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1.1.4 10-4차 천일결사 영어 통역 입재식, 정토대전 회의
“집착을 내려놓으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전 세계에서 천일결사 기도에 입재한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 통역 입재식을 진행했습니다. 정토회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로 진행된 입재식이었습니다. 오후에는 정토대전 경전팀과 저녁까지 회의를 했습니다.

새벽예불과 기도, 청소와 공양을 마치고 오전 8시에 생방송으로 영어 통역 입재식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문경 정토수련원 명상원에서 법문을 하고, 행사 진행과 통역은 미국,호주,한국등 전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국과 국제정토회 활동가들이 맡았습니다. 사회자는 오직 영어로만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Yesterday, 9,600 people around the world participated in the 4th 100-Day Practice Initiation Ceremony of the 10th 1000-Day Practicein Korean. Let’s now begin today’s ceremony, which will be held in English.”
(어제 9,600여 명이 함께 정토회 만일결사 중 제10차 천일결사 제4차 천일결사 입재식을 마쳤습니다. 지금부터는 10-4차 영어 입재식을 시작하겠습니다.)

“Next, we will read the Vows to the Threefold Refuges and the Words for Practice.”
(먼저 삼귀의와 수행문 낭독이 있겠습니다.)

외국인 참가자들은 두 손을 모으고 함께 삼귀의를 하고 수행문을 낭독했습니다.

“Words for Practice, The root of all suffering and attachments is within ourselves...”
(수행문,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

이어서 참가자 소개를 했습니다.

“Today is a historic day since it’s the first time that the ceremony is held in English since the 10,000-Day Practice began in 1993. 37 people around the world who registered to participate in the 100-Day Practice are here with us via Zoom. Would the participants from the U.S. wave your hands?”
(반갑습니다. 정토회는 1993년 만일결사를 시작했는데, 영어로 진행하는 입재식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오늘 영어 입재식은 전 세계에서 37명이 줌 미팅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참가한 분들, 손 흔들어 주시겠어요?)

참가한 나라별로 손을 흔들며 인사했습니다. 미국, 캐나다, 중국,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스페인, 독일, 프랑스에서 37명이 온라인으로 입재식에 참여했습니다. 주로 2020년 하반기에 진행된 영어 통역 온라인 즉문즉설로 인연이 된 분들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법륜스님에게 천일결사 기도 입재 법문을 청해 들었습니다. 스님은 정토회에서는 왜 천일결사를 하는지 외국인의 눈높이에 맞게 아주 쉽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천일 동안 정진을 하기로 한 이유

“오늘은 영어로 천일결사를 처음 시작하는 날입니다. 정토회에서는 왜 천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행 정진을 하기로 했을까요? 우리들의 삶의 습관이 그만큼 바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백일 정도 정진하면 ‘내 성질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짜증을 잘 내는구나!’ 하고 안다고 금방 바뀌지는 않습니다. 성격이나 삶의 습관이 바뀌려면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천일 정도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천일결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는 더욱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소한 30년, 즉 만일 정도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일결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좀 더 정의롭게 바꾸고자 만일결사를 시작했고, 그것을 다시 천일씩 열 번으로 나눠서 천일마다 입재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의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한다면 천일 동안 정진할 것을 권유하고, 그것을 다시 열 번으로 나눠서 백일마다 정진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정토회는 만일결사를 시작한 지 9,000일이 지났고, 오늘이 10번째 천일결사 중 4번째 백일을 시작하니, 지금까지 9,300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정진해왔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

괴로움과 즐거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둘 다 우리가 바라는 욕망에 그 뿌리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괴로움과 즐거움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분리해서 어느 하나만 취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입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추구하면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움도 괴로움의 다른 한 면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복되는 것이 윤회이다. 이 윤회가 곧 괴로움이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행복입니다. 니르바나, 즉 해탈이란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을 말하는 것이지 괴로움과 즐거움 중에 괴로움은 없고 즐거움만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뿌리가 욕망에 있으므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니르바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을 따릅니다. 아니면 욕망을 나쁘게 보고 그것에 저항해서 싸웁니다. 철학적으로는 전자를 쾌락주의, 후자를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욕망을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보지 않으셨습니다. 욕망을 그저 욕망으로 보셨습니다. 욕망을 따르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니르바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 욕망으로부터 괴로움이 온다는 것을 직시하시고 욕망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욕망과 싸우지도 않고 다만 알아차리고 지켜봄으로써 니르바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런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 즉 까르마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래서 까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자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인도 사람들이 사용한 까르마라는 용어의 전통적인 의미는 ‘본래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중국 문화에서는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부여받는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에서는 ‘하느님이 정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까르마란 본래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고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변화시킬 수 있다. 형성된 모든 것은 언젠가 소멸한다.’

그러나 왜 사람들은 이것을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요? 변화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변하지 않는다’,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하고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까르마란 형성된 것이고 변화되는 것이며 변화할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동시에 변화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까르마를 변화시키려면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마지막에 남기신 말씀도 꾸준히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이것이 우리가 수행정진하는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습관, 사고의 습관, 생각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가져옵니다. 또 이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괴로움과 속박이 완전하게 없어지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괴로움과 속박은 줄고 자유와 행복은 늘어납니다. 여기에서 행복이란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기분 좋음의 의미가 아닙니다. 괴로움과 속박이 줄어든다는 것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입니다.

괴로워할 일이 본래 없습니다

둘째, 이렇게 방향을 바르게 잡았다면 이제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기 삶의 괴로움이 점점 줄어들고, 자유의 영역이 늘어나고, 사람과의 갈등이 점점 줄어들고, 열등의식이 줄어들고, 남을 얕보는 교만도 사라지고, 삶이 검소해지고 단순해지고 가벼워지고, 하루를 살더라도 삶에 보람이 생깁니다.

이렇게 내 삶이 가벼워지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나 신에게 구걸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어떤 도움을 받을까’에서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로 관점이 바뀌게 됩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괴로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본래 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면 연구하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면 됩니다, 그것이 괴로울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우리는 괴로워할 일이 본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구도 나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나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주위의 조건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 있지 않을 뿐입니다. 주어진 조건에 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든지 바꿀 수 없다면 내가 적응하면 되고, 적응하기 싫다면 그곳을 떠나면 됩니다. 그것은 나의 자유입니다.

평화롭게 꾸준히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들이 수행의 방향을 잡고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잘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이 저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저항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그 저항과 싸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항은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것을 이해하고, 저항에 굴복하지 말고 저항을 극복하라는 겁니다. 평화롭게 그러나 꾸준히 이 저항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런 이유로 백일, 천일 꾸준히 정진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싸워 이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까르마와 삶의 습관을 이겨내고 자유를 얻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행의 길에 동참한 것을 환영합니다. 이것은 인종이나 민족, 종교, 성별과 관계없습니다. 누구나 이 길을 간다면 그만큼 괴로움과 속박은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입재 법문을 듣고 질문하는 시간도 주어졌습니다.

“그럼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질문해 보세요.”

온라인 화상회의 방에서 세 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 My question is I understand we practice every day. For whatever reason, if I miss one or two days, how do we reconnect or come back? What’s your advice on that?
    (기도를 매일 하지만 한두 번 빼먹을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어떻게 다시 수행으로 돌아오나요?)

  • My question is the wish to let go of desires and do not suffer any more and to find freedom, isn’t it desire by itself?
    (욕구를 버리고 고통받지 않고 싶다거나 자유를 찾겠다는 것도 욕구 아닌가요?)

그중 한 명은 까르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이해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집착을 내려놓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면 되나요?

“I’m a little bit confused. I understood letting go of habits and Karma, and letting go of attachment, but what exactly is the practice? What am I doing?”
(저는 조금 헷갈립니다. 습관이나 까르마에서 벗어나고, 집착을 놓으라는 말씀은 이해했는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저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구체적으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하는지 자기가 자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들에 대한 집착 때문이구나’라고 생각이 든다면, 그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 과제가 됩니다. 과제를 인지하는 즉시 탁 내려놓아진다면 그냥 인지만 하면 됩니다. 수행을 따로 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인지를 하는데도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간섭하는 행동이 반복된다면,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 연습이 바로 수행입니다.

한마디로 수행이라는 것은 연습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면 꾸준히 연습해야 하잖아요. 운전을 하려고 해도, 피아노를 치려고 해도, 모든 일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처럼 나쁜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도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부터 수행을 시작한 여러분들에게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는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욕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욕망을 따랐을 때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 욕망은 까르마(karma)로부터 일어납니다. 까르마는 무의식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내가 내 까르마를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생각할 때 그 까르마로부터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쾌하다거나 불쾌하다고 하는 어떤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느낌입니다. 우리가 그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그 즉시 바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쳤다면 좋거나 싫다는 감정으로까지 발전합니다. 감정이 일어나는 초기에만 바로 알아차려도 내려놓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려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명상이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선정’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좀 커져 버리면 그 감정대로 하려는 힘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감정에 따라 행동하면 손실이 생긴다는 것 또한 예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지혜로운 자라면 행동을 멈춰야 합니다. 그것이 ‘계율’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 것 또한 수행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너무 강하면 계율을 어기게 됩니다. 즉 화를 내버리고 짜증을 내버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이 잘못된 줄을 알아서 반성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둑이 무너졌다면 빨리 둑을 보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아침마다 108배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수행, 혹은 수행자의 마지막 보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회는 계율을 어겼을 때 그것을 복구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이치를 온전하게 파악하고 아는 통찰력이 ‘지혜’입니다.

계율, 선정, 지혜 이렇게 세 가지가 우리가 행해야 할 수행입니다. 정토회에서 매일 아침마다 하는 천일결사 수행 프로그램에는 이 세 가지가 골고루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 그중 한 가지를 좀 더 깊이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프로그램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명상만 일주일 동안 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지혜를 얻기 위해 6개월간 공부하는 불교대학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다음 질문자는 욕구가 일어나는 것과 반대로 무관심해지는 것은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질문했습니다.

어떤 일에도 무관심해지는 것은 어떻게 막아야 하나요?

“I was listening to what you were saying and just thinking about the other side of it. Just try to release yourself from desires and not caring. How do you avoid other extreme and being apathetic? So not caring but anything, so nothing really bothers you. How do you take that account?”
(스님 말씀을 들으면서,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욕구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은 이해했는데, 반대 극단으로 무관심해지는 것은 어떻게 막을 수 있나요?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어떤 것도 신경이 안 쓰이는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 무관심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 해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이죠. 두 번째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입니다. 특별히 피해도 안 주지만 특별히 이익도 안 주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아쉬워합니다. 수행자라면 적어도 첫 번째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하고, 최소한 두 번째 사람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세 번째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욕심을 내면 이것 또한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내가 나서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욕망이 되기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고 할 경우에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나서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욕심으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괴로워한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세상을 위해서 일해도 그것이 곧 자신을 위한 것이지 희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그런 데 별로 구애받지 않습니다. 필요한 일이라면 비난을 받아도 능히 행할 줄 알고, 필요 없는 일이라면 칭찬을 들어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질의응답을 한 후 사회자가 질문자들에게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질문하신 분들은 소감을 나눠주시겠어요? 질문한 순서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마지막에 무관심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질문한 분도 소감을 말했습니다.

“짧고 아주 명쾌한 답변이었습니다. 욕망과 무관심한 것 사이의 균형을 알게 됐어요. 부정적인 영향만 안 준다면 괜찮은 거구나 싶습니다. 수행자가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돼서 좋았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지, 좋은 영향을 주겠다는 마음을 자꾸 내면 그것도 자칫 욕망이 되기 쉽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거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세상에 큰 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힌 사례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입재식을 마치며 마무리 말씀까지 이어서 해주었습니다.

나의 무거운 짐부터 먼저 내려놓기

“우선 이렇게 마음을 내어 수행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세상이나 남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우선 나부터 괴롭지 않아야 합니다. 삶이 좀 가벼워야 합니다. 삶에 너무 많은 의무감이나 사명감을 갖게 되면 삶이 무거워지고 힘들어집니다. 내 삶이 괴롭지 않고 가벼우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비유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내 짐이 무겁다고 합시다. 무거운 짐을 어깨에도 메고 있고, 머리에도 이고 있고, 두 손에도 들고 있습니다. 너무 무거우니까 다른 누군가가 내 짐을 좀 들어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줄 알 수 있으며, 설령 안다 해도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짐도 감당을 못하잖아요. 내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가면서 주위를 둘러볼 수도 있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다른 사람을 볼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하나라도 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기의 무거운 짐부터 먼저 내려놓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야 할 길입니다. 나부터라도 좀 가볍게 살아야 합니다. 내 짐을 남에게 맡기고 가볍게 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선 내 짐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기를 괴롭히는 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기 삶을 자기가 감당 못해서 늘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에게 빌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저 산에 있는 다람쥐나 토끼도 자기 삶이 힘들다고 하느님에게 비는 일은 없습니다. 작은 벌레도 자기 삶은 자기가 삽니다.

더 이상 구걸하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결혼은 자기가 함께 살 사람인데 왜 결혼할 사람을 하느님에게 구해 달라고 해요? 가게는 자기가 열어놓고 왜 장사는 하느님더러 해달라고 그래요? 본인은 뭘 하겠다는 거예요? 이런 인생은 다람쥐보다도 못하고 작은 벌레보다도 못한 인생이에요. 그러니 자기를 괴롭히는 행동을 멈춰야 합니다. 적어도 토끼나 다람쥐 수준은 되어야 해요.

다른 사람의 짐을 하나라도 덜어주기

여기서 한 발 나아가서 토끼나 다람쥐보다는 좀 더 낫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조금 도움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을 만나면 작은 짐이라도 하나 들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토회 천일결사 수행의 첫 번째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입니다. 두 번째 목표는 ‘세상과 이웃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건 어떤 특정 종교의 가르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진실이고 진리입니다. 이것을 알면 삶이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신 겁니다. 여러분도 천일결사 수행을 통해 삶이 좀 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홍서원을 영어로 함께 읽고 영어 통역 입재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첫발을 내디딘 외국인 수행자들을 위해 양손을 흔들며 환영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전했습니다.

외국인 수행자들은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오늘 입재식에 참여한 소감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10시부터는 결사행자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문경 수련원에 상주하고 있는 공동체 법사단도 스님이 계신 정정당으로 내려와 함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새해 상반기에 추진하기로 한 행복한 100일 법문의 시행 시기를 변경하는 건에 대해 만일준비위원장으로부터 발표를 듣고, 이에 대한 스님의 의견도 함께 들었습니다. 결사행자들은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나서 각 지역마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결사행자들이 토론한 내용은 대의원회에 전달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부터는 정토대전 편찬을 위해 경전팀 법사님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법사님들은 그동안 스님의 이야기해준 방향을 토대로 부처님의 일생이 담긴 경전 속 내용을 다시 정리해서 왔습니다.

덕생 법사님이 오늘 회의할 내용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스님께서 테라밧다 경전인 니까야에서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내용을 더 찾아보라고 하셔서 이것저것 많이 찾아봤습니다. 특히 6년 고행과 성도, 전도를 개시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기존의 경전과 니까야를 서로 비교하면서 확인 작업을 해보았습니다. 저희가 발표를 할 테니 스님께서 다시 점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준비한 내용을 발표하고, 스님은 각각에 대해 무엇을 더 보완하면 좋을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 경전마다 서로 다른 부분이 있어서 비교 검증하고 확인하느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스님이 방향을 계속 잡아준 덕분에 조금씩 경전 모음집의 얼개가 완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경전을 읽고, 스님에게 질문하고, 다시 경전을 읽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 6시가 되었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저녁에는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 처리를 하였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공동체 법사단 회의를 한 후 하루 종일 정토대전 불교사상서와 사회사상서 관련하여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62

0/200

김정은

감사합니다

2022-11-13 06:18:10

박경호

법륜스님 말씀 항상 잘듣고 있고 많은 도움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2021-01-17 13:08:27

조희진

스님 감사합니다.
무지한 중생 스님 말씀에 또 한번 깨칩니다.
스님 말씀 듣고 삶의 기준이 명확해졌습니다.
부처님 법 만나게 해주심에 감사드리고
스님 말씀 들을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리고 매일 글 올리느라
수고하시는 분들 감사드립니다.

2021-01-17 04:42:09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