 마음을 내봐라’ 하고, 죄가 많다는 사람에게는 ‘죄를 내봐라’ 하고 해탈하게 해달라는 사람에게는 ‘누가 너를 잡고 있니’ 하고 묻습니다. 이렇게 밖이 아닌 안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청정하여 내 삶에 괴로움이 없으면 이대로 천당이고 극락인데 천당 극락을 따로 찾는다고 헤맬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에요.”

스님은 다음 경구로 넘어가기 전에 경구를 이해하기 위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잠깐 설명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선정을 닦는 것은 명상, 경전 공부를 하면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명상을 중시하는 파 선종, 경전 공부를 중시하는 파 교종으로 나뉘었어요. 그런데 선종과 교종이 둘이 아니다, 부처님의 고요한 마음이 ’정‘ 이고 지혜로운 말씀이 ’혜‘ 이지, 정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등불과 같다, 등이 있어서 등불이 있는 거고 등불은 등으로부터 나오는 관계와 같다, 둘로 보지 마라 했습니다.
고려시대 보조 지눌 국사도 이런 시대를 반영해서 정혜가 하나다 그래서 ’정혜결사‘를 말했습니다.”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정혜(定慧)로써 근본을 삼느니라. 대중은 미혹하여 정(定)과 혜(慧)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혜는 일체요 둘이 아니니 정은 혜의 체(體)요, 혜는 정의 용(用)이니라.
선지식이여,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한결같이 곧은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니라.

"혜의 바탕은 정이고 정의 드러남이 혜라는 겁니다. 부처님의 고요한 마음이 ‘정’이고, 지혜로운 말씀이 ‘혜’지, 정혜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삼매 선정에 든다는 것은 행(行)주(住)좌(坐)와(臥)-움직이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어(語)묵(默)동(動)정(靜)-말하고 침묵하고 고요하고 움직이는 가운데 마음이 한결같다는 의미입니다. 늘 화두를 챙기거나 호흡을 알아차리거나 음식을 먹을 때는 맛을 알아차리고 음직일 때는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오래 앉아 명상했다거나 몇 년간 등을 땅에 붙이지 않고 잤거나를 논하는 것은 선의 본질이 아닙니다.
어느 곳에서나 어떤 상태에 있거나 마음이 한결같으면 다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집중하고 사람과 대화할 때는 대화에 집중하고 늘 깨어 있으면 뭘 따로 하지 않아도 됩니다. 늘 깨어 있으면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습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욕심을 부리니까 긴장을 하게 되고, 힘이 드니까 쉬어야 하고, 쉬는 것도 너무 욕심내서 쉬고는 월요병이 걸려서 또 쉬어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일상이 그냥 휴식이에요. 긴장하지 않고 집중해서 하므로 따로 휴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재가에 있더라도 이러한 일행삼매적 관점을 갖는다면 출가 승려나 다름이 없습니다. 설령 출가 승려라 하더라도 참선을 일하듯이 하면 스트레스받아서 끝나면 나가서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물론 누구나 수행하다 보면 수행 관점을 놓칠 때도 있어요. 그러나 놓친 줄을 알면 고칠 수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가정생활도 힘들고 직장생활도 힘든데 정토회 활동까지 하니까 당연히 힘이 듭니다. 그래서 힘들다고 한다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고 일꾼에 불과한 겁니다. 삶이 힘들어서 수행 했더니 오히려 스트레스가 없어졌다고 해야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선지식이여, 나의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住)로써 본(本)을 삼느니라.
무상(無相)이라함은 상(相)에서 상을 여읨이요,
무념이라 함은 생각에서 생각 없음이요, 무주(無住)라 함은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악이나 밉고 고움, 원수거나 친하거나, 모질고 거친 말을 하거나 속이고 다툴 때 그 모두를 공(空)으로 돌려버리고 되갚거나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 중에 이미 지나간 경계를 생각하지 않음이니라.
만약 먼저 생각, 지금 생각, 뒷생각이 생각마다 상속하여 끊임이 없으면 이것을 얽매임이라 하는 것이요, 만약 모든 경계를 대함에 생각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이 까닭에 무주無住가 근본이 된다고 하느니라.

"이미 용성진종 조사님께서도 금강경의 대의를 무념으로 종을 삼고 무상으로 체를 삼고 무주로 본을 삼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하지 않음 또는 생각 없음은 생각에 의미를 두지 않고 다만 알아차리기만 한다는 겁니다. 부처님 생각이 나더라도 그건 다 물거품 같고 환상 같은 거라고 보고 의미를 두지 않는 ‘무념’을 으뜸으로 삼습니다. 옳으니 그르니 맞느니, 틀리느니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하는 건 다 내가 생각으로 일으키고 마음에서 짓는 것입니다.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무념이에요. 나도 모르게 한 생각을 일으켰을 때는 ‘아, 내가 생각을 일으켰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생각을 일으켜서 모양을 지었다면 이미 자기의 생각을 객관화시켰다는 겁니다. 이게 상을 짓는 거예요. 생각을 일으켰더라도 객관화시키지 않고 모양 짓지 않는 것이 무상입니다. 상을 지으면 당연히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면 괴로움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설령 상을 지었다 하더라도 상을 지은 줄을 알고 바로 놓고 집착하지 않으면 무주입니다. "

자성은 본래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는 것을 만약 얻은 바가 있다고 하여 망령되이 화와 복을 말한다면 이것은 곧 번뇌 망상이요 사견이라. 그러므로 이 법문에서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은 것이니라.

"이미 반야심경에서도 수없이 얘기했죠. 이무소득고-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보리살타는... 이렇게 나가지 않습니까? 법을 얻었느니 깨달았느니 전생에 죄가 많았느니 하는 말은 문화상 쓸 수 있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자라는 뜻입니다."

선지식이여, 밖으로 상을 여의면 즉 선이요, 안으로 산란하지 않으면 곧 정이니 밖으로 선하고 안으로 정한 것이 바로 선정(禪定)이니라. 선지식이여, 미혹한 사람은 몸은 비록 부동이나 입만 열면 문득 타인의 시비 장단과 호오를 말하여 도와 등지게 되나니 만약 마음에 집착하거나 청정에 집착한다면 도리어 도에 장애가 되느니라.

“선정은 어떻게 닦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상을 짓지 않으면 그것이 곧 선이고 안으로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고요하면 그것이 곧 정이니 이것이 선정입니다.

꼼짝도 안 하고 앉아서 선정을 닦거나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는다 하더라도,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 길다 짧다 하는 분별을 두고 있으면 자기가 일으킨 생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수많은 위대한 스승들이 서로 옳다 그르다고 말하는데 그들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지, 그들 중 누구 말이 맞는지를 물었습니다. 부처님이 누구 말은 맞고 누구 말은 틀리다고 대답한다면 그 시비에 휘말려 들어가는 거죠. 이런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때로는 침묵하셨고 때로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팔정도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또 때로는 ‘나는 그들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 그들이 무슨 주장을 하고 무슨 논쟁을 하는지 다 안다. 그러나 입에서 아무리 비단결 같은 말을 해도 마음속에 욕심이 있고 성냄이 있고 질투가 있다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논쟁하지 마라. 그들이 시비하더라도 옳으니 그르니 논쟁은 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대응은 하더라도 옳으니 그르니 논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생각으로 지은 것을 자꾸 객관화시킵니다. 생각은 자유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만들었다 해도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나 보다’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가 보다’하지 거기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객관화시켜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선지식이여, 이상을 무상참회라 하나니 어떤 것이 '참懺'이며 어떤 것이 '회悔'라 하는가?
'참懺'은 이제까지의 지은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이제까지 지은 모든 악업惡業인 어리석고 미혹하고 교만하고 속이고 질투한 죄를 모두 참회하여 영영 다시는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회悔'는 미래의 허물을 뉘우침이니 앞으로 짓게 될 악업인 어리석고 미혹하고 교만하고 속이고 질투하는 등의 죄를 지금 미리 깨닫고 모두 다 끊고 다시는 짓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는 참회를 분리해 참은 이렇다, 회는 이렇다고 법문을 했지만 이렇게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설명한 이유는 뭘까요? 참회라는 것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잘못했다고만 하고 지혜가 없으면 잘못을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회할 때는 참회 발원을 해야 합니다. 무상 참회란 지나간 잘못을 뉘우침과 동시에 다시는 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원을 세우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이제 나에게 한 무상송 無相頌이 있으니 능히 외우고 지녀라. 그러면 언하에 누겁累劫동안 쌓아온 미혹과 죄를 일시에 소멸하게 되리라.

미迷한 사람 도가 아닌 복을 닦나니
복만을 닦으면서 도라고 하네
보시하고 공양함은 복은 많으나
마음속 삼악三惡은 짓고 있네

복을 닦아 지은 죄를 없애려 해도
후세에 복을 받고 죄는 또 남네
다만 마음 가운데 죄연罪緣 없애면
각자 성품에서 진참회眞懺悔 되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절을 짓고 탑을 세우면 성불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을 깨우쳐야 지혜가 열리고 번뇌가 사라지는 것이지 복을 짓는다고 성불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을 위해서 베푸는 게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고 도를 닦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복을 짓는 것이 도를 닦는 게 될 때가 있어요. 바로 무주상 보시를 할 때입니다. 3조 승찬 대사가 죄를 사해달라는 제자에게 ‘그 무거운 죄를 내놔라, 내가 사해줄게’ 할 때 본래 죄라고 할 것이 없는 줄을 깨닫는 것이 진짜 참회입니다.

문득 대승법 깨달아서 진참회하고
사(邪) 없애고 행 바르면 즉시 죄 없어지고
도 배우며 어느 때나 자성 관하면
바로 제불들과 같아지노라

조사들이 돈법(頓法)만 전한 까닭은
견성하여 한 몸 됨을 원함이로다
오는 세상 누구든지 법신 보려면
모든 법상(法相) 여의고 마음 씻어라

노닐지 말고 노력하고 살펴라
뒷생각 끊어지면 한세상 마치니
대승을 깨달아서 견성하려면
경건히 합장하고 지성으로 구할지니라

”당시 유행한 불교에서는 왕이나 부자, 재가자들은 복을 지어서 극락에 가고 다음 생에 복을 받는다는 종교심이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또 교학을 공부하는 승려들은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고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인 줄 착각했습니다. 부처님의 바른 법은 그런 게 아니죠. 마음을 살펴서 자기에게 깨어 있으면 번뇌가 없고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고 그것이 곧 부처라는 이 가르침이 혜능의 제자 3대쯤 내려가면 중국 불교가 인도 불교와 완전히 달라집니다.
부처님도 숭배의 대상이 아니고 ‘사람이 곧 부처고 평상심이 도다’ 이렇게 해서 예배 중심, 계율 중심에서 일상 중심으로 불교가 크게 변화하는데 이것이 선불교입니다.
그러나 선불교는 많은 장점이 파격성을 갖지만, 계율을 소홀히 해서 욕망을 합리화하고 글자에 얽매이지 말라 하는 상에 집착해서 경도 읽지 않는 무식쟁이를 만드는 또 다른 병폐를 가져왔습니다.”

스님은 선불교의 등장과 쇠퇴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역사에서도 그 당시의 어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제기된 것이 나중에 그 상에 집착하면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길 수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선지식이여 누구나 모름지기 이 게송을 외우고 의지하여 수행하면 언하에 견성할 것이니 비록 내게서 천 리를 떨어져 있더라도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같으며 만약 이 말 아래 깨치지 못하면 비록 나와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천 리를 떨어져 있는 것과 같도다. 어찌 힘들여 먼 데서 찾아오랴. 수고들 했다. 잘들 가거라.

“가르침을 자기화해서 깨달음을 얻어서 괴로움과 번뇌 없이 산다면 천 리를 떨어져도 나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 같이 있어도 생각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이 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건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라는 말입니다. 부처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죠. ‘나의 가르침인 이 경과 율을 너희들이 지키고 간다면 항상 나와 함께 있는 거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와 함께 있더라도 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불경에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와서 다시 자신에게 맞게끔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수업을 하다보니 벌써 한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스님은 선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안내하면서 오늘 수업을 마쳤습니다

“우리가 이런 경문을 읽는 것은 육조 혜능 대사의 가르침이 특별한 게 아니라 이미 우리가 일상에서 알고 있는 것 그대로라는 것을 알기 위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글자에 너무 매이지 말고 요지를 파악하는 겁니다. 선불교는 ‘내 마음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면 부처요 내 마음이 어리석으면 중생’이라는 관점에서 바로 지금 내가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 선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성도재일 법회와 즉문즉설 방송이 있습니다.

전체댓글 47

0/200

선우

감사합니다

2023-01-18 11:19:01

이임숙

감사합니다

2023-01-09 12:33:22

정의웅

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2023-01-05 14:4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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