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7.25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
“행복이 지속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스님은 7월 20일부터 24일까지 4박 5일간 1천여 명의 대중과 함께 온라인 명상수련을 잘 마쳤습니다.

과연 1천여 명의 대중이 혼자 집에서 온라인으로 명상수련을 할 수 있을지 우려와 기대가 많았는데, 오히려 명상수련을 자발적으로 끝낸 사람이 많았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정토회 역사상 처음으로 온라인 명상수련을 하게 되었는데, 우려와 달리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문경 수련원까지 직접 찾아오기 힘들었던 사람들도 명상수련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24일 10시 30분에 명상수련 회향식을 마쳤습니다. 하늘에서는 비가 계속 쏟아졌습니다. 공동체 대중이 명상수련을 하며 사용한 공간을 대청소하는 사이 스님은 비옷을 입고 명상원 뒤쪽 사면에서 가시덩굴을 베었습니다.

대청소가 끝난 후 공동체 대중은 다시 명상원에 둥글게 모여 앉아 명상수련 소감을 나누고, 수행을 하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스님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경 수련원에서 하룻밤을 잔 후 다음날 새벽 4시 45분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오늘은 2020년 7월 25일, 정토행자 만일결사 중 제10차 천일결사 2차 백일기도 41일째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9,139일째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27년 넘게 하루도 쉬지 않고 정진해왔습니다. 그에 이어서 오늘도 정진하겠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108배와 명상을 하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지금까지는 각 지방에서
우기의 하안거를 보낸 비구들이 사방팔방에서 여래를 뵙고자 왔고,
우리는 그와 같이 수승한 비구들을 만나
그들을 존경하면서 받들어 모실 수도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입멸하신 후에는 우리는 그런 수승한 비구들을 만나거나
또 그들을 존경하면서 받들어 모실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이 저에게 서글프게 생각되옵니다.”

“아난다여! 그다지 슬퍼할 것은 없느니라.
나의 사후에도 신앙심이 두터운 양가의 자제[善男子]는
다음과 같이 여래를 기념할 만한 네 곳을 보면서,
여래를 생각하고 세상을 무상하게 여기면서
깊은 믿음을 발로할 수 있을 것이니라.”


사홍서원으로 천일결사 기도를 마치고 스님은 오늘 독송한 경전의 의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지난 일주일간 경전은 부처님께서 파바 마을에서 춘다의 공양을 받으시고 급성 설사와 함께 병을 얻으신 후 카쿠타 강에서 마지막 목욕을 하시고 쿠시나가라 교외로 오셔서 사라 나무들이 우거진 숲에 들어가시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서 길게 깐 다음 머리는 북쪽으로 향하고, 다리는 남쪽으로 한 후,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서쪽을 향해 다리를 포개어 누워서 잠시 쉬셨습니다. 그리고 아난다는 불러서 ‘나는 오늘 밤 이곳에서 열반에 들리라’ 선언을 하십니다.

나를 신통이 있는 사람으로 신격화하지 말라

경전에는 그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풍악소리가 울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라 나무가 때가 아니었는데도 꽃을 피웠다고 해요. 사라 나무 꽃이 흰색인가 봐요. ‘사라 나무가 학처럼 희어졌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사라 나무 꽃이 만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꽃잎들이 떨어져서 부처님의 몸 위를 덮은 겁니다. 이는 일반 대중에게는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이것을 두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하늘의 신들이 여래가 열반에 들기 전에 여래에게 올리는 마지막 공양이다. 하늘의 신들이 정성을 다해서 여래에게 공양을 올린다.’

하늘의 신이라는 표현은 ‘신통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신통이란 어떠한 힘을 가져서 보통 사람은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일들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통을 증득하는 것을 곧 도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대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이 들떠서 즐거운 것은 곧 마음이 가라앉아서 느끼는 괴로움과 늘 한 쌍으로 움직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苦)와 락(樂)은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즐거움으로 행복을 삼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렇다면 괴로움으로 바뀌지 않는 행복, 즉 지속 가능한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요? 즐거움을 행복으로 삼아서는 결코 지속 가능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 지속 가능하려면 고요함을 행복으로 삼아야 합니다. 괴로움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마음이 들뜨거나 가라앉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고요함으로 행복을 삼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괴로움도 없어지고 동시에 들뜨는 것에서 오는 기분 좋음도 함께 사라집니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여여합니다. 내가 원하는 상황이 되든 원하지 않는 상황이 되든, 다른 사람의 행동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든 원하는 대로 되지 않든, 마음에 괴로움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고 해서 즐거워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괴로워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든 원하는 대로 되지 않든, 그 조건과 상황에 관계없이 나의 마음은 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이렇게 받아들이고, 저런 일이 일어나면 저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응하고, 저런 일에 대해서는 저렇게 대응하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도록 하는 것이 내가 주인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도록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가 경계의 노예가 됩니다. 원하는 대로 되면 마음이 기뻤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이 슬펐다가, 이렇게 좋았다가 괴로웠다가를 반복하며 늘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경계에 따라 우리의 삶이 놀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대부분 이렇습니다. 조금 마음에 들면 좋아했다가 조금 마음에 안 들면 싫어합니다. 조금만 좋으면 입이 옆으로 찢어지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입이 앞으로 튀어나옵니다.

지속 가능한 행복이란

그러나 이런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지속 가능한 행복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피부 빛깔이 검든 희든, 키가 크든 작든, 계급이 브라만이든 수드라든, 남자든 여자든, 신체가 건강하든 장애가 있든, 그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조건에 맞는 사람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면 이 길은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은 도달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조건과 관계없이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누구에게나 다 열려있는 넓은 문이라는 뜻으로 ‘보문(普門)’이라고도 표현하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도 힘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파워를 과시하면 숭배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신통이나 힘을 숭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통은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에게 미혹의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수행과 신통이 다르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신통만 믿고 어리석은 충동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 중에 신통을 행하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중생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 신통을 숭상하던 문화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니까 신통이 자재한 것으로 기대하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같이 살아보니 부처님이 신통을 보여주지 않으니까 오히려 부처님 곁을 떠나 자신의 고향 마을로 가서 ‘부처님에게는 신통이 없다’라고 비난을 하곤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난다가 부처님께 ‘누군가 부처님을 비난합니다’라고 하니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웃으시면서 ‘아니다. 그는 여래를 칭찬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웃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풍악 소리가 울리는 모습에 대해서도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늘의 신들이 여래에게 올리는 마지막 공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최상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최상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서 바르게 사유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진정으로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이다.’

이 말씀이 우리 수행자들이 꼭 명심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씀을 눈여겨보고 귀담아 들어야 하는데, 대부분이 이런 내용을 함부로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들 마음속 한편에는 늘 신통이나 파워가 있는 사람을 공경하고 그런 사람에게 기대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처님께서 자신을 신통이 있는 사람으로 신격화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장소를 생각하라는 말의 의미

부처님이 계시는 당시에는 안거가 끝나면 수행 대중들이 모두 부처님 곁으로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때 쟁쟁한 장로 수행승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고, 그들에게 공양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수행 대중들은 안거 기간 동안에도 늘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했기 때문에 안거가 끝나면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모였던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난다 존자가 이렇게 질문한 겁니다.

‘만약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오늘 읽은 경전은 바로 이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부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난다여, 걱정하지 말라. 여래가 없을 때는 네 곳의 성스러운 장소, 즉 사성지를 생각하라.’

사성지는 부처님이 태어나신 룸비니,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 처음으로 설법하신 사르나트,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르를 뜻합니다.

첫째,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카필라바스투의 룸비니를 찾아서 ‘이곳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셨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떠올립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태어날 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요약되어 있습니다. 신과 인간 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고귀한 자는 깨달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깨달아서 세상 아무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큼 고귀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에 대한 칭송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 있다고 했으니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나만 고귀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고귀한 존재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어서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귀한 존재라고 함은 자기가 고귀한 줄 모르고 헤매는 사람들이 다 고귀한 존재임을 알도록 해서 그들도 괴로움 없이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불교용어로는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다 나와 한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에 가서는 부처님 출현의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장소는 카필라성의 룸비니입니다.

둘째, 마가다국의 보드가야가 부처님께서 6년 고행 후 깨달음을 얻은 곳입니다. 그곳을 찾아서 부처님이 고행을 버리고 구도행을 해서 깨달은 내용을 떠올려야 합니다. 깨달음의 내용은 바로 연기법입니다. 이 세상 천하 만물이 하나하나 떨어진 개별 존재들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모두 연관된 존재라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남으로 인해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이 존재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을 깨달음으로 인해 모든 번뇌가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보드가야를 참배하면서 늘 진리로서 불교를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바라나시의 사르나트는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 설법한 곳입니다. 이 곳에서는 ‘존재의 참모습이 연기라면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떠한 실천의 길을 가야 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실천의 길은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부처님께서 첫 가르침을 편 초전법륜 성지에 가서는 이 중도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삶에서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괴로움을 벗어나는 실천의 자세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입니다. 그리고 사성제를 위해 우리가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행해야 하는 길이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인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알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사성제, 그리고 그것을 향해 매일 행해야 하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고, 언제나 지금 여기에 깨어있어야 하고, 잠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팔정도에서는 이를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정진(正精進)이라고 합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치대로 알아차리고, 사유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입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말을 항상 바르게, 행동도 항상 바르게 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바르게 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입니다.

부처님의 첫 설법에는 이런 구체적인 실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불교라고 하면 사실 이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수행자라면 항상 편견이나 극단에 치우치지 말고, 어떤 전제도 없이 주어진 상황에서 바른 길인 중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의 소멸을 예측하고 소멸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덟 가지 바른 행동을 해나가야 합니다.

초전법륜 성지를 순례하라는 것은 장소에만 가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여래가 가르친 법을 떠올리며 상기하라는 의미입니다.

넷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라 사라나무 숲에 이르러서는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떠올릴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 때 남겨두신 유훈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장소가 뜻하는 의미를 떠올리는 것이 부처님을 떠올리는 것과 똑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다시 한번 오늘 읽은 경전의 요지를 강조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오늘의 경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여래가 열반에 든 후에 수행자는 사성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도 인도 성지순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성지에 가보거나 복을 빌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에 가는 이유는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를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를 방문하는 이유는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설법하신 사르나트를 방문하는 이유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에서는 ‘삶을 마감하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수행자가 이 네 가지에 대해 늘 생각한다면 잘못된 길로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중간에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이러한 관점을 분명하게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 경전에는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히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점은 아난다와 부처님의 대화입니다. 25년 동안 늘 부처님 곁에서 시봉 하던 아난다는 부처님의 열반을 앞두고 슬픔에 잠겨 숲 속에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대중에게 아난다를 부처님 곁으로 데려오라고 해서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아난다여, 너무 슬퍼하지 말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니라.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나의 가르침인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있으리라.’

부처님은 이렇게 아난다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난다가 이제 부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하고, 무엇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고, 어디에 공양을 올려야 하는지를 묻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수행의 목표는 신통이라는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참 자유, 참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열반의 길은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아난다가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 사성지를 생각하라’고 하신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정진해 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합장으로 인사를 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똑같은 경전의 내용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에 바로 적용되는 가르침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스님은 두북으로 출발했습니다. 9시에 도착한 스님은 작업복을 입자마자 지난주에 옮겨 심은 상추 모종 중에 살아남지 못한 곳마다 새 모종을 심었습니다.

공양 준비가 되자 공양을 드시고 바로 텃밭에 있는 들깻잎을 따고 풀을 뽑은 후 연장 가방을 메고 산 윗밭으로 가보았습니다.

나무가 휘어지고 넘어질 정도로 가지가 많이 달렸습니다. 그중 큰 것만 한 박스 따고, 고구마순과 들깻잎도 함께 땄습니다. 또 고소의 열매가 영글어 있어서 수확도 했습니다.


다음에는 아랫밭에 가보았는데 비바람으로 인해 가지 나무가 넘어져 있어서 일으켜 세워 임시 조치를 취한 후 가지와 오이, 옥수수를 한 바구니 수확했습니다.

내일은 두북에서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는 온라인으로 명상수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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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상

사성지를 생각하며 꾸준히
수행정진 하겟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8-02 08:29:22

월광님의 스크렙에 이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에서는 ‘삶을 마감하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수행자가 이 네 가지에 대해 늘 생각한다면 잘못된 길로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중간에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이러한 관점을 분명하게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020-08-02 02:14:43

무승화

나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 그런 나란 존재의 실상,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나의 마지막 삶의 모습 - 이 네가지, 늘 상기하며 사는 삶 - 고맙습니다.

2020-08-01 20:5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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