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5.20 (오전) 종교인 모임, 수행 법회
“자기 임무를 제대로 못해내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오전에 평화재단에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한 후 이어서 서울 정토회관에서 수행 법회 법문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서울 정토회관 앞마당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오색찬란한 연등 불빛이 수를 놓았습니다.

서울 공동체 대중과 함께 새벽 예불을 정성껏 올리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했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주교님, 교령님, 교무님이 한 분씩 차례대로 도착하자 스님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스님이 두북에서 수확해 온 상추와 쌈채소가 밥상 위에 올라왔습니다.

“목사님, 오늘도 식사기도 해주시죠.”

스님의 청을 받고 김명혁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 밖에 없는 우리들이 이렇게 자주 모여서 부족하지만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뜻을 모을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배경이 서로 다르지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3.1 운동을 일으켰던 선조들처럼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렁찬 아멘 소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논의 안건은 6월에 종교인 모임이 통영을 방문하는 일정에 대해 세부 계획을 확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인모임에서는 오는 6월에 통영을 방문하여 음악을 통해 분단된 우리 민족에게 민족화해와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했던 윤이상 선생과 그 유족들이 겪은 그간의 고초에 대해 위로하고, 통영 시민들을 위해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의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럼 6월에는 통영 방문 일정으로 종교인 모임을 대신하겠습니다. 통영에서 뵙겠습니다.”

세부 일정을 확정한 후 모임을 마쳤습니다.

평화재단을 나온 스님은 다시 서울 정토회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은 코로나 19 사태 이후 처음으로 법당을 개방하는 날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 개학을 시작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정토회도 전국 정토법당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태원 클럽 사태로 인해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법당 출입에 각별히 신경을 썼습니다. 서초 법당을 찾은 정토행자들은 마스크를 끼고, 손 소독을 하고, 체온을 측정한 후 법당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법문을 듣는 풍경도 조금 달랐습니다. 예전에는 다닥다닥 붙어 최대한 많은 사람이 함께 법문을 들었는데 오늘은 뚝뚝 떨어져 법문을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은 2층에서 화면을 통해 법문을 들었습니다. 전국 법당에서도 생중계를 통해 법문을 함께 들었습니다.

스님은 반갑게 인사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석 달 만에 이렇게 여러분의 얼굴을 보고 법문을 하게 되네요. (모두 웃음) 지난 백일 동안 집에서 잘들 지내셨습니까?”

“네!”

영상 속의 스님이 아닌 직접 눈앞에서 보는 스님의 환한 웃음이 너무나 반갑기만 합니다.

“오늘은 두북 수련원에서 법회를 하지 않고 서울 정토회관에서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석 달 동안 두북 정토수련원에 머물면서 농사를 준비하고, 농사를 짓고, 또 법사님들과 정토회의 미래에 대해 여러 가지 탐구와 논의를 하면서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집에서 법문 잘 들으셨습니까?”

“네!”

“법당에 안 나오고 집에서 들으니 더 좋았죠? 더 좋았다고 느끼셨다면 앞으로 법당을 다 없애버리고 온라인으로 법회를 할까요? (모두 웃음) 법당에 안 나와도 되게끔 집에서 법문을 듣고 집에서 실천을 하도록 정토회의 운영 방향을 바꿔볼 의향도 있습니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로 인간관계며 생활방식 등 우리들의 생활 전반이 많이 바뀔 것 같다고 전문 학자들이 예측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단은 지켜봐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부터 어떻게 바뀌는지 한 번 살펴보세요. 그것이 모이면 사회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스님은 코로나 19로 인한 세상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 후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총 11명의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무시한다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저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임무를 제대로 못 해내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라 관계가 껄끄러워져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제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질문자가 잘 났네요. 이럴 때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합니다. 질문자가 잘나서 이러는 것이니까 어떡하겠어요? (모두 웃음)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잘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못난 사람도 있고, 빠른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더딘 사람도 있고, 큰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작은 사람도 있고, 배운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못 배운 사람도 있고, 빨리빨리 습득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좀 늦게 습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운전을 배우면 한 번 만에 면허 시험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고, 열 번 만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이 서로 다릅니다.

기준을 무엇으로 삼고 있는가

그러니 질문자의 기준에서 보면 일을 못하고 늦어서 답답하겠지만, 반면에 그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질문자가 너무 서두르고 잘난 척하는 것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기준을 갖고 있다면 ‘죄송합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에 비판을 해도 껄끄럽지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사람 기준에서 보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사실대로 말하려고 노력해도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질문자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못하는 걸 못한다 그러지, 잘한다 그래요?’

그런데 그 못한다는 기준은 나의 기준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내가 잡은 기준을 마치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기준에서 보면 내가 하는 말이 잘난 척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겁니다.

이것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빠른 것을 기준으로 상대를 보기 때문에 상대가 느려 보이는 겁니다. 내가 큰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면 다른 사람은 작아 보입니다. 그것처럼 내 능력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를 보기 때문에 상대의 능력이 좀 떨어져 보일 뿐이에요. 이것은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생긴 문제예요.

그런데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자기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키를 재어봐도 작은 사람과 큰 사람이 있고, 손가락 길이를 재어봐도 긴 사람과 짧은 사람이 있듯이 사람을 포함한 자연생태계는 이렇게 다양합니다.

첫째,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빠른 것이 좋고 느린 것은 나쁘다’ 이렇게 평가를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다만 다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답답해지지 않아요.

둘째, 그런데 이 일은 좀 빨리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답답한 상태에서 빨리 하라고 재촉하면 안 됩니다. 빨리 처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내가 답답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사람이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직 잘 모르면 가르쳐줘야 하고, 원래 그렇게 느린 사람이라면 그걸 인정해줘야 해요.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

두북 수련원에서 농사일을 시작하면서 이번에 새로 공동체가 형성됐어요. 오랫동안 같이 살던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갑자기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정토행자라 하더라도 조금씩 사는 방식이 달라요. 문경 공동체에서 사는 방식이 조금 다르고, 서울 공동체에서 사는 방식이 조금 다르고, 또 개인이 집에서 살다가 공동체에 합류한 사람도 사는 방식이 조금 다릅니다. 크게는 비슷하지만 그 안에서도 조금씩 달라요. 그래서 마음 나누기를 해보니까 이런 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왜 분리수거를 하기로 했는데 안 하느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기로 했는데 왜 그렇게 벗어놓지 않느냐’
‘이 사무실은 농사팀만 사용하기로 했는데 왜 다른 사람이 와서 사용하느냐’

이처럼 기준을 정하면 그 기준을 안 지키는 사람에 대해서 자꾸 분별심이 생겨서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누구누구가 문제입니다’ 이런 나누기를 계속하길래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당신의 분별심입니다. 분별심을 내려놓으세요. 사람이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될 수 있겠어요?’

이 말은 수행적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라는 의미예요.

‘그래, 그 사람은 그래서 신발을 그렇게 벗어놓았겠지.’
‘그래서 농사팀 전용으로 정해진 사무실에 와서 앉아 있었겠지.’
‘그래서 분리수거를 안 했겠지.’

수행적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상대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또 이렇게 말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은 편안한데 질서나 규율이 안 잡히잖아요.’

그러면 또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 괜히 지적하면 나만 성질 더러운 사람이 되지 뭐. 내버려 둬도 사는 데 지장이 없잖아.’

양쪽 다 수행자의 자세는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살아온 습관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각자가 갖고 있는 온갖 기준도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공통된 기준을 정해서 지키자고 합의해도 실천이 잘 안 되는 게 현실이에요. 실천이 안 되는 걸 보고 내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건 수행 부족입니다. 그걸 보고 내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고, 또 내 마음이 불편해지니까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되는 건데, 그러나 수행자는 달라야 합니다.

‘아, 사람들이 살아온 습관이 다 다르고, 다양한 사람들이 새로 모여서 생활하다 보니까 아직 질서가 좀 덜 잡혔구나.’

수행자는 이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지가 않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실천이 안 되는 것을 수용하는 거예요. 수용을 한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수행을 하고 사회 운동을 하는 것은 어떤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 운동을 하는 것도 지구를 살리자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실천이 안 되는 부분은 개선이 될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분리수거가 안 되면 ‘분리수거해 주세요’라고 얘기하고, 신발을 아무 데나 벗어놓으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주세요’라고 개선이 될 때까지 계속 얘기해야 합니다.

눈은 멀리 보고, 두 발은 땅을 딛고

안 된다고 짜증을 내면 내 수행 부족이고, 그렇다고 내버려 둬 버리면 운동성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정하고 나서 중간에 그게 잘 안 되면 짜증을 내고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짜증 나고 괴로운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하면 아예 목표를 없애 버립니다. 눈으로는 멀리 보지만, 두 발은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다는 말은 현실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잘 안 되는 이 현실 위에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 현실을 먼저 인정해서 본인의 마음이 답답하지 않아야 해요. 그런데 빨리 처리해야 하거나,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협력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불교대학 홍보를 위해 전단지를 부착하는데 전단지 붙이는 건 불법이고. 환경오염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군가 떼어 내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현수막이나 홍보물 통해 입학하는 분들도 있기에 안 하려니 아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새로운 공부나 일을 하면 처음에는 재미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싫증이 납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스님은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하시는데 많은 일에 집중하는 노하우가 무엇인가요?
  • 포살 계본 중 ‘다른 사람의 의견은 일단 받아들인다’라는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지침에 어긋나거나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의견까지 어떻게 받아들이고 부드럽게 수용해 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지역별로 모둠을 편성하니 부부가 한 모둠으로 편성됩니다. 부부가 한 모둠일 경우 주의사항에 대해 안내 부탁드립니다.
  • 2-2차 천일결사부터 꾸준히 기도하고 봉사했는데 요즘 들어 남편에게 더 많이 화가 올라오고 무시하는 마음이 커집니다. 화를 내고 나면 후회스럽고 자괴감이 들어요.
  • 북미 서부 정회원들이 기존대로 각자 편리한 시간에 수행 법회를 듣기를 원합니다. 현행대로 가면 별 마찰은 없어서 편하지만 수행 법회를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늘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약간 무겁습니다. 법당의 현실을 인정하고 마찰 없이 가고자 하는 게 부총무의 자세가 맞는지 여쭙니다.
    -적폐 세력, 예를 들어 조중동 언론, 검찰, 경찰, 법원의 기득권을 개혁해야 하는데 어떻게 진행하는 게 좋을까요?
  • 세상이 전부 온라인화 되더라도 정토회는 직접 만나는 모임을 적정 수준 유지해서 온라인의 부작용을 막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속이 터질 때가 있었습니다. 짜증을 내고 따져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란 것을 깨닫고 기계적으로 응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해탈의 경지일까요?
  • 어떤 전문가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자본주의의 종말이 올 거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제가 봐도 이번에 사람들이 돈이나 출세보다 가족과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법문을 듣고 ‘필리핀에서 온 영상편지’를 함께 보았습니다. 필리핀 JTS에서 코로나 19 긴급 의료용품을 지원하기까지 과정을 담은 영상과 감사 인사가 담겨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살고 있고 누구인지 관계없이 한국인이든 필리핀인이든 관계없이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합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경우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한국 JTS에서 지원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법회를 마치고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평화재단에서 ‘COVID19, 총선, 한국의 재발견’을 주제로 전문가들과 원탁 토론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변화하는 세상과 한국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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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

나를 인정하고, 틀린게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면 되겠다.

2020-05-31 18:37:21

박혜진

서로의 다름을 항상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5-27 19:30:58

오늘 첫 질문만 마음에 잘 새기며 살아도 생활이 훨씬 가벼워지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듯합니다.
먼저 인정이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낌니다. 그래야 이해심이 생겨 인내심있게 봐줄 힘이 생기는듯.
금강경, 불대 다 공부해도 이것 하나만 관점으로 잘 잡고 있으면 모든것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살아지는 듯합니다.

2020-05-27 08:4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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