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오전에는 2차 만일결사 준비위원회와 온라인 간담회를 하고, 오후에는 개원 기념법회 준비팀과 사회사상 강의에 대한 기획회의를 했습니다.
오늘은 산 윗밭 남은 땅에 겨울채소를 심었습니다. 스님은 일찍 나와 홀로 모종을 심고 있었습니다.
8시가 되자 행자들도 나와 함께 모종을 심었습니다.
가을 햇살은 따스했지만, 바람이 거셌습니다. 바람이 한번 세차게 불 때마다 하늘에서 낙엽비가 내리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도 손끝이 시렸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10시부터 2차 만일결사 준비위원회와 온라인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지난번 1차 간담회에 이어서 진행되는 2차 간담회입니다.
만일 준비위원들은 온라인 불교대학과 경전반 운영, 지원팀 모둠 배치 방안, 해외 정토회 조직개편 방안, 정토회관 본부 관리방안, 온라인 불사위원회 구성 등 만일준비위원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 스님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2시간 동안 충분히 질의응답을 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또 쟁점사항이 나오면 다시 회의를 합시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울산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어제 밤늦게 병원에서 잠깐 뵈었던 결사행자 님의 아버님이 임종을 하셔서 두북 공동체 대중이 모두 함께 가서 천도 기도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상주분과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천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스님은 상주가 된 가족들을 위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영가께서 살아생전에 정말 삶을 성실하게 살았다면,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잘 제어하면서 살았다면, 많은 어려움을 인내하면서 살았다면, 크든 작든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베풀며 살았다면 굳이 49재니 천도재니 이런 것도 지낼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천상이나 극락이 있다면 기름이 물 위로 뜨듯이 저절로 가게 되어 있고, 비록 지옥이 있다 하더라도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중생들은 영가께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어쨌든 나쁜 곳에 가지 말고 좋은 데 가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천도 기도를 하게 됩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복을 지어도 눈을 뜨면 헛것에 불과합니다. 꿈속에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꿈을 깨고 보면 헛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상태에서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라는 게 큰 의미가 없어요. 깨달아서 진면목을 봐야 해탈을 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생각해서 ‘이건 내 것이야’, ‘이건 나야’, ‘이게 옳아’ 이렇게 주장했는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냄새도 못 맡고, 맛도 못 보고, 만지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지금에 이르러서 어떤 것을 내 것이라 할 것입니까. 어떤 것을 나라고 할 것입니까. 어떤 것이 옳다고 할 것입니까. 이것을 한마디로 나의 본래면목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 것을 잃어버렸다고 울 때 ‘어떤 것이 내 것인가’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옳다 그르다 할 때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늘 갖고 살아간다면 혼란한 세상에서도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가께서는 어제저녁에 편안하게 잘 입멸하셨습니다. 영가와 함께 살아온 가족분들이 느끼는 헤어짐의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만, 그러나 태어나면 죽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런 세상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우리 또한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내일 죽게 되더라도 삶의 후회가 없이 살아야 해요. 이것을 우리가 영가의 죽음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를 잃고, 남편을 잃은 슬픔이 크겠지만,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남은 가족들끼리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상주들과 서로 소개하고 인사를 나눈 후 장례식장을 나왔습니다. 스님은 치과 진료를 받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고, 두북 공동체 대중은 다시 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해가 산 너머로 지고 있을 무렵, 스님은 치과 진료를 마치고 두북 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오후 5시 30분부터는 개원 기념법회 사회사상 강의를 준비하고 있는 평화재단 실무자들과 온라인으로 회의를 했습니다.
지난 회의에 이어서 강의 준비팀에서는 강의 목차를 새로 마련해 왔습니다. 먼저 목차를 점검한 후 총론, 각론, 실천관에 대해 세부적으로 논의해 보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총론에 해당하는 연기적 세계관과 각론에 해당하는 교육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강의 내용을 구성할지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총론에서는 왜 문명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스님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발견되는 속도보다 전달되는 속도가 더 빠르면 광범위한 지역이 동일한 수준의 문화를 갖게 됩니다. 그런데 발생 속도가 전달 속도보다 더 빠르면 문명의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전달 속도는 늦지만 발생 속도가 계속 빨라지면 발생한 지역의 문명은 계속 앞서 가게 되고, 거기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진 지역은 문명이 뒤처지게 됩니다.
정보의 발생이라는 것은 특별한 어떤 사람이 하나를 발견해 낼 수도 있지만, 사람이 근거리에 많이 살게 될 때 정보의 축적이 많아지고, 정보의 축적이 많아질수록 새로운 아이디어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자연 속에서 이동하면서 수렵 채취를 해가는 방식으로 살 때는 30명 이상의 무리를 형성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역을 정하고 여기저기 떨어져서 생활하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의 발생이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렵채취의 원시 시대에는 문명의 발전 속도가 느렸는데, 초원 지대에 정착해서 살게 되면서부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동물을 사냥해서 잡아먹는 방식에서 사육하는 방식으로, 열매와 곡식을 채취하는 방식에서 열매와 곡식을 직접 재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한 곳에 장기간 정착해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렇게 농경과 목축을 시작함으로 인해 인간은 정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단위 면적당 생산물이 증산하게 되면서 좁은 지역에서 더 많은 무리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보의 축적이 늘어나게 되었고, 정보의 발생 속도 또한 점점 빨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문명이 발생하게 됩니다. 현재 발견된 세계 4대 문명은 그 시기를 5천 년 전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문명의 발생 시기를 신석기시대로 보기 때문에 1만 년에서 1만 2천 년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 후 문자의 발견과 이동 수단의 발명은 전달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해서 넓은 지역에 균일한 문명을 전파하게 됩니다. 지금 현대 사회는 발생 속도도 매우 빠르지만, 전달 속도도 매우 빠르다고 할 수 있죠.
정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시공간 안에서 정의를 말합니다. 가령 근대 이후 자본주의 시대는 인간만 놓고 보면 차등이 줄어드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을 함께 놓고 보면 인간의 자연에 대한 불평등이 가장 심화한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연에 대해서는 인식 상의 오류가 강화된 시대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최근에는 환경 파괴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겪고 나서 자연에 대한 인식 상의 오류마저 점점 시정되어 가고 있는 시대라 할 수 있지만, 이걸 보면 인간의 역사는 인식 상의 오류가 강화될 때도 있고, 시정될 때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이 학교에 가서 여러 가지를 배워 인식상의 오류를 시정하기도 하지만 특정 종교집단에 가면 인식 상의 오류가 강화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바른 법을 만나면 다시 인식 상의 오류가 시정되기도 합니다.
이런 개인적 오류뿐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인식 상의 오류가 시정되어 가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단지 종교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든 유교든 불교든 봉건적 시대에서는 봉건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해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종교가 차등을 합리화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오늘날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 불평등은 종교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그 사회 속에 봉건적 요소가 잔재해 있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종교와 철학이 봉건적 요소를 합리화하는 해석을 하는 것이죠. 만약 사회가 바뀌어 버리면 종교와 철학도 시대 상황에 맞추어서 해석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중동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사회 전체가 변해서 생긴 현상이 아니고 석유의 발견으로 부가 축적된 결과로 생긴 현상입니다. 갑작스러운 부의 축적은 사람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의 지배 질서를 강화하는 역효과를 낳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 사상을 받아들일 때도 러시아와 서유럽은 전혀 달랐습니다. 러시아는 전제적 사회 잔재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를 독재(獨裁)로 해석해서 공산주의가 전제적인 군주 사회로 나아갔다면, 서유럽은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갔습니다. 왜냐하면 해석을 그 사회에 맞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경우에도 태국에서는 만약 왕권에 대해 비판하게 되면 체포되거나 불이익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 넘어서 해석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불교를 좀 더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만이 아니고 변화된 한국 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른 가르침을 폈을 때 대중이 호응을 해줘야 확산이 되는데, 불이익을 받는다면 누가 호응해 주겠어요. 그래서 한 개인이 위대해서 진리가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파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비롯해 여러 요소가 함께 따라줘야 합니다. 진리의 발견이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요인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사회적 변화가 진리의 발견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인 변화가 있다고 해도 인간이 역사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오류가 시정되기가 어렵고, 역사적으로 왜곡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회가 민주적으로 변화하면 오류가 빨리 시정됩니다.
우리가 근래에 겪었던 불행인 일제 식민지 지배와 6·25 전쟁은 많은 전통문화를 잃어버린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통문화 속에 있던 계급 차별이나 성차별 같은 봉건적인 요소를 빨리 없애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급격한 충격은 우리나라를 일본보다 더 민주적인 나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볼 때 다 나쁘다거나 다 좋다고 볼 게 아니라 이런 변화 속에서 어떤 요인을 긍정적으로 볼 것인지, 어떤 요인을 개선할 것인지,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자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감자를 아무리 다른 곳에 심어도 크기가 다를 뿐 감자라는 점은 같잖아요. 그것을 역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세계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중동 사람들이 갖고 있는 종교관이나 사회관은 그 사회 안에서 금방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부의 소식을 접하더라도 현실에서 접하는 건 그 무리 속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명이 그 사회로부터 뚝 떨어져 나와서 미국이나 유럽에서 살면 바뀌는 속도가 빠릅니다. 옛말에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라고 하듯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 결국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의식과 사회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의식, 이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서 바라보면 안 됩니다. 다만 현실에서는 어느 것을 더 강조할 것인지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의식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은 사회 환경을 바꾸는 데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이런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본질은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이미 사회과학 책을 통해 사회 환경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충분히 배웠습니다. 그 결과 사회적인 개선을 해야 한다는 인식은 충분히 하고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형성된 자신의 인식상의 오류를 시정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좀 부족합니다. 이 점을 보완하려고 하다 보니 제 강의가 마치 사회 환경적인 요인은 등한시하고 역사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는데, 그것은 현재 상황이 이렇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다음은 각론에 해당하는 교육 문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스님은 만약 교육 문제를 강의 주제로 다뤄본다면 지금 이뤄지고 있는 공교육의 한계를 짚어보고, 미래에는 무엇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 다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산업 사회에서는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요? 산업 사회가 되고 나서 공교육이라는 것이 생겼거든요. 그 전에는 도제 양성과 같은 사교육만 있었지 공교육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사교육의 목표는 개인의 역량을 탁월하게 키워서 경쟁에서 이기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많은 돈을 들여서 사교육을 하겠습니까? 이에 반해 공교육은 어떤 특정한 개인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 아니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다량으로 양성하려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교육은 한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면, 공교육은 다수 국민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그 목표는 모두 사람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에요. 즉, 노동효율을 높이는 것입니다. 노동효율을 높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예요. 첫째, 기술입니다. 둘째, 지식입니다. 지식과 기술을 다중에게 대량으로 습득시키기 위해 공교육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공교육의 목표는 비단 노동효율을 높이는 것에만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지배자의 이익에 복무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능력을 키우는 한편 반드시 지배자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충성심을 함께 가르쳤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반대편에 서버리면 오히려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 되니까요.
그런데 근대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어릴 때부터 능력 중심으로 상대적 평가를 계속 받게 해서 모든 아이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기술과 지식이 습득되어서 능력이 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열등의식은 더욱 커졌습니다.
학교 교육을 안 받고 농촌에서 자란 사람은 상대적 평가를 안 받았기 때문에 열등의식이 없는데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에 대한 엄청난 열등감을 갖거나 또 일부는 우월감을 갖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학교 교육을 통해서 개천에서 용 난 사람들은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알기 때문에 지배층들의 교만심은 옛날의 귀족들보다 더 심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이나 귀족들도 늘 백성을 보살피라는 가르침을 받았는데 지금의 학교 교육은 마치 자기가 잘나서 성공하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가치였다면, 미래 사회는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인 창의성이 있느냐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이 외에도 협력을 할 수 있느냐, 자기의 재능을 공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 이런 가치들이 미래 사회에는 더욱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은 모방을 할 때는 효과적이었지만, 그것으로 창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개척을 하기 위해서는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이제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은 모방의 시기는 지났고 개척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아직도 공무원이라든지 이런 직업들은 사회를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첨단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모방하는 재능은 별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질의응답을 한 후 온라인 회의를 마쳤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하루 종일 바빠서 여러분이 준비한 문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못했어요. 오늘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주제는 다시 날짜를 잡아서 이야기합시다. 그때는 사전에 문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올게요.”
“감사합니다. 스님.”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어 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화상회의 방을 나왔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기온이 영상 1도까지 떨어진다고 합니다. 찬 바람을 맞으며 이제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아침에 농사일을 한 후 온라인 수행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9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