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9.30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 공동체 지부 공청회
“집착이 생기는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서울에서의 3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새벽 4시에 정토회관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어젯밤 12시 넘어서까지 미팅을 했기 때문에 차 안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동안 날이 밝았습니다. 두북 수련원에 도착하니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작업복을 입고 7시부터 아침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문경 수련원과 연수원에서 법사님들도 두북 수련원에 도착해 함께 울력을 했습니다. 모두 비닐하우스에서 고추 따는 일을 하고, 스님은 밤나무 숲으로 들어가서 밤을 주웠습니다.


아침 울력을 마친 후 오전 10시부터 정토대전 사상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불교사상팀과 사회사상팀에서 각자 공부하고 토론해 온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불교사상팀에서는 지난번 정토대전 성전팀 회의에서 스님이 이야기한 내용을 인용하면서 사성제 안에서 ‘도성제’에 대해 새롭게 해석해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스님은 그때 성전팀에서 참고한 잡아함경 내용을 소개하면서 사성제를 어떻게 하면 현실에 맞게 해석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설명해 주었습니다.

왜 괴로운가?

“사람들이 ‘괴롭다’고 하는데, ‘왜 괴로운가?’ 원인을 탐구해서 규명해 가면, 사실은 괴로워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있어서 그 원인을 없애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진실은 괴로워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분석해 들어가면 괴로움은 그냥 하나의 무명에서 시작된 거예요. 아무런 이유 없이 어떤 환영에 사로잡혀서 괴로움이 생겨난 겁니다. 그러니 ‘환영이구나!’ 하고 알아버리면 괴로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봐야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사상과도 그 내용이 일치합니다.

‘지금 우리가 괴롭다고 하는데, 괴로움의 원인을 계속 규명해보면 괴로워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입니다. 이걸 알아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중에서 ‘고집멸(苦集滅)’까지는 맞아요. 그런데 ‘도(道)를 닦으면 괴로움이 없어진다(멸, 滅)’ 하는 기존의 해석은 도(道)가 약간 사족처럼 ‘고집멸(苦集滅)’에 부연 설명으로 덧붙여진 식입니다. 잡아함경 양의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이렇게 설법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 네 가지 법이 있다. 그것을 성취하면 큰 의왕(醫王)이라 부르나니 왕의 필요와 왕의 분별에 호응하는 것이니라. 무엇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병을 잘 아는 것이요, 둘째는 병의 근원을 잘 아는 것이요, 셋째는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잘 아는 것이요, 넷째는 병이 치료된 뒤에 다시 도지지 않게 하는 것을 잘 아는 것이니라.’ - 잡아함 제15권 양의경(良醫經)

양의경에 나오는 의왕의 얘기는 바로 사성제를 비유한 겁니다. 병을 알고(고, 苦), 병의 원인을 알고(집, 集), 치료 방법을 쓰면(도, 道), 병이 낫는다(멸, 滅), 이런 순서라면 ‘고집도멸’이 되어야 합니다. ‘도’가 ‘멸’보다 앞에 나와야 해요. 그런데 사성제의 순서는 ‘고집멸도’입니다. ‘멸’ 다음에 ‘도’가 나와요. 지금까지는 사성제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 (멸, 滅)
그러면 어떻게 하면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느냐? 멸에 도달하는 방법은 이것이다. (도, 道)

그런데 경전에 나온 의왕의 얘기를 그대로 보면 새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병(고, 苦)이 있고, 병의 원인(집, 集)을 발견해서 치료하면, 병이 사라진다. (멸, 滅)
그런 후에는 앞으로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늘 건강에 유의해야 된다. (도, 道)

이렇게 해석했을 때 ‘도(道)’는 어리석은 자가 닦는 길이 아니고, 이미 깨달음에 눈을 뜬 자가 깨어있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늘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해가는 것이 됩니다. 깨어있으면 괴로울 일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깨어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니까 또다시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도(道)를 닦으면 멸(滅)에 이른다’ 하는 것보다는 ‘멸(滅)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늘 깨어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아요.

괴로움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팔정도(八正道)는 지혜(정견, 정사유), 계율(정어, 정업, 정명), 선정(정정진, 정념, 정정), 이런 순서로 나옵니다. ‘방법(道)을 통해서 멸(滅)에 도달한다’는 사성제의 기존 해석에서는 정견(正見)이 앞에 나오면 안 되고, 계정혜(戒定慧) 순서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에서는 정견이 맨 앞에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한번 괴로움이 소멸하면 재발하지 않는다’ 하는 절대화된 관점을 갖고 있어요. 한번 깨달아버리면 괴로움이 영원히 없어져버린다고 여기는 거죠. 그러나 이것은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이치를 딱 깨치는 것이 ‘초견성(初見性)’입니다. 깨치는 순간에는 괴로움이 사라지지만 우리는 또 어리석어지기 때문에 ‘멸(滅)’의 상태를 맛본 사람이 깨어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팔정도의 정견(正見)이 왜 맨 앞에 와야 되는지 자연스럽게 해석이 되는 거죠. 깨어있음을 유지하는 속에서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아야 한다는 겁니다.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려면, 자기 행위와 마음에 대해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행위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 계율(戒律)이라면, 마음 상태에 대해 깨어있는 것이 선정(禪定)입니다.

‘계속 깨어있으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이렇게 보는 게 아니라 ‘계속 깨어있으면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렇게 봐야 됩니다. 이미 발생한 괴로움은 사라진 상태에서 앞으로도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늘 유의하는 것이 ‘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면 본래 괴로워 할 일이 없습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옛날식으로 해석하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 있다’ 하는 아견(我見)에 빠질 수 있습니다. 괴로움은 그냥 드러난 하나의 현상입니다. 비단 이불에 자면서도 살려달라고 잠꼬대를 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강도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문제가 생기는데, 눈을 떠버리면 강도도 없고, 구해줄 사람도 없고, 본래 괴로워할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고집멸도를 새롭게 해석해서 병을 치료하는 것에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몸이 아픕니다. 이것이 고(苦)입니다. 의사를 만났더니 진단을 해서 병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집(集)입니다. 병을 치료해서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멸(滅)입니다. 이제 집에 가서 할 일은 앞으로 재발하지 않도록 음식을 조절하고 잠을 충분히 자고 건강에 유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道)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선불교(禪佛敎)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선불교는 엄격하게는 수행법이 없거든요. 노력을 하면 깨치는 것이 아니라 ‘언하에 깨친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초견성을 해야 거기서부터 수행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이지, 아직 무지를 못 깨쳤다면 수행의 단계가 아니라는 거죠. 초견성을 하면 ‘보림(保任)’을 하게 되는데, 이 ‘보림’이 지속적으로 모든 경우에서 견성한 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같은 관점에서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 이 말도 다 해석이 되는 거예요. 초견성한 상태를 유지하면 괴로움이 없는데, 우리가 그걸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깨닫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깨닫기 위해서 무슨 공부를 해야 되거나, 무슨 책을 읽어야 되거나, 명상을 해야 되거나, 무언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깨닫는 것은 간단한데, 그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경전에 나오는 대부분의 얘기들이 괴로워서 막 울다가 부처님과의 문답 속에서 집착을 탁 놓아버리면 괴로움이 사라졌다는 얘기들이거든요. 부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던 병은 이미 치유가 된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집에 가서 다시 그 생각에 사로잡히면 병이 재발하는 거예요. 이때 병이 안 나았다고 말해야 되느냐, 재발했다고 말해야 되느냐, 이런 해석의 문제가 있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병이 안 낫다고 봤기 때문에 ‘도를 닦으면 낫는다’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미 나은 것이 아니고 앞으로 나을 것이라고 보고, 이렇게 노력하면 낫는다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도’라고 본 거죠. ‘멸(滅)’을 ‘이미 나았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앞으로 낫는다’ 이렇게 해석한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낫느냐’ 하는 문제가 나오니까, ‘이렇게 하면 낫는다’ 하고 길(도, 道)을 제시했던 겁니다. 이것이 기존의 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해석은 ‘멸(滅)’을 ‘이미 나았다’고 해석하고, ‘도(道)’는 ‘병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계속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 이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법을 듣고 나서 깨달으면 ‘여기 좋은 법이 잘 설해져 있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로운 해석에서 이 말씀의 뜻을 헤아려보면 ‘부지런히 정진하라’ 하는 말씀은 ‘그렇게 하면 깨닫는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괴로움이 재발하지 않도록 늘 그 상태를 유지해라’ 이런 얘기라고 볼 수 있겠죠.

이렇게 해석하면 훨씬 더 현실적인 해석이 될 수 있는데, 대신에 이렇게 해석하면 깨달음에 대한 뭔가 신비한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종교든 수행이든 어디든지 사람들은 늘 신비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해야 사람들이 몰려들거든요. 신비주의가 없어지면 그 종교가 유지되기가 어렵게 되죠. (웃음)

집착을 하게 되는 이유

괴로움의 원인을 규명해보면 결국 집착에서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왜 집착을 하게 될까요? 아견(我見)과 상견(常見)을 갖기 때문에 집착이 생기는 겁니다.

여기 금덩어리가 하나 있습니다. ‘수행자는 금덩어리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하는 말을 듣고 금덩어리를 산에 갖다 버렸다고 합시다. ‘잊어버려야지’ 아무리 다짐을 해도 늘 생각이 납니다. 20년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해도 생각이 납니다. ‘이것은 금덩어리이다’ 하는 아견(我見)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칼로 그어보니 진짜 금이 아니고 도금이었어요. 도금인 줄 알고 나서 산에 갖다 버렸다면 ‘잊어버려야지’ 하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금이 아니네’ 하고 깨닫게 되면 저절로 집착이 떨어지지 집착을 놓으려고 애쓸 것이 없어요. ‘금이다’ 하니까 집착을 하는 겁니다. 집착을 놓으려고 애쓴다는 것은 아직 ‘금이다’ 하는 생각을 못 놓고 있기 때문이에요. ‘도금이네’ 하면 끝이에요. 이것이 ‘공(空)이구나’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어서 사회사상팀에서도 일주일 동안 토론하고 공부해 온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현전 승가와 사방 승가를 각각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지, 보시물을 공평하게 분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마 제도가 부처님 당시에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육화합의 가르침을 현실 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스님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들은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잠시 휴식하고 오후 3시부터는 공동체 법사단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화엄반 법사 교육 입재식 프로그램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토론을 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에는 공동체 안거 후 신설한 각 위원회가 모두 화상회의 방에 모여 그동안의 위원회별 논의 결과를 발표하고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2차 만일결사의 방향, 농사, 사회활동, 으뜸절, 유통, 온라인정토회, 총 6가지 주제에 대해 각자 토론하거나 건의하고 싶은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주로 2차 만일결사의 주요 방향에 대한 토론과 질문이 많았습니다.

제안 사항 중에는 정토회에도 대중적인 확산을 위해 문화적인 요소를 도입하자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정토회 안에 문화적인 요소를 어떻게 볼 것인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정토회 안에 어떤 문화를 만들 것인가?

“문화는 정토회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지금 정토회는 부처님이나 초기 선사들처럼 문화적 요소가 많이 없고 심플합니다. ‘자기 마음을 밝혀 괴로움이 없도록 한다’ 이렇게 가르침이 단순하고, 그에 따라 의식도 간소합니다. 이것이 좋은 측면도 있는 반면에, 감성적으로 전달되는 측면이 부족합니다. 종교는 굉장히 감성적이고 문화적인데, 이런 면이 너무 부족하다 보니 일부에서 불교의 전통문화를 수용했습니다. 천도재를 지낸다든지, 연등을 단다든지, 이런 문화적 요소를 정토회 안에도 일부 도입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정토회는 이런 문화적 요소를 깨끗하게 버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을 모두 수용한 것도 아닙니다. 전통문화를 수용하면 감성적인 면을 키울 수 있는 반면에, 수행적 관점을 흐리게 하는 부작용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이런 문제들을 모두 검토해서 앞으로 ‘수행 문화’라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됩니다. 음식을 아주 간소하게 먹거나 적게 먹는다든지, 옷 색깔이나 디자인이 아주 심플하고 색깔이 단순하다든지, 생활 방식이 아주 검소하다든지요. 이런 문화가 지금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앞으로는 고급문화가 됩니다. 이런 문화를 우리가 새로 창조해야 해요.

아직 정토회는 수행이 담겨 있는 문화를 못 만들었어요. 정토회는 담마만 가르치고 있지 독창적인 문화가 아직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년에 ‘정토의식문화 혁신 위원회’를 새로 만들었지만, 아직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것은 아니거든요. 기존 문화를 약간 변형해서 복잡한 것을 조금 단순하게 한 정도이지 수행 정신에 맞는 새로운 독창적인 문화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체 문화가 없다 보니까 세속 문화를 따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놀 때도 대중가요를 부르거나, 춤을 춘다거나, 술을 먹는다거나 하는데, 이것은 다 세속 문화예요.

대승불교도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사상적으로 소승을 비판하고 나왔지만 실천 덕목은 독자적이지 못하니까 결국 소승 계율을 채용했습니다. 선불교도 사상적으로는 독자성을 가졌지만, 선(禪)만의 문화가 없으니까 결국은 대승불교문화를 수용했습니다. 한국 불교도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했다고 하면서도 문화적으로는 정토종 예식이 많거든요. 문화적인 요소가 가장 많은 불교가 티베트 불교입니다. 음악, 그림, 건축, 춤 등 여러 가지 문화가 풍부합니다. 한국 불교도 이런 영향을 받아서 대중들을 섭수하는 방식은 정토종 의식이나 밀교 의식이 많습니다. 자기 문화가 따로 없기 때문에 다 섞여 있는 거예요.

정토회 안에 어떤 문화를 만들 것인가? 제일 좋은 것은 수행문화를 만드는 거예요. 문화 자체가 수행을 도와주고 수행의 가풍이 풍겨 나는 겁니다. 대중이 그것을 보고 좋아 보여서 수행을 따라 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 수 있으면 제일 좋습니다. 심플하고 담백한 선(禪) 문화가 미국에서 하나의 유행을 일으킨 것처럼요.”

다음 공청회 때까지 위원회 별로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을 한 후 다시 공유하기로 하고 공청회를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오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내일도 아침 일찍 밤을 주운 후 하루 종일 정토대전 성전팀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생방송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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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숙

안녕하세요스님 저의가족중 환자와보호자까지 공권력없는
영세민이란 이유로

https://blog.naver.com/insuk7171/222890799976
네이버블로그 강제원격에 글수정 짐승으로 명령후 글 자동으로 강도해 국회의원 사기지능 등에게보내 살인죄법처벌 면하는 법만들어 장애가족재산강도압류
길내쫏고 등본말소 정신병원 교도납치후 사살하라 윤석렬
등범죄

2022-12-18 12:18:29

산나무

고집멸도를 이렇게 살명해주시니 이해가 되네요. 고집멸도에서 도가 항상 막히고 이상하다는 생각. 늘 이해가 안된 부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1-10-07 21:21:09

천관

지금 여기에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데
자다 깨다 합니다~

스님의 하루를 매일 보는것 만으로도
깨어있음에 많은 도움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비타불관세음보살~~

2021-10-07 1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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