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4.29. 온라인 수행법회 9주차, 각종 회의
“결심한다고 인생이 바뀌는 게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서울에서 북한 전문가 미팅, 수행법회 생방송, 통일특별위원회와 대중부 활동가 미팅, 평화재단 회의 등을 연이어 가진 후 다시 두북 수련원으로 왔습니다.

어제 새벽에 서울에 도착한 스님은 잠깐 눈을 붙이고 오전 7시부터 평화재단에서 북한 전문가들과 회의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10:00, 생방송 온라인 수행법회

오전 10시부터는 생방송 온라인 수행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시작한 온라인 법회는 벌써 10주째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 겨울이 지나고 봄도 지나고 있습니다.

생방송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자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봄꽃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4월 마지막 수행법회입니다. 제가 요즘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깊이 체감하고 있습니다. 꽃 피는 순서도 다시 알게 되었고요. 3월 말, 4월 초까지는 매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목련 같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다가 요즘은 배꽃이며 사과꽃이며 연달래, 철쭉이 피고 있습니다. 산에는 꽃이 많이 적어진 대신 연한 새 잎이 피어나서, 아주 연한 노란색이 좀 들어간 것 같은 연초록으로 산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 부드러운 잎이 꽃보다 더 예뻐요.

날씨는 봄이 완연하게 찾아왔지만 우리의 마음은 아직 코로나 때문에 얼었던 게 덜 녹은 것 같습니다. 이제 다소 안정 국면에 들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부주의하면 언제 또 폭발적으로 확산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약간의 강제성을 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은 풀더라도 우리 각자가 자발적으로 주의하는 것은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끝났다!’ 이러고 방심해서 기존 방식으로 돌아가게 되면 또 다른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성찰해보게 되는 것들

한 편으로는 자동차도 덜 다니고 비행기도 덜 다니고 공장도 쉬니까 환경적으로는 긍정적인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든지, 올해는 우리나라에 불어오는 미세먼지가 적어졌다든지, 이렇게 환경적으로는 긍정적인 현상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가 좀 지나치게 돌아다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생산해서 저기로 보내는 물류 교류도 좀 지나쳤고, 에너지 낭비도 좀 지나쳤고, 소비도 지나치게 많이 했던 게 아닌가 돌아봐집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가 이런 점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서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 정착되어 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정토회는 5월에도 대중이 많이 모이는 강연이나 대중이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수련은 멈추기로 했습니다. 지금도 멈추고 있지만, 그 기간을 한 달 더 연장하기로 했어요. 코로나 사태가 완전히 종식됐다고 할 정도까지 지켜봤다가 진행을 재개하자고 합니다. 최종적으로는 정부의 정책에 따른 학교의 개학 시기를 최종적으로 보고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을 돌아보게 되는 게 참 많습니다. 지구가 숨을 쉴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어서 스님은 사전에 올라온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총 8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수행을 게으르게 하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첫 번째 질문을 소개해 드립니다.

수행을 게으르게 하는 제 자신을 바꾸고 싶습니다

“수행, 보시, 봉사 중 수행이 제일 힘듭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수행을 소홀히 하면서 정회원이라는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소임을 하는 것도 즐겁고, 보시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고 있지만, 수행은 게으르게 하는 제 자신을 바꾸고 싶습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하려면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 강제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누가 안 하면 안 되도록 강제적으로 만들어서 하다가 보면 새로운 습관이 붙어서 변화하는 거예요.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는 걸 부모가 강제로 시키거나, 일을 안 하는 걸 강제로 시키거나, 군대에서 훈련받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외부 환경이 안 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서 억지로 하다 보면 결국은 그것도 할 만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럴 때는 심리적인 억압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강제성 vs 자발성

그래도 결과가 좋을 수는 있습니다. 과정은 괴롭지만 결과는 좋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래를 봐서 강제성을 동원합니다. 아이들이 힘들어해도 부모는 ‘다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건 100퍼센트 다 효과가 나는 건 아니에요. 이렇게 강제성을 가질 때는 일시적으로는 변화하는 것 같지만 외부 환경이 바뀌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은 효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자발성에 기초한 방식이 있습니다. 교육의 효과가 가장 높을 때는 자발성에 기초할 때입니다. 자기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할 때 변화가 가장 잘 일어나고, 내부적인 스트레스도 없고,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개인의 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뭘 해야지!’ 하고 각오하고 결심하는 것은 마음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강제성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각오하고 결심하고 애쓰고 노력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남이 나한테 강제하지 않더라도 내가 나한테 강제하니까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억압을 받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억누르고 있으면 어느 순간 터져버립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터뜨리면 속은 시원하지만, 또 정신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내가 이걸 못해냈구나’, ‘나는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감과 후회가 듭니다. 아이들이 부모 말을 안 듣다가 부모가 계속 억압하면 집을 뛰쳐나가거나 사고를 치게 되죠. 그렇게 하면 잠시 속은 시원하지만 또 부모님한테 미안하고, 선생님한테 미안하고, 후회가 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합니다. 각오하고 결심하면서 그냥 밀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파워’로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의 변화를 가져올 때 강제로 하기보다는 각각이 자발적으로 하도록 항상 유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강제성보다는 자발성에 기초한 변화를 중요시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예요. 대부분은 각오하고 결심하고, 뜻대로 안 되니까 포기하고 쓰러지고, 그러다가 일어나서 또 각오하고 결심하기를 반복해요. 세상에서 볼 때는 이것도 어쨌든 본인의 자발성이에요. 누가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심리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강제성에 들어갑니다.

각오와 결심 vs 알아차림

그러면 자발성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화가 나면 ‘아, 내가 지금 화난 상태에 있구나’ 하고, 내가 짜증이 나면 ‘아, 내가 지금 짜증이 나는구나’ 하고, 이렇게 억누르지 않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알아차림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자각(自覺)’이에요. 자발적으로 할 때 변화가 일어나듯이 이 자각이 변화를 가져옵니다.

강제적으로 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해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만 부작용이 많아요. 각오하고 결심해서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고, 중도 포기하게 되면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부작용이 없어요. 알아차림은 ‘해야지!’ 하는 게 아닙니다. 누워서 ‘일어나야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누워 있다. 일어나기 싫어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래서 누워 있어도 스트레스를 안 받고, 일어나버려도 괜찮은 거예요. ‘일어나야지!’ 하고 누워있는 게 아니라 이미 벌떡 일어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늘 각오하고 결심합니다. 쓰레기 제로 운동도 자발적으로 하면 괜찮은데, 늘 감시 카메라와 남의 눈치를 보고 하게 되면 무의식 중에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해야지!’ 각오하고 결심했다가, 안 되면 ‘나는 이거밖에 안 되나’하고 후회했다가, 그러다가 또 잘되면 나는 잘났다고 설칩니다. 손끝 하나 건드리는 사람도 없는데 기고만장했다가, 제풀에 수그러들었다가 하는 거예요. 물 먹은 채소마냥 싱싱하게 일어섰다가 또 낮에 햇빛을 본 채소처럼 시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상태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꾸준히 해나가면 교만함도 피해 갈 수 있고, 비굴함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게 ‘중도(中道)’입니다. 알아차림을 통해 저절로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게 됩니다. ‘변해야지!’ 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정진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수행정진도 자꾸 각오하고 결심하고 애써서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행도 자기 욕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준은 10밖에 안 되는데 100은 되어야 한다고 정해놓고 죽기 살기로 노력을 하다가 제풀에 꺾여서 포기하는 거예요. 정토회 공동체에 사는 사람을 예로 들면 ‘나는 여기와 안 맞다’ 이러면서 뛰쳐나갔다가, 나가서 살다 보면 또 공동체가 ‘그래도 낫다’하고 다시 들어와요. 이렇게 우리는 인생을 결심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하면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꾸준히 하기

수행은 꾸준히 해야 합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기로 일단 정했다면 그대로 지켜보세요. 지금까지는 5시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5시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 몸과 마음에서 저항이 생기는 겁니다. 그동안 안 하던 일을 하면 거기에 따르는 저항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 저항을 극복해야 합니다. 저항을 극복해서 5시에 일어나는 것이 일정한 횟수를 넘겨버리면 저절로 5시에 눈이 떠지고, 절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더 좋아져요. 하고 나면 몸이 더 개운하고 좋아집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가 올 때까지는 기존의 습관 때문에 저항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5시에 일어나기로 했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절하기 싫으면 ‘음, 내 마음이 절하기를 지금 싫어하는구나’ 이렇게 다만 알아차리고 절을 하는 거예요. 싫어할 때 그만두는 것은 내 원래 업식에 따라가는 겁니다. 지금 내가 이걸 극복하는 게 과제이니까 그냥 하되, 각오하고 결심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거예요. 산에 올라갈 때 땀이 나고 다리가 아프면 각오하고 결심해서 한 발 한 발 힘들게 가는 게 아니잖아요. 올라가다 보면 다리가 아파지는 건 당연하다고 그냥 받아들이고,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겁니다. 너무 피곤하면 좀 쉬었다 올라가면 돼요. ‘빨리 올라가야지’, ‘죽기 살기로 올라가야지’, ‘포기해야지’, ‘내려가야지’ 이렇게 자꾸 각오하는 게 아니라 올라가기로 했으면 속도가 어떻든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겁니다. 다리가 많이 아프면 속도를 약간 늦추면 되고, 더 많이 아프면 약간 쉬어주면 되고, 또 괜찮으면 다시 올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조금 잘 되면 과욕을 내고, 조금 안 되면 물러나는 마음을 내고 이러잖아요.

하기로 했으면 꾸준히 하면 됩니다. 절을 할 때도 그냥 엎드려보고 안 죽었으면 일어나고, 일어나 보고 안 죽었으면 엎드리고, 엎드려서 안 죽었으면 일어나고, 이렇게 ‘안 죽은 동안은 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하면 돼요. 각오하거나 결심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백팔 배도 되고, 천 배도 되고, 만 배도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5시에 일어나서 해보세요. 5시에 일어나는 것도 수행입니다. 더 자고 싶은 저항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니까요. 누가 싫은 소리를 하면 화가 탁 나죠? 자동으로 반응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끌려가지 않는 게 알아차림이고 수행이에요. 화가 난다고 바로 화를 팍 내버리는 것도 아니고, 이를 악물고 참는 것도 아니고, 화가 일어나는 걸 내가 아는 거예요.

‘어, 화가 나는구나. 내 습관이 이런 말에는 이렇게 저항감이 생기도록 형성이 되었구나.’

북채로 북을 때리면 소리가 나듯이 그냥 반응하는 것이니까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게 없어요. 북소리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잖아요. 북소리를 들으면서 ‘아, 저건 때리면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구나’ 하듯이 ‘내 까르마는 이렇게 건드리면 이렇게 반응하도록 되어 있구나’, ‘이런 얘기를 들으면 홱 하는 반응을 하도록 내 까르마가 형성되어 있구나’ 이렇게 아는 거예요. 이런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내 업식을 내가 알 수 있어요.

‘아, 나는 이렇게 반응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구나.’

이런 프로그램은 어릴 때 자란 환경에서 이미 만들어진 거예요. 환경이 어떠했든 자라난 환경에 의해서 이미 형성돼버린 건데, 그걸 가지고 ‘부모님이 어릴 때 그랬다’, ‘아버지가 어릴 때 어떻게 해서 내가 이렇다’ 이런 얘기를 해봐야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어떻게 형성이 됐든 지금 형성이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반응하는 겁니다.

여기에 얽매인 노예 생활을 안 하려면 꾸준히 알아차림을 연습해야 합니다. 지금은 반응하더라도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를 계속하면, 그 반응이 나오더라도 말이나 행동으로 격렬하게 튀어나올 정도까지는 안 가게 돼요.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게 수행이에요. 절을 하는 게 수행이 아니에요.

새벽 5시에 수행을 하는 이유

일상에서 이러저러한 소리를 듣고, 이러저러한 걸 보고, 이러저러한 상황에 처하고, 이러저러한 일을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까르마가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아침 5시에 일어난다는 하나의 형식을 정해놓은 거예요. 5시에 일어나기 싫기 때문에 그게 수행이 되는 겁니다. 5시에 저절로 일어나진다면 5시에 일어나는 것은 수행이라 할 수 없어요. 안 일어나지기 때문에 스트레스 안 받고 일어나기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몸이 저항해도 딱 일어나는 연습을 해봐야 해요. 절하는 것에 저항이 일어나기 때문에 절이 필요한 거예요. ‘절하기가 정말 재미있어요!’ 이러면 오히려 절을 그만해야 해요. 그건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명상할 때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리라는 것과 같아요. 명상을 하면 다리가 칼로 도려내듯이 아픈 것은 안 알아차리려고 해도 알아차려집니다. 그런 걸 알아차리는 연습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저절로 알아차려지는 것이니까요. 깨어있지 않으면 알아차려지지 않는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려야 해요. 느낌과 감정도 미세할 때 알아차려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해소가 되지, 격렬하게 일어났을 때는 이미 거친 말과 거친 행동이 나오게 돼요. 그러면 과보가 따르기 때문에 또 후회를 하게 됩니다.

수행은 알아차림을 연습하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통해 그걸 연습을 하는 거예요. 밭에 나가서 농사일을 하는 걸로 연습을 하고,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 다리가 아파도 그냥 올라가는 걸로 연습을 하고, 놓치면 ‘어, 내가 놓쳤구나’ 하고 다시 돌아오는 연습을 하고, 이렇게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5시에 일어나는 것과 절하는 것을 연습 삼아 해보세요. 안 하겠다고 하면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5시에 수행을 안 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목표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성질대로 살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죠. 그렇게 사는 건 이 세상 사람 누구나 다 그렇게 사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감정대로 사는 사람보다 여러분의 얼굴이 더 어두운 건 자꾸 각오하고 결심해서 살기 때문이에요. 내면의 감정을 자꾸 억눌러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얼굴이 어두워지고, 넘어졌다가 일어났다가 또 넘어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절에 10년 살았는데도 ‘아이고, 꼬라지가 저게 뭐냐’ 이런 소리를 듣는 겁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빠졌다가 또 ‘그래, 나도 사람인데 어쩌겠어’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가, 또 ‘절에 10년 살아도 안 되니까 집에 가야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계속 불안정한 가운데 놓여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알아차림을 꾸준히 연습하면 반석처럼 편안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려우면 어렵고, 다리가 아프면 아프고, 몸이 아프면 아프고, 그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요. 몸이 아프다고 막 불안한 게 아니라, 몸이 아프면 아프구나 하고 지켜보다가, 그래도 더 아프면 병원에 가고, 치료가 가능하면 치료받고, 치료가 안 되면 아픈 대로 살고, 이렇게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마음은 편안해야 해요. 일이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고, 마음은 마음대로 평온합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연구를 해보고, 진척이 더디면 더딘 대로 하고, 안 되면 기계를 사용해서 해보고, 또 안 되면 남한테 부탁해서 해나가면 돼요. 이걸 갖고 ‘힘들어 죽겠다’, ‘어렵다’, ‘못살겠다’ 이러는 게 문제입니다.

무슨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해야만이 정진이 아니에요. 그 절에서는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정토회는 염불 하자고 정한 게 아니니까 안 해도 되잖아요. 대신 정토회에서는 아침 5시에 일어나기로 했고, 수행은 절을 하는 것으로 했어요. 그래서 절을 하는 거예요. 절하는 대신 명상하기로 했다면 명상을 하면 돼요. 그런데 여러분은 절하면 다리 아프다고 하고, 명상하면 졸리다고 하고, 염불 하라면 목이 아프다고 하고, 그래서 일을 시키면 왜 수행은 안 하고 일만 시키느냐고 불평합니다. 절은 하나의 수단이에요. 다만 우리가 이렇게 정한 거예요.

‘다수의 대중이 공통으로 하려면 어떤 수행이 가장 좋을까? 아, 절이 좋겠다. 힘이 들어서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 자꾸 나가떨어지니까 그 싫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절이 제일 낫겠다. 또 운동도 되고 하심(下心)도 되니까 좋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 수행은 절하자고 정한 거예요. 절을 빼고 명상을 40분 하자고 정해도 됩니다. 다만 정토회는 공통적으로 절을 하자고 정한 거예요.

시간은 4시로 해도 되고 6시로 해도 되는데, 우리가 공통적으로 6시에 하면 아침 일정이 촉박해지고, 4시에 하면 잠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해서 5시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에는 5시가 좀 불편해요. 5시에 일어나서 예불을 마치면 6시가 되고 밥까지 먹으면 7시가 되니까 밖에 나가면 벌써 볕이 뜨거워서 일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더 일찍 일어나서 예불하고 일을 하든지, 반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일부터 한 뒤에 밥을 먹고 예불을 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겠죠. 이렇게 정하기 나름이에요. 다만 절을 하기로 했으면 절을 해야 하고, 5시에 일어나기로 했으면 5시에 일어나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나는 수행자다

여러분이 ‘나는 수행자다’ 라는 것을 늘 유념하면 좋겠어요. 정토회에 입문하는 첫날부터 제가 ‘정토회는 수행공동체이고, 수행자들의 모임이다’ 이렇게 말씀드렸을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법문을 듣고 경전을 봐야 마음에 와 닿고 해석이 됩니다. 수행자의 관점을 놓쳐버리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 ‘왜 이리 어렵지? 왜 이리 힘들지?’ 이런 생각만 자꾸 하게 됩니다.”

이외에도 법당 운영, 남북관계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질문이 더 있었지만 오늘은 포살법회까지 있기 때문에 네 가지 질문에 답한 후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수행법회에 이어 포살법회를 진행했습니다. 포살법회는 2달에 한 번 정회원을 대상으로 열립니다. 지난 두 달 동안 18가지 계율 중 지키지 않은 계율이 있으면 세 번 절을 하며 참회를 합니다. 계본 낭독은 스님이 직접 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정토행자들의 정기 포살일입니다. 승가의 청정함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청정함을 말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외우는 계본을 잘 듣고 생각하여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자각하게 되면 대중들에게 드러내어 참회하십시오. 드러내고 참회하면 곧 청정함을 얻을 것입니다.

차례의 첫째는, 살아있는 생명을 때리거나 죽이지 않는다. 이 계본에 대하여 청정합니까?”

18가지 계율을 돌아보고 모둠별로 모여 어떤 계율을 어겼는지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현장에 참석한 공동체 행자들은 법당에서 나누기를 하고 전국의 정토행자들은 온라인으로 나누기를 진행했습니다.

1:00, 특위 활동가 회의

점식식사를 하고 오후 1시부터는 평화재단에서 통일특별위원회(이하 통특위) 활동가들과 회의를 했습니다. 통특위에서는 행복학교를 진행하고 즉문즉설 강연과 통일의병 교육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먼저 일정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아직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6월까지 즉문즉설 강연을 모두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강연도 취소되고 한가해서 좋겠네요. 두북에 내려와서 하루 농사일을 하루 해보면 어때요?”

“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30분 정도 스님을 뵙겠죠.” (모두 웃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일 수 없으니 우선 임원들만 하루 두북 수련원에서 농사일하며 스님과 만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님은 앞으로 강연 방식도 새롭게 고민해보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더라도 앞으로 즉문즉설 강연은 대규모로 열기보다는 소규모로 열고 온라인으로 생중계하는 방식을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그러면 굳이 넓은 공간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청중을 한 군데 모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강연 준비를 하기 위해 활동가들이 애를 많이 쓰는데, 가볍게 준비할 수 있게 해 보면 좋겠어요.”

“생중계를 하려면 독자적인 플랫폼이 필요합니다. 강연 내용을 녹취하거나 편집해서 악용할 소지도 있어요.”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하면서도 오프라인 방식의 장점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스님은 현재 법사단 수련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 공유해주었습니다.

“지금 공동체 법사단은 30년 만에 한 방에 자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전에는 농사일을 하고 오후에는 회의를 하고 있어요. 지금 이 기회에 대응을 잘하면 오히려 정토회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어요. 옛날부터 이런 방향으로 가자고 하면서도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법당에서 불교대학도 못 열고, 수련원은 수련도 취소되고, 강연도 못 하고, 해외도 못 가고, 북한도 못 도우니까, 함께 모여 미래를 기획할 기회가 왔어요. 온라인으로 해보니까 해외도 굳이 돌아다닐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모두 웃음)

사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내용은 작년 1년 동안 기획위에서 논의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 역할이 있는 사람들이 논의를 하다 보니까 연구하기도 어렵고, 연구를 해도 모여서 논의를 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법사단은 5월까지만이 아니라 8월까지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지금 논의하는 것들을 이어가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대중들의 의견도 들어보려고 서울에 왔어요.”

“멋지네요.” (모두 박수)

활동가들은 박수를 치며 반가워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거나 좋은 방법이라면 기존에 해오던 것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황당한 것은 안 되지만 과감하게 조정을 하겠다는 뜻이에요.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내봐요.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유구한 역사의 관습을 타파하세요.” (모두 웃음)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요? 환경 파괴가 굉장히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저절로 해결되고 있어요. 하늘이 맑아지고 이동이 줄어들고 소비가 줄었잖아요.” (모두 웃음)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서 일회용품 사용은 더 많이 증가했습니다.”

“그건 문제예요.”

오랜만에 스님을 만나서 그런지 할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약속된 2시간이 금방 흘렀습니다. 스님은 활동가들을 격려하며 회의를 마쳤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의 삶이라는 게 굉장히 불안정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잘 나가는 기업이 일순간에 망할 수도 있고, 조그마한 기업이 일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하기도 하잖아요. 이런 가운데서 우리도 우리의 길을 개척해나가야 하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진 경험과 에너지를 다 모아서 아이디어를 내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모두 박수)

박수를 치며 회의를 마쳤습니다. 3시부터 회의를 하기로 한 행정처 활동가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화장실만 다녀오고 바로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3:00, 행정처 활동가 회의

스님은 행정처 활동가들에게도 법사단 수련에서 논의한 내용을 공유한 다음 현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행정처에서는 온라인 생방송으로 새벽기도를 함께 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스님도 동의하며 실행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기도를 매일 온라인으로 같이 하면 제일 좋죠.”

“너무 좋죠. 5시에 다 일어날 것 같은데요.” (모두 웃음)

“지금 온라인 명상을 일요일마다 하고 있듯이 요일을 정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생방송으로 하는 게 어떨까요. 기도를 같이 하고 난 후 짧게 법문도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럼 한꺼번에 너무 욕심을 내지 말고 일주일에 한 번만 일단 해봅시다.”

행정처 활동가들과는 코로나 사태로 연기된 일정과 법당 운영, 불교대학과 경전반 운영 등에 대해 논의할 것이 많았습니다. 1시간 동안 회의를 하기로 했지만,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회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바깥에서는 다음 회의를 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30, 평화재단 사회채널 회의

곧바로 4시 30분부터는 평화재단 사회채널팀, 사회포럼팀과 회의를 했습니다. 사회채널팀에서는 얼마 전 유튜브에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행복TV' 채널을 개설했습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채널이 인생에 대한 고민을 다룬다면, ‘행복TV’에서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메시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사회 채널 담당자들은 변화된 사회에 맞게 어떤 영상을 더 기획해야 할지, 구독자 증대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제안했습니다.

사회포럼팀은 전문가와 협력해서 사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공신력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지만 어떠한 보상 없이 활동을 할 수 있는 전문가는 많지 않습니다.

“제일 쉬운 방법은 법륜스님이 더 유명해지는 거예요. 그러면 저와 함께 출연하거나 활동을 하면 그 사람에게 덕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조금은 알려져 있어서 여러분이 일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기업은 돈으로 해결하고, 정치인은 권력으로 유혹해서 해결하죠. 그런데 우리는 돈도 안 주고 복 받는다는 유혹도 안 하니, 앞으로도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웃음)

그러니 우리는 너무 욕심내지 말고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면 꾸준히 노력을 해나가면 돼요. 그 외에 더 좋은 방법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에요. 이렇게 부족한 면을 안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나갈 것이냐가 우리의 과제예요. 그렇다고 성과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그 덕분에 제가 즉문즉설을 할 때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죠.”

사업 운영 외에도 사회문제와 관련해서 궁금한 점을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 19를 계기로 정토회는 온라인화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국가적으로는 어떤 정책을 준비해야 할까요?”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가 주기적으로 발생한다면, 남북관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저녁 6시가 되어 회의를 마쳤습니다. 저녁식사는 평화재단 사무총장과 함께 하며 평화재단 운영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7시에는 오랫동안 평화재단을 후원해 온 분이 찾아와 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저녁 8시 30분이 지나 두북 수련원으로 출발했습니다.

12:40, 다시 두북 수련원

어젯밤 8시 30분에 출발해서 12시 30분에 서울에 도착하고 오늘 밤 8시 30분에 출발해서 12시 40분에 다시 두북에 돌아왔습니다. 24시간 동안 많은 일을 처리하고 돌아왔습니다. 두북 수련원은 아직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습니다. 법사님들도 밤이 깊도록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일은 하루 종일 법사단 수련이 이어집니다.

전체댓글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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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태

스님께 감사드리며 여러 봉사자님들과 회의 참가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2020-09-19 18:50:11

청정화

다만 정 하였다면 할 뿐이다.
난 수행자이길 원하옵니다.

2020-05-09 22:09:24

정지나

그냥, 여기 지금 나
아~그렇쿠나하고 알아차리고 자각 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2020-05-05 07: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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