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4.21. 고추 모종 심기, 정토불교대학 즉문즉설
“성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고추 모종을 비닐하우스에 옮겨 심는 날입니다.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비닐하우스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농사팀 행자님들이 고추 모종을 정성껏 잘 키워 놓았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트랙터로 고랑과 이랑도 반듯하게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은 잘 자란 모종을 이랑에 옮겨심기만 하면 됩니다.

먼저 병충해 예방을 위해 모종을 석회보르도액에 한 번 담근 후 모종을 하나씩 심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먼저 모종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행자님이 모종을 하나씩 꺼내 스님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겠는데요. 더 빨리 심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엉덩이 방석을 끼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던 스님은 파종기를 가져왔습니다. 주로 감자를 심을 때 사용하는 파종기입니다.

“파종기로 모종을 심으면 더 빠를 것 같아요.” (웃음)


행자님이 모종을 파종기 속으로 넣으면 스님이 파종기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파종기 밑으로 모종이 ‘쏙’ 하고 심겼습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모종이 심겨 나갔습니다.

파종기로 모종을 다 심은 후 북삽을 들고 모종마다 흙을 덮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 속도로 일하면 두 시간도 채 안 걸리겠는걸요. 빨리 끝나면 다른 일을 좀 해야겠어요.” (웃음)


흙 덮는 일까지 다 마친 후 비닐하우스 측면에 심어둔 곰보 배추를 한 움큼 낫으로 베어서 비닐하우스를 나왔습니다.

“수고했어요.”

고추 모종 심는 일을 마치고 스님은 텃밭으로 향했습니다. 텃밭에는 상추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상추를 다른 밭으로 좀 이식해 줍시다.”

너무 촘촘하게 심어진 상추를 솎아서 다른 밭으로 옮겨 심었습니다.

상추를 새로 이식할 때는 줄을 맞춰서 반듯하게 심었습니다.


상추가 더 풍성하게 자랄 것을 기대하며 오전 울력을 마쳤습니다. 울력을 마치고 나니 막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비를 피해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했습니다. 비가 그치고 해가 저물었습니다.

저녁 8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수업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생방송을 시청하는 직강반과 녹화본을 미리 보고 수업에 참여하는 기본반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날입니다. 녹화본만 보는 기본반을 위해 오늘은 모든 학생들이 생방송으로 즉문즉설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8300여 명의 학생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정토불교대학생 여러분, 입학을 하고 나서 생방송반 수업은 4주가 지났고, 기본반 수업은 3주가 지났습니다. 꽃이 필 무렵에 수업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은 다 지고 이제 꽃보다 잎이 더 아름다운 녹색의 계절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삼귀의를 하는 이유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적습니다. 옛날 사람보다야 많이 알게 되었지만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것과 비교해서 누구는 많이 알고 누구는 적게 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 자체가 매우 적기 때문에 누가 많이 알고 누가 적게 아는 것은 사실 별 차이가 없어요.

사람은 무언가 모를 때 두렵거나 신비한 마음이 생깁니다. 원리를 모르니까 두려움이 우리를 협박하고 신비한 마음이 우리를 유혹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러한 협박에 놀아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인지능력이 발달하면서 우리는 옛날 사람보다는 상당 부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보니 현대에도 두려움에 휩쓸리거나 신비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행은 어떤 특별한 것을 알거나 믿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항상 사실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의해서 사실이 왜곡될 때 괴로움이나 두려움이 생기고 고집을 하게 되고 타인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어떤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실에 깨어있으면 누구나 다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괴로움 없이 사는 사람을 이름하여 붓다라고 부르는 거예요. 붓다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깨달은 자, 괴로움이 없는 자’라는 뜻의 보통명사예요. ‘붓다에 귀의한다’는 말은 나도 붓다처럼 괴로움 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붓다는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사실에 깨어있어라’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사실을 아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각자 어떤 편견이나 관념에 쌓여 습관적으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사실에 깨어있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사실에 깨어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꾸준히 연습해서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수행자는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고, 우리는 수행자들에게 귀의하는 거예요. 붓다에게 귀의하고,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에게 귀의하는 것이 삼귀의입니다. 삼귀의를 종교적인 의식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이런 목표를 다짐하는 시간이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우리 인생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항상 ‘사실은 어떤가’ 하고 탐구하고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두 번 해보고 잘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또 금방 될 것처럼 욕심내지 말고, 꾸준히 해나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괴로움이나 유혹이나 헛된 망상에 빠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삼귀의를 하는 이유는 이런 목표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이 모여야 대화가 통합니다. ‘나는 불교 공부를 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 지위가 높아지겠다, 명예를 얻겠다, 즐거움을 얻겠다’ 이런 목표를 가진 사람과는 늘 대화가 서로 어긋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모임을 시작할 때 먼저 이런 입장을 분명히 하고 얘기를 나눠보는 겁니다.

여러분이 여섯 번 강의를 듣는 동안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을 겁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학생은 성질을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스님께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크게 가슴에 와닿았는데요. 그런데 저는 시간에 쫓길 때, 부당한 일을 겪을 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할 때, 피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 때 너무 성질이 납니다. 눈을 감고 제 마음을 바라보아도 고요해지지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면 성질이 더 불타오르고,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결국 끓어오르는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워 회피할 때가 많습니다. 스님, 불안이나 성질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성질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웃음) 지금 질문자는 ‘솥에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솥뚜껑도 안 흔들리고 김도 안 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같아요. 흘려보낼 방법은 없지만 성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성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방법

아궁이에 불을 때서 솥에 물을 끓이는데 솥뚜껑을 눌러놨다고 합시다. 시간이 지나면 물이 끓어올라 솥뚜껑이 들썩들썩하고 김이 나옵니다. 솥뚜껑 위에 무거운 돌을 얹으면 잠시 잠잠해지겠지만 곧 다시 김이 삐져나옵니다. 그래서 더 무거운 돌을 얹어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거운 돌로 눌러도 처음에 잠깐 막아지는 것 같다가 다시 김이 새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더 이상 얹을 것이 없으면 폭발하게 됩니다. 또 뚜껑을 열고 찬물을 한 바가지 부으면 잠시 괜찮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또 부글부글 끓어서 찬 물을 또 부어요. 그러면 또 잠시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또 끓습니다.

지금 질문자가 성질에 대응하는 방식은 이런 방식입니다. 자꾸 무거운 돌로 누르거나 찬 물을 붓는 거예요. 누르는 것은 참는 방식이고, 찬 물을 붓는 것은 가끔 화를 내는 방식이에요. 화를 내고 나면 잠깐은 편안해지는데 상대에게 미안하고 과보가 따릅니다. 즉 상대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럼 또 참다가 곧 뚜껑이 들썩거려서 터집니다. 그렇다고 뚜껑을 열고 찬 물을 부으면 잠시 괜찮다가 또 끓어오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끝이 없습니다. 끝을 내려면 아궁이에 있는 불을 빼야 해요. 불을 빼고 나서도 한동안은 물이 끓고 뚜껑이 덜컹덜컹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점차 가라앉습니다. 질문자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 이렇게 말했잖아요. 세상에는 부당한 일이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부당하다’는 것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이 말이거든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이미 시비를 해버린 거예요. 이것은 솥 밑에 불을 때는 것과 같아요. ‘부당한 일을 당했다’ 하는 이 생각 이전으로 돌아가서 ‘서로 다르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입장이 서로 다르다.
견해가 서로 다르다.
방식이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르다’ 하고 보면 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을 빼버리는 것과 같아요. ‘화가 나는데 어떻게 하면 참습니까?’가 아니라, 화 날 일이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화를 팍 내버렸다면 이때 대응하는 방법은 ‘참아야지’가 아니라 ‘아차, 부당한 일이란 게 본래 없지. 서로 다르지’ 이렇게 돌아와야 해요.

‘아, 내가 불을 안 뺐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불을 빼는 쪽으로 가야 됩니다. 참는 쪽으로 가지 말고요.

‘아, 저 사람이 틀린 게 아니라 나하고 서로 다른 거지. 그 사실을 놓치고 '내가 옳다’ 하고 생각하니까 화가 확 났구나. 내가 놓쳤구나.’

이것이 아궁이에서 불을 빼는 겁니다. 불을 못 뺏더라도 ‘내가 불 빼는 걸 놓쳤다’ 관점을 이렇게 잡아야 합니다. ‘덜 눌렀다, 찬 물을 안 부었다’ 이렇게 보는 것은 근본 해결책이 아닙니다. 옛 수행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는 사람이 던지는 흙덩이를 쫓지만 사자는 사람을 쫓는다.’

흙덩이를 쫓으면 계속 흙덩이가 날아오잖아요. 그러나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물면 단박에 끝나버립니다. 이 말은 말단에 연연하지 말고 근본을 딱 알아차려서 거기를 공격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부당한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참느냐’가 핵심이 아니에요.

‘부당한 일이란 없다. 서로 다를 뿐이다. ‘부당하다’는 것은 내가 시비를 일으킨 거다’

천하 만물은 서로 다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르니까 항상 내버려 두라는 것은 아니에요. ‘네가 나쁘거나 틀린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볼 때는 이 방식이 더 쉬울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있어요.

산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이 쪽으로 가자고 하고 한 사람은 저 쪽으로 가자고 하면 ‘넌 틀렸다’가 아니라, ‘길이 다르다’ 이렇게 봐야 합니다. 그럼 ‘너는 너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자’ 해도 되지만, 같이 가기로 했다면 결정을 해야 하겠죠. 여기서 대화가 필요한 거예요.

‘너는 왜 이 길이라고 생각하니?’
‘이러이러해서 그렇다.’
‘그런데 이 지도를 보면 이러이러하지 않으냐?’

화를 내거나 참으라는 게 아니에요. 서로 다르다고 알면 일단 화가 나지 않습니다. 화가 나지 않는 상태에서 대화를 해보면 상대가 내 방식으로 갈 수도 있고, 내가 상대 방식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느 것이 맞는지 각자 따로 한 번 해보자’ 이렇게 해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둘 다 맞을 수도 있습니다. 길이 두 개일 수도 있으니까요. 둘 중에 하나만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건 지금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세상에 본래 화날 일은 없습니다. 수행자는 ‘화가 나는데 어떻게 참습니까?’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화날 일이 없는 쪽으로 가야 해요. 화는 시비를 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시비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해요. ‘아, 서로 다른 것을 내가 옳다고 시비했구나’ 이렇게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읽는 수행문에 이런 구절이 있죠.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의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괴로움은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마음이란 본래 공합니다. ‘공’은 옳고 그름이 없다는 뜻을 가진 철학적 용어예요.

어떤 사람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없습니다.

질문자는 부당한 일을 겪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면 성질이 난다고 얘기했죠. 그런데 우리가 오래 살아보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을 일은 무조건 하면 안 된다’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건 고행 주의예요. 인생을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거예요. 또 하고 싶은 일이 성취됐다고 반드시 결과가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했는데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어요. 하고 싶지만 못 할 때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도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경우의 수’ 배웠죠? 내가 ‘하고 싶다’라고 할 때, 할 수 있는 상황과 할 수 없는 상황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 결과도 두 가지 경우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반드시 결과도 좋을 거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때 결과도 반드시 좋다는 보장은 없어요. 또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상황이 반드시 나쁘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상황이면 하면 되고, 하고 싶은데 못 하는 상황이면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결과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상황과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상황이 있어요. 주말에는 일찍 일어나기 싫으면 안 일어나도 되는데, 평일에는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일어나기 싫어도 반드시 일어나라’ 이런 법은 없어요. 상황에 따라 다른 거예요. 하기 싫은 일을 한다고 반드시 결과가 나쁜 것도 아니에요. 어릴 때 공부하기 싫은데 공부했다고 결과가 나빴어요? 좋았잖아요. 놀고 싶을 때 놀았던 결과가 반드시 좋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하고 싶으면 꼭 해야 하고, 하기 싫으면 죽어도 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고, 하기 싫고’, ‘좋고 싫고’에 속박이 되어서 괴로운 거예요. 그런데 이걸 열어놔야 돼요. 하고 싶은 걸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하기 싫은 걸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어요.

하고 싶은 걸 하거나 하기 싫은 걸 안 하는 건 연습을 안 해도 자동으로 합니다. 그럼 무엇을 연습해야 할까요? ‘하고 싶을 때 탁 안 할 수 있는 연습, 하기 싫을 때 탁 해버리는 연습’이에요. 이걸 연습하면 어떤 상황이 와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하고 싶은 걸 못 하게 하거나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스트레스받은 뒤에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연습을 해보세요.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됐을 때 기꺼이 멈추는 연습,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기꺼이 탁 하는 연습을 해보는 겁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지만 벨이 울리면 싹 한번 일어나 보는 거예요. 벨이 울렸는데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지 말고요.

일어나버리면 ‘일어나야지’하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야 되는데...’ 하는 괴로움은 일어나기 전에만 존재합니다. 탁 일어나버리면 고뇌가 싹 사라집니다.

‘가야지’ 하는 것은 가기 싫다는 겁니다. 가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이런 연습을 해보는 거예요. 좋고 싫고에서 자유로워지면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지금 질문자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참으면서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스리느냐, 이 마음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 이렇게 묻고 있는 거예요. 이런 방식은 개가 흙덩이를 쫓는 것과 같습니다. 본마음을 딱 살펴서 놔버리는 방식이 사자가 사람을 쫓는 거예요.

연습을 할 때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이렇게 결심해서 일어나는 연습을 하는 게 아니에요. ‘벨이 울리면 싹 일어난다’ 이렇게 본질을 연습해야 합니다. 오늘 못 일어났다면 다시 하면 됩니다.

‘아이고, 내가 싹 못 일어났구나. 내일은 싹 한번 일어나 봐야지.’

이렇게 본질을 연습해야 해요. 말단을 붙잡고 연습하면 애만 쓰지 효과가 별로 없고 힘만 듭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항상 제 마음에 돌 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사실 조금 전에도 옆에서 아이가 떠들어서 화가 나려고 했어요. 스님 말씀을 떠올리면서 조금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연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아이가 그렇죠. 질문자가 불교대학을 공부하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애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아이를 훈육하는 것도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건가요? 올바른 훈육은 무엇인가요?
  • 스님께서 수행은 애쓰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편안하게 살기만 하면 남들보다 뒤 처지지 않을까 불안합니다. 편안하게 깨어 있으면서도 발전하는 삶이 가능할까요?
  • 제가 가진 '신념'이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마음과 서로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스님 법문을 듣고 괴로움은 없어졌지만 현실과 타협하며 모든 일을 적당히 하게 되어 발전이 없는 것 같아요. 괴로움 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해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 인생에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6명과 대화를 마치고 나니 9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차에서 잠을 자는 동안 1시가 넘어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즉문즉설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KBS 방송국에서 ‘이슈 픽 쌤과 함께’ 프로그램 녹화를 한 후 저녁에 즉문즉설 생방송을 하고 두북으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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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

감사합니다

2022-05-01 04:14:03

최윤선

스님 감사합니다. 저도 공이란단어를 좋아해요. 나훈아씨의노래 공 을듣고있으면 가사내용이 의미가
있어요. 철학적인인거같고. 아궁이의 불씨를 빼겠습니다.

2022-04-27 21:35:48

전용만

*아궁이에 불을 빼라*
많은 생각을 가져 봅니다
是非(시비) ~~!
서로가 다름~!
家族(가족)간에도 다름을 인정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말씀 새겨 봅니다

2022-04-26 11:2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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