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0.20 북한 전문가 모임, 정토경전대학 금강경 제8강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스트레스받지 않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은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북한 전문가들과 북한의 농사, 식량상황에 대해 공유하고, 최근 고조되고 있는 전쟁 위기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한 후 모임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하루 종일 평화재단을 찾아온 사회 인사들과 미팅을 하고 한반도 전쟁 위기와 국민 통합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논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금강경 제11분, 12분, 13분에 대해 공부하면서 스님이 원효대사의 수행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제14분, 15분, 16분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금강경 제14분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을 읽은 후 한 문장씩 그 뜻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수보리여! 인욕바라밀이 여래가 인욕바라밀을 말함이 아니라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내가 옛적에 가리왕에게 신체를 베이고 끊김을 당할 때 내가 그때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내가 지나간 옛적에 마디마디 사지를 베이고 끊길 때에 만일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또 과거 오백세에 인욕선인이었을 때에도 아상이 없으며 인상이 없으며 중생상이 없으며 수자상이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 일체 상을 여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나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지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여기서 인욕바라밀이란 무엇일까요? 인욕은 ‘참는다’라는 뜻이에요. ‘화가 나는데 참는다’, ‘욕심이 나는데 참는다’ 이럴 때 주로 사용합니다.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참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세 번 이상 못 참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이게 세 번씩이나!’ 하고 터지거나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하고 보통 세 번째에 터집니다. 참을 때는 성질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내면에서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잠시 참을 수는 있지만 오래 참을 수는 없습니다. 참는 것은 모든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를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바라밀이란 산스크리트어로 ‘저 언덕으로 건넜다’ 하는 뜻입니다. 저 언덕이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해요. 참아서는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욕바라밀이란 ‘인욕으로써 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넜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여기서 ‘인욕’은 ‘참을 것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을 것이 없을 때 진정으로 인욕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스트레스받지 않는 방법

말은 그럴듯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시어머니가 아들 집에 방문했어요. 음식을 해드리면 음식을 드시고, 구경을 시켜드리면 구경을 하시면 되는데, 시어머니가 잔소리가 많아요. ‘이거는 생으로 먹어야 하는데 구웠다’, ‘이거는 볶아야 하는데 삶았다’, ‘이거는 국 끓여야 하는데 찌개를 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음식에 대해서 잔소리를 해요. 음식뿐만 아니라 ‘내 아들 옷을 다려줘야지 그냥 주면 어떡하냐’하며 온갖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면 며느리가 듣기 싫겠죠. 그렇다고 일일이 다 말대꾸할 수가 없잖아요. 이건 참는 거예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계시는 동안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만약 참지 못하고 말대꾸를 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이때 참지 못하는 사람은 범부중생이라고 하고, 참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은 현인이라고 합니다. 현인은 남한테 해는 안 되지만 자신은 괴로워요. 그래서 세상에서 착하다는 사람은 남에게는 좋은데 자신은 힘들어합니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대신에 본인이 살기가 힘들어요. 그렇다고 성질대로 살면 비난이 따릅니다. 꾹 참고 잘 견디면 효부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남편에 대해서 내가 더 잘 알까요, 시어머니가 더 잘 알까요? 당연히 시어머니가 잘 알겠죠. 왜냐하면, 핏덩이를 낳아서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기저귀 갈고 30년을 넘게 키운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성질이 어떤지, 옷을 어떻게 입는지, 다 압니다. 이 세상에 엄마보다 아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잘한다고 하는데도 남편은 음식을 해놔도 잘 안 먹고, 옷을 빨아줘도 고맙다는 소리를 안 해요. 그래서 남편에게 맞추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남편을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아는 시어머니가 오신 겁니다.

‘우리 남편에 대해서는 우리 시어머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어.’

‘우리 부인에 대해서 우리 장모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이렇게 어머니에게 내 배우자에 관해 물어보면 척척박사가 따로 없어요. 보통은 물어도 가르쳐줄까 말까 한데 우리 어머니는 워낙 사람이 좋아서 내가 묻지도 않는데 다 알려줍니다.

‘우리 아들은 이 음식은 생으로 먹고, 이 음식은 삶아야 하고, 이 음식은 무쳐야 하고, 이 음식은 볶아야 해. 이런 꼬들꼬들한 밥은 우리 아들이 먹기 힘들어.’

밥이 꼬들꼬들한 게 좋은 줄 알고 해 줬는데 내 배우자는 그걸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죠. 얘기를 들어보면 식은 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부인은 남편을 위한다고 갓 지은 밥을 주는데 남편이 자꾸 식은 밥을 먹겠다고 하면 갈등이 생겨요. 부인은 남편이 식은 밥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시어머니 얘기를 들어보면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보통 속옷은 빨아서 그냥 입는데 우리 남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속옷을 다려서 입혔다는 걸 알게 되니까 남편이 왜 속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는지 알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집에 어머니가 한 번 오실 때마다 배우는 게 많은 거예요. 아무런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가르쳐 달라고 하게 됩니다. 어떤 싫은 말도 내가 필요하면 잔소리가 아니고, 어떤 좋은 말도 내가 필요하지 않으면 잔소리예요.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어머니가 일주일을 계셔도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고 배우는 것만 많습니다. 이러면 참을 것이 없어요. 참을 것이 없을 때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웃에서 보면 이렇게 말하겠죠.

‘그 집 며느리 잘 참는다. 저런 잔소리를 참아내는 거 보니까 대단하네.’

참을 것이 있어서 참는 상태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지요. 언젠가는 괴로움에 빠집니다.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려면 참을 것이 없어야 해요. 그래서 참을 것이 없는 참음을 인욕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법에는 실다운 것도 없고, 헛된 것도 없느니라. 수보리여! 만일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물러 보시를 행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에 들어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보살의 마음이 법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눈이 있어 광명이 비추어 여러 가지 모양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우리는 법상을 짓기가 아주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산이라고 알고 있다가 깨닫고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허상이에요. 헛된 것은 허상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사실은 실상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래서 ‘실상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비동비서산이다’ 하고 다시 고집하게 됩니다. 이렇게 실상을 고집하면 반드시 상대되는 허상이 또 생겨요. 허상과 실상 두 개 중에 하나인 실상은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동산과 서산은 허상이고, 비동비서산은 실상이다’라고 고집하면 진실과 헛됨이 갈등을 일으켜서 다시 둘로 나눠집니다. 진실은 실상도 아니고, 허상도 아니고, 실상과 허상을 분리하지 않는 그 너머의 얘기예요. 그래서 ‘이것이 진리이다’ 하는 순간 곧 진리라고 하는 상을 짓게 되는 겁니다.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 상이군인

상을 짓는 것이 무엇인지 저의 수행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에 절에 들어가서 수행정진과 전법을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제일 많이 했던 일은 청소년 포교였어요. 세상 밖에는 부처님의 법이 중생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서 머리를 기르고 법사가 되어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청소년 법회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절에 법사로 있으면서 청소년 포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열 시쯤 법당에서 사시불공을 드리고 있는데 누가 문을 쇠파이프로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어요. 신경이 쓰였죠. 그래도 한두 번 하다가 그만두겠거니 했는데 계속 문을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하다가 목탁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어요. 마음속에 짜증이 나서 ‘누구냐?’ 야단을 치려고 딱 보니까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이 목발을 짚고 서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팔이 없으면 쇠갈고리로 의수를 했습니다. 상이군인이 그 쇠갈고리로 문을 두드리니까 안에서 듣기로는 쇠파이프로 문을 때리는 것처럼 들린 겁니다. 그래서 화를 내려다가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불공 중이니까 곧 오겠습니다.’

저는 상이군인의 모습을 딱 보자마자 동냥을 얻으러 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불공 중이니 잠시만 기다리면 불공 마치고 동냥을 주겠다고 한 거예요. 다시 들어와서 하던 불공을 마저 하는데 또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짜증이 탁 나서 다시 말했습니다.

‘조금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당신이 보다시피 내가 지금 불공을 하고 있는데 당신한테 동냥을 주려면 저쪽 요사채에 가야 돈을 가져오든 쌀을 주든 할 거 아니오?’

그랬더니 상이군인이 ‘내가 언제 동냥 얻으러 왔다고 그랬소?’ 이러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저 혼자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었음을 깨닫고 속이 뜨끔했어요. 그래서 동냥 얻으러 온 게 아니라면 왜 왔냐고 물었더니 ‘내가 마음이 하도 답답해서 스님이 되려고 왔소’ 이러는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팔이 하나 없고 다리가 하나 없는 나이 먹은 사람이 스님이 되겠다는 게 안 맞는 얘기였어요. 그래서 차분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는 시내에 있는 포교당이고 학생들을 포교하는 곳이에요. 스님이 되려면 다른 절에 가보세요’ 그랬더니 그 상이군인이 ‘다른 절에 다 가봤는데 가는 절마다 다른 절에 가보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곳은 아이들을 포교하는 곳인데 어떻게 여기서 스님이 되겠소. 그런데 스님이 되려는 이유가 뭡니까?’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면서 ‘내가 가슴이 답답해서 스님이 되려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저는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어요. 교리를 물었으면 설명을 잘해주었을 텐데 가슴이 답답하다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슴이 왜 답답한지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결혼한 후 얼마 안 돼서 월남전쟁에 갔다가 팔과 다리를 다쳐서 상이군인이 됐어요. 그래서 집에만 있는데 살기가 어려우니까 부인이 장사해서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연금이 나오긴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았아요. 몸을 다친 것도 힘들었지만 혼자 집에서 온종일 부인을 기다리는 게 너무 짜증이 났습니다. 부인은 밖에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왔어요. 그럼 왜 늦게 들어오는지 저도 모르게 자꾸 따지게 되었습니다. 그럼 부인이 내가 뭐 놀다 온 줄 아느냐고 하면서 성질을 냈습니다. 그러면 저도 성질이 확 나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욕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술을 먹고 취해 자는 일이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인도 집을 자꾸 나가게 되었어요. 집안이 제대로 되려면 내가 죽어야지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몇 번을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가 않았어요. 도저히 내 손으로 죽을 수는 없어서 절에 가서 중이 되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니까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절에 가서 중이 되게 해 달라고 했더니 절마다 다른 데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 이유는 충분히 알겠는데 어디 산에 있는 절도 아니고 시내에 있는 포교당에 어떻게 왔소?’

그랬더니 상이군인이 누가 여기로 가보라고 했다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종이 하나를 턱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종이를 자기한테 주면서 여기 한번 가보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 종이를 받아봤더니 전단지 맨 위에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어요.

‘마음이 답답한 자여, 이리로 오시오. 여기 부처님께서 마련한 좋은 안식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밑에 법회 시간이 주욱 적혀 있었어요. 그 종이는 바로 제가 시내에 뿌린 포교 전단지였습니다. 제가 시내에 뿌린 전단지를 보고 누가 마음이 답답하다고 하는 상이군인에게 전해 주면서 가보라고 한 거예요. 그때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마음이 답답한 사람은 누구나 이 절을 찾아오라고 전단지를 2000장이나 뿌렸거든요. 그래서 진짜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저는 그 사람을 보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동냥을 줘서 내보내든지 무슨 말을 해서 내 보내든지 오직 내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저 자신이 얼마나 웃기는 행동을 하고 있는지 돌아봐졌습니다. 정말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는 빨리 내보낼 생각만 하고, 한 번도 저를 찾아와서 답답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서는 법회도 열고 강의도 하고 있는 거잖아요. 학생들은 저에게 답답하다고 말도 안 했는데 ‘너 답답하지? 답답할 때는 이렇게 해결하는 거야’ 이러면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저 자신을 열심히 전법하는 사람, 누구보다 훌륭한 포교사라고 생각했고 자신감도 굉장했어요. 부처님 법을 널리 전하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법을 하지 않는 기존의 스님들을 막 비난했어요. 그런데 정작 내가 한 말이야말로 거짓말이었고, 내가 한 행동이야말로 헛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 왔을 때는 몰아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는 마치 내가 없으면 안 될 것같이 다가간 거예요. 그때 저의 존재가치가 탁 무너져 버렸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혼이 빠져서 멍한 상태가 되었어요. 그래서 학생 때 기도하던 칠불암이란 절에 가서 기도를 하다 쓰러져 버렸습니다. 3일간 정신없이 쓰러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내가 그래도 전단지를 뿌리고 전법을 했기 때문에 나의 어리석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아무것도 안 했으면 허상 속에 사는 나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번 일을 계기로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친 것이다.’

그 후 기존의 불교와 스님들을 비난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렸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들을 비판하지만 저 또한 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는 잘한다’, ‘나는 법대로 한다’, ‘나는 진실하다’ 이런 상을 짓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법상입니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옳으니 그르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저는 이렇게 느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해요.

갈등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

내가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일 뿐입니다. 생각은 다를 수도 있고, 믿음은 다를 수도 있고, 판단은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러니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내 생각과 내 의견을 고집할까요? 내가 아는 것이 곧 사실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놓아버리면 여러분들의 삶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어지고 갈등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순간순간 상을 짓고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괴로움은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는 방식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일에도 상을 짓고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좋은 일을 넘어서서 깨달았다는 상을 짓고 집착해도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것은 다 한밤의 꿈과 같은 거예요.”

이렇게 해서 이제 금강경의 절반인 상편에 대한 강의가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금강경 하편에 대한 강의를 이어나가기로 하고 이번 주 수행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교실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이어 나가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주간반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오후에는 전국법사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해 법문을 하고, 저녁에는 저녁반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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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항상 좋은 법문 감사합니다 ^^

2022-11-20 11:59:29

보각

스님의 스토리가 자세하게 전달되어 좋았습니다. 내 모순을 발견하고 끊임없이 해보는게 좋겠다 생각이드네요

2022-11-09 13:03:43

강 은희

내 남편을 잘 아는 사람은 시어머니가 아니라 아내입니다
며느리의 집에는 며느리의 방식이 옳고 시어머니의 집에선 시어머니가 옳죠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아들에게 불행을 주는일입니다

2022-11-01 20: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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