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0.9 고구마 캐기, 정토대전 편찬회의, 금요 정기법회
“어렵고 힘든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갖는 방법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고구마 캐기 농사일을 한 후 오후에는 정토대전 편찬에 대해 회의하고, 저녁에는 정토회 회원들을 위한 정기법회를 생방송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5월에 심은 고구마를 드디어 수확하는 날입니다.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나서 두북 공동체 대중 모두가 고구마를 캐기 위해 밭으로 향했습니다.

고구마순을 한쪽으로 다 걷어내고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땅을 뒤집으니 포슬포슬한 황토 흙 사이로 통통한 고구마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어제 윗밭은 땅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서 고구마를 캐기도 어렵고 고구마도 많이 없었는데, 오늘은 캐기도 좋고 실한 고구마가 주렁주렁 나왔습니다.


대중보다 일찍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밭으로 나간 스님은 대중이 울력을 시작하고도 한참 동안 아랫밭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밭 뒤로 가보니 스님은 밤나무 숲에서 밤을 줍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그냥 두고 가겠어요.”

두 자루 가득 알밤을 지고 아랫 밭으로 갔습니다.

“고구마가 잘 됐어요?”

“예. 실하고 좋습니다.”

스님도 한 두둑 끝에 자리를 잡고 고구마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흙 위로 드러난 뿌리를 따라 깊이 흙을 팠는데 고구마 알은 작았습니다.

“이것 보세요.”(웃음)


그 다음부터는 실한 고구마들이 주렁주렁 달려 나왔습니다.


아랫밭을 담당하는 행자는 고구마가 다치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오늘은 빠르게 캐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느려도 좋으니까 고구마가 다치지 않도록 최대한 살살, 유물을 발굴하듯이 해주세요.”

밭 곳곳에서 크면 고구마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웃음이 계속 터져 나왔습니다. 고구마를 살살 캐다 끝이 부러지면 탄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호미를 들고 고구마를 캐기 어려운 사람들은 반찬으로 먹기 위해 고구마순을 땄습니다.


땅 속에는 벌써 겨울잠에 든 개구리도 있었습니다.


“참 드세요!”

두 시간 동안 고구마를 다 캐고 나니 참이 도착했습니다.


참을 먹고 나서 다 캔 고구마를 정리했습니다. 잔 뿌리를 잘라내고 상한 것만 분리해 상자에 담았습니다.




땅을 뒤집으면서 나온 돌과 고구마 줄기를 깨끗이 치웠습니다.


고구마를 상자에 다 담은 후 모두 함께 고구마순을 땄습니다.

먹을 수 있는 고구마순을 다 딴 후 나머지 줄기는 밭 위에 다시 뿌렸습니다. 고구마 줄기는 다음 농사를 위한 거름이 되어줄 것입니다.

스님은 다시 밭 위로 올라가 길 위에 떨어진 밤을 주웠습니다.


길 곳곳에 연보라색 들국화가 소담스럽게 피어있었습니다.

다시 아랫 밭으로 내려와 연못을 점검했습니다. 연못에서 밭으로 연결된 호스가 막혀 있어서 뚫어주었습니다.

비닐하우스로 내려와 배추와 무를 둘러보고 감을 땄습니다.


보식 중인 스님은 한 입도 못 먹을 감을 한 바구니 따서 행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점심에 같이 드세요.”

오늘 수확한 고구마는 두북 수련원 운동장에 가지런하게 펼쳐서 햇볕에 말렸습니다. 총 270kg을 캤습니다.

오전 내내 울력을 하고 오후 1시 30분부터는 공동체 법사단과 정토대전 편찬에 대해 회의를 했습니다.

먼저 연말 명상수련 진행 계획에 대해 간단히 점검한 후 본격적으로 정토대전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오늘은 자료를 검토하기보다는 그동안 편찬 작업을 해오면서 의문이 들거나 궁금한 점에 대해 스님에게 마음껏 질문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경전, 불교사상, 사회사상에 대해서 열심히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작업하는 과정에서 질문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보세요.”

법사님들은 여러 가지 의문을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무상, 고, 무아를 의미하는 삼법인에 대해 묻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삼법인(三法印)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인데요. 경전을 보면 무상(無常)을 깨닫는 이야기만 주로 나오고, 무아(無我)를 깨닫는 이야기가 거의 없어요. 왜 그런가요?”

스님은 불교 교리는 각각을 따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서로 다른 용어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무상(無常)은 경험으로 체험할 수가 있지만, 무아(無我)는 경험으로 체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에요. 초기 불교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무상을 먼저 말씀하셨고, 무상하기 때문에 무아일 수밖에 없다는 순서로 설법하신 것 같아요. 무아 자체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거나 설법하시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로 넘어오면 ‘공(空)’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공(空)은 무상보다는 무아와 그 의미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

보통 ‘선하다’, ‘악하다’ 이렇게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함과 악함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我)’ 즉 아트만(atman)입니다. 그런데 ‘무아(無我)’란 본질이라고 할 만한 어떤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있다고 우리가 상상할 뿐이지 실체는 없다는 거예요. 나에게 ‘나의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듯이 선에도 선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고, 악에도 악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그 조건에서 인연을 따라 악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선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무아’는 철학적으로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무아’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과도 논리적으로 딱 맞아떨어집니다.

블교교리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 이유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연기(緣起), 인연과보(因緣果報), 삼법인(三法印), 이런 불교교리를 각각 따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도(中道) 속에 연기(緣起)가 들어있고, 연기(緣起) 속에 중도(中道)가 들어있고, 사성제(四聖諦) 속에 중도가 들어있고, 중도 속에 사성제(四聖諦)가 들어있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중도, 연기법,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12연기가 한 덩어리라는 겁니다. 그것을 해체시켜서 따로따로 설명을 할 뿐이에요. 그러나 실제로는 이 모든 것이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연기(緣起)’란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일어났다는 관계성을 뜻합니다. 관계성은 시간적 관계성이 있고, 공간적 관계성이 있습니다. 시간적 관계성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연과보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을 더 자세하게 분석한 것이 12연기입니다. 괴로움이 발생하는 원인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12단계로 표현한 거예요.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이 말은 시간적 연기를 뜻하고, 이것이 곧 ‘무상’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 말은 공간적 연기를 뜻하고, 이것이 곧 ‘무아’입니다.

사성제인 고집멸도(苦集滅道)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苦)’란 괴로움이라는 결과를 뜻합니다. 연기법으로 살펴보면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집(集)’입니다. 즉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집착을 하는 이유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면 누가 거기에 집착하겠습니까. 금이라고 생각하니까 집착을 하게 되는 것이지 도금한 것이라면 아무도 집착하지 않아요. ‘고’에서 ‘집’으로 가는 원인을 세부적으로 분석한 것이 12연기입니다. 즉 괴로움은 인식 상의 오류가 생겨서 발생한 것이라는 거죠. ‘무상’, ‘고’, ‘무아’를 깨달아서 인식 상의 오류를 시정하면 집착할 것이 없어지고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것이 ‘멸(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실체가 없다는 ‘공’을 자각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도(道)’입니다. 이 도성제가 곧 ‘중도’와 여덟 가지 바른 길인 ‘팔정도’입니다.

그런데 팔정도(八正道)의 첫 번째가 바로 ‘정견(正見)’입니다. 정견이란 사성제의 원리를 꿰뚫어 아는 것을 뜻합니다. 즉, 팔정도 안에 사성제가 또 들어있는 거예요. 마치 사성제 안에 ‘도성제’가 팔정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나가기 위해서는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편견을 내려놓고 ‘사실은 어떤가?’ 하고 이쪽도 저쪽도 치우치지 않고 탐구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의 구체적인 실천이 ‘팔정도’입니다.

계율을 등한시하게 된 불교의 역사

인식한 것을 객관적 실체로 잘못 아는 것을 대승불교에서는 ‘상(相)’을 지었다고 설명합니다.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집착을 하기 때문이고, 집착을 하는 이유는 상(相)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상(相)’이 바로 실체입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대승불교에 와서는 ‘팔정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법이 공한 줄 깨쳐버리면 끝나버리기 때문이에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이 따로 필요 없고, 오직 깨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방법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팔정도의 중요성이 점차 작아지게 되었고, 오직 ‘반야’, 즉 지혜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갔어요. 대승경전을 읽고 반야를 증득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식으로 강조했습니다.

그 후 선불교에서는 이런 알음알이를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선정’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선불교에서도 구체적인 인격 도야는 크게 강조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선불교에서도 화두를 참구 해서 깨쳐버리면 번뇌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계율마저 등한시하게 되었어요. 깨치기만 하면 되지, 무엇을 먹든, 무엇을 지키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흘러간 겁니다. 선사들 중에 막행막식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 이유가 그래서 그렇습니다. 대신에 어떤 윤리나 도덕, 관습을 훌쩍 뛰어넘어 알음알이를 과감하게 격파하는 파격도 보여주었죠. 그러나 보편적인 인격이 없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불교가 역사적으로 이렇게 변해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경전을 읽을 때 이 내용이 후대에 만들어진 내용인지 부처님이 당시에 하신 말씀인지 구분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안내를 하신 분이지 철학적 용어를 많이 사용하신 분이 아니에요. 후대에 가면서 철학적 논쟁이 많아지면서 논리가 점점 정연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직접 사용한 독특한 용어는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용어들은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연기’는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이 처음 사용한 용어 같아요. ‘부처’, ‘열반’ 이런 용어도 모두 그 당시에 이미 사용하고 있었던 용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 스승은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고 물었을 때 ‘나의 스승은 연기를 가르친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도대체 연기가 무엇이냐?’ 하고 묻자 ‘마치 볏단이 서로 기대고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법을 설하실 때는 ‘중도’를 가장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사성제’와 ‘팔정도’ 역시 불교에만 있는 용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성제 역시 연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팔정도는 중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한 후 오후 5시에 회의를 마쳤습니다.

원고 교정 업무를 본 후 저녁 7시 30분에 스님은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정토회 회원들을 위한 금요 정기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16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여는 말씀을 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아마도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생깁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대화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해야 할 것은 100이지만 현실에서 가능한 건 70밖에 안 된다면 70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에서는 최선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비록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지만, 편안하게 질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온라인으로 즉문즉설을 하니까 좋은 점도 있습니다. 생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예전처럼 강연장에 다 모이려면 시간도 많이 들고, 이동 거리도 길 텐데, 이렇게 온라인상에서는 각자 자기 집에 앉아서 동시에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웃음)

온라인으로라도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총 5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분은 어렵고 힘들다고 느껴지는 일을 외면하는 습관을 극복하는 방법을 질문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갖는 방법은?

“저는 어렵고 힘들다고 느끼거나 두려운 마음이 들면 그 일을 외면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내 앞에 펼쳐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용기를 내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님의 가르침을 잘 새겨듣고 실천하겠습니다.”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두려움이 들 때 어떻게 극복하냐고요? 그냥 하면 됩니다. 하고 싶을 때도 그냥 하고, 하기 싫을 때도 그냥 하고, 힘들어도 그냥 하고, 두려워도 그냥 합니다.

‘하기로 한 것은 그냥 한다.’

이렇게 관점을 갖고 계속 연습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절하기 싫더라도 그냥 해 봅니다. 108배하고 나서 후회해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하기 전에는 너무 하기 싫지만, 하고 나면 모두 잘했다고 느끼는 것이 108배입니다. 운동도 하기 전에는 싫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운동하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런데 밤에 밥이 먹고 싶어서 먹은 사람은 대부분 다음날 아침에 후회합니다. 그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했지만 손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이나 운동은 하기 싫었지만 하고 나면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고 나면 후회가 없어요.

인생에서 늘 마주하는 네 가지 상황

우리가 갖는 마음에는 하고 싶은 마음과 하기 싫은 마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하는 게 이익인 일과 하는 게 손해인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조합하면 총 네 가지의 경우의 수가 나옵니다.

첫째, 하고 싶은 일이 나중에 이익이 될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이익이 되니까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둘째, 하기 싫은 일이 나중에 손해가 나는 일이라면 이것도 손해날 일인데 하기 싫기까지 하니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가 되는 나머지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셋째, 하고 싶은 일이 나중에 손해가 될 때입니다. 넷째, 하기 싫은 일이 나중에 이익이 될 때입니다. 하기 싫은 것은 무조건 해야 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조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이익인 경우도 있고 손해인 경우도 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 손해인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는 거예요. 하기 싫은 일을 하면 이익인 경우도 있고 손해인 경우도 있는데, 하기 싫은 일인데 그 일을 하면 이익이 되는 경우에는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하고 싶은 일인데 그 일을 하고 나면 손해가 생긴다면 그 일은 안 해야 해요. 어떤 사람의 종아리를 만지고 싶어도 행동에 옮기면 성추행이 되기 때문에 만지면 안 됩니다. 행동에 옮기면 손해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밤늦게는 아무리 밥을 먹고 싶어도 손해가 나니까 안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담배를 피우고 싶어도 건강에 나쁘니까 안 피워야 해요.

아침에 절하기 싫다고 안 하면 변화가 안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절을 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절하고 나서 ‘괜히 절했다’ 이렇게 후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을 하고 나면 다 좋아합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기로 했지만, 막상 일어나려면 이불에서 나오기 싫어요. 하지만 일어나버리면 후회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냥 한다

‘일어나기 싫다’ 이것은 일어나기 전의 생각이에요. ‘절하기 싫다’ 이것도 절하기 전의 생각이에요. 절을 하고 나면 이 생각은 금방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멈출 때도 그냥 멈추면 됩니다. 하기 싫은 것을 행할 때도 그냥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한다고요?”

“그냥 한다.”

“그냥 하고 나면 아무런 후회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떨 때 후회가 될까요? 다리가 부러졌는데 절을 하면 더 나빠집니다. 그럴 땐 절을 하면 안 돼요.

직접 한번 해 보세요. 하기 싫더라도 아침 5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해 보는 겁니다. 기도를 하고 나서 후회가 되는지 한 번 점검해 보세요. 기도를 하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기 싫은 그 순간을 못 참아서 안 하는 것이지, 해버리면 후회를 안 해요. 하기 싫어도 하는 게 이익이면 그냥 해 봅니다. 그냥 하면 돼요. 이해하셨어요?”

“네, 잘 알았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다른 나라의 예불과 법회 의식, 목탁의 유래와 사용하는 나라가 궁금합니다. 법종, 목어, 북, 죽비, 요령, 종, 진언들이 부처님 당시에 있었나요?
  • 동료 한 명에 대해 얼굴만 봐도 짜증이 나고 말 한마디 한 마디에 화가 치밉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요?
  • 부모님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라면서도 마음을 나누지 못해 너무 외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 나누기가 편해질 수 있을까요?
  • 법문을 듣고 마음을 비우니 편안해졌습니다. 이제 살만해졌는지 간절함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간절함이 무엇인가요?
  • 수행을 하면 할수록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사는 게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자신에 대해 알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스님은 이 좋은 법을 이웃에게 널리 전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오늘 법회 잘 들으셨습니까? 이 좋은 법을 우리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특히 이번 100일 동안에는 행복학교에 많은 인연을 맺어주시면 좋겠어요. 제일 쉬운 방법은 많은 사람에게 즉문즉설 유튜브를 공유해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쉬운 방법은 행복학교를 소개하는 거예요. 유튜브는 그냥 보고 마는 것이지만 행복학교에 가면 마음공부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총 5회에 걸쳐 진행되는 행복 연습을 하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수 있어요. 어제 행복학교 마음 편 과정을 끝낸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을 했는데, 아주 수준이 높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행복학교를 한 번 권유해 보세요. 권유하기 전에 본인이 직접 참여해보셔도 되고요.”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생방송을 끝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한 후 오전에는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는 개원 기념법회 사회사상 강의 준비팀과 화상 회의를 하고, 저녁에는 정토회 모둠장 대회를 온라인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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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정기법회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1-04-26 23:25:28

임명환

두려워도 그냥 한다...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2020-10-21 10:31:30

보각

감사합니다 스님

2020-10-15 10:5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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