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서울 서초법당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아침 7시에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목사님, 주교님, 교무님이 속속 도착하자 스님이 반갑게 마중을 했습니다. 스님이 직접 농사지은 채소로 만든 밥상으로 식사를 한 후 다 함께 평화재단으로 올라갔습니다.
먼저 지난달에 로힝야 난민캠프에 가서 가스스토브 10만 개를 전달하고 온 모습과 필리핀JTS 활동 20주년을 기념하여 민다나오를 방문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JTS가 그동안 동남아 지역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구호활동을 해온 것에 대해 모두가 감탄하고 격려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식량난으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소식과 더불어 남북 관계는 5년 전처럼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에 대해 모두가 걱정스러운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화가 끝나갈 무렵 목사님이 스님에게 지금 종교인들과 사회 원로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러 사회 인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회 원로들이 뭐라도 좀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요구하는 것이 크게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역할을 해달라는 겁니다. 지금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어서 전쟁 위기로 자꾸 가려고 하잖아요. 남한이든, 북한이든, 미국이든, 전쟁 위기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범해서는 안 돼요. 어떻게든 평화를 유지해야 합니다. ‘절대로 한반도에 전쟁은 안 된다’라는 평화 운동에 대한 제안이나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이 딱 평화운동을 할 시기냐, 아직 좀 더 기다렸다가 위기가 격화되면 평화운동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좀 더 고민해 봐야 해요.
둘째, 한국 안에서의 국민화합과 통합을 위해 역할을 해달라는 겁니다. 지금 한국 안에서는 여야가 너무 팽팽하게 대립해서 사소한 것을 갖고 시비하느라 바빠요. 논문이 어떻네, 위증이네 아니네, 내내 서로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느라 전쟁 위기를 비롯해 경제 위기 등 정말로 중요한 사안들은 아예 논의도 안 되고 있습니다. 언론도 매일 그렇게 뒷담화하는 얘기만 뉴스로 내보내고 있잖아요.
이런 문제를 구조적으로 개선하려면 선거법 개정과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난번에 우리 종교인들이 국민통합위원회를 구성해서 기자회견을 했듯이 그것을 다시 가동해서 ‘정치가 이래서는 안 된다. 여야는 국민을 위해서 좀 협력해라’ 이렇게 얘기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제도적인 개선을 하도록 누군가 물꼬를 좀 터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정쟁은 그만하고, 국민 통합을 향해서 나아가되, 제도적인 개선도 함께 하라고 요구하고, 사회 지도층들의 여론도 모아나가야 합니다.
셋째, 제일 어렵기는 하지만 제일 필요한 일이기도 한데, 바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입니다. 이건 어쩌면 고통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데, 사회 분위기는 지금 이야기를 꺼내봐야 제일 효과가 없다는 문제가 있어요.
사회 원로들이 국민들을 대신해서 해야 할 일이 이렇게 세 가지가 있는데, 언제 무엇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는 의논이 필요해요. 그래서 우리가 이런 모임을 갖는 거죠. 가장 효과가 좋을 것 같은 명백한 시점이 오면 금방 행동을 하겠지만, 우리만 뜬금없이 성명을 발표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이런 내용을 발표하면 시민단체도 좀 호응을 해주고, 종교단체도 좀 호응을 해주고, 정치인들도 좀 호응을 해줘야 ‘어른들이 방향을 잡아줬구나’ 이럴 텐데, 아무도 관심이 없는 와중에 우리만 덜렁 선언을 내놓으면 뜬금없다는 말을 듣기가 쉽습니다.”
“세 가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음 모임에서 더 논의해 봅시다.”
“네. 남북한의 평화, 남한 안의 국민통합, 북한 주민들을 위한 인도적 지원, 세 가지가 지금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다음 달에는 이 주제로 더 깊이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더 모셔 와서 토론을 해 보면 좋겠습니다.”
“예, 공감해요.”
다음 모임에는 사회 원로 분들을 더 모셔 와서 더 많은 토론을 하기로 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종교인분들을 배웅한 후 다시 평화재단으로 돌아왔습니다. 점심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연이어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량안보의 우려와 우리 농업의 미래
오후 1시부터는 평화재단에서 연구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오늘은 서울대학교 농림자원학부 고희정 교수님을 초청해 ‘식량안보의 우려와 우리 농업의 미래’를 주제로 강의를 듣고 토론을 했습니다.
교수님은 현재 굶주리는 세계 인구가 3억 4천 명으로 추산된다는 유엔의 발표와 고조되는 식량위기 상황을 나누며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소비하는 곡물의 80%가 해외에서 들어옵니다. 전체 곡물 자급률이 현재 20.2%거든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건 45%예요. 나머지는 다 사료로 들어갑니다. 그중에서 쌀은 그래도 자급률 100%에 거의 맞춰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곡물들을 보면 콩, 밀, 옥수수가 문제예요. 해마다 1700만 톤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국내 생산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이 표는 주요 선진국의 곡물 자급률입니다. 스위스는 거의 산악 지대인데도 곡물 자급률이 이렇게 높아요. 선진국들의 곡물 자급률은 다 100%를 넘어간다는 사실에 우리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슨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 아니면 곡물을 재배하면 굉장히 이익을 많이 남아서 그런 걸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전부 정부에서 컨트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육류나 채소 자급률은 선진국에서도 왔다 갔다 합니다. 선진국에서 왜 하필 곡물에 이처럼 관심을 집중해서 관리할까요? 여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게 있습니다.”
이어서 전 세계 곡물 수급현황과 전망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전 세계 식량의 생산량, 소비량, 재고율 변화를 보시겠습니다. 수요는 꾸준히 증가합니다. 그런데 생산량은 수요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에요. 다행히 전체적으로는 수요보다 높았기에 이제까지는 괜찮았던 거죠. 그런데 최근 3년 정도는 거의 간신히 수요를 맞추는 수준입니다. 요즘 들어 식량 폭동 조짐이 보이고 있어요. 올해 겨울이 지나가면서 재고율이 떨어질 거라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재고율이 떨어진다는 것은 식량 수요가 늘어나고 그만큼 가격이 올라간다는 얘기입니다. 그 결과 식량안보지수는 점점 낮아지는 거죠. 그래서 식량 자급률은 모든 나라에서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입니다.”
불안정한 식량 생산에 대해 기후위기 및 재난으로 식량안보는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국 농업은 점점 축소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체 경지 면적이 약 3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거의 4분의 3 정도로 줄었습니다. 210만 헥타르에서 150만 헥타르로 줄었고, 농민 수도 줄었어요. 밭 같은 경우에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는데, 논이 절대적으로 이렇게 많이 줄어서 지금 거의 반쪽이 난 상태예요. 또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이 굉장히 늘었습니다. 요약하면 경지 면적은 줄어들고 인구는 노령화돼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농업의 현실과 문제점을 짚은 뒤 교수님은 식량안보 위기 대응 방향을 제안했습니다. 식량자급률 목표 법제화, 해외생산기지 다변화, 연구개발 투자 확대 및 첨단기술 수용과 이를 실행하는 주체인 농업인들에게 이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변화의 바람이 불 때 어떤 이는 바람을 안 맞으려고 벽을 쌓고 어떤 이는 풍차를 돌린다.’ 우리도 좀 풍차를 돌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박수)
1시간 30분 동안 강의를 듣고 잠시 휴식한 후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활발하게 질문이 쏟아졌는데 특히 식량위기를 대비해 농사를 짓고 있는 스님이 가장 질문과 의견을 많이 내놓았습니다. 스님은 직접 시골에서 겪은 고령화된 농촌 현실을 나누며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농업 회사’를 제안했습니다. 또 디지털 농법이 과연 친환경적인지 질문했습니다.
“스마트팜, 디지털 농법이라는 게 과연 친환경적인가요? 건물 안에서 농사를 지으면 빛을 모두 자연 태양광이 아닌 전기로 해결하잖아요. 그러면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다만 소비처 가까이에 농사를 짓기 때문에 유통에 드는 경비와 에너지를 줄여준다는 장점은 있지만 에너지를 다 전기로 써야 하니까 지구 전체적으로는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 좀 들었습니다.”
“디지털 농업이 곧 식물 공장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만은 아닙니다. 디지털 농업은 농업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데이터화해서 좀 더 정밀하게 농사를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지에서 짓는 농사도 전부 디지털 농업으로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농업은 분명히 앞으로 도움이 될 거예요. 식물 공장식 농업은 비용 대비 산출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런 건 기업에서 홍보 차원에서 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반 농민이 할 만한 모델은 아직까지는 어렵습니다. 수익 모델이 안 나오니까요.”
“수익을 떠나서 보더라도 에너지를 전기로 쓰니까 기후위기 극복에는 안 맞죠.”
“네, 당연히 그렇습니다. 1990년대 초에도 ‘글라스 하우스’라고 하며 온실 농업을 막 밀어붙였는데 지금은 그 시설이 전부 흉물이 됐습니다. 디지털 농업도 잘못하면 그쪽으로 흘러갈까 봐 상당히 걱정스럽습니다. 진흥청에서도 이런 점을 간파하고 노지농업으로 가자고 하는 거예요. 정밀 농업인 거죠. 토양이 필요한 양분을 제때제때 공급해 주고, 이쪽 토양과 저쪽 토양이 다르니까 그에 맞는 작물을 심고 별도의 양분을 공급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전국의 토양을 전부 분석해서 농사를 짓는 거예요. 이런 조치는 분명히 환경에도 도움이 됩니다. 낭비를 줄이는 것이니까요. 비료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질소 비료 중에 요소는 식물이 이용하는 건 30%밖에 안 되거든요. 30%는 공중으로 날아가고 40%는 수질을 오염시키게 됩니다. 그런 낭비를 없애자는 거죠. 이러한 취지는 굉장히 좋고, 제대로만 시행하면 환경에도 많이 도움이 될 겁니다.”
“네. 비료가 낭비될 뿐만 아니라 수질 오염이 된다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지금은 대부분 아무런 과학적인 개념 없이 농사를 짓고 있잖아요. 저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요. 저희 행자들도 논에 비료를 뿌려놓고 물을 넘치도록 대놓고, 뭐라고 하면 물을 빼버리고, 그러다가 또 비료가 부족하다며 다시 비료를 뿌리거든요. (웃음) 제가 옆에서 보니까 물 관리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비료를 적게 뿌리고, 물이 흘러가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물을 적게 대야 하겠죠. 또 말씀하신 대로 토양 분석을 하고 그에 대한 교육도 굉장히 필요하겠다 싶어요. 공중에 날아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교육을 통해 수질 오염을 막고 비료 효율성을 높일 수는 있겠네요. “
“맞습니다.”
1시간 30분 가까이 열띤 토론을 마치며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스님에게 닫는 말씀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교수님 말씀 들으면서 교수님과 다른 토질 전문가, 농업 전문가 분들을 저희 농사 현장에 모셔서 컨설팅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사를 열심히 짓기만 할 게 아니라 환경이나 토지 효율을 위해서 어떤 것을 어디에 심으면 좋을지 일종의 농업 컨설팅이나 경영 컨설팅 같은 걸 한번 받고 농사를 지으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한 번 요청드려도 될까요?. 컨설팅비는 없고요, (모두 웃음) 시골 다녀가시는 차비에 맛있는 밥과 채소는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곧바로 오후 4시부터는 평화재단 기획위원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평화재단의 사업 방향에 대해 함께 점검한 후 저녁 7시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7시 30분부터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모두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자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조금 쌀쌀하긴 하지만 요즘 날씨가 참 좋죠?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가을날에 여러분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곧 서리가 내리고 또 겨울의 추위가 오겠죠. 이런 좋은 계절은 길게 가지 않는 것 같아요. 2주 내지 3주 만에 끝나는 것 같습니다. 짧지만 아름다운 가을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지난 주말에 전국의 으뜸절과 실천장소에서 있었던 대중들의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두북 수련원에서는 논에서 피를 잘라내는 울력이 있었고, 그 외에도 곳곳에서 다양한 활동들이 활발하게 있었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곧바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세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평소에 공포감에 휩싸일 때가 많다며 어떻게 하면 공포감을 다스릴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공포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요?
“공포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요? 몇 해 전에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어요. 침착하게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될 텐데 공포에 질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다리가 떨려서 내려오는 데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또 밤에 혼자 작업실에 있다 보면 ‘누가 쳐들어와서 나를 해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문을 꼭 잠그려 하고, 안 잠갔으면 좀 불안해서 또 확인하게 됩니다. 집에 혼자 있다가 괜히 으스스한 생각이 들어서 동거인에게 빨리 집에 오라고 재촉을 할 때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시체를 버리는 숲에서 명상을 하셨다는데, 저는 아무리 조용하고 명상하기 좋다 해도 과연 시체 버리는 숲에서 정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밤에 혼자 숲에 있든,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골목을 걸어가든, 어떤 상황에서도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고 침착하려면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할지 궁금합니다. 겁이 많은 제가 공포를 잘 다스리게 되면 사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죽은 쥐가 질문자를 해칠까요, 산 쥐가 질문자를 물까요?”
“산 쥐가 저를 해칩니다.”
“죽은 뱀이 질문자를 해칠까요, 산 뱀이 질문자를 해칠까요?”
“산 뱀이요.”
“죽은 나무와 같이 있으나 산 나무와 같이 있으나 질문자에게 무슨 차이가 있어요?”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이 나를 해칠까요, 산 사람이 나를 해칠까요?”
“산 사람이요.”
“산 사람하고 있어도 괜찮다면 죽은 사람하고 있는 게 뭐가 문제예요?” (웃음)
“무서운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숲 속에서 산 사람을 만났을 때 나를 해칠까요? 아니면 숲 속에 있는 죽은 시체가 나를 해칠까요?”
“산 사람이요.”
“그럼 산 사람을 만나도 무서울 게 없는데 죽은 사람을 만나는 게 왜 무서워요?”
“산 사람을 만나도 무섭긴 할 것 같습니다.” (웃음)
“산 사람 옆에서 밥을 먹을 때 내 밥을 빼앗길 가능성이 높을까요, 죽은 사람 옆에서 밥을 먹을 때 내 밥을 빼앗길 가능성이 높을까요?”
“산 사람이요.”
“그렇다면 죽은 사람 옆에서 밥 먹는 걸 겁낼 이유가 뭐 있어요? 내 밥을 빼앗아가는 것도 아닌데요. 산 나무 옆에 있으나 죽은 나무 옆에 있으나 무슨 차이가 있어요? 움직이는 동물이나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산 동물이 나를 해쳤으면 해쳤지, 죽은 동물은 나를 해치는 법이 없어요. 죽은 사람이 나를 해칠 수가 있을까요? 죽은 사람은 그냥 죽은 동물이나 나무토막과 똑같아요. 내 밥을 빼앗아가든, 내 돈을 빼앗아가든, 나를 때리든, 상대가 산 사람이어야 그럴 가능성이 있잖아요. 살아있는 호랑이라야 나를 물지 죽은 호랑이는 나를 못 물어요.
그러니 죽은 사람 옆에서 명상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오히려 나 혼자 있으면 호랑이나 여우가 나타나서 나를 물 가능성이 있지만, 죽은 시체 옆에 있으면 여우나 호랑이가 와도 옆에 있는 죽은 시체를 먼저 뜯어먹지 살아 있는 나를 공격하겠어요? 그러면 야수도 막아주고 더 좋죠.
두려움이라는 것은 막연한 환상에 젖었을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실재가 아닌 가상의 세계에 놓여 있을 때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누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며 두려워하지만, 시체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에요. 그 어떤 시체도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시체가 벌떡 일어나 나를 해쳤다면 그건 안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인 겁니다. 시체가 일어나서 돌아다녔다는 건 그냥 이야기에 불과해요. 죽었는데 돌아다녔다는 건 그냥 머릿속에서 하는 상상이에요.
죽은 사람이 일어나서 꺼떡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중국에서는 ‘강시’라고 부르고, 한국에서는 ‘귀신’이라고 불러요. 귀신이면 똑같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귀신은 발이 없어서 휙휙 날아다녀요. 중국 귀신은 걸어 다니지 못하고 폴짝폴짝 뛰어다녀요. 이렇게 귀신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것만 봐도 실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다 제 나름대로 그렇게 상상하는 거예요. 어릴 때 재밌으라고 어른들이 해준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거죠.
영화를 볼 때는 무섭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안 무섭잖아요. 왜 그럴까요? 화면을 꺼버리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영화를 보면서 무서워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이 나를 두렵게 하는 겁니다.
깜깜한 밤에 불을 켜고 있을 때와 끄고 있을 때를 한번 비교해 보세요. 불을 켜면 안 두렵고, 불을 끄면 두려워요? 이때 두려움이 생기는 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르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두려움은 무지에서 생깁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약간 겁이 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에요. 아는 장소보다 낯선 장소에 갔을 때 약간 두려움이 생긴다면 그것은 장소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는 일은 괜찮지만 모르는 일을 할 때 약간 겁이 난다면 그것도 그 일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에요. 깜깜할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몰라서 그렇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생긴다는 건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를 잘 모르니까 그런 거예요. 이처럼 모든 두려움은 무지로부터 생겨납니다.
깨달음이란 환히 안다는 뜻이에요. 환히 알면 아무 두려울 게 없어요. 산 뱀이 나를 물까요, 죽은 뱀이 나를 물까요? 산 벌이 나를 쏠까요, 죽은 벌이 나를 쏠까요? 산 호랑이가 나를 물까요, 죽은 호랑이가 나를 물까요? 산 사람이 나를 해칠까요, 죽은 사람이 나를 해칠까요? 죽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무 힘이 없어요. 나무가 죽어도 나를 안 해치고, 동물이 죽어도 나를 안 해치고, 식물이 죽어도 나를 안 해치고, 사람이 죽어도 나를 안 해쳐요. 죽으면 해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시체가 겁이 난다면 머릿속에서 상상을 하기 때문에 겁이 나는 거예요. 마치 영화를 트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직접 경험을 해보면 돼요. 죽은 시체 옆에 머물러 보는 거예요. 누가 돌아가시면 그 옆에 가서 있어 봐요. 무슨 문제가 생길까요? 아무 일도 없어요. 영안실에서 시체 닦는 아르바이트를 좀 해 봐도 됩니다. 직접 해 보면 방바닥 닦는 거나 시체 닦는 거나 똑같아요. 처음에만 약간 ‘으으’ 하지, 매일 닦다 보면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게 적응이라는 거예요. 뱀도 처음에 보면 ‘으으’ 하지만 매일 만진다고 해 봐요. 아무 일도 아닙니다. 이런 걸 적응 훈련이라고 해요. 모르면 겁이 나지만, 알면 별일 아니에요.
스님하고도 처음 만났을 때는 말을 잘못할까 봐 떨리지만, 스님 옆에서 며칠 살아보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스님도 똥 누고, 나도 똥 누고, 스님도 밥 먹고, 나도 밥 먹고, 뭐 똑같네!’ 이런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는 같이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요.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다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성난 코끼리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칼을 든 살인자가 쫓아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처럼 부처님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모든 이치를 훤히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모르니까 자꾸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에 대해서 모르니까 두려워하는 거예요.
두려움의 대상을 조금씩 알아가면 두려워할 게 없어요. 질문자는 죽은 사람이 두렵다고 얘기했지만, 죽은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사실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모르니까 두려워하는 겁니다. 한 번도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아요.
지금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산 게 해치나, 죽은 게 해치나’ 이걸 따져보는 거예요.
안다는 건 가만히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을 뜻합니다. ‘산 사람이 나를 해치나, 죽은 사람이 나를 해치나’ 이렇게 따져보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해치지는 않잖아요. 시체가 벌떡 일어난 적은 없어요. 귀신을 두려워하는 건 화면에 비치는 영화를 보면서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뒤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혼자 있을 때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것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어릴 때 어떤 경험에 의해서 그런 느낌이 생겨나는 거예요. 산에서도 햇빛이 쫙 비치고 앞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는 절대 두려움이 안 생겨요. 응달진 곳에 가거나, 해가 져서 어두워지거나, 산모퉁이를 홱 돌아서 이쪽저쪽이 다 안 보일 때는 약간 섬찟한 마음이 들어요. 특히 혼자 산에 갔다면 더 그렇겠죠. 이런 감정은 다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아, 두려움은 무지로부터 생기는구나!’
이렇게 알고 자꾸 적응 훈련을 해야 해요. 비행기에서 낙하산 타고 뛰어내릴 때 처음에는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러나 그것도 한 번 뛰어내리고, 두 번 뛰어내리고, 세 번 뛰어내리고, 이렇게 자꾸 해보면 하나도 안 두려워요. 이런 적응 훈련이 필요합니다.”
“여태까지 어두운 곳, 쥐, 산골짜기, 이런 것들을 무서워했는데, 모두 무지 때문에 무서워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없는 가족 일들이 생각나면 걱정되고 두렵고 불안하고 기분이 다운됩니다. 가족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얼마 전에 스님께서 쓰신 <인간붓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너무도 간결하고 명확하고 재미있게 글을 쓰셔서 어떻게 하면 스님처럼 글을 쓸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서초법당을 나와 시타림을 가기 위해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향훈 법사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가족들을 위로한 후 서초법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한 후 하루 종일 평화재단을 찾아온 사회 인사 분들과 연이어 미팅과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