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5.26 틱낫한 추모 씨네토크 즉문즉설,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즉문즉설
“대화할 때 자꾸 상대를 가르치게 되는데 어떡하죠?”

안녕하세요. 오늘도 서울 정토회관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평화재단으로 이동해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했습니다. 어제 오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일 순방을 마치고 떠나자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3발 쏘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북한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인도적 지원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현재 한반도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전문가들과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곧바로 차를 타고 이동해 광화문 씨네큐브에 도착했습니다. 틱낫한 스님이 프랑스 보르도 근교에 설립한 명상 공동체 플럼 빌리지의 일상을 기록한 다큐 영화 <나를 만나는 길> 제작사에서 스님을 초청해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나를 만나는 길> 다큐 영화가 9시 30부터 상영을 시작했습니다. 플럼 빌리지의 자연 풍경 속에 틱낫한 스님의 수행 초기 명상록 속 문장이 내레이션으로 깔려서 그런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점점 자신의 내면에 더욱 집중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북한 전문가 모임을 마치고 오느라 영화의 중간 부분부터 관람을 했습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자 스님이 뜨거운 박수 속에서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객석이 거의 꽉 찬 상태에서 스님도 코로나 이후 정말 오랜만에 오프라인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스님이 영화를 본 소감과 틱낫한 스님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화 잘 보셨습니까? 저는 회의가 있어서 조금 늦게 도착해서 영화를 같이 봤는데요.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틱낫한 스님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베트남 중부 출신인데요. 베트남 불교는 호찌민이 있는 남쪽은 테라밧다(Theravāda) 불교권이고, 하노이가 있는 북쪽은 대승불교권입니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은 소승과 대승 또는 테라밧다와 선불교를 다 경험하신 분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한국을 방문해서 서옹 스님을 뵙고 나눈 이야기에서, 두 분 다 임제의 법손이라고 밝혔습니다. 선불교에 임제종이란 게 있는데 틱낫한 스님은 임제종 스승에게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래서 선불교의 수행과 테라밧다의 위빠사나가 결합된 수행을 보여주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틱낫한 스님은 한국 선불교처럼 권위주의적인 모습이 아니라 테라밧다 불교의 고요함과 선불교의 직관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또 틱낫한 스님은 베트남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미국으로 가서 반전운동을 하셨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참한 학살과 비인간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셨고 결국 미국 안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 전쟁이 종결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엄청난 사람들의 희생이 따르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길은 러시아 안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서 이 부당한 전쟁을 종식시키는 거예요. 그래야 가장 적은 희생을 치르고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틱낫한 스님의 행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불교는 자기 마음만 닦고 내면세계만 탐구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차별을 철폐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불교를 Engaged Buddhism, 참여불교라고 부릅니다. 틱낫한 스님은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참여불교를 행한 세계적 지도자셨습니다. 저도 참여불교 운동을 하기 때문에 국제 참여불교 행사나 미국에서 열리는 기독교-불교의 대화, 세계 종교회의 모임에서 틱낫한 스님을 몇 번 뵈었습니다. 평소에 존경해온 틱낫한 스님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상영되는 것에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지원하는 차원에서 오늘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틱낫한 스님의 침묵이 곧 우레와 같은 법문이었다고 했듯이 제가 더 덧붙이면 사족이 될 것 같네요.

여러분이 영화를 본 소감을 나누어 주셔도 좋고, 궁금한 점을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 안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손을 들고 영화를 본 소감과 더불어 자신의 고민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관객들이 다양한 소감들을 말하는 가운데, 한 명은 영화 속에 중생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구절이 감동적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영화에서 가장 감동받았던 문장은 ‘중생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감명이 깊었습니다.”

스님이 이에 대해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듣는 사람은 ‘중생을 위해서 산다’는 말이 감동이긴 하지만, 자기 삶에 있어서 ‘누구를 위한다’는 생각을 내려놔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남이 평가할 때 ‘저분은 중생을 위해서 사신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산다’라는 생각을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누구를 위해서 산다’는 생각을 놓지 않으면 괴로움이 뒤따라요.

항상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꿀벌이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는 것은 꽃을 위한 게 아니에요. 자기가 꿀을 먹으려고 하는 거죠. 그런데 꿀벌이 꽃을 해쳐가면서까지 꿀을 먹지는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꽃의 수정을 도와줘서 꽃에게도 도움이 돼요.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남을 해치고,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송받는 사람은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희생을 칭찬할지 몰라도, 우리가 남을 해쳐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기를 해쳐서도 안 됩니다. ‘내가 소중하듯이 남도 소중히 해라’ 이 말속에는 남이 소중하듯이 자신도 소중한 존재라는 뜻도 있습니다. 남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면 자기도 해치지 말아야 하는 거예요.

자기에게 좋고 남에게도 좋은 길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를 희생해서 남을 돕는 길은 윤리 도덕적으로는 훌륭할지 몰라도 수행적 관점에서는 괴로움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희생을 할 때는, 누가 알아주지 않고 결과도 나빠지면 배신감이 들고 헛살았다 싶은 생각까지 들어요. 비록 나라를 위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더라도 그 헌신한 과정 자체가 자신에게 행복이 되고, 보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독립운동한 것을 나중에 남이 알아줘야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찾아와요.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좋습니다. 다만 남을 위해서 산다고 너무 강조하면 여러분들 인생에 무거운 짐을 지게 돼요. 나중에 자기 헌신에 대해 알아주지 않으면 원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구를 위해서 산다’라는 생각은 수행적 관점에서 조금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의 인생 고민에 대해 질문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상대방과 얘기를 할 때 자꾸 훈계하는 식이 된다며 어떻게 하면 개선을 할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대화할 때 자꾸 상대를 훈계하는 식이 되는데, 어떡하죠?

“저는 50대 중반인데요. 점점 말이 많아지고 상대방과 얘기를 할 때 자꾸 훈계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게 느껴집니다. 이걸 누르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질문 내용을 듣고 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지고, 질문자도 웃음을 보였습니다. 스님도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누르면 터질 텐데요. 눌렀다가 한꺼번에 터지면 피해가 더 크죠. 그냥 조잘조잘하세요. (모두 웃음)

그런데 질문자가 알면 얼마나 알겠어요. 이 우주 천지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을 1억이라고 하면, 질문자가 아는 것은 하나만큼도 안 돼요. 그러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는 것이 없다’ 이걸 항상 명심하는 게 필요해요.

‘가르치려고 하지 않겠다’ 이렇게 각오하고 결심하지 말고, ‘나는 아는 게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결심을 한다고 해서 결심한 대로 잘 안 돼요. 안 되면 또 ‘나는 문제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아는 게 없다’ 이렇게 해보세요. 말이 입에서 탁 나오려고 해도 ‘참, 나는 아는 게 없지’ 이렇게요.

틱낫한 스님이 만든 플럼빌리지의 첫 계율도 ‘모른다’입니다. 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모른다, I don’t know’라는 자세입니다. ‘모른다’라는 입장이 가장 중요해요. 이 관점에 서면, 말도 적어지고 주장도 적어집니다. 가르치는 것은 적어도 없어져요. 그런데 사람들이 소감이나 느낌을 물을 때는 아는 걸 대답해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 소감을 그냥 말하면 돼요. 내 의견을 그냥 말하는 거거든요. 여기에 고집은 없습니다. 가르치는 것도 없고요. 그냥 내가 느낀 대로 가볍게 말하면 되거든요.

제가 즉문즉설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뭘 좀 안다고 생각하면 여러분이 내가 모르는 것을 질문할까 봐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원래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관점으로 대화를 하니까 그냥 여러분들이 묻는 대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질문자도 ‘나는 답을 얘기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관점을 바꾸는 게 좋아요. ‘모른다’를 화두로 삼으세요. 입에서 말이 나오려고 하면 ‘모른다’를 명심해보시기 바랍니다.”

총 여섯 분이 영화를 본 소감을 이야기하며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열린 오프라인 즉문즉설은 초여름처럼 생기로 가득했습니다. 손 든 분들이 아직 남았지만 약속한 시간이 지나 아쉽게도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고난, 삶이 주는 성장의 기회

“여러분 인생을 글로 쓴다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어려운 시절 일 년은 책 한 권 나올 정도로 이야기가 많지만, 좋은 시절은 30년도 ‘좋았다’ 이 세 글자로 끝입니다. 어떤 소설을 읽거나 어떤 영화를 봐도 어려운 사건이 계속 터지면서 스토리가 전개되죠. 마지막은 ‘그래서 잘 살았다’ 이걸로 끝이에요. 30년 세월도 한 줄 밖에 쓸 게 없어요.

고난은 배움의 좋은 기회가 됩니다. 안 되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삼기보다 회피하고 주로 상처를 입는 것 같아요. 상처 입지 마시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기 깨어있다면 살아있는 것으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즉문즉설을 마치고 스님은 영화 제작사 관계자들과 잠시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차담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차를 타고 서울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3시간 30분 동안 달려 오후 5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교문 앞 담장에는 빨간색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해가 지자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강의를 하기 위해 저녁 8시 정각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과목 중 실천적 불교사상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학생들이 공부하고 실천해왔던 것들을 토대로 소감을 나누고 의문이 있으면 질문하는 시간입니다.

그동안 8300여 명의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이 따로따로 모였는데, 오늘은 다 한 자리에 모여서 함께 하는 날입니다. 먼저 스님이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우리 눈에 8300여 명이 다 보이지는 않지만, 2022년 봄 불교대학 입학생 전원이 한 자리에 앉아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함께 대화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섯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강의 중에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즐거움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여자 친구와 헤어져야 하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여자 친구와 헤어져야 하나요?

“스님께서 법문 중에 고(苦)와 락(樂)에 대해 말씀하시며 ‘현명한 자는 고(苦)도 버리고 락(樂)도 버린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법문을 들은 이후로 의문이 생겼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직장에서 경계에 부딪혀서 괴로움을 느낄 때 ‘내가 월급을 받아서 하고 싶은 것을 누리기 위해 직장을 다니고 그에 따른 고통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와 락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인가요?

또한 여자 친구를 만나면 행복하지만, ‘앞으로 이 여자와 맞춰나가는 고통, 혹은 이별이나 사별의 고통이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자를 만나지 않는 것이 고(苦)도 버리고 락(樂)도 버리는 것인가요?”

“괴로움 없이 살기 위해 직장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는 것이 출가입니다. 질문자도 버리고 출가를 하면 돼요. 결혼도 자기가 원해서 하는 것이고, 직장도 자기가 원해서 다니는 거예요. 결혼하고 직장 다니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놓아버리면 돼요.”

“놓아버리는 것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역경이 있으면 극복해야 된다고 말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괴로움도 버리고 즐거움도 버리는 것은 역경을 극복한다는 것과 약간 상반되지 않나요?”

“버려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버리면 극복할 게 없어지잖아요. 극복할 게 있어야 극복을 하죠. 놓아버리면 극복할 게 없어집니다. 결혼을 안 했는데 아내 때문에 괴로울 일이 뭐가 있고, 자식 때문에 괴로울 일이 뭐가 있겠어요. 다른 것 때문에 괴로울 수는 있지만 적어도 아내나 자식 때문에 괴로울 일은 없잖아요. 직장을 안 다니면 상사 때문에 괴로울 일은 없어지잖아요. 원인 자체를 없애버렸으니까 문제가 일어날 일이 없다는 겁니다. 결혼을 안 해버리면 결혼 생활의 즐거움도 없고, 아이를 키우는 즐거움도 없는 반면 아이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도 없어집니다. 그러니 버려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가 직장에 다니고 싶다면, 그때는 ‘장애를 극복하라’ 하는 것이 과제가 됩니다. 직장을 다녀서 얻는 재미를 누리려면 직장 상사가 야단치는 정도는 ‘월급 받으려면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지’ 이렇게 수용하는 것이 극복하는 방법이에요. 결혼해서 사는 재미를 누리려면 상대와 어느 정도 맞추는 노고는 해야 합니다. 어떻게 공짜로 먹으려고 그래요. 마찬가지로 애들 크는 재미를 맛보려면 애를 키우는 여러 가지 노고를 해야죠.”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이대로 가면 사실은 팍 출가하는 길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수준이어서 앞으로 역경을 잘 극복해 보겠습니다.”

“놓아버리면 역경을 극복할 게 없다니까요. (웃음) 결혼을 안 하는데 무슨 극복할 부부 갈등이 있고, 아이를 안 갖는데 무슨 극복할 아이 문제가 있고, 직장에 안 다니는데 무슨 극복할 직장 문제가 있고, 사업을 안 하는데 무슨 장애를 극복할 게 있겠어요. 안 아픈데 무슨 병을 극복할 게 있겠어요.

지은 인연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다

그러나 질문자가 만약 사업을 하겠다면 그에 따르는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극복하는 방법이에요. 결혼을 한다면 서로 맞춰야 할 거 아니에요. 성격이 다르니까요. 애들을 키운다면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애들 수준에 맞춰서 계속 배울 수 있게 도움을 줘야죠. 애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요.

사장이 왜 나를 고용했을까요? 나를 위해서 직장을 마련해줬어요? 아니면 사장이 자기 돈 벌려고 직장을 마련해줬어요?”

“자기 돈 벌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요. 사장은 자기 돈 벌려고 질문자를 고용했기 때문에 질문자가 사장의 돈벌이에 좀 도움이 돼야죠. 그러면 질문자가 돈을 많이 벌어줘야 사장에게 도움이 될 거 아니에요. 질문자가 직장에 들어갔을 때는 사장을 위해서 들어갔어요? 돈을 벌려고 들어갔어요?”

“돈을 벌려고 들어갔습니다.”

“돈을 벌려고 갔으니까 사장도 직원에게 돈벌이가 좀 되게 해 줘야 직원이 붙어 있지, 돈벌이가 안 되면 나가버리겠죠. 그런데 우리는 각자 자기 입장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나는 직장에 가서 내 돈벌이만 생각하지, 사장도 나로 인해서 자기 덕 보려고 직원을 고용했다는 건 생각을 안 하죠. 사장도 자기 돈 벌 생각만 하지, 직원도 자기 돈을 벌러 왔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질문자가 결혼하려는 이유는 뭐예요? 손해 보려고 결혼해요? 결혼해서 덕을 좀 보려고 해요?”

“덕을 좀 보려고 하는 거죠.”

“그렇죠. 마찬가지로 아내도 나하고 결혼할 때는 인물이나 재산이나 여러 모로 봐서 혼자 살 때보다 좀 덕이 될까 싶어서 결혼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서로 덕이 좀 되도록 해줘야 관계가 오래 유지될 거 아니에요. 한쪽에서 계속 손해가 난다 싶으면 ‘결혼 괜히 했네’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자꾸 자기만 덕 보려고 하니까 관계가 오래갈 수 없는 겁니다. 그걸 알면 극복이 되는 것이고, 그걸 모르고 자기만 고집하면 어려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런데 꼭 극복해야 될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결혼을 안 해버리면 문제가 안 생기니까 극복할 게 없어집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좋아요. 괴로움이 싫거든 즐거움도 포기하고, 괴로움을 버리고 싶으면 즐거움도 버리면 돼요. 즐거움을 즐기고 싶거든 괴로움도 감수를 하면 돼요. 괴로움을 거부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지, ‘괴로움을 감수하겠다’ 하는 입장을 가지면 더 이상 괴로움이 안 됩니다. 돈을 빌리고 나서 안 갚으려고 하는데 자꾸 빚쟁이가 돈을 갚으라고 하니까 갈등이 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돈을 갚겠다는 입장을 가지면 아무 문제가 안 되잖아요. 빌린 돈을 갚아주면서 ‘잘 썼습니다’ 이렇게 감사 인사를 하게 됩니다. 내가 돈을 빌렸다는 걸 아니까 돈을 주면서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이지, 내가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모르면 ‘내가 돈을 줬는데 너는 왜 인사도 안 하냐’ 이럴 거 아니에요. 지은 인연을 알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지은 인연을 모르기 때문에 다 원망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명상할 때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편하게 다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 사실 주부이고 제 일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남편도 부모님도 있고 해서 할 일이 언제나 태산입니다. 할 일이 많아도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명상을 하는 건가요?
  • 더 성능이 뛰어난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방산 업체에 일하는 사람들은 계율을 어긴 것이 되나요? 만약에 무기를 개발하지 않아서 적이 약점을 잡아 공격해 국민이 죽는다면 죽인 것을 방관하는 것이 되는데 이것도 그럼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닌가요?
  •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요즘 너무 말을 안 들어서 힘이 듭니다.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고 참느라 밤이 되면 기진맥진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아이가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요?
  • 선거에서 선택되거나 임명된 대표자들이 5계를 크게 위반하고도 떳떳한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솔직히 인과응보가 즉각 나타나면 좋겠다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바르게 보는 것입니까?
  • 불교대학 수업 때 삼귀의와 수행문, 사홍서원을 같이 하는 것은 종교성이 있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을 하는 걸까요?

대화를 다 마치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해 질문한 분도 웃으며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즐거움을 추구하고 괴로움을 달게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음)

스님도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결국 어떻게든 즐거움을 추구하겠다는 얘기입니까?” (웃음)

“둘 다 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때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해보겠습니다.”

“괴로움을 버리려면 즐거움도 버려라. 그런데 수행은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즐거움을 갖고 싶으면 괴로움도 감수해라. 그러면 괴로움이 훨씬 줄어든다. 수업 중에도 여러 번 말씀을 드렸는데 귀담아 안 들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웃음)

마지막으로 스님이 다음 시간부터 배울 내용에 대해 안내해 주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부처님의 삶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얼마 전 EBS에서 일반 국민을 상대로 ‘혁명가 붓다’라는 15회 강의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인간 붓다’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방송 제작자들이 제 강의를 듣고 나서 ‘와, 부처님이 혁명가셨네요’ 이렇게 얘기를 해서 제목이 ‘혁명가 붓다’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다음 시간부터는 이런 길을 연 붓다라는 분이 어떤 분이었고, 그분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생방송이 끝나고 학생들은 교실별로 화상회의 방에 모여 마음 나누기를 이어갔습니다. 방송실을 나오자 밤 10시가 다 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창원 봉림사지로 이동해 답사를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9

0/200

김정은

고맙습니다

2023-02-03 18:31:48

정종숙

감사합니다~^

2022-06-13 13:58:42

사탕구

사장은 자기 돈 벌려고, 나를 고용했구나
이 관점을 잊지 말아야지

2022-06-01 14:5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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