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는 결사행자 포살 및 자자 수련을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생방송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공양을 마치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텃밭에 꽃이 핀 고수를 다 캐고 밭을 엎었습니다.
고수는 반찬으로 먹을 수 있도록 다듬었습니다.
뒤엎은 밭은 평평하게 고른 다음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얼갈이배추, 열무, 상추 씨앗을 차례로 심었습니다. 씨앗이 작아 흙에 버무려 살살 뿌려주었습니다.
씨앗을 다 뿌리고 흙을 살짝 덮어주었습니다. 여름 반찬 준비를 마쳤습니다.
텃밭에 일을 마치고 예초기를 둘러메고 부모님 산소가 있는 뒷산으로 갔습니다.
산소에 도착하니 풀이 마구 자라 있었습니다. 풀숲 속에서 먼저 절을 올리고 예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왱’ 하는 소리와 함께 예초기 날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안쪽에서부터 차근차근 앞으로 나오며 풀을 벴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며 산소로 가는 길도 정비를 했습니다. 높이 자란 풀은 낫으로 베고, 아래로 늘어진 가지는 장대 톱으로 벴습니다.
예초기로 길가에 풀도 깎아주었습니다. 올라갈 때와 달리 큰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풀을 다 베고 산소를 향해 절을 올렸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 살아 계실 때 보답하지 못해서 생일을 맞아 낳아준 은혜 감사드리며 산소에 풀이라도 벴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산을 내려오다 풀숲에 버려진 철문을 주었습니다.
“발판으로 쓰면 되겠네요.”
트럭을 타고 수련원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보리가 누렇게 익어있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부터는 결사행자 포살법회 및 자자 수련에 참석했습니다. 결사행자 전원이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가운데 온라인으로 수련이 진행되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을 한 후 결사행자들은 스님에게 입재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 당시에 포살과 자자가 생긴 유래와 그것을 계승하는 취지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포살(布薩)과 자자(自恣)는 수행공동체인 승가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의식입니다. 승가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청정과 화합입니다. 청정과 화합을 지켜낼 때 승가는 오래도록 대중의 귀의처로 존립할 수 있습니다. 청정과 화합을 잃게 되면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됩니다. ‘승가(僧迦)’ 또는 ‘상가(Samgha)’라고 하는 말은 수행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수행자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포살과 자자가 처음 생겨난 데에는 그 유래가 있습니다. 당시에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이렇게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한 달에 몇 차례든 정기적으로 법회를 여니까 신자들이 감동을 합니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이 수행자들을 존경하고 공양도 올리면서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법은 그들의 법보다 훨씬 좋은데도 정기적으로 법회를 여는 것이 없습니다. 대중이 법문을 들을 수 있게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요청을 하자 부처님도 그걸 수용하셨다고 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걸 수용을 하시면서 이렇게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대중에게 설법을 하려면 설법하는 사람들이 청정해야 한다. 또 대중의 공양을 받으려면 그 공양을 받는 사람들이 청정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대중에게 설법을 하거나 공양을 받을 때는 나 자신이 청정한가를 먼저 점검해라. 만약 마음속에 때가 남아 있다면 그때를 깨끗이 씻고 청정한 상태에서 대중에게 설법을 하거나 공양을 받아야 한다.’
이런 연유로 포살과 자자가 생겼다고 해요. 대중을 위한 법회가 있는 날은 먼저 포살을 해서 승가의 청정함을 확보하고, 그런 뒤에야 대중에게 공양을 받고 설법을 했습니다. 이것이 포살과 자자의 유래입니다.
승가의 청정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계율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불교적 가치관을 유지하는 것이 청정성이에요. 겉으로 드러난 형식으로는 계율을 제대로 지키는지를 점검하는 것이고, 내용적으로는 불교적 가치관을 지키는지를 점검하는 겁니다.
‘해탈과 열반이라고 하는 수행의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천상에 난다든지 죽은 뒤 다음 생에 왕이 되는 등의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가?’
이게 이제 제일 중요해요. 그러려면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도움이 되는 것은 지켜야 할 가치이고,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버려야 할 가치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고,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지 않는다.’
그 내용을 기본 계율로 정한 것이 오계(五戒)와 팔계(八戒)입니다. 오늘날 정토회에서는 이것을 계승해서 부처님 당시에 만들어진 오계와 팔계를 중심에 두고, 여기에 대승불교의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와 보살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를 참고해서, 정토행자 18계본(十八戒本)과 40계본(四十戒本)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치는 지키되 형식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보완해서 청정성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승가의 화합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쟁이 있으면 승가가 분열될 위험이 있습니다.
화합을 유지하려면 승가 공동체 전원의 의견을 수용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도 중요한 회의는 반드시 전원이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결정은 전원에게 다 알려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단 참석할 때 전원이 참석해야 하고, 그 다음에 어떤 의사 결정을 할 때도 전원이 다 찬성해야 합니다. 즉 만장일치 제도를 취했습니다. 이처럼 전원 참석과 전원 찬성이 승가의 화합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원칙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전원 참석과 전원 찬성의 원칙을 현실 속에서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활 범위가 넓어져서 부처님 당시처럼 한 숲에서, 혹은 한 절에서 같이 사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사 결정을 할 때 그 정신은 살리되 전원 찬성이 아닌 3분의 2 찬성으로 그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보통 일반 사회에서는 과반수를 기준으로 하죠. 하지만 정토회는 3분의 2를 기준으로 하되 가능하면 전원 찬성에 가깝도록 하고 있습니다. 참석에 대해서도 3분의 2 이상 참석하는 것을 회의가 성립할 수 있는 최소 요건으로 하되 가능하면 전원이 다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결정된 내용을 알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중요한 사항을 알릴 때는 전원이 다 참석한 가운데 알려야지, 몇몇 사람만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한마디로 ‘정보의 완전한 공개’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정말 중요한 사안의 경우, 예를 들어 사람을 징계하거나 징계를 풀어주는 경우에는 전원 찬성에만 그치지 않고 찬성 여부를 세 번 물어봅니다. 찬성했다 하더라도 ‘진짜 찬성하느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세 번까지 확인 작업을 해서 세 번 다 찬성이 나와야 결정이 됩니다. 판단을 순간적으로 잘못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토회는 이런 정신을 계승하고 보안해서 운영이 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취지로 포살과 자자가 열린다는 것을 유념하셔서 먼저 마음속에 가진 부담을 모두 덜어내서 깨끗이 청소하시고, 상대에 대한 의혹도 가볍게 내어놓아 보시면 좋겠습니다. 마음속으로만 의문을 품고 있지 말고, 이런 자리를 빌어 의혹을 제기하고, 해명을 듣고, 의혹을 내려놓아 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모두가 청정한 삶을 살아갑시다.”
입재법문이 끝나고 간단한 성원 보고가 있은 후 결사행자 포살법회 및 자자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40계본에 따라 참회를 하고, 모둠별로 2시간 30분 동안 온라인으로 자자를 했습니다.
자자를 마치고 5시 30분에 다시 전체 화상회의 방에 온라인으로 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회향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포살과 자자를 잘 마쳤습니다. 이로서 승가는 청정함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념사진을 찍은 후 사홍서원으로 법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잠시 휴식을 하며 원고 교정과 업무 처리를 한 후 저녁 7시 30분에 다시 두북 수련원 방송실에 자리했습니다.
오늘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금요 즉문즉설 강연이 있는 날입니다. 유튜브에서 스트리밍이 시작되자 시도별 즉문즉설 밴드에서 주소줄을 타고 많은 사람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즉문즉설에 임하는 질문자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즉문즉설은 특별한 자리가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얘기를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지식적인 얘기나 남 얘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얘기를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조리 있게 얘기할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어요. 욕하는 것만 빼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알아듣게만 말해주면 돼요. 친구가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편안하게 ‘저는 이게 문제예요’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제가 아주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너무 구구절절이 얘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고민을 솔직하게 얘기하면 됩니다. 너무 구구절절이 얘기한다는 것은 스님이 멍청해서 못 알아들을까 봐 그런 거잖아요. 질문자가 하는 얘기를 듣다가 제가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자한테 물을 테니 그때 얘기하면 돼요. 그런데 자기 혼자서 장광설로 인생 한풀이를 다 얘기하면 시청자들이 지루해하고 답답해합니다. 그러니 너무 길게 얘기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러나 얘기할 시간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드립니다.
대화를 하고 나서도 의문이 해소되지 않거나 자기 고민이 해결되지 않으면 한 번 더 물어봐도 괜찮아요. 위축이 되어서 할 말 못 하지 말고 자기 할 말은 다 하세요. 욕 빼고는 어떤 말을 해도 좋습니다. 자, 그러면 대화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이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다섯 명이 스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중 마지막 질문자는 15년 간 키웠던 반려견이 죽었다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혼자 사는 독신 여성입니다. 15년간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냈던 강아지를 얼마 전에 떠나보냈습니다. 노환인 강아지를 조급한 마음에 입원시켰는데, 케이지 안에서 돌연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무런 보살핌도 주지 못했는데 케이지 안에서 혼자 마지막을 고통스럽게 보낸 강아지가 밤낮으로 떠올라 너무 괴롭습니다. 그 강아지가 있어서 저는 행복했고,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어요. 지금은 죄책감으로 너무 괴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모님은 살아 계세요?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살아 계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질문자는 최선을 다해서 효도했습니까?”
“효도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육십이라는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때 서른 살이었고요. 아버지는 고향에 계셨고 저는 대학생 때부터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아서 효도를 못 했습니다.”
“그 말은 아버지한테 효도 못 한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이 안 들고, 강아지를 돌봐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죄책감이 든다는 거잖아요. 왜 그럴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시간이 좀 지났고, 아버지는 저보다 윗사람이니까 아버지가 저를 보살펴줘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와 달리 강아지는 저보다 약한 존재이니까 아무래도 제가 더 많이 보살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게 두 가지네요. 첫째,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에는 가슴이 아팠지만 시간이 흐르니까 해결이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강아지가 죽은 것도 시간이 흐르면 해결이 된다는 겁니다. 둘째,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고, 강아지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가까이 있어서 죄책감이 든다는 겁니다. 또 아버지에게 나는 보살핌을 받았을 뿐이지 내가 아버지를 보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죄책감이 없고, 강아지는 내가 보살폈기 때문에 죄책감이 든다는 겁니다. 질문자는 결혼을 안 해서 부모의 마음을 모를 수도 있는데, 만약 질문자가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의 가슴이 아플까요? 안 아플까요?”
“아프실 것 같아요.”
“부모의 가슴이 엄청나게 아픕니다. 그래서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이런 말이 있어요. 옛날부터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불효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부모를 너무 가슴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람의 경우에는 자식이 부모보다 오래 살 확률이 높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확률은 낮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수명이 100년 가까이 되고, 강아지는 수명이 길어야 20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사람이 강아지를 키우면, 강아지가 먼저 죽을까요? 사람이 먼저 죽을까요?”
“강아지가 먼저 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식이 나보다 당연히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식이 돌연사로 죽으면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강아지는 사람보다 수명이 짧아요. 그래서 강아지를 키울 때는 언제가 되든 강아지가 나보다 먼저 죽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해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이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괴로워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해요.
첫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은 나의 잘잘못 여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집착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아지든 고양이든 그것이 무엇일지라도 내가 보살핀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강아지가 죽었기 때문에 특별히 더 괴로운 게 아니에요.
둘째, 이런 아픔은 시간이 흐르면 인간의 망각 작용으로 인해 조금씩 집착이 얕아지면서 저절로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강아지는 케이지라는 좁은 방에서 수액 맞고 스트레스받다가 죽게 된 거예요. 차라리 내 옆에서 엎드려 있는 것이 훨씬 나았을 텐데, 잘해주려고 했던 판단이 결국 어리석은 판단이었다는 후회가 됩니다. 또한 좋은 병원이라고 해서 데리고 갔는데 수의사들은 검사하고 난 뒤 데이터만 보고, 강아지의 심리적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더라고요. ‘강아지가 굉장히 불편해 보인다’라고 제가 여러 번 말했는데도 수의사들은 강아지가 스트레스받는 걸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럼 다른 검사도 해보자’ 이런 식으로만 대처를 했습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도 지금까지는 정신적인 병에 대해 별로 신경 안 쓰고 육체적인 병만 치료했잖아요. 사람의 스트레스에 관한 연구는 길어야 백 년밖에 안 되고, 특히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는 아직 오십 년도 안 됩니다. 그러니 강아지의 심리를 연구하거나 강아지가 스트레스받는 것까지 연구한 수의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수의사는 학교 교육에서 조차 강아지가 어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배운 적도 없고, 연구한 적도 없는데, 그것을 수의사한테 요구하면 어떡해요?”
“결국에는 강아지를 입원시킨 제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아지를 입원시킨 것만 잘못했을까요? 강아지 입장에서 보면 자연 속에서 사는 게 좋을까요? 사람으로부터 성대 잘리고 생식기 잘리고 꼬리 잘리면서 사는 게 좋을까요?”
“자연 속에서 맘대로 사는 게 좋습니다.”
“질문자는 강아지를 데려올 때 나를 위해서 데려왔어요? 강아지를 위해서 데려왔어요?”
“저를 위해서 데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위해서 강아지를 고생시킨 겁니다. 병원에 데려간 것도 강아지가 원한 게 아니었잖아요. 단지 자기를 위해서 병원에 데려갔을 뿐이에요.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간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면, 강아지를 집에 데려다 키운 건 백 배 천 배 잘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강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천 배 잘못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조금 잘못한 것을 갖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 강아지를 위해서 병원에 데려간다고 생각하지만,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강아지가 요구한 적이 없어요. 강아지가 때때옷을 입혀달라는 요구를 한 것도 아니고, 비싼 개밥을 달라고 요구를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가 외로우니까 강아지를 키우는 거잖아요.
깊이 분석해 보면 사람들의 정신적인 불안정으로 인해서 애완견이나 애완묘가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외로워서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이기주의라는 걸 알아야 해요.
죽은 강아지를 위해서 지금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착각이에요. 내가 외로워서 강아지가 필요하다면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건 안타깝지만, 그 강아지는 잊어버리고, 또 한 마리 데려다 키워야겠다’ 하고 새로운 강아지를 데려와서 키우면 됩니다. 그렇게 데려다 키워도 그 강아지 역시 자기보다 먼저 죽을 거예요. 그러면 지금과 같은 괴로움이 똑같이 반복되겠죠.
‘내가 내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강아지를 지금까지 키웠는데, 강아지 입장에서는 해가 되는 줄 모르고 내 생각만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면, 앞으로는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말 외로우면 강아지를 키울 게 아니라 사람을 새로 만나서 같이 살면 됩니다.
부처님은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말라 하셨어요. 내가 보기에 개가 죽은 것이 안타까운 것이지 그 강아지는 수명이 다 되어서 죽은 겁니다. 가볍게 보내주고, 또 강아지가 필요하면 새로 데려와서 정성스럽게 키우면 됩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지 강아지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남편이 죽어서 슬프다’, ‘아들이 죽어서 슬프다’ 이런 괴로움도 다 집착에서 생긴 병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집착이 점점 옅어져서 결국에는 좋아져요. 시간이 흘렀는데도 계속 더 괴롭고 슬프다면 그건 정신질환에 속합니다. 집착했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좋아지는데, 그렇지 않고 슬픔이 계속 유지되거나 더욱더 심해진다면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해요. 만약 1년이나 2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 강아지에 대한 슬픔이 조금 나아질까요? 그대로일까요?”
“나아질 것 같아요.”
“1년 지나고 나니 슬픔이 나아졌다면 강아지가 살아 돌아와서 내가 나아졌을까요? 강아지는 죽은 상태로 있는데 내가 나아진 것일까요?”
“강아지는 죽은 상태로 있지만 제가 나아진 겁니다.”
“그러면 1년간 괴로워하다가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 나아지는 게 좋죠.”
“1년간 괴로워하다가 나아져야지 지금 나아지면 강아지한테 미안하잖아요.”
“조금 미안하긴 하죠.”
“그런데 1년간 괴로워하다 나아진다고 해서 강아지한테 도움이 될까요? 내가 1년간 괴로워하면 강아지가 천국에 간다든지 강아지가 살아 돌아온다든지 그렇게 될까요?”
“그건 아니죠.”
“강아지한테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 1년간 괴로워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그럼 괴로워하면 돼요. 괴로워할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 괴로워하는 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집착이 너무 강해서 생긴 정신질환에 속하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집착이 있기 때문에 애완동물이 죽으면 슬픕니다. 그 동물이 고양이든 개든 쥐든 뱀이든 상관없이 슬퍼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뱀을 키우다 죽었다고 질문자처럼 울면 질문자는 어떨 것 같아요?”
“이상할 것 같습니다.”
“쥐를 키우다 죽었다고 슬피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쥐를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은 흰쥐를 실험용 쥐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엄청나게 반대해요. 애견인들도 개고기 먹는 것에 대해 반대 시위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것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것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기 쉬워요. 이것은 집착에서 오는 병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한참 괴로워하다 나아지고, 정신질환자는 계속 괴로워하고, 지혜로운 자는 지금 바로 좋아지는 거예요. 지금 내가 괴로워하는 것이 죽은 강아지한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힌다면 어리석은 사람이에요. 질문자의 잘못을 굳이 따진다면 강아지를 병원에 데려간 게 잘못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아지를 집에 데려와서 키운 게 잘못이에요. 이제 조금 정신이 차려집니까?”
“네.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섭섭하면 좀 더 울다가 좋아지세요. 자기가 좋아서 울겠다는데 어떡하겠어요.” (웃음)
“아니요. 지금 바로 좋아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의 밝아진 얼굴을 보며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스님이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강아지가 죽어서 슬퍼한 분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너무 집착이 강해서 괴로움을 만들었구나 하고 알게 되니 마음이 가볍습니다. 강아지를 입원시킨 게 잘못이 아니라 애초에 강아지를 집에서 키운 게 잘못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가장 와닿았습니다.”
유튜브 실시간 채팅창에도 소감이 올라왔습니다.
“오늘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삶이 가벼워졌습니다.”
“고구마 100개 쯤 먹은 것첨 답답했는데 스님의 말씀은 막힌 것을 뚫어주는 탄산음료 같아요.”
“어두운 밤에 불을 밝히듯 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주 금요일인 5월 28일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9시 30분에 생방송을 마친 후 곧바로 차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정토회 행정처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정토회 지원국장 소임을 맡고 있는 박종숙 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조문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을 위로한 후 영가를 위해 잠시 천도 기도와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영가시여! 살아생전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며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주장하고 평생 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고, 감촉하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는데, 어떤 것이 영가의 본래면목입니까?
영가시여! 영식을 오롯이 하여 이 법사의 질문에 쾌활하게 대답하소서. 만약 이 법사의 질문에 막힘이 있다면 여기 모인 대중들이 영가를 위하여 부처님의 해탈주를 염송할 것이니 이 해탈주 공덕으로 저 극락세계에 왕생하시어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시고 깨달음을 얻어 부디 해탈 열반을 성취하소서.”
해탈주 삼독을 정성껏 한 후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정토회는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전부 자원봉사로 일하고 있어요. 그러니 가족들이 양해를 좀 해주세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문을 마친 후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오니 밤 11시가 다 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한 후 문경 수련원과 봉화 수련원을 방문하고 올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4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