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1.1 정토경전대학 금강경 11강
“도와주되 거지가 안 되도록 도와주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INEB 행사를 모두 마치고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젯밤 국제지부 봉사자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새벽 4시에 선유동 문경 연수원을 출발했습니다.

“운문사 대중들이 INEB 참가자들을 위해 행사 준비한다고 고생이 많았는데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갑시다.”

문경에서 사과를 구입하여 운문사로 향했습니다. 차로 2시간을 달려 6시에 운문사 범종루 앞에 도착했습니다.

“아이고, 스님! 선물 주시려고 이렇게 새벽에 직접 오신 거예요?”

“이번에 행사 준비해줘서 고마워요. INEB 참가자들이 운문사를 방문한 게 정말 좋았다고 해요. 감사합니다.”

“저희가 배운 게 더 많았는데요. 뭐.”

사과를 옮겨 실은 후 운문사 주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다시 차에 올랐습니다.


곳곳이 단풍으로 물이 들어서 절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전 8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습니다.

“거의 열흘 만에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네요.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농사팀과 김장 일정 회의를 하려고 했는데 모두 가메달 밭에 가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밭으로 갈게요.”

“오시는 길에 수련원 옆밭에서 양파 모종을 가져와 주실 수 있을까요?”

스님은 옆밭으로 가서 모종을 한 대야 캐서 가메달로 갔습니다.


밭에 도착하니 농사팀이 양파 모종을 심고 있었습니다.


먼저 농사팀장과 배추가 크는 상태와 날씨, 정토회 일정을 고려하여 김장 일정을 최종 확정 지었습니다.

작업복도 갈아입을 새 없이 바로 밭에 왔지만, 넓은 밭에 농사팀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 스님은 바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어디부터 심으면 돼요?”

“이쪽부터 같이 심으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스님도 함께 모종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INEB 행사로 열흘 만에 하는 농사일입니다.


“저는 도시보다 시골에 사는 게 더 좋네요. 몸은 힘들어도 상쾌한 공기 마시고 땀 흘려 일하는 게 더 편해요.”

따스한 햇살 아래 지난 열흘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나누며 모종을 심었습니다.


한 두둑을 다 심고 다음 줄을 심기 시작했는데 점심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남은 모종은 밭 한편에 묻어 두고 뒷정리를 하고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땀을 흘려 일하니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오후에는 경전대학 강의 준비를 하고, 여러 가지 밀린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금강경 제11강을 할 차례입니다. 스님이 먼저 금강경 제25분의 마지막 구절을 읽고 나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수보리여, 범부라는 것은 여래가 범부를 말함이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이니라’

“범부중생이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있어서 우리가 범부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한 생각 어리석게 낼 때 그 사람을 일러 범부중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가 한 생각 지혜롭게 내면 그는 부처가 되는 거예요. 길고 짧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따라서 때로는 길다고 불리고, 때로는 짧다고 불립니다.

이번에 INEB 국제행사를 하면서 제가 어떤 미국인 옆에 서니까 제 키가 그 사람 어깨에 닿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미국인에게 키가 크다고 했더니 그 미국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저는 키가 작습니다. 제 키가 187㎝인데 저희 아버님은 키가 198㎝예요. 어릴 때부터 늘 키가 작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습니다.’ (웃음)

이것이 부처님의 법인 무유정법입니다. 그 미국인의 키는 제 키와 비교하면 큰 키인데 자기 집에서는 아버지와 비교해서 늘 작은 키라고 불렸다는 거예요. 작은 키라고 불린다고 작은 키라 할 것이 없고, 큰 키라고 불린다고 큰 키라 할 것이 없습니다. 인연을 따라 크다든지 작다든지 하고 불릴 뿐이지 크다 작다 하는 어떤 실체가 없는 거예요. 무유정법이 가장 핵심적인 불교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연을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합니다. 이런 일시적인 현상을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착각할 때 ‘상을 짓는다’라고 합니다.

본래 중생이라 할 것이 없다

하늘에 사자 모양, 코끼리 모양, 용 모양으로 바뀌는 뭉게구름을 보면서 사자, 코끼리, 용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허상을 보는 거예요, 그 구름은 사자도 아니고 코끼리도 아니고 용도 아닌 것처럼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음을 어리석게 내면 중생이라고 하고, 그 마음을 슬기롭게 내면 현인이라 부르고, 그 마음을 지혜롭게 내면 부처라고 합니다. 중생이라 하지만 중생이라 할 실체가 없습니다. 중생이라 여기고 ‘중생을 구제한다’ 하는데 본래 중생이라 할 것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행을 권하지만, 선행이 수행의 전부는 아니에요. 세상에는 나쁜 사람을 배격하는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을 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쁜 사람을 포용하는 사람은 ‘그는 나쁘지만 내가 용서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아량을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쁘다고 할 것이 없는 줄을 알아버리면 용서할 것도 없어집니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불법은 세상의 윤리나 도덕, 종교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수행을 꾸준히 하다 보면, 자신이 잘하는 줄 알고 행동하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허상에 집착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이 옵니다. 그럴 때 깨달음의 길이 하나씩 열려가는 겁니다. 실패를 통해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됩니다. 실패하면 새로운 방법을 연구해서 결국 성공의 길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처음 인도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인도가 가난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 본 적은 없었습니다. 머릿속에서만 ‘못 사는 나라다’, ‘가난하다’, ‘거지가 많다’ 이렇게 알고 인도에 갔어요. 인도 관광을 안내하는 사람이 주의사항으로 구걸하는 아이들이 많으니 불쌍하다고 돈을 주면 아이들이 따라다녀 여행을 망치니까 절대로 돈을 주지 말라는 것과 설사 돈을 주더라도 1루피짜리 동전을 주거나 1루피보다 적은 금액인 바이샤 정도만 주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캘커타 공항에 내려서 보니 제가 어릴 때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그때는 무전여행을 하듯이 인도 여행을 했기 때문에 정말 지저분한 시내 골목골목을 지나 허름한 숙소를 잡았습니다. 인도에서는 물에 석회가 많이 들어있기 때문에 수돗물을 마시면 설사병으로 고생하기 십상이에요. 그래서 생수를 사러 가는데 어떤 여인이 제 옷자락을 잡고 자꾸 뭐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깜깜한 밤이라 어두워서 제가 그냥 지나가니까 그 여인이 저를 따라왔어요. 희미한 가로등 아래서 보니까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었는데 손을 자꾸 아기 배에 댔다가 아기 입에 댔다가를 반복하는 거예요. 그 행동을 보고 ‘아기 배가 고파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여인이 저를 끌고 길에 세워놓은 조그마한 가게에 데려가서 벽에 붙여놓은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분유였습니다.

‘아, 아기가 배가 고파서 분유를 사 달라는 얘기구나’

그래서 제가 짧은 영어로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60루피라는 거예요. 1루피 이상 주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60루피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아이고, 그렇게 큰돈을 달라고 하다니’ 하면서 그냥 뿌리치고 8루피짜리 물만 2개 사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아기 엄마가 배고픈 아기 먹을 걸 달라는데 안 주고 왔으니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안내자에게 60루피면 우리나라 돈으로 얼마냐고 물어봤어요. 그 당시에 1달러가 800원일 때였는데 2400원이라는 거예요. 그때 제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어요. 아기가 배고프다고 2400원짜리 분유 사달라는데 마치 내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한 것처럼 깜짝 놀라서 도망가다시피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한국 돈으로 계산하니까 아주 적은 돈이었어요. ‘아이고, 분유를 사줄 걸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황급히 돈을 가지고 다시 그 골목으로 갔는데, 아기를 안은 여인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 후로 자책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평등을 말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자고 주장했는데 한 순간에 그걸 뿌리친 나를 보게 된 거죠.

‘나는 내가 굉장히 선량한 사람이고, 남을 돕는 일도 늘 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 순간에 외면을 했을까?’

그래서 가방을 뒤져서 인도 여행을 하면서 사용하려고 챙겨 온 물건 중에 안 쓰는 물건이나 좀 덜 쓰는 물건을 이튿날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다 줘버렸어요. 그랬더니 제 주위에 아이들 30명 정도가 계속 따라다니는 거예요. 시끄러워서 여행이 안 될 지경에 이르자 안내하는 분이 ‘이런 식으로 하면 같이 여행을 다닐 수가 없습니다’ 하고 야단을 쳤습니다. 말하자면 소위 너 혼자 잘났냐는 겁니다. 전날 제가 잘못한 것에 워낙 충격을 받아서 즉각적으로 잘못을 보상하려고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된 것인데,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가다 시골길에 차를 세웠어요. 짜이를 한 잔 먹고 있는데 역시 마을 애들이 뒤에서 막 낄낄대고 웃으며 구경하고 있는 거예요. 이때는 이미 내가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애들이 구걸하면 주려고 사탕과 볼펜을 사서 잔뜩 가지고 있었습니다. 애들이 막 구걸을 하던 콜카타와 달리 시골에 사는 애들은 웃기만 하고 다가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사탕을 주겠다고 오라고 했는데도 안 왔어요. 그래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애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때 또 가슴이 철커덕했습니다.

‘가난해서 거지가 되는 게 아니고,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거지가 되는구나.’

이곳 시골 아이들은 외국인을 만난 적도 없고, 돈 주는 사람도 만나지 않으니까 구걸할 일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탕을 준다고 하니까 애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망가 버린 거예요.

‘아, 애들에게 볼펜 1자루, 라이터 1개, 사탕 한 봉지 준 것이 애들을 이렇게 거지로 만들었구나.’

다음부터는 주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후에는 애들이 막 따라올 때 마음이 아파도 주지 않고 딱 버티고 여행을 잘 다녔습니다.

거지가 안 되게 도와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러다 두 다리를 못 써서 손을 짚고 다니는 장애인이 계속 ‘볼펜’, ‘볼펜’ 하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도 볼펜을 계속 안 줬더니 수자타 스투파에서 우루벨라 가섭터까지 거의 1킬로 가까이 되는 길을 두 손을 짚고 몸을 끌면서 따라오는 거예요. 고민이 됐습니다.

‘애들은 그렇다 치고 이 사람은 동전 하나를 얻어서 생활하는 사람인데, 과연 안 주는 게 잘하는 것일까?’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고, 막 헷갈리는 거예요. 주자니 거지가 될 것 같고, 안 주자니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해결해줄 수가 없고, 그게 저의 화두가 되었어요. 안 주는 내 습성은 참회하고 바꿔야 하지만, 구걸하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잖아요.

‘도와주기는 주는데 거지가 안 되게 도와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걸 화두로 잡고 여행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두 명 구걸하는 게 아니라 몇백 명의 아이들이 구걸하는 현장을 보면서 안내하는 분께 물어보았습니다.

‘지금이 평일 오전인데 왜 애들이 학교에 안 가고 이렇게 구걸을 하는 겁니까?’

‘학교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대답에 딱 부싯돌에 불꽃이 일어난 기분이 들었어요.

‘학교를 세워서 애들을 공부하게 하고, 병원을 세워서 치료를 하는 것, 이것이 애들이 거지가 되지 않게 해주는 길이겠구나.’

이런 인연으로 해서 인도에 오늘의 수자타아카데미가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잘못하는 것의 연속입니다. 늘 놓치고 잘못하고 돌이키고 뉘우치고, 그러나 거기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발 나아가고 하는, 이런 과정이지 않을까요?

내가 그들을 도왔다고 말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어쩌면 그들이 오늘의 내가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내가 이 길을 가기도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벌이 수정을 도왔다고 말을 하는데, 꽃이 벌의 먹이를 준 것일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오고 감이 있지만 자연에는 오고 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색내기를 하면서 괴로움을 만듭니다.

금강경을 대충 읽으면 말장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조금만 깊이 읽으면 그 속에는 엄청난 가르침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있다’ 하는 상을 가지면 그 상을 깨기 위해 ‘내가 있지 않다’ 하고 말하고, 내가 없는 줄 알고 ‘내가 없다’ 하면 또 내가 없다는 상을 깨기 위해 ‘내가 없다고 할 것도 없다’ 하고 일러주는 것이 금강경입니다.

저는 과학자의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금강경을 처음 공부할 때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니고...’ 이런 표현들이 완전히 말장난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상이군경과의 만남을 통해서 모든 걸 버리고 불법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것마저 상에 사로잡힌 것이라는 것을 안 후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던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금강경을 읽었을 때 비로소 금강경의 내용이 한눈에 다가왔습니다.

모양과 소리에 집착하면 진리를 볼 수 없다

이 볼펜은 인연을 따라 크다고 할 수도 있고, 작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엇이든 어떤 것을 ‘이것이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인연을 따라 일어날 뿐입니다. 무유정법은 정함이 있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길이 없는 겁니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럼 자기 좋을 대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 하고 말하는데 그런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있음이 없다’ 하면 ‘없다’ 하는 상을 또 새로 짓게 됩니다. 없다는 상에 빠진 것을 ‘단멸상’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있다는 상에 빠지는데 수행을 하게 되면 ‘있다고 할 것이 없구나’ 하고 없다는 상에 빠지게 됩니다. 단멸상에 빠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선하다 할 것도 없고 악하다 할 것도 없다고 하면서 본인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 중에 말은 굉장히 잘하는데 막행막식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없다는 상에 빠졌다’, ‘공이라는 상을 지었다’ 하고 말합니다. 목욕탕에 옷 입고 들어가거나 밖에서 벌거벗고 다니면서 ‘본래 옷 입으라는 법도 없고, 본래 옷 벗으라는 법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이 사람은 인연을 따라서 벗기도 하고 입기도 하는 도리를 모르는 겁니다. 깨달은 사람은 정해진 법이 없음을 알아서 윤리 도덕에 메이지도 않지만 윤리 도덕을 어기지도 않습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일 색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이 구절 역시 금강경의 핵심 사상이 담긴 사구게입니다. 모양으로 여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 여래를 구하면 이것은 삿된 도리이기 때문에 여래를 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 이유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은 복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여! 보살은 지은 바 복덕에 탐착하지 않으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생은 복을 짓지는 않으면서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현인은 복을 지어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보살은 복을 지어 복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수보리가 깜짝 놀라서 부처님께 ‘어떻게 복을 받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복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복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이 필요 없는데 무엇 때문에 복을 짓느냐’ 하는 물음은 ‘돈이 필요 없는데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느냐’ 하는 물음과 일맥상통합니다. 복을 짓지만 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복에 탐착 하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복에 탐착 하지 않으니까 복을 받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복을 받으면 복을 일체중생을 구호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러니 복을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옛말에 ‘똥 누고 뒤도 안 돌아본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똥을 만들려면 진짜 일이 많고 돈도 많이 듭니다. 시장에 가서 음식 사서 요리해야죠. 입으로 씹어야죠. 배에 들어가면 소화를 시켜야죠. 온갖 노력 끝에 노란 똥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똥을 누고 나서 뒤도 안 돌아볼까요? 이 말은 아무런 집착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똥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 즐겼기 때문이에요. 공덕에 집착하는 것은 똥에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똥 만드느라 고생했다는 생각을 하면 똥을 천금같이 여겨야 하지요.

30년 전에 홍수로 서울이 물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아는 흙공예 예술가의 집에 물이 잠겨서 20년간 정성 들여 만든 소상 작품이 모두 녹아버렸어요. 자신의 20년 정성이 다 사라져 버렸다며 큰 충격을 받아서 저에게 괴로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에게 똥 얘기를 해 줬어요.

‘당신은 지금 똥에 집착하고 있군요. 지난 20년 동안 당신이 만든 소상이라는 작품은 음식을 먹고 난 후 남은 똥과 같습니다.’

똥 누고 뒤도 안 돌아보듯이 이미 그걸 만드는 과정에 내 인생의 기쁨을 누린 겁니다. 그렇게 깨우치고 나서야 그는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어요. 결과물인 똥에만 매여 살기 때문에 음식 만들 때는 음식 만드는 즐거움, 시장 볼 때는 시장 보는 즐거움, 음식 먹을 때는 음식 먹는 즐거움을 모두 놓치고 사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결과물인 똥에 집착해서 잃었다고 괴로워하고 얻었다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회향(回向)을 합니다. 농사를 지으면 수확물이 생기듯이 우리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보시하면 공덕이 쌓이잖아요. 그 공덕을 마지막에는 고통받는 일체중생에게 회향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양식이 되고, 병든 이에게 약이 되며,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배움의 터가 되고, 가난한 자에게 도움이 되고, 외로운 자에게 위로가 되고, 이렇게 모든 나의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나눠주는 걸 회향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은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에게 회향해서 그분들이 왕생극락하게 하옵소서. 저에게 지금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저에게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 파키스탄에 홍수로 수해를 입은 이재민들에게 집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남는 게 없어도 좋습니다. 나는 이미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누렸어요. 이런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입니다.

보살은 복을 탐하지 않기 때문에 복을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범부중생은 복을 짓지도 않고 얻으려고만 합니다. 현인은 복을 지어서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어서 못 받으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래서 현인은 해탈한 사람은 아닙니다. 보살은 복을 짓지만 복을 받지는 않아요. 오히려 다 나눠줍니다. 이것이 무위의 행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화상회의를 한 후 오후에는 두북 수련원에 손님이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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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미

좋은 말씀ᆢ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 나에게 온 인연을 내가 옳다는 생각으로 되지않으니 괴로움만 남았습니다.
그 인연에 대한 고마움을ㅡ
사실 있는 그대로만 보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그 인연이 안 아팠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2024-03-11 09:46:58

호롱불

감사합니다.

2023-11-07 09:32:18

김정이

감사합니다

2023-11-06 06: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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