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2.11 정토대전 회의, 금요 정기법회
“아이가 핸드폰만 보고 공부를 안 해서 걱정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하루 종일 정토대전 편찬을 위한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금요 정기법회를 생방송했습니다.

기도와 명상을 마치고 아침 8시 30분에 두북 공동체 전체 대중과 공동체 법사단이 강당에 모였습니다. 내일과 모레 이틀에 걸쳐 두북 수련원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짓고, 스님과 공동체 법사단은 이제 문경 수련원으로 이동합니다.

남은 농사일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함께 의논을 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전부 문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남은 농사일을 주말에 다 끝내야 할 것 같아요. 나머지 작은 일들은 여기 두북에 남는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하면 되잖아요. 우선 아랫밭에 안 뽑고 남겨둔 배추를 다 뽑아서 소금에 절여서 저온냉장고에 보관해 놓아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밭에서 배추 뽑아서 소금물에 담그는 것까지는 할게요. 나중에 배추를 건져서 비닐에 담고 저온냉장고로 옮기는 일을 누가 좀 해주세요.”

다들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희 법사단은 전부 주말에 불교대학 온라인 반별 활동을 진행해야 하고, 지역별 온라인 공청회도 참석해야 해서 일을 할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저희 두북 대중들은 선물로 보낼 농산물 포장도 해야 하고 마무리를 다 해야 해서 남는 인력이 없습니다.”

“아이고, 일할 사람이 저 밖에 없어요?”

어떻게든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 한두 명만 번갈아가며 스님에게 붙기로 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오전 9시부터는 정토대전 중 경전 모음집 편찬에 대해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경전 모음집 제작팀을 이끌고 있는 덕생 법사님이 오늘 회의할 내용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스님께서 방향을 잡아주신 것을 토대로 제3장에 해당하는 부처님의 출가 부분에 대한 경전 내용을 모두 취합해서 종합본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께 질문을 몇 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부처님의 출가 이전 과정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스님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제4장인 ‘성도’와 제5장인 ‘전도의 시작’과 관련된 경전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발표 내용을 다 들은 후 다시 스님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전 회의를 마치고 점심시간에는 화목난로에 불쏘시개로 사용할 솔잎을 주우러 갔습니다.

“두북 수련원에 남아서 생활하게 될 행자님들을 위해 선물을 하나 남겨두고 가려고 하는데, 저랑 같이 갈 사람 있어요? 솔잎을 많이 주워서 포대에 담아주고 갈게요.”

행자님 두 명이 자진해서 손을 들고 스님과 함께 솔숲으로 향했습니다. 갈퀴로 솔잎을 긁자 금방 한 포대에 담을 양이 모아졌습니다.

“이것 보세요. 금방이잖아요.”

모아진 솔잎 뭉치를 갈퀴로 툭툭 쳐서 한 방향으로 정렬시키고, 다시 직각으로, 다시 직각으로 정렬시키고 나니 직사각형으로 각진 모양이 되었습니다. 양손으로 드니 그대로 포대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준비해 간 포대가 7개에 솔잎을 가득 담은 후에도 스님은 계속 솔잎을 모았습니다. 주변에서 부러진 소나무 가지를 주워와서 아래 위 사방으로 받친 다음 그 속에 솔잎을 가득 담고 마지막에 줄로 꽉 묶었습니다. 포대가 없어도 엄청난 양의 솔잎을 한 번에 나를 수 있었습니다.




“자, 이게 마지막입니다. 여기까지만 주워서 갑시다.”

7포대와 소나무 가지로 엮은 두 뭉치를 싣고 나니 트럭이 가득 찼습니다. 지나가던 마을 어르신이 솔잎 뭉치를 어깨에 메고 나르는 스님을 보고 한마디 했습니다.

“아이고, 진짜 야무지게 잘 쌌네”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에도 여러 가지 질문과 스님의 대답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중 한 분은 경전마다 부처님의 일생을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서 현재 경전 모음집 제작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때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어떤 관점을 갖고 정리해야 할까요

“저희가 경전 모음집을 만들고 있는데요. 제 나름대로 부처님의 일생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위주로 발췌를 해오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의지가 개입될 경우 오히려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을 낮추어 보게 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방대한 경전의 내용 중에 우리는 어떤 관점을 갖고 부처님의 일생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야 할까요?”

“첫째, 부처님의 일생과 관련해서 경전에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경전에 있는 사실이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연기와 중도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경전에 있는 내용들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몇 백 년 후에 비로소 기록된 이야기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전에 근거해서 붓다를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를 봐야 합니다.

가령 부처님께서는 이미 당대에 신비주의에 빠지고 중생을 현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신통을 못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경전에 부처님이 신통을 쓰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건 앞뒤가 안 맞는 얘기잖아요. 우리는 항상 부처님이 하신 이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나의 가르침에 견주어서 살펴봐야 한다’

부처님이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셨다고 누가 말하더라도 다 믿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견주어서 살펴봐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와 중도에 부합하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연기와 중도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후대에 잘못 편집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계율에는 운명을 점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운명을 점친다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한다는 얘기잖아요. 깨달음이란 좋고 나쁨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인데,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따질 일이 없잖아요.

종교는 신통을 중요시하는데 부처님은 신통을 금했던 이야기, 종교는 운명을 논하는데 부처님은 운명을 논하지 말라고 하신 이야기, 이런 내용들은 다른 종교와 차별화 된 굉장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요. 부처님이 나무 밑에서 자고 걸식하고 살아가신 모습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니 복을 비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범천이나 마왕이 무슨 말을 했다든지, 아사나 나무 신이 부처님을 물에서 건져 올렸다든지, 이런 이야기들은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런 내용들은 인도의 문화적 전통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든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고 하는 것은 신비주의라기보다 상징성을 의미해요. 이런 내용은 굳이 뺄 필요는 없지만, 약간의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요소로 이해해야지 종교적 요소처럼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전생담도 교훈적 요소로 이해하고 선별해서 넣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중요시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편집한 부처님의 일생도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목적을 가진 집단이 보기에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부처님의 모습과 맞지 않아서 우리가 부처님을 격하시켰다든지 신격화 했다든지 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겁니다.

동시대에도 그 집단이 어떤 목적을 갖고 부처님의 일생을 규명하려고 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집니다. 부처님 일생에 대한 기록이 100개가 있다면 그 100개를 다 그대로 기록하지 못해요. 현실적으로는 그중 10개만 선별해서 기록하게 되는데, 어떤 10개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또는 집단의 목표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스님의 하루도 무엇을 중요시해서 읽는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잖아요.

‘설법은 누구든 다 하는 건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 농사짓는 것이 중요하지.’

‘농사는 농민이 짓는 건데 뭐가 중요하냐? 무아를 해석하는 법문이 중요하지.’

이렇게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처럼 부처님의 일생 중에 어떤 것이 우리가 볼 때 존경할 만한 일인지, 또는 비판할 만한 일인지를 보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 외에도 법사님들이 헷갈려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스님이 하나씩 방향을 잡아 주었습니다.

오전 9시에 시작한 회의는 저녁 6시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럼 다음 주부터는 문경 수련원에서 만나게 되겠네요. 하루 종일 수고하셨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시간을 내어준 스님에게 법사님들은 삼배로 인사를 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지고 원고 교정 업무를 본 후 저녁 7시 30분부터 금요 정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13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환한 웃음과 함께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이번 주 초에는 많이 추웠는데 어제와 오늘은 날이 좀 풀렸습니다. 이곳 두북 수련원 아침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떨어질 정도로 계속 영하의 기온이었다가 오늘은 영상 1도로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아직 밭에서 뽑지 않은 배추는 조금 얼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영하 7도까지 떨어지는 강추위가 예보되고 있습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추위가 계속되네요.”

6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고등학생 딸아이가 핸드폰만 좋아하고 공부를 안 해서 걱정이라며 질문했습니다. 다른 한 분도 자녀 교육이 큰 고민이었는데요. 오늘은 자녀 문제에 대한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이가 핸드폰만 보고 공부를 안 해서 걱정입니다

“저는 세 명의 딸을 둔 직장맘입니다. 남편은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도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고1인 큰 아이가 핸드폰만 좋아하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며 공부를 안 합니다. 온라인 수업을 하는 날에는 아침 9시가 되어서야 일어납니다. 요즘 아이가 짜증을 너무 많이 내서 힘이 듭니다. 결혼 생활 내내 저만 독박 육아를 하는 것 같아 남편에 대한 원망이 큽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제가 편안해질까요?”

“질문자는 아이들에게 일어나라든지 뭘 하지 말라든지 하는 잔소리를 했어요, 안 했어요?”

“잔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질문자의 말을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듣습니다.”

“앞으로 질문자가 이야기를 하면 듣겠어요, 안 듣겠어요?”

“안 들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잔소리를 안 하면 되잖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아이들을 억압하지 말라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한 번씩 터질 때가 있어요.”

“그렇게 화가 터지는 것은 누가 제어가 안 되는 거예요?”

“제가요.”

“그러니 그것은 질문자의 문제입니다. 아이들의 문제도 아니고 남편의 문제도 아니에요. 잔소리를 해봐야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명백한데도 잔소리가 나오는 것은 질문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왜 아이들과 남편이 문제라고 이야기를 하나요?

아이가 질문자의 말을 잘 들으면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닐 겁니다. 말을 안 들으니까 고민거리가 된 거겠죠. 그런데 이미 질문자가 여러 번 잔소리를 해봤지만 아이가 말을 안 들었다면서요? 만약 앞으로 잔소리를 더 하면 듣겠느냐? 그것도 아니라면서요. 아이가 말을 안 들을 것을 알고 있는데도 계속 잔소리를 하는 건 바보 같은 행동 아닙니까?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질문자가 말을 해도 안 듣는 상황에서 계속 잔소리를 하면, 질문자의 감정도 상할 뿐만 아니라 아이와의 사이도 나빠지게 된다는 거예요.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면 아예 잔소리를 안 하는 게 낫습니다. 그러면 질문자의 감정이 상하지도 않을 것이고, 아이와의 관계도 나빠지지 않겠죠. 이렇게 좋은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을 자꾸 선택하려고 합니까?”

“막상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면 화가 주체가 안 되더라고요.”

“그것은 아이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죠. 어차피 아이는 계속 그럴 것이니까요.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화가 주체가 안 되는 겁니다. 이 세상 일이 내 뜻대로만 될 수 없다는 것은 질문자도 알고 있잖아요. 남편도, 자식도, 부모도 질문자의 뜻대로 될 수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될 수 없는 것을 내 뜻대로 하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질문자가 무모한 겁니다.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 아니라 질문자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비가 많이 와서 논이 떠내려가는 상황이라고 해봅시다. 그런데 지금 둑을 막을 시간도 없고, 막을 사람도 없다면, 논이 떠내려간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잖아요. 울고불고한다고 논이 안 떠내려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스님은 논이 떠내려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렇게 물어요. 저는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논을 떠내려가지 못하게 할 방법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이미 논이 떠내려가는 상황은 어쩔 수 없으니까 나중에 축대를 쌓고 복구하는 길 밖에 없다는 거예요.

질문자는 지금 아이를 내버려 두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이를 그렇게 두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왜 바보같이 속을 끓여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데 아이의 행동을 보고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겁니다. 백해무익한 행동을 자꾸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은 질문자 자신의 문제이니까 의사의 상담을 받든지 아니면 안 하겠다고 결심을 다시 하든지 하면 됩니다.

아이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서 아이가 착실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질문자의 괴로움은 아이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게 딱 분명해야 하는데, 질문자는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아이가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요. ‘스님이 좀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고 질문을 했다면, 저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의향도 없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나서 내내 독박 육아 중이거든요. 맞벌이 부부니까 남편도 육아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 저만 육아를 해왔으니까 화가 더 나는 것 같아요.”

“질문자가 그렇게 육아에 동참하지 않는 남자를 구해놓고 왜 그래요? 그래도 남편이 죽어버리는 게 나아요, 살아있는 게 나아요?”

“그래도 살아있는 게 낫습니다.”

“남편이 죽어버리면 어차피 질문자가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남편이 살아있으니까 돈이라도 보내주잖아요. 만약 남편이 죽어버렸다면 남편한테 왜 나만 독박 육아하냐고 한탄할 거 아니잖아요. 남편이 외국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아이들이 엄마 말도 안 듣는데 멀리 있는 아빠 말은 듣겠어요?”

“저는 아이들한테 협박하듯이 말을 하는데, 그래도 남편은 아이들한테 좋게 잘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도 그런 남편의 말을 잘 듣더라고요.”

“그건 아빠 말을 잘 듣는 게 아니고 어쩌다 와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도 일 년에 딱 한 번만 간섭을 해봐요. 그러면 아이들도 질문자의 말을 들을 거예요. 질문자의 경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간섭을 하니까 잔소리가 된 겁니다.

어차피 이야기를 해봐야 개선될 여지가 없는데 계속 이야기를 하게 되면 본인도 속상하고 관계만 나빠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해요. 아이가 공부를 안 하는 1차 피해뿐만 아니라 아이와의 사이도 나빠지는 2차 피해, 본인이 괴로운 3차 피해까지 입을 이유는 없잖아요. 현명하다면 1차 피해만 입으면 되지 더 많은 피해까지 입을 필요가 없어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내가 바보 같은 행동을 했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노력하고 결심하고 각오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바보 같은 행동만 그만 두면 됩니다.

‘안 죽고 사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밥이라도 먹으니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순간 여기에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겁니다. 아이가 늦게 일어나더라도 ‘학교에 다니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직장 나가는 사이에 집이라도 지켜주니 고맙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질문자가 낳아서 질문자가 키웠는데 아이가 왜 문제겠어요? 질문자도 잘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가 조금 늦게 일어나는 게 무슨 큰 일이에요? 요즘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핸드폰만 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전부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어요. 아이가 핸드폰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건 보편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어요.

요즘 직장을 잃은 사람들도 많은데 질문자는 직장에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건강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또 남편이 안 죽고 살아서 돈이라고 꼬박꼬박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남편이 돈을 꼬박꼬박 보내주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밥은 안 해줘도 되니 얼마나 좋아요? 요즘 같은 때에 남편까지 한국에 돌아와서 직장 안 나가고 재택근무만 하고 있으면 질문자는 엄청 힘들 거예요. 코로나 이후 가정불화가 심해졌다고 하는데 질문자는 남편과 뚝 떨어져 있으니 더 나을지도 몰라요. 힘들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좋은 일이 굉장히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 ‘감사합니다. 저는 편안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부처님께서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참회할 수 있게 출가를 허락한 것이 이해가 안 됩니다. 악행을 하고서도 나중에 진실로 참회하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 큰 아이가 하이스쿨을 지나 대학을 갔는데 유혹에 약하고 자기중심을 잡기 어려워 현실을 회피합니다. 큰 아이를 제가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까요?
  • 비핵화 없는 종전선언은 미군 철수를 가져오고 오히려 남한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북한이 경제개방도 하고, 체제유지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북한 주민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요?
  • 노모와 미혼인 제가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시골로 직장을 옮겨야 할지 현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입니다. 시골에 집을 지었으나 막상 내려가려니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 탈모로 인해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하던 도반이 제게 생긴 탈모 증상 치료를 위해 기치료를 자꾸 권해서 너무 불편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스님은 수행의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수행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여 원인을 규명하고 그 원인을 없애는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둘째, 문제 자체를 안 삼아버리는 방법입니다. 아이가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합시다. 상담을 해서 원인을 밝혀 해결하려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라면, 아이가 건강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문제 자체를 삼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방법입니다. 문제를 안 삼는 것이 사실은 더 큰 도(道)예요.

괴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해결책

마지막 질문자가 탈모 치료에 대해 질문했는데,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어차피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했는데 머리카락이 빠지니 오히려 잘 됐다’ 이렇게 생각을 탁 바꿔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지요. 물론 이렇게 하기가 좀 어렵긴 합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 가장 쉬운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문제로 삼지 않는 것, 이것이 선(禪)이에요. 생각을 안 해버리는 겁니다. 회피하는 것이 아니에요. ‘별 일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야’ 라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가 근심 걱정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이렇게 관점만 바꾸면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여유를 가지시고 어깨 펴고 그렇게 사시면 좋겠습니다.”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방송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내일 농사 일감에 대해 잠깐 의논한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한 후 오전에는 배추를 뽑고 소금물에 절이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산 윗 밭에 올라가서 내년 농사를 위해 밭 정비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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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

스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또 한번 참회합니다.

2020-12-28 08:17:06

수행

스님 말씀 감사합니다.

2020-12-22 13:33:47

실상

문제삼지 않는 것이 禪이다. 잘 들었습니다.

2020-12-17 23: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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