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0.7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 결사행자 회의
“일상 속에서 중도(中道)를 실천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서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벽 4시에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해가 떴습니다.

오전 7시 30분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작업복을 입고 아침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산 윗 밭으로 올라가 들깨를 수확해도 될지 살폈습니다.

9월 초에 꽃이 피었는데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니 잎과 줄기가 누렇게 변해 있었습니다. 게다가 군데군데 까맣게 변한 것도 많았습니다. 건드리기만 해도 깨가 떨어졌습니다.

“아이고, 내일은 무조건 들깨를 수확해야겠어요. 이러다가 깨가 땅에 다 떨어지겠어요.”

스님은 낫으로 까맣게 변한 것만 베어냈습니다. 몇 개만 베어 놓으려고 했는데 자세히 보니 꽤 많은 수가 까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줄기를 잡아서 약간 눕히면서 낫으로 비스듬히 쳤습니다. 베어낸 줄기는 밭에 눕혀 놓았습니다.

“밤이 더 떨어졌는지 한 번 더 가봅시다.”

엊그제 밤 줍기를 끝내기로 했는데 아직 밤이 더 남았는지 스님은 다시 한번 밤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많은 양의 알밤을 줍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문경 수련원과 연수원에서 새벽에 이동한 법사님들도 아침에 농사 울력을 함께 한 후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오늘은 중도에 대해 공부해 온 것을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불교사상팀에서 중도의 사전적 의미, 경전에서 부처님이 중도를 설명한 인용구, 그동안 스님의 하루에 올라왔던 중도에 대한 스님의 설명, 스님이 중도를 사회문제에 적용한 사례 등 각자 연구해 온 내용을 발표한 후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먼저 향광명 법사님이 중도와 팔정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중도와 팔정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전에 스님께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 가운데 도제(道諦)를 중도(中道)라고 하고, 중도로 나아가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이 팔정도(八正道)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중도라는 것이 실천행위나 실천방법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중도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이 팔정도라고 생각됩니다. 중도와 팔정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팔정도(八正道) :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

"중도(中道)는 주어진 조건에서 목적지로 가는 가장 적절한 길입니다. 그래서 중도적 방식은 양 쪽에 치우치지 않고, 많지도 적지도 않고, 이 쪽도 아니고 저 쪽도 아닌 것입니다. 말과 행위, 생활방식, 정진, 알아차림, 집중을 모두 중도적 관점에서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통합해서 말하면 중도이고, 나눠서 말하면 여덟 가지입니다. 그래서 중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여덟 가지를 점검해야 됩니다.

어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잡을 때 중도를 실천하는 것이 팔정도 중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입니다.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중도적 관점에서 해야 하고, 언행도 중도적 관점에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도는 철학이 아니고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마음가짐, 말, 행동은 모두 구체적인 실천 행위의 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 실천 행위를 여덟 가지로 나눠서 말한 것이 팔정도이고, 여기에 가장 중심 된 관점은 중도입니다. 중도를 현실에서 시행하려면 말과 행동을 중도적 관점으로 해야 하고, 마음가짐을 중도적 관점으로 가져야 하고, 사물을 중도적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중도는 말, 마음, 행동 모두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팔정도는 중도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이 여덟 가지가 없이 중도를 얘기하면 중도가 다시 또 사유나 사색, 철학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목표로 가는 가장 바른 길

중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목표가 분명해야 됩니다. 목표에 따라 중도의 행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두북 수련원에서 있었던 유기농 고추 농사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몇 달 동안 정성을 들여 유기농으로 고추를 재배했는데 진딧물이 갑자기 확 번졌습니다. 유기농약을 쳤지만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추를 수확하려면 진딧물을 없애는 농약을 쳐야 하는데, 농약을 치면 유기농 필증을 못 받게 됩니다. 공동체 성원들끼리의 논의를 통해 농약을 한 번 쳐서 고추를 살리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현재 자급자족에 목표를 두고 있지, 상업적인 농사가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성원들은 어차피 고추를 먹어야 하니까 시장에서 사 먹는 고추보다는 비록 약을 한 번 치더라도 직접 농사지은 것이 낫다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보통 동네 어른들이 말하길 고추 농사를 지을 때 농약을 12번 친다고 하거든요. 농약을 12번 친 것을 사 먹는 것과 우리가 한 번 치고 농사지은 것을 먹는 것 중 어느 것이 낫냐고 할 때, 한 번 치고 먹는 것이 낫겠다고 결정한 겁니다.

그러나 상업적인 유기농을 목표로 한다면, 약을 치지 않고 고추를 뽑아내는 것이 목적에 더 부합합니다. 농약이 검출되면 유기농 필증을 더 이상 못 받게 되거든요. 그래서 유기농 전문가의 조언은 올 해는 고추 수확에 미련을 갖지 말고 농약을 치지 말라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목표에 따라 중도적인 선택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결정한 것이 바른 길이고, 유기농 전문가의 조언이 바르지 않은 길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가능하면 유기농으로 해 먹는다는 목표가 있지만, 상업적이지 않을 때는 유기농을 국집(局執)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유기농 전문가의 비판적인 견해에 대해서도 치우쳤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서로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조언을 한 전문가는 유기농 필증에 목표가 있는 것이고, 우리는 자급자족이 목표입니다. 유기능 필증을 빨리 받게 되면 좋지만, 공동체가 농사를 지을 때는 그것이 핵심적인 목표는 아니라는 거예요. 이렇게 목표에 따라서 판단의 기준이 달라집니다. 중도는 ‘목표로 가는 가장 바른 길’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중도는 이런 것이다’ 하고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중도에 대해서 얘기하신 것은 ‘이 쪽 저 쪽에 치우치지 마라’ 이 정도밖에 없습니다.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거나 느슨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중도란 ‘극단으로 치우치지 마라’, ‘관점을 유연하게 가져서 바르게 봐라’ 이런 개념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사상화되고 철학화되면서 대승불교에 오면 중도에 대해 어마어마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해서 해석하게 됩니다. 좋게 말하면 사상이 깊어진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관념화됐다고 할 수 있죠. 마치 공(空)이란 개념이 관념화된 것처럼요. 사람들이 ‘크다’, ‘작다’ 하는데 중도적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비대비소(非大非小), 즉 무유정법(無有定法)이에요. 이렇게 단순한 것이 공의 개념인데, 18공이니 해서 이런 공, 저런 공을 설명한 책이 몇 권이 되도록 써놓으니까 공사상이 어렵게 느껴지는 겁니다. 원래 부처님이 설하신 중도의 개념은 굉장히 심플합니다.”

법사님들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중도를 사회문제에 적용한 사례를 연구해 온 묘향 법사님은 사회 문제에 중도를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중도를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죠?

“일상 속에서나 사회적인 문제를 다룰 때, 내가 어떤 의견이 서기 시작하면 중도가 안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살면서는 늘 어떤 관점을 갖기 바라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생각이 서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중도가 아닌 거라서 어떻게 일상 속에서 중도를 실천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자기 관점이 없으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 쉽죠. 관점을 가지면 한쪽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고요. 늘 이런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에 항상 지금 여기에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석에는 N극과 S극이 있습니다. 양 끝을 비교하면 확실하게 이 쪽은 N극이고, 저 쪽은 S극이에요. 그래서 자석의 가운데를 자르면 N극과 S극을 분리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자른다고 해서 분리가 안 됩니다. 이것이 존재의 실제 모습입니다. N극과 S극은 연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적 존재가 아니고 낱개로 구별된 개아(個我)적 존재라면, N극과 S극으로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분리될 수 없다는 거예요. 딱 자르면 다시 이 쪽이 S극이 되고, 저 쪽이 N극이 됩니다. 자석을 구성하는 원자 하나하나가 자석의 성질을 띄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N극 속에 S극이 있고, S극 속에 N극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같다’, ‘다르다’ 하는 말을 어떻게 쓰는지 잘 보세요. 여기 책상 위에 노란 콩이 열 개 있다고 합시다.

콩을 하나씩 살펴보면 다 다릅니다. ‘콩마다 다르네’ 이렇게 ‘다르다’는 용어를 씁니다. 그런데 파란 콩을 옆에 갖다 놓으면 어떻게 말할까요? 노란 콩끼리 비교할 때처럼 다르다고 말하지 않고, ‘이 쪽은 같은 노란 콩이고, 저 쪽은 같은 파란 콩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방금 전에 서로 다르다고 말한 콩에 대해 ‘같은 노란 콩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옆에 팥을 갖다 놓으면 어떻게 말할까요? 노란 콩이든 파란 콩이든 ‘모두 같은 콩이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럼 옆에 채소를 갖다 놓으면 어떻게 말할까요? 콩과 팥을 보고 ‘같은 곡류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옆에 쇠붙이를 갖다 놓으면 어떻게 말할까요? 채소하고 곡류를 보고 ‘같은 식품이네’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같은 사물을 놓고도 어떤 때는 같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같은 콩 속에 다른 콩이 있고, 다른 콩이 곧 같은 콩이 되는 거예요.

존재의 본질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에요. 인식을 할 때 ‘같다’, ‘다르다’ 하는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지, 존재 자체를 두고 ‘같다’,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표현합니다. ‘부동불이(不同不異)’ 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同(같을 동)’자를 쓰지 않고 ‘一(한 일)’자를 씁니다. ‘不異(불이)’라고 할 때는 ‘二(두 이)’자를 쓰는 게 아니고, ‘異(다를 이)’자를 씁니다. 그래서 불일불이(不一不異)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런 뜻이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왜 존재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닐까요? 연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되어 있다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연기(緣起)와 중도는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왜 불일불이(不一不異)냐?’ 하고 물으면, 연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실체가 없고, 무아(無我)이고, 공(空)이기 때문에 불일불이(不一不異)입니다. 불일불이(不一不異)이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보거나 판단을 할 때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이 ‘중도’ 예요.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 짧은 시간 내에도 연기이고 무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가 생기고 관념을 탁 극복하면 연기를 직관적으로 자각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도는 수많은 경험이 쌓여야 실천이 가능합니다. ‘중도가 무엇이다’ 하고 개념적으로 안다고 해서 중도를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禪)의 관점에서 표현하면, 견성(見性), 깨달음, 오도(悟道)는 대부분 3년 안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보림(保任)은 10년에서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립니다.

깨달은 내용을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체험해가는 과정이 보림입니다. 계속 체험해 가다 보면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중도적 관점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남이 볼 때는 99%와 100%가 구분되지 않잖아요. 비올 확률이 90%라면 거의 비가 오지만 가끔 아닐 때도 있는 것처럼요. 그 정도 되어야 설법에 나서는 거예요. 깨달았다고 해서 곧바로 설법을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설법만 할 수 있지 자기 행동이 못 따라가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체험했지만 막상 현실에서 실천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선불교의 전통은 보림을 해서 어느 정도 체득이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스승을 향해서 향을 꼽고 절을 한 다음 산문을 엽니다. 산문을 열게 되면 제자를 받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부터는 사회사상팀에서 ‘사회 부패 현상과 정의’를 주제로 토론하고 공부해 온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궁금한 점에 대해 스님에게 묻고 의문점을 해소한 후 오후 3시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공동체 법사단 회의를 화상으로 진행했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정토회의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안건이 올라왔고, 하나씩 토론하고 결론을 내린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15분부터는 결사행자 회의를 온라인으로 진행했습니다.

온라인 정토회로 정식 출범을 한 이후 큰 틀은 갖춰졌지만 계속해서 보완해 나가야 할 여러 가지 사안들이 안건으로 올라왔습니다. 지회별 실천 장소 수정안, 특별법회 운영 방안, 전법 활동가 병가자 모둠 배치 방안, 대중부 명상주간, 회칙 개정안 등 방대한 양의 안건에 대해 토론하고 의결하는 시간을 가진 후 모든 안건을 통과시키고 나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들깨를 베는 일을 하고, 하루 종일 정토대전 성전팀 법사님들과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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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중도의 목표는 가장 바른길 관점을 유연하게 가져서 바르게 봐야하나 자기 관점이 없음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아무것도 아니고 관점을 가지면 한곳에 치우치게 되므로 지금 여기 깨어있어야 한다는 말씀 감사합니다

2022-03-29 21:51:36

호롱불

"존재의 본질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에요. 인식을 할 때 ‘같다’, ‘다르다’ 하는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지, 존재 자체를 두고 ‘같다’,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는 말씀에 꽂힙니다. 감사합니다.

2022-03-29 11:42:44

이지윤

깨달은 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도 실천에 옮기도록 깨어있겠습니다.

2021-10-15 06: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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