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5.16. 토요 천일결사 생방송, 청년 랜선법회
“눈치를 많이 봐서 힘들어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생방송으로 천일결사 기도를 하고, 하루 종일 청년활동가들과 함께 수련을 했습니다.

새벽 4시 45분, 세상 만물의 행복을 발원하는 종소리가 두북 수련원에 울렸습니다. 동시에 생방송으로 전국, 전 세계로 울려퍼졌습니다.

원차종성변법계(願此鐘聲遍法界)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하여

철위유암실개명(鐵圍幽暗悉皆明)
철위산의 깊고 어두운 지옥 다 밝아지며

삼도이고파도산(三途離苦破刀山)
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을 여의고 도산지옥 무너지며

일체중생성정각(一切衆生成正覺)
모든 중생 바른 깨달음 이루어지이다.

종송이 끝나고 5시가 되자 스님이 직접 목탁을 치며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을 드린 후 108배와 명상을 하고 발원을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스님은 정토행자 천일결사 기도법이 어떤 원리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하고, 매일 기도할 것을 독려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을 그저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그 어려움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을 때 능력이 늘어나고 수행력이 늘어납니다. ‘삶이 어렵다’, ‘사는 게 힘들다’ 이런 생각에 자꾸 빠져있지 말고 장애나 어려움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아 보세요.

어려움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을 때

매일 아침 기도를 꾸준히 해나가면 행복한 사람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이 안 되려고 해도 이런 과정이 나를 행복한 길로 데려다 줍니다. (모두 웃음)

그런데도 여러분은 프로그램이 짜여진 대로 하지 않고, 또 하더라도 딱 집중해서 하지 않고, 남이 장에 가니까 나도 따라가는 것처럼 멍청한 상태에서 그냥 형식적으로만 따라하니까 변화가 생기지 않는 거예요. 정신을 집중해서 프로그램대로만 하면 저절로 알아차림이 생기고, 뉘우침이 생기고, ‘내가 이것이 부족하구나’, ‘내가 여기에 끌려가는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어제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지만, 오늘은 일어나면서 ‘이건 그저 극복의 대상이구나’, ‘뚫고 나가야 하는 장애에 불과하구나’, ‘해보니 별 거 아니네’ 이렇게 자각하고 정진을 해나가야 합니다.

생활에 지치다가도 정진을 하면 다시 관점을 잡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여러분들은 정진을 하는 게 힘들다고 합니다. 세상의 힘듦을 정진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데, 오히려 정진을 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하니, 이것은 정진조차도 일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절하는 걸 일로 삼고, 명상을 일로 삼고, 정진을 일로 삼기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이거 안 하면 안 되나’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은 정말 귀한 존재들입니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여러분을 비판하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졸아가면서도 여러분이 하고 있다는 건 잘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누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졸면서라도 기도를 하겠습니까? 아주 잘하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여러분은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다만 우리가 세운 목표에 견주어 보면 아직 부족한 점이 있으니 긍정적인 바탕 위에 개선해 나가자는 것입니다. 스님도 여러분이 졸면서 기도를 해도 안 쫓아내는 건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는 여러분은 정말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산에 올라가겠다고 가방을 메고 왔으니 그건 가상한데, 막상 올라가는 길에서 계곡 옆에 앉아서 놀고 있으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계속 그렇게 앉아서 놀다가 언제 정상에 올라가려고 하느냐? 얼른 일어나서 같이 가자.’

그러니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서 정진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고 법문을 하는 사이 날이 완전히 밝았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나와 스님은 수련원 뒷밭에서 열무를 수확했습니다.

아침 공양을 하고 8시에 비닐하우스로 나갔습니다. 오늘은 청년정토회 중앙활동가들도 함께 울력을 했습니다. 청년들은 스님과 1박 2일 동안 수련을 하기 위해 두북을 찾아왔습니다.

“축대를 쌓을 때 돌을 제자리에 안 놓으면 돌이 삐딱삐딱 흔들립니다. 마음도 제자리에 안 있으면 괴롭고 불안한데, 제자리에 딱 들어가면 편안해집니다. 논에 물을 댈 때도 물을 터야 되는 상황에서는 물꼬를 트는 것이 제자리이고, 물이 멈추어야 된다면 물꼬를 막아주는 게 제자리예요. 오늘은 둑을 터주는 게 아니고, 물이 새지 않도록 막아주는 게 제자리입니다.

‘만물에는 다 제자리가 있습니다.’

이 명심문을 갖고 일을 해본 후에 나중에 깨달은 바가 있는지 마음 나누기 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스님, 깨달으려면 1시간 30분 갖고는 어렵겠는데요.”

“아니예요. 10분만 명심문에 집중하면 금방 깨달을 수 있어요.”(모두 웃음)

비닐하우스에서 일할 사람, 논둑을 보수할 사람으로 나누었습니다. 청년활동가들은 삽을 들고 스님과 함께 논으로 향했습니다.

비가 오기 전 논둑을 쌓았는데, 비가 온 후 낮아진 곳들이 있었습니다. 삽으로 흙을 퍼올리고 다져주었습니다.



능숙하게 삽질을 하는 스님을 따라 청년들도 힘껏 삽질을 해봅니다. 몇 번 삽질을 하자 금세 허리가 뻐근합니다. 삽질하는 중간 중간 허리를 펴주며 둑을 높여주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두 곳의 논둑을 보수했습니다. 흙이 묻은 삽과 장화를 깨끗이 씻어서 원래 자리에 가지런히 놓아두었습니다.

스님과 청년들은 잠깐 휴식을 한 후 비닐하우스에서 계속 일을 했습니다. 고추밭에 잡초를 매고, 토마토가 높이 자랄 수 있도록 줄을 달아주었습니다.


스님은 비닐하우스 가장자리를 돌며 잡초를 뽑고 쌈채소를 수확했습니다.


양상추, 양배추도 세 바구니 수확했습니다.

사람만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이꽃 뒤에선 작은 오이가 자라나고 토마토 꽃마다 꿀벌이 부지런히 꿀을 빨며 꽃가루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농사 울력을 마치고 돌아와 10시 30분부터는 두북 수련원 뒷산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침에 쌀쌀하던 기온이 점심이 가까워오자 한 여름처럼 햇살이 따가워졌습니다.

“저기 뒷산이 보이죠. 저 산을 오를 겁니다. 재공골로 올라가면 경사가 완만해요. 내려올 때는 석문암 쪽으로 내려올 건데, 경사가 가파릅니다.”

길가에는 5월 장미가 빨갛게 피어서 눈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마을 골목길을 지나자 나지막한 산길이 나타났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개쑥입니다.

“아니. 여기에 개쑥이 많이 있네요. 올 봄에 개쑥을 찾으러 경주 남산을 다 뒤졌는데, 수련원 뒷산에 개쑥이 있었네요.” (웃음)


벌써 꽃이 피어서 뜯어서 먹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개쑥이 많이 나는 곳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한 줄로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농사를 할 때 부위별로 근육을 키울 수 있게 동작을 개발해보면 좋겠어요. 밭에서 헬스를 하는 거죠.”

“요즘은 온라인으로 PT(퍼스널 트레이닝)를 받는다고 해요. 정토회에서도 긍정적 사고 습관을 형성하는 온라인 수행프로그램을 개발해 보면 좋겠어요.”

“코로나 때문에 올 여름에 동북아 역사기행을 못 가게 되면, 두북 수련원에서 선재 수련을 하면 어떨까요? 스님이 경주 역사기행을 안내해 주시면 좋겠어요.”

...

1시간 남짓 산을 오르니 넓은 평지가 나타났습니다.

“이곳 지명이 아주 재미있어요. ‘말그미(맑음이)’라고 불러요. 맑은 곳이라는 뜻이에요.”

아카시아 향기가 그윽했습니다.


가볍게 산책을 마치고 다시 산을 내려왔습니다. 산 중턱에 큰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지게를 지고 흙을 날라서 둑을 만들었습니다. 흙을 다지는 둥근 나무로 된 도구를 ‘망개’라고 불렀어요. 터를 다진다고 망개를 들고 놓고 그랬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가팔라서 밧줄을 잡고 내려오는 구간도 있었습니다. 스님은 오르막길을 천천히 올라갔지만 내리막길은 쏜살같이 내려갔습니다. 청년들도 한참 뒤쳐져서 겨우 스님을 따라갔습니다.


뒷산을 모두 내려오니 다시 포장된 도로가 나왔습니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몸과 마음도 시원해집니다. 얼굴에는 절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2시부터는 활동에 대해 궁금한 점을 스님에게 묻고 법문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청년들은 먼저 ‘청년대학생 정토회의 10차 천일결사 사업목표’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저희는 수행을 하는 청년이 많아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수행자 양성을 위해 ‘온라인, 브랜딩, 대학생’에 초점을 맞춰보면 좋겠습니다...”

발표를 마치고 청년들은 스님께 ‘10차 천일결사와 2차 만일결사 사업방향’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스님은 7명의 청년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청년대학생들이 이렇게 700명이나 모여서 감사합니다. (모두 웃음)

코로나19로 인해 중앙활동가 7명만 연수에 참가했습니다. 스님은 1명을 100명처럼 바라보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1차 만일결사가 처음 시작된 해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1993년입니다. 만일결사를 공식적으로 시작한 건 1993년이지만, 1988년에 이미 정토포교원, 사회연구소, 사회교육원, 월간정토를 만들고, 1992년에 깨달음의 장을 진행하는 등 여러 가지 준비들을 한 다음에 1993년에 본격적으로 만일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일결사를 시작할 때 제 나이가 마흔이었고, 법사님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정토회를 설립하기 전 준비 과정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1982년에 제가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가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것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는데, ‘붓다의 시대적 조명’이라는 주제로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들 7백 명 가량이 모인 자리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강의를 듣고 감동을 받은 대학생들 중 일부가 정토회 설립에 함께 참여한 주축 멤버가 되었습니다.

...(중략)...

정토회의 준비과정을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번 2차 만일결사를 준비하는 것도 그런 청년들이 많이 참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직장도 다니고 있고, 나이도 어린데...’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나이가 젊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이가 젊은 것보다 원(願)을 갖는 게 더 중요합니다. 원(願)이 없으면 아무리 젊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30년 전에 우리가 이 길을 준비하고 갈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젊었기 때문이 아니라 원(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해보자는 원(願)이 있었고, 그것도 한두 번 해보고 멈추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약속한 것을 적어도 30년은 같이 해보자는 원(願)을 세웠습니다. 물론 중간에 그만둔 사람들도 있고, 지금도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이가 젊다고 해서 청년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런 원(願)을 갖고 도전을 했으면 좋겠어요. 중간에 장애를 만나면 그 장애를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겁니다. 여기에는 경력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제 동참했어도 원(願)이 있다면 같이 도전할 수 있는 것이고, 정토회에 10년을 다녔어도 마음속에 원(願)이 없다면 이 일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성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원(願)이 굳이 필요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고 개발하고 수정하면서 나아가기 위해서는 원(願)이 가장 중요합니다. 또한 여러분이 원(願)을 가지고 있어야 주변에 있는 건강한 젊은이들이 붙게 됩니다.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원(願)을 가지고 있어야 주변에서 모이지, 원(願)이 없는데 어떻게 주변에서 모이겠어요.

저는 재능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출발할 때는 스님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머리를 기른 상태에서 젊은 사람들과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든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상(相)에 집착하니까 동참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어요. 대신 젊은 사람들은 제가 가진 ‘원(願)’을 보고 참여했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은 스님인지 아닌지, 조계종인지 아닌지, 박사학위가 있는지 없는지, 이런 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데, 젊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구애를 덜 받습니다. 같이 살아보면서 이 사람의 원(願)을 느끼고, 또 기운을 느끼니까 ‘같이 한 번 해봅시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무리 여러분이 나이가 젊다고 해도 만약 저보다 미래에 대한 원(願)이 부족하다면 제가 더 젊은 거예요.” (모두 웃음)

지금은 새로운 것을 계획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뭐든지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다만 뭐든지 하더라도 내용과 형식이 잘 맞아야지 마음만 앞서 가면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중간에 애만 많이 쓰지 결과적으로 아무런 성과가 나지 않습니다.

지금 정토회는 두북 특별위원회를 만들어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많은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그냥 전환하면 되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전 설계를 다 세우고 여러 가지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한 대안을 마련한 다음 시작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이 생각하고 설계를 한 다음 시작해도 막상 실전에 적용해보면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실패는 아닙니다. 가능하면 많은 준비를 해서 시작을 하지만, 그 후에 나타나는 문제들은 해결하면서 다듬어 가는 겁니다.

집을 지을 때도 가능하면 완벽하게 지으려고 하지만 지어놓고 보면 완벽하지 않습니다. 어디 하나라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부분은 살면서 손 봐 나가는 거예요. 축대를 쌓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대로 한 단계씩 잘 쌓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차를 대고 물건을 실어보면 일부 부족한 면이 또 드러납니다. 그때는 다시 수리하고 조정해서 보완하는 거예요. 보완해 놓으면 당분간은 괜찮은데, 시간이 지나면 또 고장 나는 부분이 생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잘 다져지는 부분도 있고요. 고장 나는 부분은 다시 수리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이런 과정이 늘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초기 설계가 어느 정도 그럴 듯해야 조금씩 수정해나가면서 보완할 수가 있습니다.”

청년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습니다. 사업방향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사전에 제출한 질문 목록에는 개인적인 고민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1차 만일결사를 시작했던 청년 시절의 스님과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마음이 바뀌었는지, 활동에 대한 질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대학생들이 참회나 분별 등 수행에 대한 용어를 어려워합니다. 사전을 찾아보고 설명을 해주려고 해도 사전적 의미와 딱 맞지는 않았어요. 수행에 대한 용어들을 좀 더 쉽고 대중적인 용어로 바꿀 계획이 있으신가요?”
“청년들이 스님의 법문은 좋아하지만, 막상 실천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런 청년들을 위해 어떻게 안내하면 좋을까요?”
“최근 온라인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시는 것 같은데, 온라인 조직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지난 해 청년역사학교를 진행했었습니다. 청년역사학교를 통해 다시 정토회를 나오게 되고 수행을 하게 된 분들이 있었어요. 역사와 사회, 그리고 수행을 잇는 프로그램을 개발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를 역사학교의 모델로 삼아서,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를 양성해보고 싶습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청년들이 왜 수행하고 봉사해야하는지 법문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스님은 청년들의 고민과 제안을 귀 기울여 들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시작한 지 4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으로 ‘변화’를 강조하며 대화를 마쳤습니다.

개인이든 세상이든 지금보다 나은 방향으로

"제가 법문을 하는 이유는 인생 상담을 해주려는 게 아니예요. 저는 인생 상담을 하기 위해서 절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요. 제가 중점을 두는 것은 개인이든 세상이든 지금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목표를 따로 정해두고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살펴보고 변화를 시키자는 겁니다. 현실이 마음에 안 들면 내 마음을 바꾸어서 적응을 하고, 상황을 개선시켜야 되면 그걸 개선시키는 일을 해나가자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면 둑을 세워서 피해를 막든지, 둑을 세울 형편이 안 되면 버리고 도망을 가든지, 결정을 해야 된다는 얘기예요. 집이고 세상이고 싫으면 도망을 가거나, 도망가기 싫으면 한탄하지 말고 세상을 바꾸라는 거예요. 세상을 바꾸고자 하면 그에 마땅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은 하기 싫고, 그렇다고 도망가려니 집은 아깝고,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물에 떠내려가는 거예요. (모두 웃음)

아주 심플하죠? 막는 데까지 막아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버리고 도망가라는 거예요. 몸이라도 살아야 물이 빠지고 나면 다시 집을 지을 수가 있잖아요. 떠내려 간 다음에 아깝다고 울면 뭐하겠어요.”

저녁에도 청년들과 생방송으로 법회가 있기 때문에 아쉽지만 6시에 대화를 마쳤습니다.

저녁 예불을 드린 후 7시부터 8시까지는 농사팀과 마음나누기를 했습니다.

마음나누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복도를 통과하여 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녁 8시부터는 전국 청년정토회 활동가를 대상으로 생중계 법회를 했습니다. 오늘부터 청년정토회에서 새롭게 마련한 ‘청년 랜선법회’입니다. 랜선은 통신망을 뜻합니다. 두북수련원에는 중앙활동가 7명만 법회에 참석했지만, 랜선을 타고 온라인으로 200명이 법회에 함께 했습니다.

스님의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청년랜선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서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법당에 나와서 법문을 듣는 것보다 어쩌면 더 편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누워서 듣는 사람은 없기예요.” (웃음)

사전에 올라온 질문지에 대해 답변을 하는 방식으로 법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질문 중에는 글로 써서 올라온 것도 있고, 영상을 촬영해서 보내준 것도 있었습니다. 수십 개의 질문이 올라왔지만 그 중 10명의 질문에 대해 스님이 답변을 해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상대방의 눈치를 계속 보게 되어서 힘이 든다는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상대방의 눈치를 많이 살피는 게 힘듭니다

“저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많이 살핍니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는 게 느껴져야만 마음이 풀립니다. 꽤 가까운 사람에게도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조심스럽고, 떠날까봐 두렵습니다.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방어벽을 치고 있는 제 모습이 답답합니다.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면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지내면 됩니다.” (모두 웃음)

스님의 간단명료한 한 줄 답변에 모두가 웃음을 보였습니다.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고 표현을 했는데, 이건 사실에 맞는 표현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5시에 일어나고 싶은데 5시에 일어나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5시에 일어나고 싶으면 5시에 일어나면 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어나고 싶은데 못 일어나는 건 없습니다. 이럴 때는 일어나고 싶은 게 아니라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일어나지지가 않는다’라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즉, 일어나고 싶은데 안 일어나지는 게 아니라,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일어나지지가 않는 겁니다.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일어나지지가 않는다는 건 마음속에서는 일어나기가 싫다는 겁니다. 내 마음이 일어나고 싶지 않은 걸 알았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첫째, 마음을 따라가서 다시 자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기도를 못하거나 지각을 하게 되겠죠. 즉, 마음을 따르면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마음을 따라가고 나서 기도를 못하는 과보, 지각을 하는 과보, 비난의 과보를 받으면 됩니다.

둘째, 만약 과보를 받기 싫다면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기 싫은데 어떻게 일어나느냐고요? 벌떡 일어나면 됩니다. (모두 웃음)

아침에 밖에 나가기 싫은데 밖에 나가면 천만 원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요? 나가기는 싫지만 나에게 득이 되니까 벌떡 일어나서 나갈 거예요. 마찬가지로 일어나기 싫지만 기도를 못 하거나 지각을 하는 게 나에게 손해라고 생각된다면 벌떡 일어나면 되는 거예요.

편안하게 사람을 대하고 싶으면 편안하게 대하면 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안 보고 싶으면 눈치를 안 보면 됩니다. 마음은 지금 눈치를 보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눈치 볼 필요 없지 않느냐’ 하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눈치를 안 봐도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마음은 눈치를 본다면, 첫째, 그냥 계속 눈치를 보면 됩니다. 눈치 좀 본다고 남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눈치를 보는 게 싫거나 눈치를 보니 안 좋다면, 둘째, 마음속에서는 눈치를 보지만 그걸 무시하고 행동을 해버려야 합니다. 계속 그렇게 연습하면 차츰 눈치를 덜 보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어디에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한다’라고 말하는데 이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 표현이 아닙니다. ‘가야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가고 싶지가 않다’ 이것이 사실대로 인식한 표현입니다. 정말 마음속에서 가고 싶다면 가버리면 됩니다. 지금 누가 못 가게 손발을 묶어뒀나요? 감옥에 갇힌 상황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가고 싶은데도 못가는 상황이 맞습니다. 그런데 누가 몸을 묶어둔 게 아니라면, 가고 싶으면 그냥 가면 됩니다. 막상 가려니까 비난을 받거나 손실이 따를 것 같다면, 가고 싶어도 그런 이유 때문에 못 가는 겁니다. 그래도 가고 싶으면 갔을 때의 손해를 각오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고 싶다면 고백하면 됩니다. 고백을 하려는데 고백이 잘 안 된다는 건 고백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고백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고백하기가 싫은 겁니다. 왜 싫을까요?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나서 싫은 겁니다.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나면 고백을 안 하면 됩니다. 고백을 하고 싶으면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고백을 해버리면 됩니다.

왜 이런 게 헷갈릴까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는 생각과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하는 마음의 작용을 혼돈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작용과 마음의 작용을 제대로 알고 나면, ‘일어나고 싶은데 못 일어납니다’와 같이 성립하지 않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일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안 일어나진다면, 왜 안 일어나지는 지 원인을 살펴보세요. 몸이 아파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누군가 강제로 누르고 있어서 그렇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나는 건 자기 마음 때문에 안 일어나지는 겁니다. 즉,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기 싫으면 안 일어나면 됩니다. 그러면 손실이 따릅니다. 그때 손실을 감수하면 됩니다. 만약 손실을 감수하기 싫다면 일어나면 됩니다. 어떻게 일어나느냐고요? 벌떡 일어나면 됩니다.

어떻게 고백하나요? 그냥 가서 고백을 해버리면 됩니다. 안 하면 내가 답답하니까 가서 고백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절당하는 두려움이 고백 안 할 때의 답답함보다 더 크면, 그게 두려워서 내가 말을 못 꺼내는 거예요. 그럴 때는 고백을 안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자기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스님이 연애를 안 해봐서 저런 소리한다’ 이럴지 모르지만 이건 아주 심플한 원리입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큰 동력은 욕구입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하는 욕구가 동력이지 ‘해야 된다’, ‘말아야 된다’ 히는 의지나 생각은 욕구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의지나 생각이 아주 강하면 욕구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의지나 생각이 욕구를 못 이깁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거예요.

부처님은 의지가 욕구를 이긴 분입니다. 그래서 그걸 ‘대결정심’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의 의지였냐면 ‘이 길을 가다가 죽어도 좋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대결정심의 핵심은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이 정도의 결정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욕구가 의지를 앞섭니다. 일시적으로는 제어가 되는 듯 보이지만 그건 참는 것이기 때문에 압력이 강해지면 언젠가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뭔가 의지를 갖고 어떤 일을 하려면 대결정심을 내서 하든지 아니면 욕구를 따르면 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과보를 받거나, 과보를 받기 싫으면 안 따라가야 합니다.

대결정심을 내기가 힘들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고 싶은 걸 그만 둬?’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윤리나 도덕 때문에 그만두라는 게 아닙니다. 그걸 따라가면 자신에게 손실이 따르니까 계속 해서 그 손실을 감수하든지, 손실을 감수하기 싫으면 멈추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 두 가지 선택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왜 이런 욕구가 일어날까?’, ‘나는 왜 눈치를 보는 마음이 일어날까?’하고 탐구해볼 수는 있습니다. 깊이 탐구해보면 성장 배경 등 여러 조건을 근거로 그 원인을 파악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원인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야단을 맞아서 눈치를 보게 되었다거나, 학교에서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하다 보니 눈치를 보게 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자나 상담사가 하는 일입니다. 수행자는 ‘아, 지금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것이 나에게 손해다 싶으면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고, 따라가는 걸 멈추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따라갔다면 또다시 그 현실을 인정하고 ‘나도 모르게 손해나는 짓을 했구나’ 알고 원래대로 돌아오면 됩니다.

이렇게 본질을 꿰뚫으면 공부가 간단합니다. 이 본질을 꿰뚫지 못하면, 이러면 이게 문제이고, 저러면 저게 문제라서 머릿속이 아주 복잡해져요.

그런데 이런 얘기는 젊은 사람들한테는 잘 안 먹히는 것 같아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서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헤매다가 이 이야기를 듣기 때문에, 과거에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수없는 의문이 들었는데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이 해결되면서 관점이 탁 잡히는 겁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아직 경험을 덜해서 그런지 이게 잘 안 돼요.

‘돈을 빌리고 싶은데 빌리려니 나중에 이자까지 갚을 게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안 빌리려니 지금 너무 궁하다’

이렇게 고민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중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일까가 본질 같지만 전혀 아닙니다. 여기에는 빌리면 이자를 쳐서 나중에 갚아야 하고, 이자를 쳐서 갚기 싫으면 안 빌려야 되는, 두 가지 선택 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궁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빌리고는 싶은데,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갚기는 싫기 때문에 고민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모순이 서로 부딪치고 있기 때문에 고민이 되는 거예요. 하고는 싶은데, 그에 따른 과보는 받기 싫기 때문에 망설여지는 겁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안 지려고 하니 선뜻 선택을 못하는 거예요. ‘돈을 빌리되, 어떻게 하면 이자까지 쳐서 갚는 과보는 안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잔머리를 굴리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겁니다.

인연과보라고 아시죠?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습니다. 욕구를 따르면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그러니 손실이 크면 아무리 욕구가 강해도 멈추든지, 욕구를 못 이기고 따라갔다면 과보를 기꺼이 받아야 합니다. 과보를 기꺼이 받으면 행해도 괴롭지 않습니다. ‘돈을 빌렸으니 당연히 갚아야지’ 하고 생각하면 빚쟁이가 빚을 받으러 왔을 때 괴롭지 않아요.

‘지금 이자를 쳐서 주는 게 아깝긴 하지만, 그때 그 돈이 없었다면 굶어 죽었을 거야. 이 돈 덕분에 살았으니까 이 정도 이자를 쳐서 주는 건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돈을 갚을 때도 아깝거나 고민이 되지 않습니다.”

9시 30분까지 즉문즉설을 하고 마지막으로 채팅창에 소감을 올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색다른 느낌의 법회였습니다.”
“돈을 갚기 싫으면 빌리지 않겠습니다.”
“스님, 이런 법회 또 해주세요.”

소감을 나누고 랜선법회를 마쳤습니다.

오늘 스님의 하루는 생방송 기도로 시작해서 생방송 법회로 끝이 났습니다. 코로나19로 대중과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온라인으로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내일도 온라인 회의, 온라인 불교대학 즉문즉설, 온라인 일요명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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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나

선택하고 그 선택을 책임지면 됩니다 지꾸 이리저리
상대에게 핑게되고 떠 넘기는 나를 자각합니다
심플하게 감사합니다 꾸벅^^

2020-05-20 21:08:25

박혜진

스님의 옳으신 말씀에 또 배워갑니다. 내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그냥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05-20 15:31:01

굴뚝연기

[철위산의 깊고 어두운 지옥 다 밝아지며][… 언제 정상에 올라가려고 하느냐?]
[제가 중점을 두는 것은 개인이든 세상이든 지금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의지였냐면 ‘이 길을 가다가 죽어도 좋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 계속 해서 그 손실을 감수하든지, 손실을 감수하기 싫으면 멈추라고 하는 겁니다.] 개쑥이 가까이있었군요~

2020-05-20 02: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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