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7.9. 천일결사 기도, 논매기, 서원행자 신청자 교육
“이렇게 하면 인생 문제가 한 번에 정리됩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종성, 예불,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을 했습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그리고 오늘 읽을 경전을 함께 독송했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일에 유의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에서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이르는 곳마다 슬픔이 있을 뿐이다.

계율을 지키는 일에 유의하는
신중한 사람은
세상에서는 명예를 얻고
그는 이르는 곳마다 즐거운 일을 만난다.”

  • 실라바트 비구

천일결사 기도를 마친 후 경전에 대한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악을 막는 길입니다. 즉, 고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길입니다. 이를 두고 악을 막는다고 하여 ‘지악(止惡)’이라고도 하고, 악을 응징한다고 하여 ‘징악(懲惡)’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악(惡)이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손해 끼치는 행동이 모두 악에 속합니다. 이런 행위는 멈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율을 마치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여기곤 합니다.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공동의 이익을 위해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서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요.

비난을 받지 않고 명예를 얻는 길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면 비난을 면할 수 없고, 결국 과보가 돌아와서 고통을 면할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계율을 지키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명예를 얻습니다. 즉, 비난을 받지 않고 칭찬을 받는다는 의미죠.

옛말에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을 멈추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잡초처럼 뽑기가 어려워집니다. 잡초가 어릴 때 호미로 긁어내면 금방 없어집니다. 그걸 제때 손보지 못해서 무성하게 자라게 되면 하나를 뽑는 데도 힘이 많이 듭니다. 또 제때 뽑지 못하면 수백, 수천 배의 열매가 떨어져서 더욱 무성해집니다. 때에 맞춰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처럼 악을 멈추는 것이 계율입니다.

우리 삶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세 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이를 사랑으로 따뜻하게 보듬어서 심리적 안정을 주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 건강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를 세 살 때까지 제대로 돌보지 못하거나, 아이가 어리다고 부모들이 싸우거나 짜증을 내면 아이가 심리적 압박과 불안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가 자라서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재주가 있어서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늘 심리가 불안하고, 쫓기고, 분노에 차있어서 인생이 행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 아이에게 천금을 주는 것보다, 세 살 때까지 따뜻하게 돌봐주는 게 좋습니다. 뭘 특별히 잘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강아지 돌보듯이라도 따뜻하게 돌봐주는 게 아이에게 좋습니다. 이것이 아이에게 부모가 때맞게 해 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늘 ‘때를 아소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농사를 지어봐도 우선 처음 심을 때 잘 심어야 합니다. 요즘 제가 논에서 뽑고 있는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논에 물을 가득 채워서 모를 심어야 피가 물속에서 싹을 틔울 수 없는데, 물을 충분히 채우지 않거나, 논을 고르게 하지 않아서 땅에 높낮이가 생기면 피가 싹을 틔우고 무성해집니다. 설령 피가 싹을 틔우더라도 어릴 때 뽑았으면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는 잘 보이지도 않고 다른 일로 바빠서 시기를 놓치고 나니까 지금은 무성해진 피를 뽑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최근 피가 심각했던 한 논에는 무려 50명이 들어가서 피를 뽑았습니다. 며칠 지나서 다시 보면 또 뽑을 게 있을 거예요. 또 다른 논은 그만큼 심각하진 않았지만 피가 무성해서 최근 일주일 내내 아침마다 가서 피를 뽑는데도 아직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20명의 봉사자가 와서 같이 울력을 하려고 합니다. 봉사자 20명이 와서 같이 하면 저 혼자 3주 동안 하는 것과 비슷해요.

농사꾼이 이렇게 일을 하면 제대로 농사짓기가 어렵죠. 이게 다 때를 놓쳐서 생긴 일입니다. 왜 때를 놓쳤는가 하고 원인을 찾아보면, 우선 우리 대중이 농사에 대해 잘 몰랐던 측면이 있습니다.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하고, 모를 심는 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 일을 진행하다 보니 일이 많아졌어요. 유기농을 하고자 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가장 큰 부분은 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일손 부족입니다. 일손이 필요할 때 공급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일손 공급이 조금 불안정합니다. 주말에는 일손이 많은 편 이지만, 평일에는 거의 없다 보니까 필요한 일손을 맞추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농사를 맡은 행자들도 농사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수련과 행사 등 다른 일도 함께 진행하다 보니까 때를 놓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되고,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일이 두 배, 세 배가 됩니다. 결국 적절한 때를 놓쳐서 그렇습니다.

인간관계도 오해가 생겼을 때 초기에 해명하고 풀면 금방 해결될 일도, 마음이 꽁해서 상처가 된 다음 풀려고 하면 잘 안 풀립니다. 간단하게 사과 한 마디만 하면 해결될 일도 나중에는 엎드려서 절을 해도 안 됩니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는 꼴이죠.

우리 인생이 늘 이렇습니다. 우리 인생도 때를 놓치지 말고, 적절한 때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꼭 시간적인 부분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늘 주어진 조건에서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걸 말해요.

이처럼 악이라는 건 가능하면 생겨나지 않도록 하고, 설령 생겨나더라도 초기에 제압해야 합니다. 선이라는 건 되도록 일어나도록 하고, 한 번 일어난 건 계속 키우도록 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선은 권하고 악은 징벌한다’는 의미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고 하고, 또 ‘악은 멈추고 선은 닦아야 한다’는 의미로 지악수선(止惡修善)이라고 합니다.

나쁜 것은 바로 멈출 줄 알아야 하고, 좋은 것은 꾸준히 닦아 나가야 합니다. 나쁜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은 큰 고통이 따르고 죄가 됩니다. 좋은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좋은 것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윤리, 도덕은 좋은 것을 꼭 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은 것에 대한 부담과 거부반응이 있습니다. 누군가 좋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좋은 일을 하면 칭찬을 해줘야 합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칭찬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히 멈추어야 하는 일입니다. 오히려 나쁜 일을 하면 비난받아야 할 일입니다. 이런 관점을 분명히 해서 생활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일정 잘 보내시고, 저는 오늘도 논에 가서 피를 뽑도록 하겠습니다.” (웃음)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방송실을 나와 작업복을 갈아입고 행자들과 함께 논으로 향했습니다.

“봉사자들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피를 뽑아 놓읍시다.”

어제까지 뽑은 곳에서부터 한 사람당 세 줄씩 맡아 일렬로 서서 피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줄마다 피가 많기도 하고 적기도 했습니다. 피로 꽉 찬 줄에 선 행자가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 줄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피가 많네요.”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행자님은 복이 많네요. 줄을 잘 섰어요.”

스님과 행자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강해졌습니다. 모에 맺힌 이슬과 땀으로 옷은 점점 젖어들어갔습니다.




스님은 제일 먼저 논 끝에 다다랐습니다.


“스님,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하셨어요?”

“피가 적었어요.”

스님은 되돌아 복이 많은 행자가 피를 뽑고 있는 반대편에서 피를 뽑았습니다. 행자를 만날 때까지 계속 피를 뽑았습니다.

모두 맡은 만큼 피를 다 뽑자 바닥에 두었던 피를 거둬서 논둑에 펼쳐놓았습니다.


8시 30분이 되자 부산울산지부와 대구경북지부에서 봉사자 16명이 왔습니다. 행자들은 발우공양을 하기 위해 서둘러 두북수련원으로 돌아가고 스님은 남아서 봉사자들과 함께 계속 피를 뽑았습니다.

피를 뽑는 사람은 논으로 들어가고 거사님 네 분은 논둑을 예초했습니다.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먼저 피가 무엇인지, 피를 어떻게 뽑는지를 알려주고 세 줄씩 자리를 정해 서서 피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논에 남은 피를 다 뽑았습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6일 동안 계속되었던 피 뽑기를 드디어 마쳤습니다. 이제 두 번째 논이 끝났습니다.

논을 나와 느티나무 아래에서 한숨 돌린 후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함께 해준 봉사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끝냈습니다.”

“스님, 이제 피 뽑기는 끝난 건가요?”

“우리가 농사짓는 논이 8개예요. 이제 2개 끝났어요. 또 오세요.”(웃음)

봉사자들을 배웅하고 스님은 향존법사님과 함께 남은 논을 둘러보며 피가 얼마나 났는지, 어느 논의 피를 먼저 뽑을지 살펴보았습니다.



11시가 넘어서 울력을 마쳤습니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점점 강하게 내리쬐기 시작했습니다.

대중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스님은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오래전에 스님이 안내하는 인도성지순례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인연이 된 비구니 스님 일행이 두북 수련원을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비구니 스님 일행과 차담을 나누며 지역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비구니 사찰을 성심껏 운영해 온 것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북 수련원 곳곳을 둘러보며 이곳 시골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소개했습니다.

“여기는 재활용 센터입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전국에 170여 개의 법당을 철거하면서 나온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어요. 온갖 물건들이 다 있습니다.” (웃음)

운동장 맞은편에 새로 만든 꽃밭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는 대중들이 주말마다 와서 꽃밭 가꾸기를 하는 곳이에요. 어느 사찰에서 벗겨낸 기와를 가져와서 재활용을 했습니다. 벽돌도 버리는 걸 재활용한 거예요.”

“요즘 세상에 스님처럼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웃음)

“저희도 시행착오를 많이 하고 있어요. 요즘은 논에 물 조절을 제대로 못해서 피가 엄청 자라는 바람에 매일 피를 뽑고 있습니다. 시기를 잘 맞춰서 제때에 피를 뽑았으면 그나마 덜 할 텐데, 시기를 놓쳐서 피가 이만큼 자란 후에 뽑으려니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부처님께서도 ‘때를 아소서’ 그러셨잖아요. 농사를 지어보니까 시기를 맞추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웃음)

운동장을 한 바퀴 돈 후 비구니 스님 일행에게 얼마 전 수확한 햇감자를 선물하고 헤어졌습니다.

낮에는 뙤약볕을 피해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서 방송실 카메라 앞에 다시 자리했습니다.

삼귀의와 수행문을 함께 낭독한 후 제2차 서원행자 신청자 교육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서원행자 신청자 교육생 41명이 화상회의 방에 모두 입장하자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정토회에서 서원행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정토회의 회원은 후원회원과 회원으로 나뉩니다. 회원에는 일반회원과 전법회원이 있습니다. 전법회원 안에는 발심행자, 서원행자, 결사행자가 있습니다.

전법회원은 다른 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법을 전하고 안내할 수 있는 역량과 인격을 갖추어야 하고,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만큼 발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발심행자’라고 부릅니다.

커다란 원(願)을 가진 사람들, 서원행자

발심행자는 자기 생활이 바쁜 와중에 법을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발심행자보다 많은 시간을 내서 상근하다시피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의지가 있는 사람, 또 그런 역량이 되는 사람이 ‘서원행자’입니다. 서원행자는 이 땅에 정토를 이루는 것을 내 생의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로 둔 커다란 원(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서원행자가 되면 어떤 역할이 주어지게 되고,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자세히 이야기한 후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여섯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정토행자의 서원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부처님을 삶의 모범으로 삼으니까 마음이 무거워져요

“정토행자의 서원 중 두 번째 내용인 ‘부처님과 보살을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는다’는 부분이 평소에도 무겁게 다가왔는데, 교육을 받으면서 조금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어떤 관점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부처님 당시 출가수행자는 집을 떠났습니다. 집을 떠났다는 의미는 첫째, 가족관계를 버렸다는 뜻입니다. 둘째, 직업과 지위를 모두 버렸다는 뜻입니다. 셋째, 기존의 가치관을 모두 내려놓았다는 뜻입니다.

출가란 그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양반, 상놈이라는 생각도 내려놓고, 남자, 여자라는 생각도 내려놓고, 왕, 신하라는 생각도 내려놓고, 재산이 있다, 없다는 생각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삶의 기준이 생존하기 위한 가장 기본 조건인 ‘먹으면 된다’, ‘걸레 같은 천조각이라도 걸치기만 하면 된다’, ‘어디든 눈감고 잠잘 수 있으면 된다’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토끼가 사는 데 걱정이 없고, 다람쥐가 사는 데 걱정이 없듯이, 사람도 사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삶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 바탕 위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나아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출가하지 못하는 사람도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직장을 갖고, 지위를 갖고, 결혼을 하고도 수행을 할 수 있어요. 대신 수행자라면 꼭 지켜야 할 계율을 알려주셨습니다.

첫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건 안 됩니다.
둘째,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건 안 됩니다.
셋째,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의 의사에 반해서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성추행이나 성폭행도 포함됩니다.
넷째, 어떠한 경우에도 말로 남을 속이는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욕설도 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어떠한 경우에도 취하거나 중독성 성분의 음식을 섭취하지 않습니다. 설령 섭취하더라도 취하거나 습관성 중독이 될 정도로 섭취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이 다섯 가지 계율이 오계입니다. 나아가 세 가지 계율까지 더 하면 팔계라고 합니다.

여섯째, 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일곱째, 아무리 지위가 높더라도 교만해서는 안 되고 겸손해야 합니다.
여덟째,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를 지킨다면 직장을 가져도 괜찮고, 지위를 가져도 괜찮고, 결혼을 해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재가 수행자의 원칙입니다.

부처님과 보살을 모델로 삼는다고 해서 오늘부터 당장 다 떨어진 옷을 입으라는 게 아닙니다. 적어도 옷 입는 것을 가지고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떠한 옷을 입어도 수행자보다는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어떻게 불평을 하겠어요? 먹는 것으로 불평할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얻어먹는 것보다는 좋은 음식을 먹고 있잖아요. 자는 것으로 불평할 일도 없습니다. 어디서 잠을 자든 동굴이나 나무 밑에서 자는 것보다는 좋은 곳에서 자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삶을 모델로 삼으면 내가 현재의 삶에 대한 불평이 사라집니다. 부처님은 이보다도 못한 음식을 먹고, 이보다도 못한 옷을 입고, 이보다도 못한 곳에서 잠을 잤는데,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이보다 더한 것을 추구하겠어요. 그러니 부처님과 보살을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내가 괴로울 일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부처님과 보살처럼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그 길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내 삶에 아무런 불평 거리가 없어집니다.

집을 떠나는 삶을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 결혼생활을 해도 된다고 길을 열어줬는데 거기에 무슨 불평이 있을 수 있겠어요? 수행자라면 원래 집을 떠나서 살아야 하는데, 아내나 남편과 함께 사는 길을 열어줬는데도 다른 남자나 다른 여자를 구한다고 하면 조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적어도 수행자라면, 재산을 다 버리고 출가하지는 않더라도 가진 재산으로 사치를 부리며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라면 지위를 버리지는 않더라도 지위를 가지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수행자라면 어차피 버릴 지위와 재산인데, 그게 없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버릴 건데 지위나 재산을 받아서 뭐하겠어요? 안 주면 버릴 것도 없으니 좋은 겁니다.

그러니 승진에 목매다는 건 수행자의 관점이 아닙니다. 승진을 시켜주면 기꺼이 그 역할을 하지만, 승진을 못했다고 기가 죽거나 하면 그건 수행자가 아니라 그냥 세속 생활을 하는 겁니다.

보살은 자기 재산을 쓰고, 자기 몸을 내주고, 자기가 고통을 받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당장 그렇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보살을 모델로 삼는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일은 없습니다.

이처럼 부처님과 보살을 모델로 삼으면 인생에 불평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삶을 살면서 불평이 많고,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울까요? 부처님과 보살을 모델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하고, 집을 더 크게 지어야 하고, 맛있는 것을 더 먹어야 하는 걸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으니까 불평, 불만이 생기고,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정토행자의 서원에는 부처님과 보살의 삶을 모델로 삼으라고 하지, 그렇게 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모델로 삼으면 불평, 불만도 없어지고, 괴로울 일이 싹 없어집니다. 감사할 일 밖에 없습니다. 수행자가 되려면 원래 집을 떠나야 하는데 집에서 살게 해 주고, 직장도 그만둬야 하는데 직장에 다니게 해 주고, 얻어먹어야 하는데 맛있는 걸 사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불만을 가질 일이 있겠어요?

출가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수행자가 되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생활을 허용하는 대신 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에 불만을 가진다는 건 벌써 수행자의 관점이 아닌 세속적 관점으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관점만 제대로 잡으면 지금 이대로 세상에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다리 아프게 절을 할 필요도 없고, 허리 아프게 명상을 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할 일밖에 없어요. 부처님과 보살을 모델로 삼는 건 좋은 일인데 왜 부담을 느낄까요? 관점을 못 잡고 있기 때문에 인생이 복잡한 거예요. 담배를 안 피우면 되는데, 계속 콜록거리며 담배를 피우면서 ‘이걸 어떻게 끊습니까?’하고 질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담배를 안 피운다면 좋은 담배, 나쁜 담배를 구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누가 좋은 담배를 피우든, 나쁜 담배를 피우든, 어차피 몸에 나쁜 건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부자든, 지위가 높든, 그게 뭐가 부러워요?

이런 건 다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다 갖다 버리라는 건 아니에요. 수행자라면 원래 버려야 하지만, 가지고 있도록 허락해 줬는데도 불만을 가지는 건 수행적 관점에 서 있지 않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세속적 관점에서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고,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그건 세속의 길, 신자의 길이지, 수행자의 길이 아닙니다.

정토회에서도 여러분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건 관여하지 않습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생활을 하는 건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라면 승진에 떨어졌다고 울고불고할 일은 아니라는 거예요. 지위를 준다고 해도 수행자라면 버려야 하는데, 왜 그걸 못 얻었다고 괴로워해요? 그냥 시도해보고 되면 다행이고, 안 돼도 그만이죠.

이런 관점이 부처님과 보살을 모델로 삼는 관점입니다. 부처님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보살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사는 삶에 불평을 하지는 않는 겁니다. 이건 쉬운 길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만 제대로 잡히면 단식을 할 필요도 없고, 절을 많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근본을 놓치면 자꾸 절하는 횟수 같은 형식을 가지고 수행을 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인생 문제를 한 번에 정리하는 방법

수행자라면 첫째, 연기법이라는 세계관이 잡혀야 합니다. 둘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인생관이 잡혀야 합니다. 인생관만 잡히면 세상살이가 쉬워집니다. 토끼도 살아가는데 왜 사람이 사는 게 어렵겠어요? 그냥 밥 먹고 살면 되는데, 왜 사는 게 어렵다고 그래요? 저도 단식을 해보니까 70일 동안 안 먹고도 살아져요. 그런데 겁날 게 뭐가 있어요? 부부가 헤어지거나 죽는다고 해도 그게 뭐 그리 울고 불고 할 일이에요? 원래도 혼자였잖아요.

이런 관점을 한 번에 정리하는 게 ‘부처님과 보살을 우리 삶의 모델로 삼는다’는 구절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모든 인생 문제가 한 번에 정리됩니다. 이 부분이 부담스럽게 다가온다면 아직 수행자의 관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밥을 얻어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혼하고 집을 떠나라는 것도 아니고, 지위를 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모든 걸 다 버리는 삶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서 자도 뭐든 다 만족스럽게 다가옵니다. 뭐든지 다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겁니다.

제가 오랫동안 재가수행자와 출가수행자 모두 지켜보았지만 대중들이 이 관점을 잘 못 잡습니다. 부처님의 출가 정신에 대한 관점이 잡히지 않으면 절에 2-30년을 살아도 공부에 아무런 진척이 없습니다. 늘 먹는 걸로 전전긍긍하고, 입는 걸로 전전긍긍하고, 자는 걸로 전전긍긍합니다. 생활이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또 그걸 개선할 수도 있지만, 그걸 가지고 불평을 한다면 그건 수행자의 관점이 아닙니다.”

이 외에도 서원행자 교육 과정에서 생긴 의문점과 고민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오후 5시 30분이 되어서 대화를 모두 마쳤습니다. 서원행자 교육생들은 소감 나누기 시간을 이어갔고, 스님은 서둘러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빨리 논에 피 뽑으러 갑시다.”

스님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마뚝논으로 향했습니다. 방송실에 앉아서 화면과 소리를 조정하던 행자들을 비롯하여 두북 공동체 대중들 모두가 스님을 뒤를 따라 논으로 향했습니다.

“옛날에 이 논 아래에 말을 묶어두었다고 해서 이름이 마뚝이라고 해요. 날씨가 선선해서 일하기 좋네요. 해지기 전까지 마칩시다. 이 논에는 피보다 풀이 많아요.”

끝에서부터 세줄 씩 자리를 정하고 피를 뽑기 시작했습니다.

“줄을 잘 서야 해요. 피가 많은 사람이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아침에 행자님들이 피 뽑고 지나간 자리를 보니 모가 다 눌려있었어요. 엉덩이로 모를 누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뽑아주세요.”



허리가 아픈 사람은 피를 거둬서 논둑에 가져다 놓는 일을 했습니다.

바람이 선선히 불어와 일하기 좋았습니다. 어제 내린 비로 땅이 촉촉해져 풀도 여느 때 보다 쉽게 뽑혔습니다. 논 끝까지 갔다가 다시 세줄 씩 맡아 되돌아 반대편 논 끝으로 가며 풀을 뽑았습니다. 이렇게 네 번을 한 끝에 풀을 다 맸습니다.



“다 했어요! 나갑시다.”

논 밖으로 나와 시원한 수박과 미숫가루를 한 대접씩 먹고 울력을 마쳤습니다.

해가 산 너머로 지고 있었습니다.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저녁예불을 하고 공동체 대중들은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스님은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도 논에 피 뽑기를 계속 이어갑니다. 아침 일찍 대중들과 함께 논매기를 한 후 통일의병 행복광장에 참석해 즉문즉설을 하고, 일요명상 생방송을 하며 지난 한 주를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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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남

계율을 지키는 것
- 악(다른이에게 피해를 주는것)을 막는길, 고통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길

"때를 아소서"
- 적절한 때를 알며, 늘 주어진 조건에서 적절한 대응

2022-07-14 13:25:31

고광남

수행자의 관점
- 팔계를 지키고
- 부처님과 보살을 모델로 삼으면 감사할일 밖에 없다
부처님 출가(가족, 직업, 지위, 기존의 가치관을 모두 버리고)
부처님의 삶의 기준(어떤것이라도 먹고 걸치고 잠만 자면 된다)
보살(자기 재산, 몸, 고통등을 희생하면서 다른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

비록 정진이 느리더라도 꾸준히 수행하겠습니다

2022-07-14 13:29:10

고경희

수행자

2022-07-14 08: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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