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2.15 공동체 연말수련 3일째(회향식), 경전대학 화엄경 2강
“일상이 그대로 수행이고, 놀이이고, 휴식이 되려면”

안녕하세요. 오늘은 공동체 연말수련 3일째 마지막 날입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아침을 먹고 7시 30분에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어제저녁 모둠 토론 시간에 ‘공동체 생활’을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먼저 모둠별로 토론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절에서는 오신채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전통이 있는데, 농사를 짓는 공동체에서는 오신채를 풀었는데 모든 공동체에 다 풀면 좋을 것 같고, 오신채를 금하는 것이 수행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새로 짓고 나서 출가수행자가 이 건물에서 사는 것이 적합한지 많은 의견이 있었습니다. 모두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하거나, 옛날 건물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떨까요?
  • 서울, 문경, 두북 공동체 별로 생활 원칙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적으로 원칙을 정하고 살아야 할까요?
  • 출가수행자의 원형을 구현하는 공동체 외에 대중의 다양한 활동력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 공동체를 2차 만일결사부터 새로 만들어서 실험해 보면 좋겠습니다.


  • 문경 수련원은 아주 원칙적으로 살아가는 원형을 구현해 내고, 두북 수련원은 다양성을 포용해 내는 열린 공동체를 실험해보는 공간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 잠을 잘 때 코를 고는 사람들 때문에 힘듭니다. 코를 고는 사람들만 따로 모아서 잠을 자도록 하면 어떨까요?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도 구분해서 잠자리를 배정하면 좋겠습니다.
  • 법사님들이 온라인 회의가 많아지면서 행자들과 같이 생활하는 면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문경 수련원이 어떻게 하면 수행공동체의 원형이 될 수 있는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습니다. 스님은 대중이 발표한 내용을 경청하고 메모했습니다. 인도와 필리핀에 파견을 나가 있는 활동가들은 모두 온라인으로 접속하여 수련에 참여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발표를 들은 후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젊은 활동가들이 헷갈려하는 삼무 원칙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정토회를 창립할 때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실무자가 가져야 할 세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월급 없음. 둘째, 휴일 없음. 셋째, 휴가 없음. 이것을 세 가지 없음이라고 해서 ‘삼무(三無)’의 원칙이라고 합니다.

일상이 그대로 수행이고, 놀이이고, 휴식이 되려면

‘삼무의 원칙’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일상이 그대로 수행이고, 놀이이고, 휴식인 상태를 유지하자는 것입니다. 일, 수행, 놀이, 휴식을 각각 따로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3일 동안 명상을 하고 나서 ‘3일간 명상을 했으니 이틀은 명상을 하지 말고 쉬어야겠다’라고 한다면 그건 명상을 한 게 아니라 세속적인 일을 한 것과 똑같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삼무 원칙을 지키면서 건강을 회복하려면, 일상을 조금 느슨하게 해서 따로 날짜를 정해서 쉴 필요가 없도록 해야 됩니다. 휴식이 꼭 필요하면 공동체 대중의 동의를 얻으면 언제나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수행의 원칙을 지키면서 하려면 일의 속도나 양을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일의 성과보다는 수행의 원칙을 담보하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삼무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운동 측면에서 볼 때는 ‘삼무 원칙을 지키면서 느슨하게 일하기보다 오히려 바짝 일 하고 바짝 쉬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느냐’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몸이 지쳐서 ‘잠시 쉬겠습니다’ 하고 대중의 동의를 얻고 난 후 쉬는 것은 삼무 원칙을 어기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하루를 정해서 그날은 어디 가서 실컷 먹고, 실컷 놀고, 수행과 관계없는 딴짓을 좀 하고 들어오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수행자가 지켜야 할 원칙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놀고 싶은 마음이 드는 현실은 인정하지만 수행자의 삶의 자세에는 맞지 않습니다.

자기가 쉬어야 되는 상태라면 그날 아침 대중공사에서 ‘제가 몸 상태가 이래서 오전에는 병원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쉬면 됩니다. 이것은 정토회를 창립할 때부터 허용된 일입니다. 몸이 피곤할 때 그렇게 말하고 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것이 좀 부담스럽다면, 내가 무엇을 쥐고 있어서 부담스러운지 살펴봐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삼무 원칙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는 게 필요합니다.

‘환자방을 좀 따뜻하게 해야 된다’, ‘환자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된다’ 하는 요구는 수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에요. 꾀병을 부려서 쉬는 사람이 생겨나는 부작용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개인의 문제이고, 전체 대중을 위해서 그런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출가수행자들에게 환자를 돌보는 문화가 없었어요. 당시 출가수행자들은 고행을 해서 그런지, 죽든지 살든지 자기가 알아서 살아서 그런지, 서로 돌보는 일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부처님이 만든 승가에서도 처음에는 병든 사람을 아무도 안 돌봤는데, 어느 날 부처님께서 병든 비구를 발견하시고 돌보시면서 ‘너는 다른 비구를 안 돌보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병든 비구가 자기도 다른 사람이 아플 때 안 돌봤다고 대답하니까, 부처님께서 대중을 불러 모아서 ‘아무리 수행도 중요하지만 옆에 사람이 아프면 돌봐주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환자를 돌보는 계율이 나왔습니다.

출가 정신을 늘 잊지 않고 살기 위해

출가 수행자가 같이 어울려 살면서 출가 정신을 잊지 않으려면 삼무 원칙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지금도 미얀마에서는 수행자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승려가 돈을 만지지 않습니다. 승려가 보시를 받을 때나 물건을 살 때 주머니가 달린 부채를 내밉니다. 돈을 만지지 않기 위해 부채 주머니에 돈을 받고 그 돈을 가게 주인에게 내밀면 가게 주인이 물건의 금액만큼 돈을 가져가는 거죠. 승려가 돈을 안 쓰는 건 아니고 실제로 물건을 사기도 하는데, 형식적으로나마 돈에 손을 안 대는 거예요. 눈 감고 아웅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승려가 돈을 만지는 것보다는 계율을 지키기가 용이하겠죠. 그렇게 하는 것이 불편하니까 그래도 좀 덜하잖아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휴가를 갖자는 요구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자기 해탈이란 수행적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은 아직도 세속의 끈을 못 버렸다는 반증입니다. 욕구가 남아있기 때문에 늘 기웃거리게 되는 겁니다.

저는 서울 공동체의 장점이 도심 한가운데 유흥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산속에 살면서 물들지 않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문경 수련원에서 살면 누구나 다 계율을 잘 지킵니다. 그런데 산속에 있지 않고 도심 속에 사는 데도 불구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수행을 해나간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입니다. 서울 정토회관 맞은편에는 아주 유명한 술집이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술을 먹고 싶어 그 술집으로 갈 거냐, 술집 종업원들이 괴로워서 법당으로 올 거냐?’ 하고 우스개 소리도 하곤 했었는데요. 결국은 소가 닭을 보듯 서로 안 가고 안 오고 그랬죠. (웃음)

자본주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면

서울 공동체가 서울 한 복판에 살면서 물들지 않듯이, 정토회가 얘기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수행적 삶의 모델을 세상에 확대시키려면 결과적으로 소비주의를 이겨야 되고, 욕락을 이겨야 됩니다. 욕락을 피해서 사는 것은 결국은 소승의 갇힘과 같습니다. 욕락의 세상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살아가야 됩니다. 세상으로 나가면 물들고, 안으로 들어오면 갑갑하고, 만약 이런 상태라면 우리들의 수행을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휴가를 없애야 한다거나, 휴일이 없으면 비효율적이라거나, 이런 내용이 핵심은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푸는 휴식과 휴가가 필요해지는 겁니다. 일을 할 때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왜 별도의 휴가가 필요하겠어요?

산에 가고 싶은 것이 술을 마시고 싶은 것과 동일한 욕구라면, 산에 가고 싶은 것도 욕구로 봐야 됩니다. ‘건강을 위해서 산책을 가야 되겠다’ 하는 것과 ‘안에 있기 갑갑하니까 밖에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와야겠다’ 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갑갑할 때 차를 몰고 나가서 강변을 시원하게 달리고 오는 것을 좋다고 여기잖아요. 수행자가 된 사람이 이렇게 에너지를 낭비하고 지구환경 위기를 초래하는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서 되는 문제인지 한번 살펴보면 좋겠어요. 오히려 수행자라면 명상이나 자기 알아차림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방금 여러분들이 발표한 ‘적절한 운동 시간이나 휴식 시간이 필요하다’ 하는 것은 수행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공동체 안에 운동 기구를 갖다 놓고 운동 시간을 별도로 갖는다면, 그것은 서암 큰스님께서 늘 야단치셨던 내용에 해당합니다.

‘이놈들아, 밥 먹고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밭에 가서 일을 해라. 왜 역기를 들고 아령을 들고 난리냐.’

큰스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절에서 누가 음료수를 마시면 ‘봉암사에 이 맑은 물을 놔놓고 왜 썩은 물을 돈 주고 사서 마시느냐?’ 하셨어요. 그래서 젊은 승려들은 자기들끼리 둘러앉아서 ‘영감이 고지식하다’ 이러기도 했습니다.

가은 시내에서 봉암사까지 올 때도 큰스님은 늘 걸어오셨거든요. 젊은 승려들이 택시를 타고 오다가 큰스님이 앞에 보이니까 못 지나가고 택시에서 내려 거기서부터 걸어서 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운동이 필요한 건 알겠는데, 왜 따로 시간을 내서 하느냐? 중이 바쁜 게 뭐가 있다고 택시를 타고 와서는 절 안에서는 한가하게 차를 마시느냐. 앉아서 차를 마시느니 두 시간 걸어오면 다리 운동도 되고 얼마나 좋으냐?’

지금 생각해보면 다 맞는 얘기예요. 사실은 운동의 문제가 아니고 욕구의 문제라는 거죠. 여러분들이 답답해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렇다고 규율로 정해서 그렇게 해도 된다고 정하기에는 애매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자로서 삼무 원칙을 지켜나가려면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합니다. 한쪽으로는 자기 수행적 관점을 잡아 나가야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조금 여유를 갖고 일할 수 있는 시간표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물론 밤을 새워서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는 이튿날 휴식을 보장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런 경우는 피곤해서 쉬는 것이지 욕구불만하고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휴식이 필요한 경우죠, 그래야 오래 일을 할 수 있지, 매일 밤을 새우면서 일을 하면 지속하기가 어렵잖아요. 개선해야 할 점은 개선하되, 그렇다고 수행적 원칙을 허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외에도 대중들이 제기한 다양한 제안에 대해 스님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부터 다시 대화를 이어나갔습니다.



오후에는 공동체 생활을 그만두고 밖에 나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사람들과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 한 명 본인이 왜 밖에 나가서 살고 싶은지 이유를 이야기하고, 대중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마디씩 해주었습니다. 스님도 개개인에 대해 어떤 인생을 살면 좋을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길게는 30년 이상, 짧게는 3년 이상 함께 살아온 도반들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애정 어린 말들을 해주었습니다. 오가는 이야기 속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공동체 연말 수련 회향식

개인의 진로에 대해 대화를 나눈 후 전체 대중이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 2박 3일 동안 수련을 하면서 느낀 점을 가볍게 이야기했습니다.


소감을 다 듣고 나서 2박 3일 동안의 공동체 수련을 마무리하는 회향식을 시작했습니다. 대중이 삼배로 법문을 청했고, 스님은 정토회가 발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종교로는 브라만교가 있었고, 철학적으로는 우파니샤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와 철학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오랜 탐구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농경제, 사문유관, 6년 고행, 이 모두가 기나긴 탐구의 과정이었습니다. 오랜 탐구 끝에 모든 것이 사람의 생각이 지은 관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음이 지은 상에서 벗어나자 모든 것이 여실하게 보였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에 의해 정립될 수 없고, 현실에서 확증해야 한다’

심지어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이렇게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먼 후대에 부처님의 가르침마저 고정관념이 되고 형상화되고 논란이 될 것을 걱정하여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누군가가 부처님한테 직접 들었다거나, 스님들한테서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거나 무조건 거부하거나 하지 말고, 지금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주어 이것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검토해서 수용하든지 배격하든지 하라’

안타깝게도 역사 속에서 이런 부처님의 우려가 여러 번 되풀이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도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는 주장이 많이 있습니다. 상당히 심오한 이야기같이 들리지만 구체적인 현실에 비추어 봤을 때 해결책이나 대안이 되기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저도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환희심도 있었지만, 기성 불교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무엇이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그 근본 입장에서 새로운 상가 공동체를 만들어 보기 위해 만든 것이 수행공동체 정토회입니다. 완전히 출가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한 조각은 출가해서 모자이크 붓다를 이룬 사람들이 정토회 대중부 활동가들입니다.

정토회의 발전을 평가하기 위한 세 가지 기준

정토회가 여기까지 온 동력은 바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에 동의해서 모인 바로 대중 여러분들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길에 거의 한 생을 다 바칠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그리고 사회 실천적으로도 모순이 없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온 거예요. 물론 처음에는 사회운동적인 요소가 강했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다 보니 수행적 관점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현실의 일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행적 관점을 기초로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몇 차례 공동체를 해산시키고, 법사단을 문경으로 내려 보내기도 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토회가 발전했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돈이 많이 모였느냐’, ‘사람이 많이 모였느냐’와 같은 양적 기준이 아닙니다. 정토회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세 가지 기준에 의해 평가를 해야 합니다.

첫째, 얼마나 수행의 원칙을 잘 지켰느냐
둘째, 얼마나 대중 주체가 되었느냐
셋째, 얼마나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수 있겠느냐

이런 기준에서 발전했다든지 성장했다든지 하는 평가를 해야지 양적으로만 평가한다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수련이 짧아서 아쉽지만 오늘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하기 전에 몇 번 더 대화를 나누면서 공동체의 미래 방향을 조정해 나가겠습니다.”

고통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사홍서원을 하며 공동체 연말 수련을 모두 마쳤습니다. 짧았지만 지난 30년을 평가하고, 미래 30년을 설계해보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선유동 연수원 계단 앞에서 다 함께 1차 만일결사 회향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대중들이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스님이 구호를 외쳤습니다.

“만일결사 회향하고 집에 가자.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돌아오자!” (웃음)

대중들은 각자 생활한 처소를 대청소하고 서울, 문경, 두북 수련원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정토경전대학 수업

해가 지고 스님은 생방송으로 정토경전대학 수업을 하기 위해 문경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어제 눈을 다 쓸었는데 저녁부터 내린 눈이 다시 쌓여 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수련원까지 가려고 했지만 바퀴가 미끄러져서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산길을 올라갔습니다.

저녁 8시가 되어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 수업에서 배운 내용을 요약해서 복습하고 화엄경의 마지막 부분인 입법계품을 간략히 설명해주었습니다.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나며 공부를 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화엄경에는 네 가지 법계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스님은 경전대학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효 대사의 일생과 대비하여 네 가지 법계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수업에 이어 화엄경을 요약한 법성게 구절을 마저 알려주었습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법성게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능인해인 삼매중(能人海印 三昧中) 번출여의 부사의(繁出如意 不思義)

능인은 모든 것에 다 능하다 하는 뜻으로 부처님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삼매에 들어 고요한 가운데 온갖 것이 뜻대로 드러나는데 우리 생각으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거울이 아무것도 그리지 않지만 수만 가지 그림을 비추는 것과 같고,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인연 따라 수십만 가지 방향이 나올 수 있는 것과 같고, 고요한 바다에 들어가 보면 헤아릴 수 없는 보배가 가득한 것과 같습니다.

우보익생 만허공(雨寶益生 滿虛空) 중생수기 득이익(衆生隨器 得利益)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의 비가 허공 가득히 내리는데, 중생은 자기 그릇 따라 이익을 얻어갑니다. 작은 그릇이면 적게 얻어가고, 큰 그릇이면 많이 얻어가죠. 법화경에서 배웠듯이 하늘에서 비는 차별 없이 내리는데 모든 초목은 제 그릇 따라 약초가 되거나 독초가 되고, 큰 나무가 되거나 작은 나무가 되는 것과 같죠. 그런데 온종일 서 있어도 못 얻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바로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는 사람이죠. 안다병이나 모른다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시고행자 환본제(是故行者 還本際) 파식망상 필부득(叵息妄想 必不得)

이런 까닭으로 수행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망상을 쉬어야 합니다. 망상을 쉬지 않으면 결단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

궁좌실제 중도상(窮座實際 中道床) 구래부동 명위불(舊來不動 名爲佛)

마침내 실제 중도의 자리에 앉아보니 예부터 변함이 없는데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는 뜻입니다. 법화경에서 비슷한 비유를 들었죠? 부자 장자가 큰 보배 의자에 앉아 있었고, 문간에 찾아온 거지가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비록 중생으로 있지만 본래 모두 부처입니다. 노력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애써 노력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 줄 모르다가, ‘아, 부처구나!’라고 자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법계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다 보니 평소보다 20분 늦게 강의를 마쳤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눈 내린 길을 천천히 달려 연수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내일부터는 공동체에 상주하는 일반 회원들의 수련이 있습니다. 스님은 내일 오전에 상임 천일준비위원회와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고, 즉문즉설 생방송을 한 후, 오후에는 공동체 일반 회원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저녁에는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가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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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월해

스님과 수행공동체 도반님들 모두 그저 감사합니다.

2023-04-10 11:02:47

이임숙

감사합니다

2022-12-28 14:20:46

김희란

수행자로 공동체생활을 하고싶은 일반중생입니다.자연스럽게 그런날이 왔음 합니다

2022-12-26 13: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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