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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하루 종일 정토회 결사행자들과 온라인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온라인 일요 명상을 생방송으로 진행했습니다.
새벽 기도와 공양을 마치고 비닐하우스 4동을 둘러보며 일감을 확인했습니다.
비닐하우스를 나와 산 아랫밭으로 갔습니다.
아랫밭으로 가는 길에 밭으로 연결한 호스가 터져있었습니다. 날이 영하로 떨어지면 호스가 어는데, 그 위로 차가 지나다니다 보니 깨진 모양입니다. 이제 밭에는 배추와 무만 여물어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물을 줄 일이 없기 때문에 호스를 다 정리했습니다.
곧이어 오늘 함께 일할 봉사자들이 도착했습니다. 지난번에 울타리 주변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고 시간이 부족해서 그냥 두었는데, 오늘은 그 나뭇가지를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일감을 설명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나뭇가지를 잘라 한쪽에 가지런히 쌓았습니다. 나뭇가지는 수련원으로 가져가 땔감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어느덧 열 시가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법문이 있어서 잠시 수련원에 다녀올게요. 법문만 하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농사일을 마친 후 오전 10시에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60여 명의 결사행자들이 모두 화상 회의 방에 접속하자 예불, 반야심경과 함께 온라인 결사행자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오전에는 포살과 자자를 하기로 했습니다. 자자를 하기에 앞서 결사행자들은 스님에게 입재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왜 수행자는 포살과 자자를 해야 하는지 그 취지와 방법에 대해 자세히 법문해 주었습니다.
“정토회 결사행자는 1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자자(自恣)'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매달 한 차례 '포살(布薩)'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기록에 보면 초하루와 보름, 한 달에 두 번 포살을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보름이 한 달의 중간이지만, 인도는 보름이 그 달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 달의 마지막 날을 ‘풀문 데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30일을 지칭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보름날 밤에 상가의 구성원들이 모여서 포살을 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자는 부처님 당시에 안거가 끝나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1년에 한 차례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방으로 불교가 전해진 이후에는 하안거와 동안거 두 번의 안거를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자자도 두 번 하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안거’라는 공동체 생활을 마칠 때 지난 3개월 동안 보고 듣고 한 것을 기준으로 자자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법사님들은 같이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자가 깊이 되는데, 대중 법사님들은 다 따로따로 살고 일도 같이 하지 않으니까 자자가 깊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보고 듣고 직접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자자가 되지 않고, 주로 누구에게 전해 들은 소문을 갖고 자자를 하기가 쉬운데, 원래 자자는 들은 소문을 갖고 하면 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계율에 근거해서 우리가 지키기로 서로 약속한 것을 기준으로 포살도 하고 자자도 하는 겁니다. 인생 전반에 대해서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을 문제 제기하는 게 아니에요.
자자를 하고 나면 힘든 이유는 인간의 뇌에 깔려 있는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요즘 유튜브에서 동영상 하나를 보면 그와 연관된 동영상이 옆에 계속 뜨게 되어 있듯이 그런 작용이 인간의 뇌에도 프로그램화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구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는 경험이 한번 뇌 속에 각인되면, 이것은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하나 본 것과 똑같아요. 그 순간 머릿속에서 그 사람과 기분 나빴던 장면이 순식간에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 때문만이 아니라 과거에 기분 나빴던 것들이 전부 동시에 떠오르기 때문에 감정이 격해지게 돼요.
칭찬을 하면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칭찬을’ 이러면서도 기분이 좋게 되어 있고, 비판을 하면 ‘저는 괜찮습니다’ 해도 기분이 나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뇌에 깔려져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칭찬하면 좋아하고 비판하면 기분 나빠하는 정신작용 프로그램은 누구에게나 깔려있어요. 그래서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을 갖고 문제 삼으면 안 됩니다. 기분이 나쁠 때 우리는 바깥으로 기분이 나쁘다는 걸 드러내거나, 바깥으로 안 드러내도 그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기분이 나쁠 때마다 이렇게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프로그램에 의해 일어나는 하나의 작동일 뿐이다’
이런 이치를 알게 되면 기분 나쁨은 여전히 일어나지만 기분 나쁨에 구애를 안 받게 됩니다. 기분 좋음이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기분 좋음에 들뜨지 않게 됩니다. 그건 그냥 하나의 프로그램의 문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느낌은 일어나지만 느낌이 감정으로까지 확대되지 않도록 이 이치를 알고 꾸준히 연습해 나가야 합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 지적받는 것이 자자이기 때문에 자자를 하고 나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자를 할 때는 나를 위해서 사람들이 지적을 해준다는 관점이 잡혀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이 안 잡힌 사람은 자자를 하고 나면 기분이 나빠지고, 그 사람을 통해서 기분 나빴던 것들이 자기도 모르게 전부 머릿속에서 떠올라서 감정이 상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대답을 할 때도 약간 방어적으로 하거나 변명조로 얘기하게 돼요. 그래서 이런 원리를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자자를 하면 오히려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됩니다.
포살(布薩)은 ‘제가 짜증을 내서 미안합니다. 다음에는 유의하겠습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바깥으로 드러내어 참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 자각을 해야 포살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에는 아예 자각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자각을 했는데도 드러내어 참회를 안 하는 사람이 있고, 자각을 해서 드러내어 참회하는 사람이 있고, 자각은 했는데 자기 체면을 생각해서 남한테 드러내서 참회하는 것은 꺼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쨌든 포살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 자각을 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나도 모릅니다. 나도 모르니까 그것을 드러내어 참회할 방법이 없어요. 이럴 때 가까이서 나를 지켜본 도반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자자(自恣)’입니다. 내가 누구한테 말을 해주는 게 자자의 핵심이 아니고, 내가 도반들에게 나를 위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자자의 핵심입니다. 내가 나를 못 보니까 다른 사람의 거울을 통해서 나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나를 위해서 이렇게 도반들에게 청해야 합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을 저를 위해서 저에게 알려주시면 제가 그걸 충분히 개선하겠습니다.’
이렇게 자자를 하고 나면 나도 모르는 잘못을 개선하는 효과도 생기지만, 오해도 해소됩니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하면 상대는 나의 잘못을 보고 ‘저 사람이 왜 저러지?’ 이렇게 의혹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포살을 할 때 내가 그 잘못을 스스로 알고 있어서 대중에게 드러내어 참회하면 상대의 의혹이 풀리게 되죠.
‘아, 저분이 저걸 알고 있네. 개선은 못 하지만 자기 문제를 알고 있구나.’
이렇게 해서 의혹이 모두 풀리면 가장 좋지만, 어떤 경우에는 포살을 할 때도 말을 안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중의 의혹이 계속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자를 해서 ‘나를 위해서 지적해 달라’ 하고 요청하면 도반들이 그런 의혹들을 이야기하게 되죠. 이때 사실이 아닌 경우이거나 계율을 어기지 않았던 경우에는 해명할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그 결과 도반이 갖고 있던 의혹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도반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참회해서 의혹을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반의 지적에 대해 사실이 아님을 알려서 의혹을 풀어주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오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해가 씨앗이 되어 사이가 벌어지는 큰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솔하게 자자를 청해야 합니다.
그동안 자자를 해보면, 그 사람 때문에 자기 마음이 불편했던 것을 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불편했던 것을 내어놓는 것은 자자가 아니에요.
‘누구의 행동을 보고 제 마음이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이렇게 내 감정이 불편한 것은 포살 시간에 내어 놓아야 돼요. 왜냐하면 수행의 관점에서는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다 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편한 건 자기 수행의 부족이라고 봐야 해요. 내가 불편해서 그 마음을 내어놓게 되면 문제제기도 분명하게 하기 어렵고, 그 문제제기를 상대가 받아들일 때도 감정이 더 상하게 됩니다. 내가 불편한 건 내 문제이지 상대의 문제는 아닙니다.
‘저 도반을 위해서 저 행동은 개선되는 게 좋겠어. 만일 법사나 결사행자가 저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를 살 확률이 높을 것 같아. 대중이 실망할 수 있는 행동인데, 정작 본인은 뭐가 문제인지 잘 몰라서 안타깝다.’
이런 마음으로 지적을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늘 마음이 불편했던 것을 가슴속에 쌓아 두었다가 자자 때 한꺼번에 드러내기 때문에 자자가 시원해지지 않고, 하고 나면 서로 찝찝해지는 겁니다.
자자(自恣)란 내가 수행자로서 더욱 성장하기 위해 주위 도반의 도움을 얻어서 나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즉 도반이라는 거울을 나를 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든 해달라고 도반에게 진솔하게 청해야 합니다. 꼭 잘못한 것을 참회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해를 해명하는 기회도 되기 때문에 진솔하게 청하는 게 좋습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떤 의혹을 갖고 있는지 평소에는 내가 알 수 없잖아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다 말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법륜 스님에 대해서 뭔가 의혹이 있거나 미심쩍은 게 있어도 다 말하지 않잖아요. 진솔하게 청해도 사실은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진솔하게 청하면 조금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진솔하게 청해서 그런 의혹들을 해소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자자는 자기에게 쌓인 불만을 내어놓는 시간이 아닙니다. 자자는 내가 기분이 나빴던 일을 내어놓는 시간이 아니라 상대가 이 부분을 개선하면 좋겠다는 걸 내어놓는 시간입니다.
‘저분이 계율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을 개선해야 저분의 발전에 도움이 되겠다.’
이런 관점에서 자자를 해야 말하기도 쉽고 편안합니다. 특히 문제제기를 할 때 자기의 불편했던 마음을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여러분들께서 이해하시고 자자를 하셨으면 합니다. 오늘 자자를 통해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있는 찌꺼기와 의혹들이 모두 사라지면 좋겠습니다.”
여기까지 입재 법문을 한 후 곧바로 포살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낭독하는 40계본에 따라 결사행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뉘우치며 한 배 한 배 절을 했습니다.
“승가의 청정함은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이 청정함을 말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외우는 계본을 잘 듣고 생각하여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자각하게 되면 대중에게 드러내어 참회하십시오. 그러면 곧 청정해질 것입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잠자코 있을지니 잠잠하면 곧 청정하다고 하겠습니다.
물을 때는 마땅히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같이 세 번을 물을 것이니 세 번을 질문받고도 허물이 있으면서 드러내어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는 고의적인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수행자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승가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허물이 있다고 기억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청정하기를 원한다면 그 허물을 대중 앞에 드러내십시오. 드러내고 참회하면 곧 청정함을 얻을 것입니다.
첫째,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 어떤 정토행자라도 이 계본을 어기면 허물이 됩니다. 이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계본에 대해서 청정합니까?”
화상회의 화면 속에는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회를 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스님은 입재 법문만 마치고 얼른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사과, 감 등 참을 챙겨 아랫밭으로 갔습니다. 스님이 법문을 하고 오는 사이 봉사자들은 쉼없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참 드시고 하세요!”
참을 먹으며 잠깐 숨을 돌린 뒤 다시 나뭇가지 정리를 했습니다. 밭 뒤에는 오가피나무도 있었습니다. 오가피 열매도 땄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울력을 마쳤습니다. 힘이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땀을 닦는 봉사자들에게 스님은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정말 힘든 일인데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일은 다음에 하루 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저희들끼리 시간 날 때마다 정리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법사님들은 포살을 마치고, 이어서 모둠별로 자자를 했습니다.
오후 1시 20분에 자자를 마치고 각자 점심식사를 한 후 2시 20분에 다시 화상회의 방에 모두 접속했습니다.
“점심 식사 잘하셨습니까? 포살과 자자도 잘하셨습니까? 그럼 오후에는 회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2차 만일준비위원회에서 오랜 연구와 토론 끝에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온라인 불교대학과 경전반의 운영 기간, 명칭, 입학 시기를 비롯해 회원 관리 방안, 모둠 운영 방안, 해외 정토회 조직 개편 방안, 서초정토회 편제 방안, 본부 정토회관 관리 방안, 임원 선출방식 개편안, 온라인 불사위원회 구성 등 많은 제안들을 발표했습니다.
이에 대해 결사행자들은 의문이 나는 점을 묻거나, 새로운 의견이 있으면 자유롭게 손을 들고 제안했습니다. 특히 온라인 불사위원회 신설 건에 대해서는 스님도 한마디 덧붙여 강조했습니다.
“온라인 불사위원회를 신설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는데요. 이것은 비단 홍보의 문제만이 아니고 전법, 교육, 연수, 수행 등 앞으로 정토회의 전체 사업을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준비하자는 차원에서 나온 제안입니다. 지금 방식으로 과연 온라인으로의 전면 전환이 가능하겠느냐는 거예요.
모든 회원들이 개인방을 법당으로 만들어서 사용하도록 전환을 했는데, 개인방만 법당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온라인상에 법당을 하나씩 가져야 해요. 온라인 법당에 들어가면 명상도 할 수 있고, 법회도 들을 수 있고, 교육도 받을 수 있고, 이런 방식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절에 오면 삼배를 어떻게 하고, 향과 초는 어떻게 켜는지, 사찰 예절에 대해 교육하듯이, 온라인 법당에는 어떻게 접속하고, 어떻게 퇴장하고, 언제 마이크를 켜고, 화상회의를 할 때는 어떤 예절을 지켜야 하는지 온라인 예절을 자세하게 교육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업이 온라인 방식으로 재설계를 해야 해요.
앞으로는 정토회가 온라인 시스템을 마련하는 일에 더 많은 투자를 해서 온라인 세상에서는 일반 회사보다 더 앞서갈 수 있게 되도록 지금부터 준비해야 합니다. 내 방에 노트북 하나 올려놓고 법문을 시청하는 것을 넘어서서 VR 안경을 끼면 경치가 아주 좋은 온라인 법당 안에 앉아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든지, 스님이 오직 나만을 위해 법문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한다든지, 사운드가 3D로 구현되어서 새소리와 물소리가 앞뒤 좌우에서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든지, 회원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든지, 이런 기술의 도입까지도 우리가 고려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정도의 시스템을 마련해야 정토회가 기존의 종교에 비해 탁월하게 앞서가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설계를 하는 것이 온라인 불사위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미래지향적이고 온라인 세상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미 IT기업에서 개발한 기술과 서비스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밖에 없겠지만요.
1차 만일결사냐 2차 만일결사냐 이런 구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후에도 정토회가 비약적 성장을 해나가려면 온라인으로 모든 사업을 잘 전환하는 것이 관건이에요.”
이어서 자격심사위원회, 법제위원회, 불사위원회에서도 각각 보고사항을 제출하고 함께 검토했습니다.
준비된 안건에 대해 찬반 토론을 마친 후 거수로 의결을 했습니다.
“지금 제안한 내용들을 반영해서 이문건을 전국대의원회의에 제출해도 되겠습니까?”
모두 만장일치로 손을 들고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30분을 넘겨 6시 30분에 결사행자 회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들을 처리한 후 저녁 8시 30분에 다시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코로나 이후 31번째 맞이하는 온라인 명상 시간입니다.
“제가 있는 이곳은 한국의 남부지방인데도 이번 주부터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습니다. 덩굴 채소들은 대부분 다 얼어서 시들어버렸습니다. 기후 온난화 때문에 지구 전체적으로는 기온이 오르고 있지만 이런 한파가 군데군데 닥치고 예년보다 더 일찍 영하로 떨어졌어요. 저희들은 폐교를 이용해서 살고 있으니까 매우 추워요. 어제는 나무 때는 난로를 하나 설치했습니다. 학교에 난로를 설치하니까 초등학교 때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데워서 먹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1960년이니까 벌써 60년이 흘렀네요. 초등학생일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훌쩍 지나갔어요. 아마 10년, 20년 지나서 눈을 감을 때 생각해보면 오늘 이 일이 어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는 인생이 참 긴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 가는 게 인생살이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집착하고 욕심내고 괴로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죽은 시신을 보면서 몸에 대한 집착을 떠나는 연습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도 곧 너의 모습이 될 것이고, 너도 며칠 전에는 나의 모습이었다. 나와 네가 같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명상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이어서 지난주에 외국인으로부터 올라온 질문 2가지에 대해 답변했습니다. 그중 한 분은 명상을 하고 싶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저에게 명상은 시금치와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몸에 좋다고 아무리 말해도 전 별로 맛이 없어서 자주 찾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명상이 하고 싶어 지고, 저에게 더 도움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So far, meditation for me has been like spinach. It is something that other people tell me is good for me, but I do not find it particularly pleasant. Since I do not find it particularly pleasant, I tend to not want to do it often. Do you have advice about how I can improve my meditation experience so I am eager to do it and make it more useful for me?”
“하고 싶은 것은 욕망의 일부입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할 수 없을 때 괴로움이 됩니다. 명상을 하고 싶어서 한다면 명상을 할 수 없는 조건이 되면 괴로움이 되니까 명상이 괴로움을 없애는 게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명상이 하고 싶다고 다 좋은 게 아니에요. 명상은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하기 싫어도 아니고 그냥 하는 겁니다. 명상이 하고 싶으면 할 수 없는 조건이 됐을 때 괴롭고, 명상이 하기 싫으면 해야 할 조건이 됐을 때 괴로워요. 괴로움이 되는 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욕구일 뿐입니다.
명상은 욕구를 내려놓는 겁니다. 그래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이렇게 앉아서 호흡을 한다고 명상이라 할 수 없어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명상의 필요조건이지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에요. 명상의 필요충분조건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 번뇌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명상을 해야 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자,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봅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라는 생각도 지금은 내려놓습니다. 이 순간은 하기 싫어도 하기로 했기 때문에 하고 있는 중이에요. 어차피 하고 있는데 계속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할 필요 없어요. 하기로 한 거니까 힘들게 하지 말고 편안하게 해 봅니다. 아무 할 일 없는 사람처럼 한가한 마음을 내봅니다.
그리고 마음을 콧구멍 끝에 딱 주시해서 가만히 느껴보면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내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늘 이렇게 호흡을 하고 있어요. 신체적 조건에 따라 호흡이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합니다. 그 상태를 내가 알아차립니다. 숨이 들어오면 ‘들어오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숨이 나가면 ‘나가는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숨이 가쁘면 가쁜 줄 알고, 숨이 부드러우면 부드러운 줄 알아차립니다.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해 봅니다. 40분간 하겠습니다.”
스님의 안내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 한 후 들숨과 날숨에만 깨어있는 명상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탁! 탁! 탁!
죽비 소리가 들리고, 다시 스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명상해 보니 어땠습니까? 채팅창에 여러분들의 소감을 올려 주세요.”
소감이 올라오는 동안 스님은 다시 한번 12월 초에 진행되는 주말 명상수련을 소개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다시피 12월 4일 저녁부터 5일, 6일까지 진행되는 주말 온라인 명상수련이 있습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순식간에 소감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한 줄씩 읽고 간단히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잡념이 많아서 수시로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A lot of distractions that come back and come back again repeatedly to my focus.”
“안 졸고 다리도 안 저리고 차분하게 잘했습니다.”
“This time I wasn't drowsy my legs didn't ache and I was counted throughout.”
“졸음이 많이 왔습니다.”
“I felt really sleepy.”
“몸은 힘들었는데 정신은 맑았어요.”
“It’s tough on my body but my mental clarity was there.”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소감도 보였습니다. 스님은 이에 대해 간단히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숨에 집중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명상을 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어요.”
I could not concentrate and couldn't bring focus on my breathing, a fear of death provided all through my meditation.”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것은 죽음을 생각했다는 얘기입니다. 죽음을 생각했다는 것은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마치 지금 자기가 죽을 것 같은 그런 생각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경험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두려움이라는 것이 죽음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고 죽음을 생각하는 데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놓아 버린다면 두려움은 사라져요.
죽음 때문에 두려운 게 아니고 죽음을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운 겁니다. 이런 것을 조금씩 더 탐구에 나가보면 이렇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 괴로움이라는 것은 괴로울 만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집착하니까 괴로움이 생기는구나!’
그래서 생각이 일어났을 때 생각에 집착하지 말고 오직 호흡에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괴로울래야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법문을 하고 다음 주를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일주일 동안 편안하고 행복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명상을 한 후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점심에는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하고, 저녁에는 방송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수행 모임인 길벗 회원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온라인 일요명상 전체 내용은 아래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 보기 하실 수 있습니다.
'with 코로나' 라고 합니다. 상황에 한탄하지 않고, 활용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불안하고 초조하여 근심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기보다 내 몸과 마음에 온전히 집중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갑니다.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생방송 주말 명상은 코로나 시대에 주말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입니다.
해외 거주자들도 한국시간에 맞게 참가합니다. 접수마감 시간은 한국시간 기준입니다. 생방송 주말명상 참가자는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생방송 연말 명상(초심자)'에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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