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4.2 천일결사 기도, 결사행자회의, JTS 인도인 스태프 간담회
“환경이 나쁠 때가 수행하기 좋을 때입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새벽 4시 30분에 맑은 종소리가 랜선을 타고 전국으로 울려 퍼집니다.

정토회 천일결사자들은 스님과 함께 예불, 삼귀의, 수행문, 참회, 108배, 명상, 경전독송을 차례대로 했습니다.

밧다 비구에게 그 어머니가 말했다.
“밧다여,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세간에 대해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사랑스러운 아들아,
거듭 태어나는 고통을 받는 사람은 되지 말거라.

밧다여, 욕심도 없고 의혹도 없으며,
청량한 마음으로 자신을 잘 억제하여
오염을 여읜 성자(聖者)들은,
실로 안락한 나날을 지내고 있다.

밧다여,
진상(眞相)에 대한 직관력(直觀力)을 얻기 위해,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이들 현인(賢人)들이 밟아 온 길을 너도 소중히 하거라.”

기도를 마친 후 스님이 오늘 읽은 경전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읽은 경전은 아들이 있는 여성이 출가를 한 후에 자기가 공부하고 깨달은 바를 아들에게 전하는 내용입니다.

초기에 출가한 여성들은 아버지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어서 이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는 여성들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사회에서는 남자는 부모가 있어도, 아내가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출가를 할 수 있었지만, 여성의 출가는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어요. 부처님께서 고심 끝에 출가를 허락한 여성들도 대부분 부모도 없고,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출가해서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자녀가 있는 여성들에게도 출가의 길이 열렸어요.

출가를 하려면 상당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밧다의 어머니도 결단 끝에 비구니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출가를 하고 얻은 기쁨을 아들에게 이야기해서 아들 밧다도 출가해서 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경전은 이제 막 출가의 길에 들어선 아들 밧다에게 어머니가 이야기하는 구절입니다.

이제 막 비구가 된 아들은 아직 출가에 대한 마음이 어머니만큼 확고하지 않은 상태겠죠. 어머니는 아들에게 ‘밧다여, 너는 어떤 일이 있어도 세간에 대해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속에 대한 집착은 재물, 지위, 명예, 쾌락 등에 대한 집착을 의미합니다.

‘사랑스러운 아들아, 거듭 태어나는 고통을 받는 사람은 되지 말거라’

이 대목에서는 인도의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인도의 전통사상에는 사람이 죽으면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업을 소멸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업을 소멸해서 거듭 태어나는 고통을 받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몸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핵심은 괴로움의 원인을 완전히 소멸하여 그 괴로움이 거듭되지 않는 것입니다. 업을 소멸해서 다시는 그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 삶, 열반을 증득하라는 거예요. 이 구절은 먼저 출가한 어머니가 갓 출가한 아들에게 괴로움이 되풀이 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밧다여, 욕심도 없고 의혹도 없으며, 청량한 마음으로 자신을 잘 억제하여 오염을 여읜 성자(聖者)들은 실로 안락한 나날을 지내고 있다’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은 세 가지입니다. 바로 ‘욕심, 성질, 어리석음’이에요. 이 탐진치 삼독이 괴로움을 만듭니다.

정토회 공동체에 들어와서 같이 생활하는 수행자들은 보면 욕심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욕심이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 수행공동체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들어온 후에도 욕심을 완전히 끊지 못해서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욕심보다는 자기 성질이나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동체에 와서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성질을 못 버리는 거예요. 수행을 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까지도 버리고, 가족의 품도 다 떠나서 사는데도 자기 성질 머리를 못 버리는 걸 보면 안타깝죠.

세속에 살면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지만, 수행공동체에 들어와도 자기 성질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출가를 한 스님들도 욕심을 못 버려서 난리입니다. 출가하기 전에 욕심을 버리는 관점이 확고하지 않으면 출가를 한 다음에도 욕심이 잘 안 버려집니다. 정토회는 공동체에 들어오면 욕심을 버려야 생활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고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욕심을 부린다고 해봐야 먹는 것 정도예요.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걸 보면 입는 것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잘 안 보이는데, 간혹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을 끊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걸 제외하면 가장 큰 문제는 성질입니다. 여기 들어와서 살면서도 자기 기분대로, 자기 성질대로 되지 않으면 힘들어해요.

욕심에 이어서 ‘의혹이 없어야 한다’고 나옵니다. 법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법에 대한 의혹이나 불신’이 없어야 합니다. 의혹이란 ‘이렇게 수행한다고 해서 뭐가 이뤄지겠어?’ 이렇게 수행에 대해 믿음이 없는 경우를 말합니다. 믿지 못해서 의심하는 것은 다 의혹입니다. ‘이게 무엇이지?’하고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는 자세는 오히려 수행에 동력이 돼요. 깨달음에 필요한 한 요소이기도합니다. 반면, 불신에서 나온 의혹은 수행에 장애가 됩니다.

‘밧다여, 진상(眞相)에 대한 직관력(直觀力)을 얻기 위해,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 이들 현인(賢人)들이 밟아 온 길을 너도 소중히 하거라.’

여기서 ‘진상(眞相)’이라는 단어는 ‘진실한 모습’을 뜻하는 한자입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의 참모습’을 말해요. 참모습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뜻합니다. 거품이 있으면 거품인 줄 알고, 그림자가 있으면 그림자인 줄 아는 게 사실 그대로의 모습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거품이 물이라고 착각하거나, 그림자가 실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허상입니다. ‘진상(眞相)에 대한 직관력(直觀力)’은 깨달음의 지혜 또는 반야지(般若智)입니다. ‘실상을 그대로 비추어 아는 것’이 반야지입니다.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는 열반을 뜻합니다.

세속적인 부모, 자식의 인연일 때는 주로 ‘몸조심해라, 잘 먹어라, 추위에 떨지 말고 옷 잘 입어라, 잠자리를 편하게 해라’ 이런 걱정을 많이 합니다. 세속적으로는 이런 걸 자식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밧다 비구와 어머니는 비록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이 세상에 서 만났지만 지금은 수행자 도반으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어서 내일 읽을 경전도 읽은 후 스님의 법문이 이어졌습니다.

밧다 비구가 말했다.
“낳아 주신 어머니여, 당신은 확신을 가지고
이 도리(道理)를 제게 일러 주셨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이미 자식에 대한
애착을 여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밧다여, 볼품없는 것이든
훌륭한 것이든 그 중간의 것이든,
만들어진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은
눈곱만큼도 내게는 없다.”

“이제 밧다 비구가 어머니에게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아들은 ‘당신은 이미 자식에 대한 애착을 여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죠. 어머니는 나를 낳고 키워 주신 분이지만 이미 부모와 자식이라는 세속적인 집착은 끊어졌고, 도반으로서 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만들어진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은 내게 눈곱만큼도 없다’라고 답합니다. 이는 ‘만들어진 것, 형성된 것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그 중간이든, 또 훌륭한 것이든 비천한 것이든 그 중간이든, 이 세상 그 무엇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무엇에도 집착할 바가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일어나고 사라질 뿐입니다. 마치 바다 위에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을 반복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일어난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고, 사라진다고 슬퍼할 일도 아닙니다. 또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습니다. 해가 뜬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고, 해가 진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에요.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만 바닷물이 출렁거릴 뿐입니다. 파도가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해가 뜨고 진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만 지구가 자전할 뿐입니다. 이렇게 실상을 꿰뚫어 보면 세상의 변화에 집착을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의 이야기는 일상용어를 사용하고, 내용도 덜 형식적이어서 보다 진솔하게 와닿습니다. 이다음부터 읽을 경전은 남자 장로 스님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비구들의 이야기는 형식이 딱딱하고, 얼핏 보기에는 너무 아는 체하는 듯 느껴지는 글들도 많습니다. 우리도 아는 걸 너무 유식하게 말하려고 하면 그렇게 되잖습니까. (웃음)

그래서인지 비구니 스님들의 이야기가 우리 가슴에 더 잘 와닿는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출가 전까지의 삶이 힘들었기 때문이에요.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설령 부잣집에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먹고사는 것만 괜찮을 뿐, 정신적으로는 늘 누군가의 노예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종으로 살다가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출가의 길을 가게 되었으니 비구니 스님들은 마치 노예가 해방된 것과 같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불법을 내 것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들이 남아있지만 과거에 비하면 요즘은 여성이라고 해서 누군가의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사회를 부처님 당시와 비교하면 사회 제도나 의식주 수준이 천국이나 다름없어졌어요. 그러나 ‘천국에 사는 사람들도 윤회고(輪回苦)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우리 마음속 괴로움은 그대로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사람들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천상에 간다고 해서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좋은 조건일 수는 있겠죠. 그러나 천국에 간다고 해도 단지 생활환경이 조금 나아질 뿐, 우리 마음속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2,600년 전에 이미 이 점을 꿰뚫어 보셨으니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당시 인도 사람들이 지금 우리의 생활을 본다면 도솔천, 도리천 이상 수준으로 산다고 할 거예요. 그런데도 우리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있잖아요. 그러니 이러한 마음의 이치를 알아서 법에 귀의하여 법을 오롯이 경험해야 진정한 자유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조금씩 이치를 알아가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고 그 전보다 삶이 나아져요. 그렇지만 그렇게 조금 나아지는 정도에 만족한다면 해탈의 길은 멀고도 멉니다. 조금 나아진 상태에 만족하지 말고, 법의 이치를 더 깊이 알고 내 것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환경이 나쁠 때가 수행하기 좋을 때입니다

주변 환경이 좋아져서 내 삶이 좋아지는 정도는 특별히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도 누릴 수 있는 변화입니다. 나쁜 환경에 처해도 그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해탈을 해야 합니다. 그 어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수행을 하다 보면 실제로는 환경이 좋아져서 생활이 좋아진 것인데 이걸 자신의 수행력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때는 환경이 조금만 나빠져도 성질 머리가 올라오고,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가 튀어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마치 지금까지 공부한 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큰 나라의 왕비였던 위제희 부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고 할 만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버지인 왕을 감옥에 가두는 일이 벌어지자 누구 하나는 죽어야 하는 이 일로 하루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위제희 부인이 진정한 발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배경에서 설해진 설법이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입니다.

환경이 좋을 때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환경이 나쁠 때는 수행하기 좋을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처하든, 저런 상황에 처하든 항상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해요. 또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생방송을 마친 후 두북 공동체 대중과 함께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대중은 스님에게 한말씀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봄나물 채취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면 좋겠다고 농사팀에 제안했습니다.

“농사팀은 봄나물을 채취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면 좋겠어요. 봄에 가장 먼저 나는 나물이 원추리와 머위입니다. 정토회 회원들이 봉사를 오면 같이 봄나물을 채취해도 좋고, 공동체 대중들이 2박 3일 정도 시간을 내서 봄나물을 채취해도 좋을 것 같아요. 봄나물은 우선 공동체 대중들이 먹을 수가 있고, 선물용으로도 좋습니다. 오히려 봄나물 채취가 농사짓는 것보다 경제적인 생산성이 높아요. 농산물보다 봄나물의 가격이 더 비싸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어제 대중공사 시간에 한 행자님이 문제 제기를 한 내용에 대해 스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제 벚나무 아래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었는데, 행자님 한 분이 왜 의무적으로 식사에 참석해야 하느냐고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이 주제에 대해 함께 연찬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이렇게 논란이 되면 앞으로는 식사를 초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만 식사에 초대하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기 때문이에요. 몸이 아파서 누워 있거나, 외부에 출장을 갔기 때문에 참석을 못하는 건 허용이 되지만, 공동 행사는 다 함께 참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 계율에는 식사 초대를 할 때 상가의 구성원 전체를 초대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아예 초대를 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부만 초대해서 식사를 할 경우 공동체 내에 불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문제 제기를 했던 행자님이 다시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수행공동체 구성원이 지켜야 할 계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다 같이 밥을 먹는다고 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나요?

“저는 밥을 안 먹고 싶은데 반드시 참석하라고 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오후에 곧바로 부서 일정이 있어서 저는 점심에 쉬어야 하는데, 필참이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상황이 됐거든요. 그냥 밥을 먹는 건데 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할까요? 개인이 선택할 수 있게 하면 안 되는지 그게 궁금했습니다. 놀러 가는 것을 왜 의무화하나요?”

“어제 일정은 놀러 가는 게 아니었어요. 전체 대중에 대한 식사 초대였습니다. 사전에 알렸을 때 아무도 반대가 없었어요. 쉽게 말해 공동체 성원 전체가 참여해야 하는 업무에 해당한다고 보시면 돼요.”

“업무라고요?”

“공동체에서 같이 하기로 정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농사를 짓든지, 식사를 하든지, 꽃구경을 하든지, 이런 일정들은 공동체에서 전체가 함께 하기로 한 행사에 해당해요. 그 행사의 내용은 울력일 수도 있고, 꽃구경일 수도 있고, 창고 정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처럼 식사 초대도 공동체가 다 함께 하자고 정한 일이에요.

그리고 수행공동체에서는 일상이 수행이기 때문에 놀러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공양을 낼 때 약간의 울력을 함께 하는 거예요. 울력을 마치고 나서 같이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특히 경주 남산에 여러분을 자주 데려가는 이유는 불상에 예불도 하고, 순례도 하면서, 그 속에서 꽃구경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저도 해외에 많이 다니지만 놀러 가기 위해서 여행을 가는 경우는 일절 없습니다. 법문 하는 일정 때문에 해외에 가고, 법문이 끝난 다음에 그 주변을 잠깐 둘러보는 정도로 하거든요.

보시받은 공양물은 평등하게 나누어라

어제의 경우 식사 초대를 한 것이기 때문에 전체 성원이 참석해야 합니다. 강제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만약 공동체 성원 전체를 식사 초대한 것을 강제성으로 받아들인다면, 본인이 공동체 계율을 모르거나 안 따르고 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몸이 아프면 ‘저는 몸이 아파서 못 갑니다’ 하고 건의를 하면 돼요. 그러면 몸의 상황에 맞게 불참하거나, 산 밑에까지만 따라가서 꽃만 구경하고 돌아온다든지 하면 됩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에 이 주제를 갖고 다시 연찬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공동체에서 ‘오늘은 다 같이 울력을 하자’ 하고 결정이 나면 전체가 울력을 해야 하는 거예요. 강제성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만약 아주 특별한 일정이 갑자기 생긴 사람은 건의를 해야 해요. ‘저는 몸이 아파서 도저히 못 움직입니다’, ‘긴급 사안이 생겨서 참석이 어렵습니다’ 하고 전체 대중에게 양해를 구해야 합니다.

개인의 취향을 자꾸 고집하면 공동체에서 살기가 점점 어려워져요. 가령 여러분 중에 세 명만 따로 밖에 나가서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고 온다면, 그것은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를 통해 공동체 안에 패거리를 형성하기 때문이에요. 커피를 마시면서 남의 허물을 말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이런 행위는 못하도록 계율에 명시되어 있어요.

공동체에 살지 않는 일반 대중들도 자기 집에 정토회 회원들을 정기적으로 식사 초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한 번 두 번은 괜찮지만, 정기화되면 같이 앉아서 정토회의 공식 일정을 사석에서 의논하기가 쉬워요. 이것은 ‘사적인 모임’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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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공동체에 들어왔다면 마음공부를 중심에 놓아야 해요. 그런데 일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지 마음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법문을 듣고 나면 바로 생활에 적용해보고,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수행을 중심에 놓고 지내야 합니다. 수많은 대중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자신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여러분은 자기 공부는 안 하고 그저 스님 하는 일만 도와주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정작 이곳 수행도량에서 배워야 할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자신에게 큰 손실입니까?

같은 계율을 같이 지켜라

속박으로 생각한다면 관점을 잘못 잡고 있는 거예요. 공동체에 들어온 대중은 모두가 지켜야 할 계율이 있는 겁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육화합의 원칙에 ‘같은 계율을 같이 지켜라’, ‘보시받은 공양물을 평등하게 나누어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원칙에 입각하면 공동체 안에 사적 소유물이 없어야 해요. 만약 개인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기 혼자만 맨날 맛있는 것을 사 먹고 비싼 옷을 사서 입는다면, 그런 행위 자체가 공동체의 화합을 깨뜨리게 됩니다. 출가한 수행자들 사이에도 빈부격차가 생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경전에도 마하가섭 존자가 출가를 하고 나서도 자신의 습관을 못 버리고 있어서 부처님의 지적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하가섭 존자는 부잣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출가 하고 나서도 좋은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마하가섭 존자의 옷을 만지면서 ‘존자는 옷이 참 좋구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당신은 큰 결단을 했는데도 아직 세속의 습관을 못 버렸군요’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는 부처님의 지적을 받고 나서 평생 동안 검소한 삶을 살았고, 나중에 ‘두타제일’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물론 습관을 버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지켜야 할 원칙을 아예 무시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원칙을 지키되 그렇다고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습관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좀 열어두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원칙은 분명하게 알고 약간 열린 자세로 살아야지, ‘그럴 필요가 있느냐’ 하면서 원칙 자체를 문제제기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자세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으면 물어봐야죠. 그러면 공동체가 정한 일은 모든 업무에서 우선해야 한다고 알려줄 수가 있거든요.

아무래도 정토회에서는 스님의 일정이 가장 중요하다 보니 공동체 일정을 정할 때 스님의 일정에 맞출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왜 우리 부서 일정은 고려하지 않느냐’ 하고 여러분이 불평을 가질 수 있어요. 그런 문제제기는 합당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님의 일정이 빡빡하다 보니까 현재로서는 어쩔 수가 없거든요. 여러분이 좀 희생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양해를 구합니다. 그 외에는 공동체에서 함께 정한 일정이라면 모든 일에 우선해서 참석해야 합니다.”

스님의 제안에 따라 두북 공동체 대중은 오늘 저녁에 다 함께 연찬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발우공양을 마쳤습니다.

곧바로 아침 7시 50분부터는 결사행자회의에 온라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얼마 전 결사행자 교육을 마친 분들에 대한 결사행자 인준 절차를 2시간 30분 동안 가졌습니다. 한 분 한 분이 결사행자가 될 자격이 있는지 꼼꼼하게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JTS 인도인 활동가 간담회

오후 1시 30분부터는 JTS 인도인 활동가들과 온라인 간담회를 했습니다. 지난 1월에 간담회를 하고 3개월 만입니다.

먼저 인도인 활동가들이 한 명 한 명 돌아가며 인사를 했습니다. 인도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활동가들을 소개하고, 한국 JTS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도 소개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도 인도말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नमस्कार! 나마스떼! 메라 남 법륜스님 해”(안녕하세요. 법륜스님입니다.)

이어서 각 부문별로 지난 3개월간 진행한 사업을 보고했습니다. 유치원, 초중등 학교, 병원, 마을개발, 건축부 순서로 각 인도인 담당자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발표를 했습니다.


하나씩 사업 보고를 듣고 바로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스님은 자료에 담기지 않은 정보까지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학교를 개학해 보니까 코로나 팬데믹 전보다 평균 학년별 성적에 차이가 있나요?”

“초등생은 차이가 없는데, 중등생은 2년 전보다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이유는 무엇인가요?”

“팬데믹의 영향이라기보다 남학생의 경우에는 사춘기가 와서 공부를 소홀히 하는 아이들이 있고요. 휴대폰을 사용하는 아이들도 많아져서 공부에 집중을 잘 못 합니다. 여학생의 경우에는 집안일을 많이 하느라 성적이 떨어졌다고 봅니다.”

스님뿐만 아니라 한국 활동가들도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10학년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기숙 학습은 어떤 효과가 있었습니까?”

“기숙 학습을 끝내고 시험을 쳤는데 남학생들은 전체 1등급, 여학생은 몸이 아픈 1명을 빼고 모두 2등급을 받았습니다. 3등급 미만은 낙제인데 낙제한 학생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과가 좋아서 참여한 교사들과 학생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또 정부에서 시행하는 주말 학습 프로그램이 있는데 수자타아카데미가 가야 시에서 1등을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병원에서는 지난 3개월간 병원에 내원한 환자의 질병 분포를 보고하고 실행한 의료지원 사업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마을개발에서는 기존에 진행하던 극빈자구호, 재봉반 운영, 마을울력, 핸드펌프 수리 외에 새롭게 시작한 버섯 재배 실험을 보고했습니다.

“버섯 재배 실험은 마을에서도 실험하고 있나요?”

“일단 학교 안에서만 실험해보았습니다.”

“버섯재배키트 비용이 비싸지 않나요? 키우기는 쉽나요?”

“시장에서 버섯을 사서 먹는 것보다 싸고, 키우키도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차가운 공간이 필요합니다. 차가운 날씨에서만 버섯이 자라기 있기 때문에 한 겨울에만 키울 수 있습니다.”

“인도는 더우니까 가을부터 반지하 시설을 만들어서 겨울까지 키워보면 좋겠네요.”

“네, 좋습니다. 올 겨울에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마을을 위한 사업으로도 좋지만, 자원봉사를 하는 인도인 활동가들도 생활이 어려우니까 이런 부업을 통해 수익을 내는 방안을 마련하면 좋겠네요. 마을개발팀에서 연구를 해주세요.”

“예, 확인해보겠습니다.”

“둥게스와리 마을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극빈자가 더 많아졌나요?”

“마을 밖으로 나가서 일하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돌아오기도 했지만, 정부에서도 여러 가지 지원을 해서 극빈자가 더 늘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질의응답을 충분히 하다 보니 예정된 2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시간이 부족해 아쉽게도 건축부는 발표를 하지 않고 특이사항만 질문하고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닫는 말씀을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어요. 여러분들 질문도 받아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질문은 다음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휴교를 했는데도 학생들 성적이 그렇게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니 다행이에요. 또 마을에 극빈자들이 많이 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주말학습 프로그램 1등을 축하합니다. 성적이 부진한 고등학생들을 위해 기숙학교를 운영하고, 또 그 학생들이 모두 1, 2등급까지 성적이 오른 것도 축하합니다. 또 중학생 지진아를 위해 방과 후 수업을 해주셔서도 감사합니다. 학교, 병원, 마을개발, 건축부 각 분야에서 애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보광법사님이 격려를 잘해주세요. 축하 보너스도 좀 주시고요. 시내에서 회의를 했으면 밥 한 끼 잘 대접했을 텐데 학교에서 회의를 해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식사도 잘 준비해서 해주세요.

제가 멀리 한국에 있어도, 사업보고를 들어보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고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धन्यवाद!(고마워요)“

“저희도 감사드립니다. 스님!”

단체 사진을 찍고 간담회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나서 저녁에는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두북공동체 대중은 아침에 스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동체가 지켜야 할 계율에 대해 함께 연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을 하고, 오후에는 주말 온라인 명상수련 참가자들을 위한 회향식 법문을 한 후, 저녁에는 일요 명상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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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감사합니다.
좋은법문 항상 감사합니다.

2022-04-07 00:24:09

시냇물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는 것이 힘들겠어요
서로 맞춰야 하기 때문에 ...
스님의 말씀처럼 해야 내가 행복 할 듯 합니당

2022-04-06 14:44:09

김은혜

스님의 환한 미소를 보니 저도 웃음이 납니다. 사랑합니다

2022-04-06 14: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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