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5.10 정토불교대학 실천적 불교사상 10강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길”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강의를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에 서울 공동체 대중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대중이 스님에게 한 말씀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절에서 생활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한 가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절에서 걸을 때는 가능한 발 뒤꿈치가 닿지 않게 걷거나 뒤꿈치를 앞꿈치보다 늦게 디디거나 해야 합니다. 발 뒤꿈치가 마루에 닿으면 쿵쿵쿵하는 소리가 나게 돼요. 특히 어제는 명상을 생방송하는 중에 위층에서 누가 쿵쿵 딛는 소리가 많이 났거든요. 그래서 자신의 걸음걸이를 알아차려보고 항상 걸을 때 뒤꿈치가 닫지 않도록 하는 연습을 해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친 후 오전에는 외부 일정을 갖고 다시 서울 정토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능한 일찍 두북 수련원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러 서울을 출발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이동하는 중에 휴게소에 잠시 들러 간단히 식사를 한 후 오후 4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8시에 정토불교대학 생방송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화상회의 방에 모두 입장하자 스님도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지난 수업 시간에는 두 번에 걸쳐 누구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 가치인 ‘오계’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재가 수행자의 계율인 ‘팔계’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면 꼭 멈추고 삼가야 하는 것이 다섯 가지 계율, 즉 오계입니다. 오늘은 오계에 이어 세 가지 계율을 더 배웁니다. 이 세 가지 계율은 남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행위들은 아니기 때문에 금지사항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는 행동이고 자칫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 간접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수행자라면 이 세 가지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첫째, 사치하지 말라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 가지로 꾸밉니다. 화장을 하고, 꽃을 꽂고, 패물을 차고,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삽니다. 주어진 형편에 지나칠 정도로 사치를 한다면 우선 경제적으로 낭비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위화감을 줘요. 삶이 당당해지려면 내면이 단단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내면이 허전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외형을 꾸미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면이 허전할수록 겉으로 더 허세를 부리는 거예요. 이러한 사치는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수행자는 검소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단순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격을 통해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해요. 좋은 옷이나 집으로 남의 부러움을 사거나, 화장을 해서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스스로도 위선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마음이 떳떳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늘 외형을 꾸미고 허세를 부립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꾸미는 건 결국 노예근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내면이 허전하다는 걸 말해요. 나아가 지나치게 꾸미거나 사치를 하면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고, 타인에게 위화감을 조성합니다. 게다가 사치는 서로 부추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결국 지나친 소비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애초에 사치하지 말라는 계율은 ‘얼굴을 치장하거나 꽃으로 장식하지 말라’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보통 얼굴 치장을 많이 하고, 꽃으로 장식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했는데, 그 취지는 결국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생활하라는 뜻입니다.

먹을 것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보고 부러워하며 껄떡거리면 ‘극빈’하다고 말합니다. 즉, ‘극빈’은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질 만큼 가진 사람이 스스로 검소하게 살면 ‘청빈’이라고 합니다. 청빈은 ‘깨끗한 가난’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치하지 말라는 계율은 여러분에게 극빈자의 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청빈의 삶을 살라는 의미예요.

수행자와 거지는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속은 다릅니다. 거지는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껄떡거리는 사람이에요. 수행자는 ‘남거나 버리는 것이 있으면 저에게 주십시오’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껄떡거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달라는 ‘구걸’과 남거나 버리는 것이 있으면 달라는 ‘걸식’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당사자의 내면은 천지 차이입니다. 수행자는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껄떡거리지 않기 때문에 없어도 당당합니다. 있으면 오히려 베풀 기회가 있어서 좋습니다. 그렇기에 있고 없고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가진 것이 있어야 한다, 가진 것이 없어야 한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내 삶을 검소하게 살고 좋은 것을 구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있고 없고에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수행하기에 좋고, 있으면 있는 대로 보시하기에 좋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둘째, 교만하지 말라

지위가 높으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걸음걸이가 달라지고, 목과 어깨에 힘을 주고, 잘난 체하게 됩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다른 사람에게 거만을 피우고 타인을 무시하게 됩니다. 이는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건 아니지만 명성이 나빠지고, 타인에게 간접적인 피해를 주게 됩니다. 멸시하는 눈초리로 사람을 바라보거나, 잘난 체하거나, 타인을 무시하면, 그런 대우를 받은 사람은 기분이 나빠집니다.

지위가 높으면 사람은 지위를 자신으로 삼기가 쉽습니다. ‘내가 사장이다, 내가 이사다, 내가 부장이다, 내가 과장이다, 내가 대통령이다, 내가 군수다, 내가 판사다, 내가 의사다’ 하며 거만한 자세를 지닌 사람들은 모두 지위를 자기 자신으로 삼는 경우입니다. 스님들 중에도 가끔 거만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역시 ‘내가 스님이다’ 이렇게 스님이라는 지위를 자기 자신으로 삼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도들 앞에서 거들먹거리거나 큰소리를 치게 됩니다.

종교인이라면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데, 신부, 목사, 스님들 중에서도 간혹 거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우리 신부님’, ‘우리 목사님’, ‘우리 스님’ 이렇게 부르면 마치 자기가 잘난 줄 알고 목에 힘을 주고 거만해지기 쉬워요. 이 계율은 그런 자세를 경계해서 교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계율에 ‘교만하지 말라’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수행자가 교만해진다면 그건 스스로 수행자의 길을 거부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부처님도 이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제자 수행자들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비굴하지 말고 당당하라.’

부처님은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만 하신 게 아닙니다. 돈에 집착하면,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기 쉽고 나보다 돈이 적은 사람 앞에서는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지위에 집착하면,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기 쉽고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 앞에서는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외모에 집착하면, 나보다 잘난 사람 앞에서는 기가 죽고 나보다 못난 사람 앞에서는 우쭐하기 쉽습니다. 기가 죽는다는 건 비굴해진다는 뜻이고, 우쭐한다는 건 교만해진다는 뜻입니다. 지식에 집착하면,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면서 나보다 조금만 모르면 그 사람 앞에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기 쉽습니다. 이렇게 기가 죽는 비굴한 태도나 우쭐하는 교만한 태도는 가만히 보면 다 무언가에 집착할 때 생겨나는 태도입니다.

부처님은 수행자라면 왕 앞에서도 기가 죽거나 비굴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왕에게서 뭔가 얻으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누군가 버리는 음식이 있으면 얻어먹고, 버리는 옷이 있으면 주워 입고,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사는 사람이 상대방이 왕이면 어떻고 거지면 어때요? 내가 상대방에게서 얻으려고 하는 생각이 없는데 그 사람이 부자면 어떻고, 가난하면 어때요?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왕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이건 교만해서가 아니라 당당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반대로 수행자는 밥을 얻으러 다닐 때 가난하거나 낮은 계급의 사람이 밥을 줘도 ‘감사합니다’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건 일체 세상 사람들을 평등하게 본다는 의미입니다.

‘겸손하라’고 하면 어딘가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면 자연스럽게 당당하면서 겸손하게 됩니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나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도 똑같이 대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대부분 지위가 높은 사람 앞에서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지위가 높은 사람을 내가 평등하게 대하면 당당하다고 해요. 사람들은 대부분 지위가 낮은 사람 앞에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지위가 낮은 사람을 내가 평등하게 대하면 겸손하다고 해요. 이렇게 보면 당당할 것도 따로 없고, 겸손할 것도 따로 없습니다. 일체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면 당당하면서도 겸손하게 됩니다.

애초에 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계율은 ‘높은 평상에 앉지 말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인도에는 모임에 귀빈이 오거나 하면 맨 앞 높은 평상에 자리를 마련해주는 문화가 있습니다. 이때 그 지역에서 이름 꽤나 있는 사람은 다 그 높은 평상에 앉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높은 평상에 앉지 말라는 건 그만큼 사람들한테 대접받기를 바라지 말고 겸손하라는 의미입니다.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살라’는 계율이 생활태도, 소비태도에 대한 계율이라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라’는 계율은 사람을 대할 때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계율입니다. 수행자는 어른이든 아이든, 지위가 낮든 높든 사람을 모두 동등한 인격으로 대해야 합니다.

셋째, 향락에 빠지지 말라

세 번째 계율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데서 오는 즐거움, 향락에 빠지지 말라는 거예요. 들뜨는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라는 내용입니다. 현대인들이 아마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율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이 들뜨는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고 있습니다. 즐거움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금방 괴로움으로 바뀌게 됩니다. 또, 향락에 빠지면 손실이 따릅니다. 가산을 탕진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가정불화가 일어나거나 자신의 건강을 해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마음이 들떠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마음이 들뜨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아서 고요 적정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항상 마음이 고요해야 해요. 좋은 일이 생겨도 흥분하지 않고 빙긋이 웃고 넘기고, 나쁜 일이 생겨도 우울해하지 않고 덤덤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늘 이런저런 일이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이에요. ‘소림사’라는 중국 영화에 나오는 방장 스님을 보면 평정심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방장 스님은 절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쳐도 ‘아미타불’,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좋은 소식을 들어도 ‘아미타불’, 이 한마디뿐이에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게 아니라 어떤 일 앞에서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아야 해요. 설령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마음이 긴장되거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아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겁니다. 일어난 일을 대응하는 건 다음 단계에 할 일입니다. 불이 났으면 불을 끄고, 사람이 살아 돌아왔으면 반기면 됩니다.

이처럼 어떤 경우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가무를 즐기지 마라’는 계율로 명시해 놓은 거예요. 춤추고 노래하는 건 남을 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무에 너무 빠지면 자기를 해치고 다른 사람에게도 간접적으로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가무가 아닌 조금 다른 성격의 가무도 있습니다. 명상 방법 중에서 마음을 차분하게 하기 위한 춤 명상도 있고 음악 명상도 있잖아요. 그래서 무조건 춤이나 노래를 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향락을 삼가라’ 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길

오계에 이 세 가지를 더하면 팔계입니다. 오계를 지키면 남에게 해를 주지 않으니까 착한 사람이 될 수 있고, 팔계까지 지키면 존경받을 만한 모범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오계와 팔계는 출가수행자가 아닌 재가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입니다. 출가수행자는 이미 자기 재산과 지위 등 모든 걸 버리고 절에 들어왔기 때문에 팔계는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출가수행자 중에도 팔계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어요. 그래서 출가수행자도 오계와 팔계에 많은 계를 더해서 받고 있습니다. 원래 오계는 출가하지 않고 세상 속에 살면서 결혼하고 사업하더라도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율을 정해놓은 겁니다. 오계에 세 가지를 더해놓은 게 팔계예요.

첫째, 돈이 많더라도 사치하지 말고 검소해야 합니다.
둘째, 지위가 높더라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 쾌락을 추구해서 향락에 빠지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 부유층들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살았습니다. 부처님도 출가하기 전 왕자로 살 때는 향락에 빠져 즐거움을 추구하셨어요. 그러다 어느 날 밤새 함께 술 마시고 놀았던 아름다운 무희들이 다음날 아침에 취해서 쓰러진 모습이 마치 시체를 갖다 버린 숲을 보는 듯해서 출가를 결심하셨습니다. 즐거움의 극치가 괴로움임을 자각하신 거죠. 들뜨는 즐거움을 추구하면 괴로움이 항상 따라다녀서 해탈과 열반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고(苦)와 락(樂)의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락(樂)이 곧 고(苦)임을 자각해야 해요. 이렇게 우리가 팔계를 지킨다면 이 세상 속에 살아도 괴로움이 없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강의를 한 후 이번 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하고 나서 생방송 수업을 마쳤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모둠별로 화상회의 방에 모여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내일부터 3일 동안은 공동체 법사단 수련이 진행됩니다. 오전에는 농사일과 발우공양을 함께 하고, 오후에는 공동체 법사단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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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계

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2022-05-18 18:46:35

박무상

요즈음의 세상에서 꼭 필요한 덕목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진걸 자랑하고 또 못가진 걸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너져서는 술과 향락에 빠져 드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 공황장애, 우울증, 분노조절장애 등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모두가 내가 가지지 못한 걸 부러워하다가 그러는 것 같아요. 장기하 노래가 생각나네요..

2022-05-16 18:03:37

보각

감사합니다

2022-05-16 17: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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