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경전대학 육조단경 3강 수업이 있는 날입니다. 스님은 오늘 원고 교정 작업과 저녁에 있을 경전대 수업자료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수업은 경전대 학생들과 함께 경문을 읽으며 진행하려 합니다. 전부를 함께 읽을 수는 없지만 요지는 놓치지 않고 잘 담기 위해 스님은 경전대학 교재에 꼼꼼하게 표시했습니다. 전부 마치고 나니 방송자료가 51페이지나 나왔습니다. 방송실에 들어오는 스님 손에는 강의 자료가 가득했습니다
혜능대사의 ‘육조단경’과 선(禪) 불교 사상
대승불교가 중국에서 발달하고 대승불교의 종교적인 면이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지면서 선불교가 시작됐습니다.
‘불립 문자(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즉 선불교는 지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 깨달으면 바로 부처다.’ 하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불교는 체험과 실천을 중요시합니다.
선불교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큰 계기가 된 분이 육조 혜능 대사입니다. 선불교를 계승하는 사람들은 혜능 대사의 법어집을 부처님 말씀인 ‘경’에 준하여 공경하여 ‘육조단경’이라고 불렀습니다.
선불교에는 승찬 대사의 신심명을 포함한 많은 선사들의 법어집이 있지만,
정토 경전 대학에서는 육조 혜능 대사의 법어집인 육조단경으로 선불교의 핵심 사상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혜능대사는 절에서 부목 생활을 하는 중에 법을 얻었어요. 스님도 되기 전이었습니다. 이 자체가 모든 권위나 형식을 무시한 파격적인 것이죠. 혜능대사는 문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점은 지식보다는 체험을 중요시하고, 말을 하더라도 간결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하는 장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혜능대사는 24살에 법을 얻어서 39살에 법문을 시작하고 37년간 법을 설하다가 입적하십니다. 우리가 혜능대사 법문집을 다 읽을 수는 없더라도 요점들만 뽑아 함께 살펴보고 설명하겠습니다.
육조단경을 이해하려면 당시 중국은 많은 불교 종파가 굉장한 지식과 심오한 철학을 자랑하는 시대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육조단경은 간결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한량없는 과거 겁 전에 부처를 이루었고, 부처를 이루려면 한없는 세월을 수행정진 해야 한다.’ 이런 표현은 종교적으로는 심오할지 몰라도 체험적으로는 어렵죠.
‘중생,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이 어리석으면 중생이라 이름하고 내 마음 깨달으면 부처라 이름한다.’ ‘그래서 정토가 저 마음 밖 서방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맑아지면 정토고 내 마음 욕심내고 성내면 바로 예토다.’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다 하는 논리’입니다. 당시의 번다한 교학 교리를 단순하게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선불교는 초기에 사이비 취급을 받았습니다. 경에 근거하지도 않고 교학적인 깊이도 없고 바로 언하에 깨치거나 대화 몇 번 해서 깨달았다는 것 자체가 불교를 얕게 만들고 천박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200년 지나면서 선이 중국불교의 주류로 등장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하는 즉문즉설도 선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대승과 선의 입장은 서로를 비판하지만, 여러분은 이번 학습을 통해 이 둘이 결국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읽을 수는 없지만 요지를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책에 번역이 돼서 다 실려 있고, 읽어보면 되니까 그 가운데 요점들만 좀 뽑아서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면서 필요하다면 설명도 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대사께서 다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지식이여, 보리 반야의 지혜는 세간 사람이 다 본래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 다만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할 따름이니 모름지기 대선지식의 가르침과 인도함에 의지하여 견성하여야 하느니라.
대중을 선지식이라고 불렀습니다. ‘보리’라는 말도 원래 보디에서 온 말인데 ‘깨달음’이라는 뜻이고 ‘반야’도 깨달음이라는 뜻이죠. ‘역전앞’ 처럼 외국어인 인도말을 쓰다보면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보리 반야의 지혜는’ 할 때, 앞뒤 문맥으로 보면 ‘깨달음의 지혜 또는 부처님의 지혜’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즉 깨달음의 지혜는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자기가 깨닫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불성은 본래 차별이 없다
마땅히 알아라.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불성은 본래 차별이 없느니라.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음도 있고 슬기로움도 있는 것이다. 내 이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각기 지혜를 얻게 하리니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그 불성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혜능대사가 5조 홍인 대사를 찾아가서 문답했을 때입니다.
‘어디서 왔느냐’
‘영남에서 왔습니다’
‘오랑캐가 무슨 부처가 되느냐’
‘사람은 남과 북이 있지만 불성이 어디 남과 북이 있습니까’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불성은 본래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음도 있고 슬기로움도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맑은 물과 더러운 물에는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물입니다. 다만 거기에 찌꺼기가 끼어 있으면 오염수라 부르고, 그것이 없으면 청정수라고 부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탐진치 삼독에 오염되어 있으면 중생, 어리석다고 부르고 탐진치 삼독이 제거가 되면 깨달음, 청정, 부처라고 부릅니다. 본래 마음 바탕은 같다. 하는 이야기지요.
선지식이여, 세상 사람이 입으로는 종일 반야를 외우나 자성반야自性般若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말로써 음식 이야기를 하여도 배가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아서 다만 입으로만 공을 말하면 만겁을 지내더라도 견성하지 못하고 마침내 아무 이익이 없느니라.
첫 줄은 불교가 철학화, 지식화되어 가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반야에 대해 계속 말하지만 자성 반야, ‘스스로의 지혜’는 알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입으로만 ‘공(空)’을 말하면 만겁을 지나도 견성하지 못하고 이익이 없다.
마치 말로는 음식 이야기를 해도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음식은 먹어야 배가 부르다는 뜻입니다. 운동은 직접 몸을 움직여야 건강해지는 것이지 축구장이나 야구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누가 제일 잘한다고 운동에 대한 지식이 많아 봐야 본인의 건강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경전을 많이 읽고 안다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시 교학에 대해 날카롭게 예를 들어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불교의 풍토를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식이여, '마하반야바라밀'은 범어이니 여기 말로는 '큰 지혜로 피안(彼岸)에 이른다'는 말이니라. 이는 모름지기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요, 입으로 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도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며,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행한다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할 것이니라. 본성, 이것이 불佛이니 본성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여기서 본성이라는 것은 내 마음의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관점에서는 선불교의 표현이 파격적이었지만, 후대에 내려오면서는 ‘본성’이라는 자아가 있다 하는 새로운 관념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 썼을 때는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지 말고 네 마음 안에서 부처를 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게 핵심이었어요.
그러나 언어가 후대에 내려가면 또 상을 짓고 관념이 돼서 ‘내 본성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본성이라는 말은 ‘내 마음의 본성’ 이런 뜻이에요. 이것이 곧 불이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떠나서 따로 부처라는 게 없다. 이런 관점입니다.
다음은 마하반야에 대한 설명 중 일부에요.
선지식이여, 심량이 광대하여 법계에 두루하니 작용을 하면 또렷이 밝고도 분명하다. 응용을 하면 곧 일체一體를 알아서,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이며 가고 옴에 자유로워 마음의 본체에 막힘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반야般若'이니라.
심량, 마음의 양, 마음이라는 것은 한번 크게 턱 내버리면 온갖 것도 문제가 안 되지만 한번 좁게 가지면 조그마한 것도 시비가 됩니다. 이것을 응용하면 곧 일체를 알게 되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일체가 곧 하나고 하나가 곧 일체다. 가고 옴에 자유로워 마음의 본체에 막힘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반야니라, 이런 뜻입니다.
선지식이여, 어찌하여 '반야'라 하였는가? 반야라 함은 여기 말로 지혜이다. 일체 처 일체 시에 생각 생각이 어리석지 아니하여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이 곧 반야 행이니라. 한 생각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어짐이요, 한 생각 슬기로우면 곧 반야가 생함이니라.
그래서 ‘한 생각 어리석으면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으면 부처다’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반야를 마음 밖에서 따로 구하지 마라. 반야라는 것은 마음이 밝으면 반야라 이름하고 마음이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졌다고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바라밀'이라 하였는가? 이는 인도 말이니 여기 말로는 '피안에 이르렀다(到彼岸)'이니 '생멸을 여의었다'는 뜻이니라.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니, 이는 물에 물결에 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곧 차안此岸이요, 경계를 여의면 생멸이 없나니 이는 물이 항상 자유로이 통해 흐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이 곧 피안彼岸이니라. 그러므로 바라밀이라 이름 하니라.
피안에 이르렀다는 말은 생(生)하고 멸(滅)하는 윤회를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경계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경계에 부딪혀서 바깥 경계를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하면 한 생각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죠.
즉 차안과 피안이 이 언덕과 저 언덕이 예토와 정토가 어디 바깥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 가운데 있다. 마음이 경계에 끌려다녀서 분별이 일어나면 곧 차안이고 분별이 끊어지면 곧 피안이다 라는 뜻입니다.
선지식이여, 범부가 곧 부처요 번뇌가 곧 보리(菩提)니 전념(前念)이 미혹하면 곧 범부요, 후념(後念)이 깨달으면 곧 불이라. 전념이 경계에 집착하면 번뇌가 되고 후념이 경계를 여의면 즉시 보리니라.
화엄경에서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고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다. 그런데 이 ‘둘이 아니다’라는 것의 설명이 훨씬 간단하게 돼 있습니다.
‘전념이 미혹하면 범부요, 후념이 깨달으면 부처다.’ 그러니까 조금 전 한 생각이 어리석게 일어나면 그때는 범부지만, 바로 다음 한 생각 깨달으면 곧 불이라 이름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혜명이 발우를 뺏으러 왔을 때 일화입니다.
‘이 발우만 내가 가지면 내가 육조다. 내가 조사다.’ 하고 조사의 자리를 뺏겠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발우가 바닥에서 안 떨어지니까 마음이 순간적으로 바뀌어서 ‘행자여, 내가 법과 법의를 빼앗으러 온 게 아니라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할 때는 이미 선심이 일어났죠.
그래서 ‘전념은 무엇이며 후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어떤 것이 행자의 본래 면목인고 어떤 것이 당신의 본 마음인가? 한 번 악심이 일어나고 한 번 선심이 일어났는데 어떤 게 너의 본마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마음은 악심도 아니고 선심도 아닌 자리입니다.
전념이 미혹하면 범부요, 후념이 깨달으면 불이니라
전념이 경계에 집착하면 번뇌가 되고 후념이 경계를 여의면 보리라고 한다.
이것이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범부니 보리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도 다 마음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다 마음이 어리석으면 중생이요.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다, 마음이 어리석으면 번뇌가 일어나고 마음을 깨달으면 번뇌가 사라진다. 마음이 맑으면 정토라 하고 마음이 탁하면 예토라는 거예요.
이 법문은 최상승(最上乘)으로 큰 지혜 있는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이며, 상근인(上根人)을 위하여 설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근기(根機)가 얕고 지혜가 작은 자는 이 법문을 들어도 마음에서 믿는 마음이 나지 않느니라.
지금까지 우리는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자신을 대승이라고 하고 기존의 불교를 소승이라고 했죠. 부처님 법문을 듣고 깨달은 자는 ‘성문승’이라 하고 법의 이치를 스스로 이해해서 깨달은 자를 ‘연각승’이라고 합니다. 이 성문승, 연각승을 소승이라 하고 실천, 경험을 통해 깨달은 자를 ‘보살승’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대승은 곧 보살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선(禪)은 대승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한 단계를 더 설정했습니다.
‘이 법문은 최상승이다.’ 소승, 대승, 최상승 또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3승과 선은 최상승이다.
우리가 법화경 공부할 때 대승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려고 출가한 비구 스님들이 교만심 때문에 대승 법문을 못 알아들어서 자리를 나가버리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깨달았다. 내가 아는 이것이 다다. 내가 아라한과를 얻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 하여 작은 근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도 ‘경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은 근기가 약한 사람이고, 정말 상근기가 있는 지혜로운 사람은 언하에 바로 자기 성품을 봐서 마음을 봐서 깨닫는다’ 라고 해서 ‘견성성불’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선지식이여, 근기가 낮은 사람이 이 돈교법을 들으면 마치 뿌리가 약한 초목이 큰비를 맞으면 모두 다 쓰러져 자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근기가 낮은 사람 또한 반야 지혜를 갖추고 있음은 큰 지혜가 있는 사람과 조금도 차별이 없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이 법을 쉬이 깨닫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는 단박에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근기가 낮은 사람은 법문을 듣고 황당해하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 법을 듣고 단박에 깨닫는다. 그러니까 이 법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과거 생으로부터 수행 정진해 온 근기가 큰 사람이다 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선을 우위에 두고, 선을 닦는 사람에게 자부심을 갖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돈교를 깨달아서 밖을 향하여 닦는 것을 국집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 마음에서 정견(正見)을 일으켜서 항상 번뇌의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돈교’라는 말은 단박에 깨닫는다 하는 뜻입니다. 당시 모든 종교는 무량하고 한량없는 능력을 갖춘 신을 믿고 따르면서 복의 가피를 얻고자 기도하는 것이 주류를 형성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부처님의 능력이나 존재의 위대함에 중심을 두지 않고, ‘내 마음에 번뇌가 있느냐? 없느냐?’ 관점에서 정리를 해버렸습니다.
관점을 밖에 두지 않고 내 마음 안에 두니, ‘승과 속’, ‘머리 깎았나, 안 깎았나?’ ‘양반 상놈’이 이런 경계들도 중요하지 않으니 파격적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마음’은 다 가지고 있는 것이고, 마음 가진 자는 다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세속의 지식이나 지위는, 깨닫고 못 깨닫고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연 사람은 단박에 깨닫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고 파격적으로 제시가 된 것입니다.
기득권이 하나도 인정되지 않으니, 초기에는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신분이 높거나 지식이 많거나 하는 사람에게는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일체 경전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다
선지식이여, 일체 경전(修多羅)과 문자로 된 대승(大乘) 소승(小乘)의 십이부경(十二部經)이 사람 때문에 있는 것이며, 지혜의 성품으로 말미암아 두루 만들어진 것이니라. 만약 세간 사람이 없으면 일체 만법이 본래 있을 수 없느니라. 이 까닭에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나며 모든 경서도 사람을 위하여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서울 가는 길을 묻는데 어디서 묻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동쪽으로 가라, 서쪽으로 가라, 북쪽으로 가라, 남쪽으로 가라, 동북으로 가라, 서북으로 가라 온갖 방향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서울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면 서울 가는 방향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만법이 본래 사람으로 인하여 일어나며 모든 경도 사람을 위해서 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경전이나 말씀을 절대화하는 것을 부정해 버리고 본래 좋은 약 나쁜 약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병에 따라 그때그때 처방이 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죠.
선지식이여, 깨닫지 못하면 불이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불이니라. 이 까닭에 알아라. 만법이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이거늘 어찌하여 자기 마음속의 진여眞如 본성을 문득 보지 못하는가.
여기에는 신분 고하, 귀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고 누구든지 못 깨달으면 중생이라는 얘기에요. 가끔 기독교적 사고방식으로 “부처님은 사람입니까? 신입니까?”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그래봤자 인간이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에는 신이 인간보다 높다는 게 전제돼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과 지혜와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신이 아닌 인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깨달았느냐, 못 깨달았느냐’
그러나 불교적 관점은 전혀 달라서 ‘깨달았느냐, 못 깨달았느냐’를 질문합니다. “하나님은 부처입니까? 부처가 아닙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기독교인은 부처가 아니라고 대답하겠죠. 이 불교의 논법에서는 부처가 아니면 다 중생인 것입니다. 사천왕, 제석천, 야마천, 도솔천, 타화자재천, 범천, 대범천, 용왕 등 온갖 신들은 모두 불교에서는 중생에 속합니다.
불교의 신은 기독교의 신과 다릅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은 신이라도 윤회하는 범부 중생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중생에는 지옥 중생, 아귀 중생, 축생, 아수라 중생, 인간 중생, 그다음 하늘 중생인 신들이 있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신들이 부처님께 와서 법문을 듣고 부처님을 받든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라는 용어는 신들 위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인사’, 부처는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고 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천상은 신들의 세계를, 천하는 인간 세계를 말하는데 하늘 세계와 인간 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깨달은 자를 부처라고 하는데 불이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깨달았냐? 못 깨달았냐?’만이 기준이라는 겁니다. 세속처럼 남녀, 귀천, 지식이 많고 적음, 종교에 대한 차별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직 ‘깨달았냐, 못 깨달았냐?’ 이것만 갖고 딱 둘도 가르는 거예요.
이런 도리에서는 법을 구하러 인도로 유학을 간다거나 책을 보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선은 배우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자기의 마음의 본바탕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문에 나와 있잖아요.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 절 이 산 저 산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닌다고 해결이 되는 게 아니라고. 관점을 안으로 돌려서 자기 마음의 상태를 직시해야 하는 겁니다.
생각을 멈추고 알아차려라
선지식이여, 지혜로 비추어보면 안과 밖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알게 되나니 만약 본심을 알면 이것이 곧 본래 해탈(本解脱)이며, 만약 해탈을 얻게 되면 그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이며 또한 무념無念이니라.
어찌하여 무념이라 하는가? 만약 일체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이니라.
여기서 무념 즉, 생각 없음은 우리가 명상 할 때 눈에 뭐가 보이든 귀에 뭐가 들리든 냄새가 나든 감촉이 일어나든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거기에 일체 의미 부여를 하지마라, 다리가 아프든 졸리든 의미 부여하지 마라, 동작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라고 합니다.
생각을 멈추라는 것은 생각에 어떤 의미나 관심을 두지 말고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으로 ‘개미가 기어간다’라고 하면 이것은 생각으로 아는 거예요. 직접 개미가 기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알아차린다는 겁니다.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만 알아차린다는 것은 생각과 다른 겁니다. 지금 일어나는 것을 그냥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앉아서 계속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무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바람 소리처럼 관심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할 뿐. 말이 쉽지 우리는 늘 생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현실에서는 어렵습니다.
금강경에서의 으뜸이 무념이듯이 선의 으뜸도 무념입니다. 숭산스님은 그것을 한국식 영어로 ‘띵킹스톱(Thinking Stop)’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생각을 멈춰라.’ ‘생각을 끊어라.’ ‘생각을 놓아라.’ 이런 의미입니다.
선지식이여, 나에게 한 무상송無相頌이 있으니 모름지기 각기 외워 지녀라. 재가인이든 출가인이든 다만 이를 의지하여 닦아라. 만약 스스로 닦지 아니하고 오직 내 말만 기록한다면 또한 아무 이익이 없느니라. 나의 송頌을 들어라
우리가 모양을 짓지 않는 것은 금강경에서 수없이 공부했습니다. 수행하는데 무슨 머리가 길었나 깎았나, 절에 있느냐 집에 있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 상태가 어떠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이게 파격이죠.
말이 통하고 마음까지 통하고 보면
태양이 허공에 있음과 같나니
오직 견성하는 이 법을 전하여
세간에 드러내어 삿된 종파(邪宗) 부숨(破)일세
법에는 돈頓도 점漸도 있지 않건만
중생의 미오迷悟 따라 늦고 빠르네
성품 보아 부처 되는 이 수승한 문을
어리석은 무리들이 어찌 다 알까?
생각으로 이거니 저거니 하는 그런 것들을 일거에 다 부숴버린다는 얘기에요.
진리에는 본래 돈도 없고 점도 없다는 말입니다.
말로 하면 만 가지로 벌어지지만
이치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
번뇌가 들끓는 어두운 방에
지혜의 밝은 등불을 항상 밝히라
사념邪念일때 번뇌가 이는 것이며
정념正念이면 번뇌가 가시는지라
사邪와 정正 모두 여의어 쓰지 않을 때
생멸 없는 청정지에 이르오리라
이것이 선과 대승의 차이입니다. 삿된 것을 버리고 바른 것을 세우는 것이 수행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면 선의 도리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사’니 ‘정’이니 하는 생각 자체가 사라져 버려야 합니다. 분별이 끊어져야 그것을 이름하여 그냥 청정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바르다는 것을 내세우면 삿되다는 상대가 반드시 함께 일어나서 두 가지 모양이 된다는 겁니다.
보리의 근본 제 성품은
마음을 일으킬 때 즉시 망妄이라
정심淨心이란 망념 중에 있는 것이니
다만 정심正心이면 삼장三障이 없으리라
세간 사람 만약에 수도할 때에는
일체 세간사가 방해될 게 없나니
항상 스스로 제 허물을 보아서
도와 더불어 서로 맞게 되리라
한 마음이 일으키면 이미 망념입니다.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도 망념 중에 있는 것이고 깨끗한 마음을 낸다는 것도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명상 할 때 오직 알아차리기만 하고 화두선을 할 때는 오직 ‘이뭣고’ 하고 탐구만 해야 하는데 거기에 부처님이 보이거나 부처님 법을 생각하거나 경구를 생각하면 그건 다 망념에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일으켜도 망념이에요. 나쁜 생각을 일으키면 나쁜 꿈에 들어가고 좋은 생각을 일으키면 좋은 꿈에 들어가지 여전히 꿈 속의 얘기라는 겁니다.
이런 도리만 알면 내가 세간에 산다고 해도 수도에 아무 방해가 안 되고 자기가 일으키는 생각이 망념인 줄을 알아서 자기 허물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쟤가 문제다’ 할 때 그를 보지 말고 분별하는 나를 보라 하는 뜻입니다.
일체 중생 제각기 도가 있으니
서로서로 방해 없고 괴로움 없으리
만약에 도를 떠나 도를 찾으면
목숨은 다하여도 도는 못 보리
부질없이 바쁘게 일생 보내다
백발이 찾아드니 뉘우치누나
만약에 참된 도를 보고자 하면
행이 바름이여 이것이 도이니라
만약에 스스로 도심道心 없으면
어둠속을 헤매일 뿐 도는 못 보리
참되게 도를 닦는 사람이면
세간 사람 허물은 보지 않노라
일체중생은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면 그 마음이 이미 분별심이기 때문에 분별심을 일으키는 이것 또한 허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 허물을 보면
도리어 제 허물이 저를 지나니
다른 사람 그르고 나는 옳다면
내가 그르게 여김이 제 허물 되리
다만 스스로 그른 마음(非心) 버리면
번뇌는 부서져 자취는 없고
밉고 곱고에 마음 안 두니
두 다리 쭉 펴고 편히 쉬도다
신심명에도 나오죠. 좋고 싫고 밉고 곱고 이것을 떠나야 해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여기서는 ‘밉고 곱고’로 표현했습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 교화하려면
모름지기 기틀 따라 방편을 써서
저들의 의심 뭉치 버리게 하라
즉시에 청정자성淸淨自性 드러나리라
불법은 세간 중에 있는 것이니
세간을 여의지 않고 깨닫게 하라
세간을 여의고서 보리 찾으면
흡사 토끼 뿔을 구함 같니라
어떤 중생이 번뇌가 있을 때 그것은 남이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성청정’ 스스로 자기를 알아차리고 자각이 일어날 때 번뇌는 사라지게 됩니다. 번뇌가 있을 때 번뇌가 일어나는 줄을 알아차려야지 깨달음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곧 보리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밖을 찾아 헤매지 말고 자신으로 돌이켜서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라.
정견正見은 출세간이요
사견邪見은 세간이니
사邪와 정正을 모두 다 물리치니
보리자성 완연히 드러나노라
이 게송의 가르침이 바로 돈교이며
또한 이름하여 대법선大法船이니
미迷하고 들으면 겁劫을 지내고
깨달으면 찰나 동안이니라
이 말은 세간과 출세간의 이분법을 떠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 게송 하나에 이미 선의 요지인 육조 혜능 법문의 요지가 다 들어있습니다. 핵심적 관점은 부처, 진리, 반야가 마음 가운데 있지 마음 밖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괴로움이 다 자기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종교로서는 파격적인 겁니다. 어쩌면 기존의 종교개념으로는 종교라고 할 수도 없죠. 그러나 종교의 본질은 가르침 중에 가장 으뜸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이잖아요.
불교를 굳이 종교라고 한다면 가장 종교라는 말에 맞는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천하 온갖 가르침 중에 자기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두려움이 없는 상태에 이른 가르침보다 더 으뜸 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두 번째 법회에서 대중이 양 무제에관해 묻습니다. 양 무제가 ‘저의 불사 공덕이 얼마나 되느냐?’ 고 물으니 달마대사께서 ‘공덕이라고 할 게 없다’고 대답했다는 얘기가 있죠.
이것이 전해 내려오는데 당시 종교로서의 불교계에서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보시를 하고 불사를 해서 공덕을 짓는 것이 당시 대유행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관료나 부자는 자기가 보시해서 공덕 짓는 것이 어마어마한 자부심인데 달마 대사가 아무런 공덕이라고 할 게 없다고 하니까요.
위 자사가 이해가 안 되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좀 가르쳐 달라고 법문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대사가 대답합니다.
실로 공덕이 없나니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라. 무제가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하면서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푸니 이것은 복을 구하는 것이로다. 복은 공덕이 될 수는 없나니 공덕은 법신 중에 있는 것이요. 복을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니라.
복을 많이 지어서 복은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윤회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 복이 다하면 다시 괴로움이 닥치게 되는데 깨달음이라는 것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죠. 보시해도 아무 공덕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보시도 안 하고 오직 깨닫기만 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해서 선이 많은 부작용도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런 세속적인 불사를 통해서 복을 비는 행위를 불교의 본래 가르침 관점에서 날카롭게 비판적으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공덕 법신功德法身을 찾으려면 다만 이에 의지하여 지어야 이것이 참 공덕이니라. 공덕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가볍지 아니하여 항상 널리 공경하나니 만약 마음으로 항상 남을 업신여기고 나를 내세우는 마음을 끊지 않으면 곧 스스로 공이 없음이요, 자성이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으면 곧 스스로 덕이 없음이니 이것은 나를 내세우는 생각이 스스로 커져서 항상 모든 것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니라.
즉 교만하고 아만에 차 있는 것은 수행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뜻 입니다. 그러니까 재물이 있다고 보시해서 목에 힘주고, 지위가 높다고 목에 힘주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을 양 무제가 보였잖아요. 불교를 받드는 신도이면서 본인이 원하는 대답을 안 해준다고 칼로 달마대사의 목을 치려고 하는 교만함, 왕이 가진 그 교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 견성을 하고 깨달음을 얻겠느냐 하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을 하면 정말 극락세계에 태어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극락세계에 태어나는지에 대한 대답이에요.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 땅에 나기를 구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느니라. 이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마음이 청정해짐을 따라서 곧 불국토도 청정해지느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유마경에도 나오는데 ‘내 마음이 청정하면 곧 세계가 청정하고 내 마음이 더러우면 세계가 더럽다’는 뜻입니다. 자성이 청정하면 세상이 정토가 되고 자성이 청정하지 못하면 세상은 예토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정토와 예토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온갖 시비분별을 일으켜서 세상을 보면 지금 세상은 혼란스럽고 말세지만, 분별을 끊어버리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사군이여, 동방 사람이라도 다만 마음만 청정하면 죄가 없는 것이며, 비록 서방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부정하면 역시 허물이 되는 것과 같다. 만약 동방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염불하여 서방 국토에 나기를 구하면 되지만, 서방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느 국토에 나고자 염불할 것인가?
어리석은 범부들은 자성을 밝히지 못하여 자기 몸 가운데에 정토淨土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동쪽 나라를 원하고 혹은 서쪽 나라를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있는 곳마다 다 한가지니라.
이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머무는 곳마다 항상 안락하다.' 하셨느니라.
동방은 예토(사바세계)를 말하고 서방은 정토(극락세계)를 말합니다. 예토와 정토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 가운데 있고 내 마음이 청정하고 내 마음이 깨달으면 죽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저 다른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 바로 그대로 정토에 사는 거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를 이루고자 할진댄 본성을 향하여 지을 것이요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자성이 미혹하면 곧 중생이요, 자성을 깨치면 곧 불이니라. 자비는 곧 관음이요, 희사喜捨는 세지勢至가 되고
내가 부처를 이루고자 한다면 자기의 본성을 향하여 짓지, 밖을 향해서 더 이상 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내면 곧 관세음보살이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세상을 평등한 마음을 내면 그게 곧 대세지보살이지, 부처와 보살이 내 마음을 떠나서 별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선불교의 요지이고 앞으로도 이런 관점에서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이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선불교가 일어날 당시 당나라는 불교가 국교였습니다. 국왕의 보호를 받고 스님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 국사로 임명이 되고 엄청나게 절이 지어지고 복을 구하는 시대에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당나라 말기, 불교를 억압 하는 시대에 이르렀을 때 국가로부터 보호받던 불교는 순식간에 쇠퇴해 가고 민중의 바탕 위에 특별한 지원 없이 직심으로 하는 선불교는 빠른 속도로 확산이 되면서 불교의 주류가 바뀌는 시대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