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7.17. 논에 피 뽑기, 영어 즉문즉설, 청춘톡톡, 일요명상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스님은 오늘도 농사일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대중들과 함께 논에 피 뽑기를 하기로 한 날입니다. 대중들이 오기 전에 스님은 산밑밭으로 가서 채소를 수확했습니다.

잘 자란 호박, 가지, 오이와 잘 익은 토마토만 수확해서 바구니에 담아 산을 내려왔습니다.


아침 7시 10분이 되자 대중들 80여 명이 느티나무 아래에 모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비닐하우스 주변에 풀매기를 해야 할 곳을 둘러본 후 꽃밭 논에 들어가서 피를 뽑다가 대중들을 맞이했습니다.


대중들이 스님에게 선 채로 삼배를 하며 인사를 하자, 스님이 간단하게 오늘 일감에 대해 안내해 주었습니다.

“스님이 고생하는 모습 보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농사짓는 논이 8개입니다. 피가 아주 많은 논이 4개예요. 나머지 4개는 피가 적습니다. 지난주까지 피가 아주 많은 논 3개를 끝냈고, 어제 대중들 120명이 와서 피가 가장 많은 논 1개를 끝냈습니다.

오늘 피를 뽑을 논은 한 달 전에 피를 뽑았던 논입니다. 한 달 사이에 피가 다시 자라 버렸고, 풀도 다시 많아졌어요. 그래서 오늘은 그 논에 가서 다시 한 번 피를 뽑겠습니다. 1인당 3줄씩 맡아서 한 번만 끝까지 가면 됩니다.

해도 없고 날씨도 선선해서 일하기 딱 좋은 날이에요. 이런 날은 놀기 좋은 날이 아니라 일하기 좋은 날입니다. 일하는 시간은 2시간, 2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끝내겠습니다. 그러니 무리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아시겠죠?” (웃음)

“네!”

절반 정도가 논에서 피를 뽑기로 하고, 나머지는 낫과 호미로 비닐하우스 주변에 풀을 뽑거나, 마을 앞 밭에 가서 밭 정리를 하기로 한 후 다 함께 논과 밭으로 출발했습니다.


논에 도착한 후 스님의 안내에 따라 일렬로 줄을 서서 모두가 논에 들어갔습니다.

“저기에 한 자리가 비었어요. 한 분이 빈자리에 들어가 주세요.”

7시 30분부터 피 뽑기를 시작했습니다.

논에 처음 들어가 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방금 스님의 설명을 들었지만 아직 모와 피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옆 사람에게 물어가며 열심히 피를 찾았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에게 모와 피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피를 뽑고 나면 물에 흙을 다 털고 나서 밖으로 던져 주세요. 안 그러면 손으로 들기에 너무 무겁고, 아까운 흙이 밖으로 다 소실되어 버리게 돼요.”

이양기가 모를 심을 때 가로와 세로가 교차해서 줄이 반듯하지 않은 외곽은 세 명이 별도로 피를 뽑았습니다.

“저는 8시부터 생방송 강의가 있어서 두북 수련원에 다녀올게요. 2시간 뒤에 강의 끝나고 나오면 지회별로 기념사진을 같이 찍겠습니다.” (웃음)

스님은 안내를 마친 후 곧바로 강의를 하기 위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오전 8시 정각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을 하는 날입니다. 전 세계에서 300여 명의 외국인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두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자연계에서 보편적 정의를 찾을 수 있다는 스님의 법문에 대해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왜 자연이 보편적인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있나요?

"There are many Dharma talks in which Sunim looks to nature to draw a universal definition of justice. I would like some clarifications on the idea that doing better than nature is ethically good. The way I see it, as long as it doesn’t oppose the laws of physics, literally everything happens in nature. So when people hear that we should look to nature to determine what’s ethically neutral, I feel they will probably end up seeing whatever they want to see. I am also confused when you say that animals in the wild do not abuse substances or abandon their offsprings. Studies have shown that even fruit flies are more likely to get drunk off fermented fruits when they can’t find mating partners. Even among mammals, we see lions or chimpanzees slaughter an entire litter of cubs or infants for political reasons. Even sheep living in ideal conditions sometimes reject lambs right after they’re born. How should we reconcile the fact that even bugs get drunk and even mammals exhibit neglect or violence against their newborns and this idea that we should look to nature to find the basis of justice?"
(스님께서는정의의 보편적 정의를 자연에서 찾을 수 있다는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자연보다 더 잘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 좀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물리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말 그대로 모든 일이 자연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위해 자연을 바라봐야 한다고 들었을 때,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야생의 동물들이 물질을 남용하거나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실 때 좀 의구심이 듭니다. 연구에 따르면 초파리도 짝짓기 상대를 찾지 못하면 발효된 과일에 더 취해 있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포유류들 중에서도, 사자나 침팬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새끼나 유아들을 도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환경에 살고 있는 양들도 새끼 양이 태어나자마자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벌레도 술에 취하고 포유류도 갓난아기에 대한 태만이나 폭력을 보인다는 사실과 정의의 기초를 찾기 위해 자연을 바라봐야 한다는 이 생각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기계론적이지 않습니다. 주사위를 던지면 1이 나올 확률이 6분의 1이라는 말은 6분의 1이 나올 확률이 가장 높다는 뜻입니다. 현실에서는 여섯 번 던진다고 해서 1이 한 번 나오는 게 아니고, 어쩌면 백 번 던져도 1이 한 번도 안 나올 수 있습니다. 또 여섯 번이 다 1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현실은 그런 가변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사위를 백 번, 천 번, 만 번, 십만 번 던져서 횟수를 많이 하면 점점 6분의 1에 수렴이 됩니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예요. 씨앗을 심으면 싹이 트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반드시 싹이 트는 건 아니에요. 기름진 밭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틀 확률이 높고, 황무지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틀 확률이 낮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밭을 기름지게 하면 반드시 수확량이 많아지는 게 아니라 수확량이 많아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좋은 일을 하면 결과도 좋다, 즉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는 것도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가 상대를 비난했을 때보다는 칭찬했을 때 돌아오는 말이 칭찬일 확률이 더 높다고 말할 수는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확률이 높은 쪽으로 사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건 없습니다.

기후 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소비를 줄이고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기후 위기가 조금 완화되거나 해결될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다는 것이지, 그런다고 기후 위기가 해결된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우리는 확률이 높은 쪽으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사람만 자살하는 게 아니라 동물도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물도 자기 새끼를 물어 죽이는 경우가 있고요. 그러나 그것은 매우 확률이 낮습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정신질환의 일부라고 볼 수 있어요. 아주 드문 케이스를 가지고 섣불리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역마다 종교마다 윤리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가치 기준을 잡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첫째,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자는 겁니다. 이것도 어쩌다가 만나면 괜찮아요. 그러나 늘 같이 산다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 갖고는 갈등을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만약 공통으로 새로운 기준을 하나 만들자는 문제가 제기된다면 어디에 기준을 두어야 하느냐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힘이 강한 쪽을 중심으로 해서 기준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파워가 정의였습니다. 그러나 힘으로 기준을 정하지 않고, 대화로 새로운 기준을 만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공통으로 기준을 삼을 수 있는 것은 자연 상태라는 겁니다.

자연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선이라는 의미로 하는 얘기는 아니에요.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서 어떤 공통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 현재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연이라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집단 안에서의 어떤 특정한 윤리, 남성 중심적 윤리, 지배계급 중심적 윤리, 기독교적인 윤리, 이런 것들이 주류였는데, 이제는 여성도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생각하고, 다른 종교도 생각하고, 인류 전체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윤리관을 새로 정립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히 지금은 환경 문제까지 제기되니까 인간관계만 갖고 윤리를 정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자연 생태의 법칙, 즉 환경윤리에 기초한 윤리관을 새로 적립해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이라고 하는 소수 집단의 윤리를 전 인류의 보편적 윤리로 확장시켜서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윤리관을 제시했습니다. 즉 유대인의 하느님에서 모든 민족의 하느님으로 확장시켜서 보편성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환경 문제가 제기되면서 인간 윤리만으로는 환경적 가치를 바라보는 데에 한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생태적인 것까지 고려한 윤리관을 정립하셨습니다. 천하 만물이 다 연기되어 있다는 연기적 세계관이라든지, 첫 번째 계율이 살인하지 말라가 아니고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라든지, 이런 내용을 보면 불교는 출발부터 생태적인 것까지 고려한 윤리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한 명의 질문을 더 받은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의문이 있으면 뭐든지 묻고 대화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다 해결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의문이 남으면 연구하다가 다음에 대화를 하면 됩니다. 인생에는 어떤 정답도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2주 후 다음 시간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생방송을 마치자마자 스님은 곧바로 작업복을 갈아입고 대중들이 피를 뽑고 있는 논으로 향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는 안팎으로 풀매기를 하고 있고, 산앞밭에는 양배추를 수확하고 난 두둑을 뒷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초기를 돌리는 거사님들은 산밑밭, 산앞밭에 예초를 마치고 논둑으로 내려와 예초기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피 뽑기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었는지 논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스님도 논으로 들어가서 함께 피를 뽑았습니다.

“많이 했네요! 조금만 더 하면 되겠어요.”

대중들이 출발한 지점에서 반대편에 일부 마무리를 못하긴 했지만 상당 부분 피를 거의 뽑았습니다.

“두 시간이 되었어요. 무조건 마치겠습니다.”

현재까지 골마다 모아둔 피들만 모두 논둑으로 빼낸 후 일을 끝마치기로 했습니다. 끝까지 마무리를 못해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대중들은 서둘러 릴레이로 피를 논둑으로 전달했습니다.



“자, 나갑시다. 수고했어요!”

스님의 큰 목소리로 외치자 그제야 대중들 모두 논 밖으로 나왔습니다.



다시 모두가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서 닫는 모임을 했습니다. 대중이 스님에게 마무리 말씀을 청했습니다.

“이제 못한 것은 못한 것이고, 그냥 두고 가는 수밖에 없어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이번 주가 끝이고, 다음 주부터는 자발적으로 봉사를 오는 분만 신청을 받겠습니다. (웃음)

두북 수련원에 농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4명밖에 없어요. 저 같은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두 시간밖에 결합을 못합니다. 아직도 여기저기 풀을 매야 할 데가 많아요. 비닐하우스에는 고추가 쏟아지고 있어서 따야 하고요. 다음에 또 공지를 하면 많이들 와 주십시오.”

“네!”

모두 다 수박과 미숫가루를 한 그릇씩 먹은 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중들이 가고 스님은 논 장화를 신고 다시 논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대중들이 끝마치지 못한 부분을 마무리해야겠어요.”

대중의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은 여전히 피와 풀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뙤약볕 아래 한 시간을 더 피를 뽑은 후 논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제 갑시다.”

잠시 후 생방송 강연이 있기 때문에 강연 시간에 맞춰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청춘톡톡

오후 2시부터는 청년들을 위한 청춘톡톡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1300여 명의 청년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한여름에 열린 즉문즉설에 청년들은 저마다 물안경을 쓰거나 밀짚모자를 쓰는 등 바캉스 복장을 갖추고 줌에 입장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요즘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뉴스를 보니 우리나라만 더운 게 아니라 유럽에도 지금 폭염이 와서 많은 사람이 죽고 입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피 뽑는 걸로 여름 피서를 보내고 있습니다.” (웃음)

스님이 지난 한 주 동안 논에서 피 뽑기를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후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며 어떻게 사람들과 관계를 좋게 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사회생활 및 대인 관계에 대해서 고민입니다. 제가 남들보다 개성이 강해서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잘 지내다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람들과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래서 저도 사람들이 점점 싫어집니다. 사람들이 싫어지면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고 그만두고 나면 후회를 넘어 제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람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사람들을 싫어하겠죠. 그리고 스스로 개성이 강하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왜 개성이 강한 사람을 싫어하겠어요? 그것도 자기 생각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단정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남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내가 알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가 알 수가 없어요. 안다는 것도 내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가 알 수 없기 때문에 상관을 안 하는 게 좋아요. 모르는 일을 가지고 자꾸 얘기해 봐야 소용이 없잖아요. 또 그가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그의 문제고 그의 자유지 내 권리가 아니에요. 그의 권리죠. 남의 권리에 내가 자꾸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를 좋아해도 그의 문제고, 싫어해도 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자신을 좋아하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마음이 들떠요. 누가 나를 비난하면 내가 못나서 그런 줄 알고 우울해지죠. 이게 다 남의 영향을 받고 사는 거예요.

여러분이 어떤 꽃을 좋아하고 어떤 산을 좋아하고 어떤 바다를 좋아하고 어떤 물건을 좋아한다면 그건 자기 문제죠. 그게 무슨 꽃 문제도 아니고 바다 문제도 아니고 산 문제도 아니고 물건 문제도 아니잖아요. 그냥 물건은 물건일 뿐이고 산은 산일 뿐이고 바다는 바다일 뿐이고 꽃은 그냥 피어 있을 뿐이에요. ‘나는 무슨 색깔이 좋다. 무슨 꽃이 좋다’ 이건 다 자기 문제란 말이에요.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건 내 문제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법륜스님이 훌륭하다 해도 실제 법륜스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자기가 가진 상에 제가 하는 얘기가 딱 맞으니까 좋다고 생각하는 거죠. 자기가 가진 상에 안 맞으면 저는 나쁜 사람이 되거나 싫은 사람이 됩니다.

근데 이 사실을 모르면 누가 ‘아이고, 스님 훌륭합니다’ 하면 착각을 합니다. ‘내가 훌륭해서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대중에게 휩쓸려서 구름 속에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대중의 관심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버리면 땅바닥에 떨어지죠.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때는 한번 ‘내가 뭘 잘못했지?’ 하고 돌아보면 돼요. 큰 문제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건 그의 자유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그 비난에 굴하지 않게 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그 사람이 내가 싫다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이런 관점을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무 예뻐서 싫어하나?’, ‘내가 못 생겨서 싫어하나?’, ‘내가 재주가 많아서 싫어하나?’ 이런 생각도 다 자기 생각이에요. 사람을 만나서 좋으면 내가 좋다고 말하면 되고, 내가 좋다 해도 상대가 싫다고 하면 ‘알았어’ 이러면 되는 거예요. ‘왜 나를 싫어하지?’ 그걸 왜 따져요? 싫다는데요.

누군가에게 아이스크림을 줬는데 안 먹겠다 했을 때 ‘너 왜 안 먹니? 이 맛있는 걸 왜 안 먹니?’ 이렇게 얘기하는 거하고 똑같아요. ‘어떻게 이 꽃을 안 좋아할 수가 있어?’ 이런 얘기하고 똑같단 말이에요. 본인이 싫다는데 그걸 어떻게 해요? 여러분들 애완동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개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 고양이를 싫어할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뱀을 좋아할 수 있어?’라고 해요. 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죠. 고양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개를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건 다 개인의 취향입니다. 일반적으로 개를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다수이고, 뱀은 싫어하는 사람이 다수일 뿐이지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잖아요. 이런 게 다수의 폭력이에요.

법륜스님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조금 다수면 그 사람이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다수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일에 별로 신경 쓰지 말고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면 좋겠어요. 질문자가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이 있는 이유는 ‘사랑고파병’ 때문이에요.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잘나고 싶은 병이에요.

사람들이 얼마나 잘나고 싶으면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하고 자신을 인형처럼 만들어서 남의 관심을 끌려고 하겠어요. 남자든 여자든 몸에 자신이 있으면 몸을 드러내고 머리에 자신이 있으면 머리를 어떻게 해서 관심을 끌려고 하잖아요. 이런 현상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신의 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은 대부분 다 관심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일반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나치면 병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해 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죠? 근데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좋아하면 또 골치 아픕니다. 남자들은 세상 여자들이 나를 안 좋아해서 여러분이 고민인데 세상 여자들이 다 나를 좋아하면 더 골치 아파요. 꼭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 사람이 500살, 1,000살까지 살면 좋을 것 같지만 부작용도 엄청날 거예요. 그처럼 어떤 현상에는 다 장단점이 있는데,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거꾸로 큰 고통이 따릅니다.

저는 요즘 매일 논에 난 풀을 뽑고 있습니다. 풀이 안 나면 좋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풀이 뽑아도 금방 나고, 베어도 금방 자라는 건 자연에 복원력이 있다는 반증이에요. 자연에 복원력이 있으니까 인간도 살 수 있죠. 이런 성질이 없으면 인간은 벌써 죽었어요. 뭐든 잘 썩어야 하는데 플라스틱 같이 썩지 않는 걸 만들어놓으니까 지금 어마어마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까?

한쪽에 너무 치우쳐서 사물을 봐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사귀었다고 합시다. 내가 상대를 싫어하게 되었다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지만, 만약 상대가 나를 싫어하게 되었다면 꼭 나쁜 일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나를 떠나 줘야 내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를 내치면 약간의 책임감이 따르잖아요. 그런데 상대가 알아서 나를 떠나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하겠어요?

‘남편이 죽었다’, ‘아내가 죽었다’, ‘애인하고 헤어졌다’ 이런 이유로 울고불고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는 그 사람이 3년 후에 또 누구를 만나서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가끔 제가 이렇게 말합니다.

‘3년만 지나면 다른 여자, 다른 남자 만나서 희희낙락하면서 나한테 또 자랑하겠다.’

그러면 펄쩍 뛰면서 ‘내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요?’ 하고 항변을 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꼭 3년 후에 그런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길게 보면 다 우스운 얘기예요. 이렇게 연극 같은 짓을 하고 우리가 사는 겁니다.

감정을 억제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감정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지나 놓고 보면 별 일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제가 평소에 관심 종자거든요. 스님 말씀을 듣고 나니 ‘관심을 많이 받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 지나쳤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나치면 안 되고 적당히 하는 연습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작년 초에 꽤 큰 수술을 하고 건강 회복, 진로 고민 등의 이유로 일을 쉬었습니다. 우유부단함과 걱정을 내려놓고 일단 다시 가볍게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나와 다른 입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이지만 거부감이 올라올 때도 많습니다.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 최근 대통령 지지율이 30% 대로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여권 내 분열이나 사사건건 전 정부 탓을 하는 모습을 보니 착잡해집니다.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를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나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마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다음 달 이 시간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무더위를 피해 오후 내내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일요 명상

해가 저물고 저녁 8시 30분부터는 일요 명상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119번째 진행되는 온라인 명상 시간입니다.

지난주에 명상을 마치고 나서 특별히 질문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명상을 하는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명상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빨리어로 ‘닙빠나’라고 하고, 그것을 한국어로 음역 한 것이 ‘열반’입니다. 괴로움은 욕구로부터 일어납니다. 괴로움이 없어지려면 모든 욕구가 멈춰져야 합니다. 무엇을 하고 싶다든지, 무엇을 해야 한다든지, 모든 의도를 멈춰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싶다’ 하는 욕구를 일으키고, 그 욕구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유발합니다.

명상을 하는 목적

그런데 사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형성된 습관에 의해서 반복되고 있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까르마’라고 하는 것은 습관성 또는 중독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까르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까르마는 본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본성도 아니고,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냥 단순히 반복될 뿐입니다. 그러나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소멸 또한 가능합니다.

동물이 동면을 하면 모든 동작을 멈춥니다. 그러나 생명은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숨은 쉽니다. 마찬가지로 명상을 할 때는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멈춰야 합니다. 그러나 정신작용의 가장 핵심인 알아차림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모든 동작은 멈추되 호흡은 유지돼야 하고, 모든 의도와 욕구, 생각은 멈추되 알아차림은 유지돼야 합니다. 당장 우리가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되면 온전하게 휴식이 되고,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을 할 때 의도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굽는다든지,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의도적으로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처럼 나도 모르게 어떤 상념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이어가서는 안 됩니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가는 것은 멈춤이 아니고 그냥 몸만 앉아 있을 뿐이지 정신은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상은 멈춤이고, 멈춤은 완전한 휴식입니다.

자세를 바로 하고, 편안한 가운데 동작을 멈추고, 생각도 멈춥니다. 좋은 생각이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거기에 생각을 더해서 나가지는 않습니다. 한가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그러나 코끝에 집중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명상을 잘해야겠다’ 이런 욕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곧바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탁, 탁, 탁!

명상을 마치고 나서 스님이 실시간 채팅창에 올라온 소감을 직접 읽어준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밤 10시가 다 되어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내일은 오전과 저녁에 전법활동가 법회를 생방송하고, 오후에는 인도 성지순례 준비회의와 정토회 기획위원회 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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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스님 감사합니다

2022-11-03 09:31:36

고광남

사람들이 저를 싫어해요
- 상대가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건 그의 자유지 내권리가 아님
- 사람들이 비난할때 `내가 뭘 잘못했지? 돌아보면 돼고 큰 문제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수 있다. 그건 자유다.
- 뱀은 싫어하는 사람이 다수 절대적인 사실 아님
-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사랑고파병

2022-07-24 20:13:19

고광남

명상의 목표
-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
- 괴로움이 없어 지려면 모든 욕구가 멈취져야 한다

명상을 하는 목적
- 모든 동작은 멈추되 호흡은 유지,
- 모든 의도 욕구, 생각은 멈추되 알아차림은 유지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해주시는 법륜스님 감사합니다

2022-07-24 20: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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