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0.6. 밤 줍기, 배추밭 풀 뽑기, 정토경전대학 금강경 4강
"상을 짓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상을 짓지 않으려면..."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도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아침 일찍 밤을 줍기 위해 밤나무 숲으로 향했습니다.

“밤이 떨어지는 게 이제 거의 끝나 가네요.”

이제는 빈 밤송이 껍질만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간혹 새로 떨어진 밤송이가 있어서 스님은 재빨리 밤을 주워 담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 밤을 주운 후 숲을 나왔습니다.

“산 위로 더 올라가 봅시다.”

숲에서 주운 알밤을 물에 담가 놓은 후 산 위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산 위로 올라갈수록 속에 알밤이 꽉 차 있는 밤송이가 많이 보였습니다.

“여기는 알밤이 많네요. 크기도 아주 커요.”

눈에 보이는 알밤이 많으니까 줍는 것이 더 재미가 났습니다.




스님도 바구니 한가득, 함께 간 행자님도 바구니 한가득 손에 들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 보길 잘했네요.”


밤 줍기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니 아직 농사팀 행자님들이 배추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행자님들 일 하는 걸 좀 도와주고 갑시다.”

스님은 행자님들에게 무슨 일을 도와주면 좋은지 물었습니다.

“어떤 일이 남았어요?”

“고랑마다 잡초 매트는 깔았는데, 아직 밭 주변에 풀을 아직 못 벴습니다.”

스님은 낫을 들고 밭 주변에 풀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넝쿨이 우거져서 땅을 뒤덮고 있었는데 말끔하게 걷어 내었습니다.

밭에는 배추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한랭사를 씌우고, 고랑에 잡초 매트를 깔고, 밭 주위에 풀매기를 다 한 후 오전 울력을 마쳤습니다.

“수고했어요.”

골목마다 국화와 코스모스, 각양각색의 꽃들이 피어 있고, 감나무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습니다.



들판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구름이 걷히자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들녘에 푸른빛이 나는 것은 이제 가을배추만 남았습니다. 가을이 점점 깊어가고 있습니다.


점심에는 스님을 뵙기 위해 두북 수련원에 스님 몇 분이 찾아왔습니다. 오후에는 손님들을 접대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강의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금강경 제4분(分)과 5분(分)을 공부했는데, 경전을 읽지 않고 설명했기 때문에 경전 구절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상(相)을 짓고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모양’에 집착하는 것을 깨우쳐 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병든 비구가 부처님을 한 번 뵙고 싶다고 청했을 때 부처님은 ‘허물어져 갈 육신을 봐서 뭘 하겠느냐’ 이렇게 모양에 집착하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열반하실 때는 제자들에게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부분을 보충하는 사례를 들어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겠습니다.

목불에서 사리를 찾느냐

옛날에 어떤 스님이 수행을 열심히 했는데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옛날에는 수행자들이 ‘수행을 열심히 하면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스님은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도 아직 부처님의 진신을 만나지 못해서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내가 죽을 각오로 기도를 해서 반드시 부처님의 진신을 친견하리라.’

그래서 사람의 왕래가 없는 깊은 산속에 낡은 암자로 가서 새벽부터 하루에 4번 기도하는 사분정근(四分精勤)을 시작했습니다. 천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부처님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거예요.

3년째 되던 해 겨울이었어요. 그 해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마을하고 왕래도 못 하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하기도 어려웠어요. 결국 땔감도 떨어지고 양식도 떨어졌죠. 양식이 떨어져도 땔감이 있으면 단식을 하면서 버티면 되고, 땔감이 떨어져도 양식이 있으면 음식을 먹고 체온을 유지하면 되는데 둘 다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눈이 많이 와서 위험하지만 마을로 내려가서 양식을 구해오기로 했습니다.

마을에 내려가서 양식을 구하고 돌아오려는데 또 폭설이 쏟아져서 도저히 암자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위험하다고 못 가게 했어요. 그렇게 해서 마을에서 삼일이 지났습니다. 이 스님은 지난 3년 간 천일기도를 결심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를 했는데, 이렇게 중간에 삼일이나 기도를 못 하고 부처님께 공양도 못 올리게 되니까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3일째 되는 날, 마을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은 안 된다며 기를 쓰고 암자로 갔습니다.

스님은 발자국 하나 없이 눈만 덮여있는 땅을 걸어 천신만고 끝에 암자에 돌아왔습니다. 위험했지만 돌아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방 앞에 신발이 한 켤레 놓여있었어요. 스님은 ‘이 추운 곳에서 사람이 죽지 않았을까. 내가 일찍 왔어야 하는데!’ 하고 걱정하며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자고 있었어요. 방 안에서 훈기가 확 느껴졌습니다. 암자에 양식도 없고 땔감도 없었는데 방에 훈기가 있고 사람이 자고 있으니까 너무 이상했어요. 눈 위에 아무 발자국도 없었던 걸로 보아 이 사람은 적어도 오늘 온 건 아니에요. 스님은 의아해하면서 부처님께 절을 하려고 법당으로 갔습니다. 법당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불상이 없는 거예요. 그때 머리가 탁 돌아갔어요. 스님은 한 달음에 방으로 달려가서 자고 있는 객승의 멱살을 잡고 욕을 했습니다.

‘야 이 놈아, 아무리 춥더라도 어떻게 중이 부처님을 불에 땔 수 있느냐?”

그랬더니 객승이 아주 급한 일이 있다면서 놔 달라고 사정을 하는 거예요. 기도승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데도 급하다니까 놔줬어요. 눈이 와서 어디 도망갈 데도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람이 뭐 하나 봤더니 부엌에 가서 부지깽이로 아궁이를 뒤지고 있는 거예요. 기도승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 놈아, 뭐 하는 짓이냐?’

‘사리 찾는다’

‘이 놈아!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

‘그러면 마저 갖다 때야 되겠네!’

그 때 그 기도승이 확 깨달음을 얻었다는 얘기입니다.

스님은 처음 신발을 보고 ‘아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어야 되는데. 결국 한 사람이 죽었구나’ 이런 마음을 냈습니다. 방문을 열었을 때 훈기가 있고 사람이 자고 있으니까 걱정하는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했어요. 법당에 불상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이 죽일 놈이!’ 하고 욕을 하면서 멱살을 잡고 부처님을 불에 땠다고 난리를 피웠단 말이에요.

부처님을 화장했으면 사리가 나와야 되잖아요. 그래서 객승이 ‘사리 찾는다’ 하니까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 이렇게 말했단 말이에요. 목불이라는 말은 ‘그게 무슨 부처님이냐. 나무토막이지’ 이런 뜻이잖아요. 객승이 ‘그럼 마저 갖다 때야 되겠네’ 할 때, 기도승은 자기의 모순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실로 여래를 보는 것, 여리실견(如理實見)입니다. 상을 짓고, 그 상에 집착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알 수 없어요. 상의 실체가 없음을 깨달아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상(相)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상이 뭘까요? 한문으로는 모양 상(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물건의 크기를 말할 때 ‘그 물건이 작기 때문에 작다고 인식을 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작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에요.

‘이 물건이 작기 때문에 내가 작다고 알았다’

‘이 물건이 크기 때문에 내가 크다고 알았다’

‘저 것은 빨간색이기 때문에, 저것은 푸른색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그렇게 인식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아는 것이 진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빨갛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노랗다고 하면 이렇게 반응하게 됩니다.

‘눈이 삐었나, 넌 어떻게 색깔도 구분할 줄 모르냐?’

내가 크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보고 다른 사람이 작다고 하면 ‘저게 어떻게 작냐, 크지’라고 생각해요. 내가 싸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다른 사람이 비싸다고 하면 ‘에이, 그거 싼 거야. 너 물건 볼 줄 모르네’ 이렇게 시비를 합니다. 시비는 왜 생길까요?

‘나는 사실을 알고 있다. 너는 사실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맞고, 너는 틀렸어’ 이런 얘기죠.

그런데 사실은 빨간 색깔을 내가 빨갛다고 아는 게 아니고 내 눈에 빨갛게 보이는 겁니다. 내가 볼 때 빨갛지만 색맹이 보면 달리 보일 수 있고, 개가 봐도 달리 보일 수 있겠죠. 크기도 보는 사람에 따라 크게 보이기도 하고 작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작다, 크다, 빨갛다. 노랗다 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입니다.

‘나는 이렇게 인식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인식했습니다.’

‘어, 내가 보기엔 노란데.’

‘그래? 내가 보기엔 빨간데.’

이렇게 대화를 하면 누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 싸우지 않습니다. 서로 달리 본 거예요. 그러면 다르게 본 대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그러면 실제는 어떤 색깔일까?’ 이렇게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네 눈엔 노랗게 보이는데 왜 내 눈엔 빨갛게 보이지?’

‘네 눈엔 크게 보이는데 왜 내 눈엔 작게 보이지?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연구를 합니다. ‘네가 틀렸어!’라고 시비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갈등이 없는 거예요.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머리로 생각해서 아는 정보는 내가 그렇게 인식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자기가 인식한 내용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할 때 상을 짓는 겁니다.

사람들은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죠. 예를 들어 누가 세상에서 제일 긴 강이 아마존강이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때 ‘제가 알기로는 나일강이 세계에서 제일 길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나일강이 제일 길어! 아마존강이 제일 길다는 건 틀린 거야!’ 이렇게 말해서 말다툼을 하죠. ‘아 그래요? 제가 아는 것과 다르네요. 한번 찾아봅시다’ 이렇게 하면 대화가 되는데요.

모든 분별은 상을 짓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기도승의 사례를 살펴보면 목불이 부처님이라고 그랬잖아요. ‘부처님을 어떻게 불에 땔 수 있느냐’고 난리를 피웠는데 객승이 사리를 찾는다고 하니까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입으로 ‘그게 나무토막이지 어떻게 부처냐’라고 말한 거예요. 그럼 ‘어, 모순이네’ 이렇게 알아야 되는데 자기가 말을 하고도 뭐가 모순인지 모르는 거예요. 객승이 ‘나무토막이면 무엇 때문에 모셔 놓고 절을 하니? 추운데 불 때지’ 하니까 그 때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이 기도승을 보고 어리석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도 일상에서 이런 일이 허다해요. 허다한 것을 넘어서서 대부분의 일상을 이렇게 보내고 있습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진리라고 믿고 ‘이게 옳아. 저게 옳아’ 주장하는 것이 아상(我相)이에요. 아상이 곧 인상(人相)이고 중생상(衆生相)이고 수자상(壽者相)이에요. ‘나’라는 기준의 범위에 따라 상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네 가지로 나눈 것이 사상입니다. ‘나’라는 기준을 내 육신과 정신으로 잡으면 아상, 우리라는 울타리로 잡으면 인상이라고 해요.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나눠서 사람은 소중하게 여기고 사람 아닌 것은 함부로 여기는 것이 인상입니다. 중생상은 생명체는 소중하게 여기고 생명체 아닌 것은 함부로 해도 된다고 구분하는 겁니다. 수자상은 형상이 있는 것은 존재라고 인정하고, 형상이 없는 것은 비록 존재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구분하는 거예요.

아상이 있으면 곧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상을 타파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금강경 제6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것이 진리이다’ 하는 법상(法相)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法)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래, 존재에는 실체가 없어!’

이렇게 ‘없다’라고 하는 상을 지어서 진리라고 주장하면, ‘이것이 진리이다’ 하는 상을 또 짓게 됩니다. 그것을 법상이라고 합니다. 아상을 지어서 서로 싸울 때는 하루만 지나면 대부분 화해를 하는데, 진리라는 상을 짓고 싸우면 천 년을 가도 화해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건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렇게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을 지으면 갈등이 더 오래갑니다.

‘이게 부처님의 말씀이야’ 이렇게 주장해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이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야’ 이렇게 주장해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신이 있어!’ 또는 ‘신이 없어!’ 두 가지 모두 상에 집착하는 겁니다. ‘있다’라는 유견(有見), ‘없다’라는 무견(無見), ‘영원하다’라는 상견(常見), ‘영원하지 않다’라는 단견(斷見)에 떨어지는 이유는 모두 상을 짓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다’, ‘없다’를 넘어서는 중도(中道)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그 얘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이다’ 하는 고집을 깨뜨리기 위해 나온 가르침

그럼 금강경에 왜 이런 얘기가 나올까요? 금강경이 나왔던 당시는 기존 불교가 진리를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는 것을 움켜쥐고, ‘너희는 진리를 모른다’ 하면서 기존 불교가 아닌 것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라고 하는 이 고집을 깨트리기 위해서 법상이라는 표현이 나온 거예요. 또 하나의 상을 지은 것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것이 무슨 상이든, 아상, 인생상, 중생상, 수자상이든, 법이라는 상이든, 법 아니라는 상이든, 그것은 상에 불과한 것이고 허망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중에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무엇을 주장해도 괜찮은데, 경전대학에 다니는 동안은 마음 나누기를 할 때 이렇게 말하면 좋겠어요.

‘저는 이렇게 체험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상을 짓지 않는 겁니다. ‘이게 불교야.’, ‘이래야 돼.’, ‘저래야 돼’ 이렇게 말하면 상을 지은 것입니다. 자기가 불교 지식이 좀 있거나 불교 예식을 좀 안다고 해서,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고 말하는 것은 지식적인 문제에 불과해요. 이것이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관세음보살을 불러야 된다고 얘기하면 ‘아, 저 사람은 저걸 믿고 있구나’ 이렇게 알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주제인 제6분(分)에 대한 강의를 이어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를 제대로 알면 알수록 성경을 읽을 때 더 잘 이해가 됩니다. 상대방이 점점 더 이해가 되어야 진짜 불교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정토불교대학이나 경전대학에 다니기 전에는 시어머니가 굿을 하고 점쟁이한테 찾아가는 것을 보고 미신을 믿는다고 못마땅해했는데, 불교를 공부하고 나서는 ‘아, 우리 어머니는 저런 믿음을 갖고 계시는구나’ 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를 제대로 공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불교대학을 안 다닐 때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히려 불교대학을 다니고 나서는 ‘어머니,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에요. 미신이에요. 불교는 이런 거예요.’ 이렇게 말한다면 불교 공부를 제대로 안 한 거예요. 이것은 불교라는 상을 지어서 남을 배타하는 자세입니다. ‘불법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불교라는 상을 지었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어렵죠? 얼마나 어려우면 수보리가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했겠어요.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와 같은 말씀과 문장과 글귀를 듣고 정말로 실다운 믿음을 내겠습니까?’

수보리는 자신도 오늘에야 이걸 알았는데 후세 말법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믿어지겠느냐 이렇게 걱정을 한 거예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보리야,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여래가 열반에 든 뒤 후오백세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으면 이 문장과 글귀에 능히 믿는 마음을 내어 이로써 실다움을 삼을 것이니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죠. 그 시대에도 아직 이 법을 못 만나서 그렇지 한량없는 공덕을 쌓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법을 듣고 바로 믿음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내일은 손님들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낸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6

0/200

김정은

고맙습니다.

2023-04-06 12:57:23

시명화

스님법문 고맙습니다~(())

2022-12-31 10:40:01

정명선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2022-10-16 20: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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