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8. 인도 성지순례 6일째(라즈기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의 불행”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 성지순례를 시작한 지 6일째 되는 날입니다.

새벽 5시, 수자타아카데미를 떠나 라즈길로 출발했습니다. 버스에 타자 스님이 오늘 일정을 간략하게 안내해주었습니다.

“잘 잤어요? 보드가야에서 출발해서 동쪽으로 80km 정도 가면 당시 인도 최대의 도시인 라자그라하, 지금의 라즈길이 있습니다. 한문으로는 왕사성이라고 합니다. 저희들은 오늘 왕사성으로 가겠습니다.”

오늘 순례하는 라즈길(Rajrir)는 부처님 당시 북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수도로써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왕사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년의 요새였습니다. 이 곳은 부처님이 성도 하시기 전에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한 곳이었고, 수행하시는 부처님의 청정한 모습을 보고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서 성도 하시면 자기를 깨우쳐 달라고 부탁한 곳이기도 합니다. 또 왕사성에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귀의한 제띠안,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영축산과 죽림정사, 경전 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이 있습니다.

제띠안, Jethian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아침예불을 한 후 한 시간 반쯤 달려 제띠안에 도착했습니다. 넓은 공터에 서서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똥밭이라서 자리를 깔고 앉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어서 어쩌면 2천6백 년 전의 모습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스님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귀의하던 날 뿐만 아니라 빔비사라 왕과 부처님 사이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은 ‘제띠안(Jethian, 杖林)’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산인 가운데 골짜기가 쭉 이어져 있죠?”

“네.”

“이 골짜기를 따라 걸어서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왕사성이 나옵니다. 여기는 왕사성 서문 밖으로 1 유순(由旬), 즉 15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부처님은 왕사성(王舍城, 라즈길)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왕사성에 도착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온 길을 따라오셨어요. 우리는 차로 왔지만, 부처님은 보드가야에서부터 걸어서 이리로 오셨습니다. 보드가야(Bodhgaya)에서 걸어오면 전정각산을 지나 이 돌산을 쭉 따라오게 됩니다. 지도에서는 이 돌산이 마치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부처님이 이곳 제띠안에 도착하자 빔비사라(頻婆娑羅, Bimbisara) 왕이 신하들과 왕족들을 거느리고 직접 마중을 나왔어요. 경전에는 ‘부처님을 마중 나왔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부처님이 누군지를 왕이 아직 몰랐기 때문에 부처님을 마중 나온 게 아니라 우루벨라 가섭(Uruvela Kassapa)과 그 제자 1천 명을 마중 나온 거예요. 부처님과 대중들이 왕족들과 대신들을 마주하자, 왕이 먼저 우루벨라 가섭에게 예를 취하고 이렇게 묻습니다.

‘큰 스승이신 우루벨라 가섭께서 어떤 젊은 수행자의 제자가 됐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 마치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여든 살 노인을 두고 자기 손자라고 말하는 것 마냥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왕이 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마주 보았을 때 우루벨라 가섭은 아주 나이 든 노인의 모습이었고, 옆에 젊은 수행자의 모습을 한 부처님이 계셨어요. 대중은 소문을 벌써 들었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던 겁니다.

‘우루벨라 가샤파가 정말로 저 젊은이의 제자가 됐을까? 아니면 저 젊은이가 우루벨라 가섭의 제자인가?’

이렇게 다들 속으로 의심을 하고 있을 때 왕이 대표로 나서서 우루벨라 가섭에게 질문을 한 겁니다. 그러자 우루벨라 가섭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를 표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분은 저의 스승이고 저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제가 이분을 만나기 전에는 윤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분의 가르침을 듣고 윤회의 씨앗을 버렸습니다.’

윤회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은 복을 구했다는 뜻입니다. 복을 구하면 결국 복을 받더라도 나중에 또 그만큼 갚아야 하니까 윤회하는 씨앗을 심었다고 하는 거예요. 윤회의 씨앗을 버렸다는 것은 해탈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 대답을 듣고 왕과 대신들의 마음속에 있던 의심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왕이 다시 부처님 앞에 나아가서 예를 표합니다. 예를 표하는 방식이 옛날에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금강경에 ‘편단우견(偏袒右肩)하고 우슬착지(右膝着地)하며 합장공경(合掌恭敬)하사 이백불언(而白佛言)하였다’ 이런 말이 나오잖아요. 왕이 그렇게 해서 부처님께 예를 취하고 자기도 부처님의 법문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대중을 위해서 법을 설하셨는데, 그 법문을 듣고 빔비사라 왕도 지혜의 눈을 떴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께 청을 합니다. 그리고 공양을 접대하겠다며 왕궁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승낙을 하지 않으셨어요. 부처님은 승낙을 하실 때 침묵을 합니다. 말이 없으시면 승낙이에요. 누가 뭔가 건의를 했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면 승낙이라고 보면 됩니다. 거절할 때는 분명하게 ‘노, 땡큐(No, thank you)’ 이렇게 딱 거절을 하셨어요. (모두 웃음)

한 번은 행자 한 분이 저한테 어떤 일과 관련한 사항을 물었는데 제가 아무 대답을 안 했어요. 제 입장에서는 약간 결정에 망설임이 있어서 대답을 안 했는데, 행자는 그냥 일을 진행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왜 허락도 안 받고 했냐고 물었더니 ‘말씀이 없으셔서 승낙하신 줄 알았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모두 웃음)

그 얘기를 듣고 제가 가만히 돌아보니까 차이가 있는 거예요. ‘부처님이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다’ 이 말은 대중이 요청하면 거의 승낙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저는 승낙할 때 예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요청한 걸 별로 승낙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모두 웃음) ‘침묵으로 승낙하셨다’ 이 말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절을 하지 않으셨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빔비사라 왕이 왕궁으로 초대하자 부처님은 명확하게 ‘노, 땡큐’라고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빔비사라 왕이 굉장히 곤란해졌어요. 왕궁으로 식사 초대를 해서 부처님이 응해야 식사를 접대한 뒤 자기가 궁금한 것도 물어볼 시간을 가질 텐데, 부처님이 왕궁의 식사 초대에 응하지를 않으시니까 부처님과 개인적으로 대화할 시간을 내려면 본인이 부처님을 찾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은 주로 산꼭대기에 있거나 동굴 속에 있으니까 왕이 거기까지 찾아가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모두 웃음)

이 능성 건너편으로 쭉 가면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 가 보면 2,500여 년 전에 축대를 쌓아서 올라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둔 흔적이 남아 있어요. 그 축대는 부처님 때문에 쌓은 게 아니라 왕 때문에 쌓은 거예요. 영축산(靈鷲山)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그걸 ‘빔비사라 왕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왕이 부처님을 찾아뵈려고 하니까 신하들이 길을 닦은 거예요. 영축산 너머 산 끝자락에도 동굴이 있는데, 거기에도 길을 닦았던 흔적이 있습니다. 그런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왕이 방문했던 곳이라고 볼 수 있어요.

만약 청와대에서 여러분을 초청하면 여러분은 밥도 얻어먹고 이것저것 부탁도 하고 싶잖아요. 불교 병원이 필요하다, 뭐가 필요하다, 이러면서 ‘민원’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걸 요구해요. 그런데 부처님은 빔비사라 왕한테 그 어떤 것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온갖 것을 다 가진 빔비사라 왕은 때때로 부처님을 찾아와서 자기 괴로움을 하소연했지만, 부처님은 아무것도 가진 바 없었는데도 왕에게 가서 뭘 청탁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가 좀 깊이 살펴봐야 할 대목이에요. 오늘날 우리가 불교의 이익을 위해서 정부하고 협상할 때도 이런 식이니까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다 돈 달라는 소리만 하니까 정부가 주도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렇게 부처님이 왕궁 초대에 응하지 않으니까 왕이 다른 제안을 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 겁니다. 왕궁 밖 일정한 거리에 왕이 소유한 대나무 숲이 있었습니다. 그 대나무 숲을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장소로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부처님이 그건 승낙을 하셨어요. 그래서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竹林精舍, Venuvana Vihara)가 지어졌습니다. 여기서는 대나무를 ‘베누(venu)’라고 하고, 숲을 ‘바나(vana)’라고 부릅니다.

죽림정사가 불교 최초의 사찰이긴 한데, ‘지었다’라고 해서 건물을 지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행자가 머무를 수 있는 전용 공간이 마련됐다는 뜻이에요. 조금 있다가 우리는 죽림정사로 갈 예정입니다.

이처럼 여기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뜻깊은 장소입니다. 부처님이 여기로 1천 명의 비구를 이끌고 와서 빔비사라 왕을 교화하셨고, 이 길을 따라 서문을 통과해 왕사성에 이르셨고,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으셨어요.”

재미난 이야기 속에서도 왕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는 부처님, 부처님의 행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스님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버스에서는 서로 신발에 똥이 묻었는지 검사를 하고 닦아주었습니다. 똥을 밟고 차에 타면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버스 안에서도 스님의 안내는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왕사성 남문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창밖으로 능선을 따라 이천 육백 년 전의 성벽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것이 왕사성의 외성입니다.”

곧이어 영축산에 도착했습니다.

영축산, Gridhrakuta

영축산은 부처님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입니다. 법화경, 반야심경, 열반경이 설해진 곳이고 염화시중의 미소가 행해진 뜻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영축산을 오르는 길은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을 만나러 다닌 길이라고 하여 빔비사라 왕의 길이라고 불립니다. 왕이 마차로 산 아래까지 와서는 마차에서 내려 가마로 500미터 정도 산으로 오르다가 다시 100m 정도 걸어갔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오르는 길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완만한 경사지만 동남아에서 온 순례객 중 젊은 여성이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노인이거나 환자면 모르겠지만, 이 정도도 걷기 싫으면 여긴 왜 왔어요?”(웃음)

영축산 정상에는 크고 작은 굴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 굴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굴 이름도 제자들의 이름을 따서 아난다 굴, 사리불 굴, 목련 굴, 마하가섭 굴 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산의 정상 부근에는 데바닷타가 부처님을 해치기 위해 돌을 던졌다고 전해지는 곳도 있었습니다.

영축산 정상에는 독수리를 닮은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인도말로 ‘Gridhrakuta 그리드라쿠타’ 즉 독수리봉이라고 불리우는데, 한문으로는 ‘영축산’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영축산의 정상이 좁고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있어서 정토회 순례자들은 삼배만 드리고 내려와 아래에서 영축산 정상을 향하여 자리 잡았습니다.

먼저 스님은 영축산에 있었던 부처님 당시의 많은 일화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설명을 들은 후에 부처님 당시에 설한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독송 후에는 예불을 올렸습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영산당시 수불부촉...’ 에서 나오는 바로 그 영산이 이곳입니다.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설법을 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예불을 드리겠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도 450여 명의 대중이 가사를 수하고 예불 올리는 모습에 발길을 멈춰 서서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천이백 대중이 함께 하였다고 하니 굉장했을 것 같습니다.

영축산을 내려오는 길에 영축산 정상이 잘 보이는 곳에서 차량별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

다시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지나 빔비사라 왕의 감옥터로 갔습니다. 감옥터는 왕사성의 내성 맨 끝에 위치한 곳으로 감옥터만 남아 여기가 감옥이었구나 짐작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스님은 빔비사라 왕이 아들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과 감옥에 갇혀 굶고 있는 왕에게 음식을 몰래 전하려던 왕비 위제희 부인이 아들에게 이 사실을 들켜 골방에 갇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처님의 위로를 청하고, 부처님은 그런 왕비를 위로하기 위해 관무량수경을 설하신 이야기 등을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의 왕이 빔비사라(Bimbisāra) 왕입니다. 빔비사라 왕의 부인은 위제희 부인입니다. 당시 인도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이니까 권위가 굉장했겠죠. 그런데 이 왕은 제띠안(Jethian, 제티 안)에서 부처님께 귀의해서 왕 중에서는 부처님께 가장 먼저 귀의한 왕이에요. 부처님 성도 후 1년 안에 귀의한 사례니까 초기 신자라고 볼 수 있어요.

이 왕은 모든 걸 다 갖췄는데 아들이 없었어요. 아들을 낳기 위해서 온갖 기도를 하고 노력해도 효험을 보지 못하다가, 나이가 마흔이 넘어갔을 때 어떤 선인을 불러서 물어보니까 3년 후에 아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 3년이냐고 물어보니 왕자로 태어날 사람이 히말라야 산에서 수행하는 선인인데 그 수행자의 수명이 아직 3년 남았대요. 그 사람이 수명을 마치면 왕자로 태어날 거라고 했어요.

왕이 진짜인가 싶어서 사람을 보내서 그 선인에게 가서 확인을 해봤어요. 그 사람도 ‘내가 죽은 다음에 빔비사라 왕의 아들로 태어난다’ 하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걸 확인하니까 왕이 빨리 아기를 갖고 싶어서, 다시 사람을 보내서 그 선인에게 ‘빨리 죽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거부를 했어요. 옛날에는 왕명을 거부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왕명을 거역했다고 죽여 버렸어요. 죽을 때 이 선인이 ‘내 반드시 원수를 갚으리라’ 이렇게 말하고 죽었어요.

왕이 그 얘기를 듣자 불안해졌어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부인이 아기를 딱 갖게 됐어요. 왕은 하루는 불안하고, 하루는 아들을 갖게 돼서 기뻐하고, 하루는 불안하고, 하루는 기뻐하며 지냈어요. 이렇게 해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왕은 이 아기를 원수라고 생각하고 아기를 2층에서 밑으로 집어던졌어요. 그런데 애가 안 죽고 손가락만 하나 딱 부러진 채 살았어요. 그러자 또 생각이 바뀌어서 아기를 끔찍이 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키운 아이가 아자타삿투(Aātaśatru)예요. 이 아들이 커서 19세 때 쿠데타를 일으켰어요. 아버지를 이 감옥에다가 가두고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를 직접 칼로 죽이지는 못하니까 감옥에 가둔 채 굶겨 죽였어요. 일체 음식을 못 주게 엄명을 내린 거예요. 그러자 아자타삿투의 엄마이자 빔비사라 왕의 아내인 위제희 부인은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위제희 부인은 당시 여인 중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어릴 때는 아버지가 왕이어야 해요. 공주보다 더 귀한 여자는 없잖아요. 둘째, 결혼할 때는 남편이 왕이어야 해요. 공주 출신이라도 남편이 왕이 아니면 별 볼 일이 없어요. 셋째, 늙으면 아들이 왕이어야 해요. 아들이 왕이 아니면 왕후라도 별 볼 일이 없는 거예요. 남편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되지만,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니까, 역시 최고의 지위는 아들이 왕인 여인입니다.

위제희 부인은 이걸 모두 가진 여성으로서 최고로 행복에 겨운 사람이었는데, 아들과 남편이 왕위 투쟁을 하게 되니까 오히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된 거예요. 왕위 투쟁에서 지는 사람은 무조건 역적이 되니까 죽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극도의 행복을 누리던 복 받은 여인이 순식간에 세상의 그 어떤 여인도 경험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빠진 거예요.

이런 것이 락(樂)이 고(苦)가 되는 원리입니다. 위제희 부인은 그동안 자신이 불법을 굉장히 많이 아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수행을 제대로 안 한 상태에서 이런 문제에 부딪치니까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아들을 낳았나? 부처님은 왜 저런 데바닷타 같은 악인을 친족으로 두었을까?’

아자타삿투를 충동질한 데바닷타(Devadatta, 提婆達多)가 부처님의 친족이니까 이런 원망이 생겼던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위제희 부인은 감옥에 있는 남편을 만나러 갑니다. 목욕을 하고 난 몸에다 꿀을 바르고 그 위에다 밀가루 반죽을 붙인 뒤 다시 옷을 입고는 빔비사라 왕을 면회하러 갔어요. 그렇게 해서 몰래 음식을 줬습니다.

한 편 이 정도 시간이 흐르면 아버지가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몇 주가 지나도 안 죽는 게 이상해서 아자타삿투가 사정을 알아봤어요. 그래서 위제희 부인이 그런 식으로 빔비사라 왕에게 음식을 공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아자타삿투는 ‘내 어머니도 역적과 한패이니 죽여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의사인 지바카(Jivaka)와 월광(月光)이라는 두 신하가 칼에 손을 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칼에 손을 댔다는 것은 저항을 불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인도 전 역사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경우는 수도 없이 많지만, 아들이 어머니를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천민도 어머니를 죽이는 일은 안 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어머니를 죽인다면 우리는 당신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아자타삿투는 이런 청을 받아들였고, 대신에 어머니를 자기 방에서 못 나오게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위제희 부인은 영축산에 있는 부처님을 향해 기도하면서 원망을 했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설해집니다. 대부분의 경전처럼 어떤 제자가 부처님에 법을 청하는 게 아니라, 고통에 처한 여인이 부처님께 자기의 고통을 하소연하는 데서 관무량수경이라는 경전이 시작됩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잡는 것이 당시 인도에서 특별한 사건은 아닙니다. 종종 있었던 일이에요. 인도의 전통문화에서는 45세가 넘으면 아들한테 가업을 물려주고 유행(遊行)을 떠나는데, 왕이 된 사람들은 안 그랬나 봐요. 죽을 때까지 왕을 하려고 하다 보니 아들하고 계속 왕위 쟁탈전을 벌이게 되기가 쉬웠습니다. 그런데 데바닷타가 아자타삿투를 꾀어낼 때 출생의 비밀을 얘기했다고 합니다.

‘너, 손가락에 다친 흉터가 있지? 왜 다친 줄 아느냐? 그건 바로 네 아버지가 너를 죽이려고 했던 흔적이다. 저 사람은 네 아버지가 아니라 전생의 원수다.’

이렇게 얘기하면서 꾀어냈으니 아자타삿투의 증오심이 더했겠지요.

그런데 관무랑수경을 읽어보면 위제희 부인이 부처님을 막 원망하는 장면이 나오다가 갑자기 ‘이 세상은 싫습니다. 극락세계를 보여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경전에는 위제희 부인이 왜 갑자기 변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그 내용은 아들을 갖게 된 과정의 인연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갖기 위해서 남을 죽이는 게 빔비사라 왕이라면, 아들을 갖기 위해서 그것을 방조한 게 위제희 부인이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 제 아버지를 죽이는 게 아들이에요. 이 세상이란 실제로 이런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왕이 되고 왕비가 되고 부자가 된다는 것에 빠져 있으면, 그건 마치 쥐가 맛있는 음식에 취해 쥐약을 먹고 잠깐 즐거운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지옥과 같은 일입니다.

위제희 부인은 이걸 깨닫고 부처님께 정토세계를 보여달라고 청한 겁니다. 이럴 때 대부분은 ‘아들과 아버지가 화해하게 해 주세요’라고 빌겠죠. 그런데 위제희 부인은 세상의 덧없음을 깨닫고, 복을 비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은 싫습니다. 정토세계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위제희 부인을 위해서 정토를 보는 열여섯 가지 관법(觀法)을 설하셨는데, 그게 관무량수경입니다. 자, 그럼 관무량수경의 서분(序分)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서분은 본론인 관법에 들어가기 전에 이 경이 설해진 배경을 기록해 놓은 부분입니다. 함께 독송해 보겠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위제희 부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독송을 마치고 앉은 그 자리에서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맛있게 먹은 후 다음 장소인 죽림정사로 떠났습니다.

죽림정사 Venuvana Vihara

5분쯤 달려 죽림정사에 도착하여 내리니 아이들이 손을 내밀며 우리를 먼저 반겼습니다.

죽림정사는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 감명을 받아 부처님과 1,000명의 제자가 머물 곳을 보시한 곳으로 초기 사찰의 원형이 된 곳이라고 합니다.

죽림정사로 들어서자 과연 그 이름에 걸맞게 대나무 숲(죽림)이 우거져있습니다. 땅에서 하나, 하나 솟아 있는 한국 대나무와는 달리, 인도의 대나무는 다발로 우거져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며 연못을 에워싸고 앉을 예정이었는데 공사 중이라 너른 잔디밭에 모여 앉았습니다.

예불과 공양을 올리고 난 후 스님께서는 이 곳에서 ‘부처님의 상수 제자인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며, 마하가섭이 부처님께 귀의한 이야기’ 등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최초의 절인 죽림정사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세 번째 제자인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이 부처님의 제자가 됩니다. 마하가섭은 브라만 출신인데, 엄청난 부잣집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귀하게 자랐겠죠.

마하가섭 존자는 본래부터 결혼할 생각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수행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집안의 분위기를 봐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하가섭은 꾀를 냈어요. 조각을 잘하는 사람에게 전단향으로 아주 아름다운 여인상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꾸 장가가라는 어머니께 여인상을 드리면서 이런 여자가 있으면 가겠다고 했어요. 그런 여자를 구할 수가 없으니까 어머니의 잔소리를 피해 다닐 수 있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그런 여자를 진짜로 구해 온 거예요. (모두 웃음)

옛날 사람들은 거짓말을 못했나 봐요. 약속을 했으니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하고 첫날밤에 부인에게 사정을 고백했더니 부인도 똑같은 고백을 하는 겁니다.

‘사실 나는 결혼할 의향이 없는데 부모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요? 잘됐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만 부부 행세를 하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각자의 길을 갑시다.’

이렇게 결혼을 했기 때문에 합방을 안 했어요. 부부생활을 안 하니까 아기가 생길 수가 없잖아요. 부모님은 계속 손자 보기를 기다렸지만 아이가 안 생겼어요. 그러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해방이 된 부부는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한 사람은 이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저쪽으로 갔어요. 여러분도 좀 이렇게 해보시면 어떨까요? (모두 웃음)

경전을 보면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많아요. 그렇게 해서 마하가섭 존자는 바로 죽림정사를 찾아와서 부처님께 법을 청해 들었는데,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대상으로는 마하가섭 존자 외에도 수닷타(Sudatta) 장자가 있습니다. 수닷타 장자에게도 부처님이 ‘내 이미 당신을 기다린 지 오래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하가섭은 이렇게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됐고, 훗날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돼서 모든 경전의 결집을 맡습니다. 선종(禪宗)에서는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계승한 사람으로 마하가섭을 꼽습니다. 제1제자인 사리푸트라(Sariputra,舍利佛)와 제2제자인 목갈라나(Moggallana,目犍連), 이 두 분은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으셨기에 부처님보다 먼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의 상수제자는 제3제자였던 마하가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하가섭 존자는 부잣 집 출신에 귀한 집 자손이다 보니 아무리 수행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랄 때의 습관이 쉽게 안 버려졌어요. 그것이 옷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과 같이 앉아 있었는데, 부처님은 다 떨어진 누더기를 입은 반면에 마하가섭은 값비싼 비단옷을 입고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유니폼이라는 게 없고 자기 입은 대로 와서 생활을 했습니다. 마하가섭은 부잣집에서 입고 온 차림 그대로 생활했던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 마하가섭 존자의 옷을 만지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존자여, 옷이 참 좋구려.’

마하가섭 존자가 미처 모르고 있다가 그제서야 자기 옷을 보니까 부처님 옷은 누더기인 반면 자기 옷은 좋은 비단옷인 거예요. 이때 마하가섭 존자가 크게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옷을 벗어 부처님께 드리고, 부처님의 누더기를 자기가 입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마하가섭 존자는 죽을 때까지 옷을 가장 허름하게 입고, 음식은 박하게 먹고, 생활은 나무 밑에서 했습니다. 이것을 두타행(頭陀行)이라고 하는데, 두타행에 제일이었다고 해서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 존자’라고 말합니다. 원래 모든 수행자는 거지꼴이긴 하지만, 마하가섭 존자는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어요. 같은 수행자들마저 마하가섭 존자가 가까이 오는 것을 싫어할 정도였습니다.

이 일화는 옷 한 벌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하가섭 존자는 자신의 몸에 밴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는 부처님의 지적을 받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다른 사람보다 더 철저하고 엄격하게 생활을 한 겁니다.”

그리고 죽림정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이 담긴 경전을 함께 독송하고 잠시 명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명상을 하며 바로 여기에서 부처님과 제자들도 명상을 했다고 생각하니 부처님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죽림정사 연못 한 켠에서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바로 칠엽굴으로 이동했습니다. 대중들은 더 있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죽림정사를 나왔습니다.

제 1 결집이 이루어진 칠엽굴

다음 장소는 칠엽굴입니다. 산을 조금 오르다 뒤 돌아보니 산으로 둘러싸인 라즈기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생각보다 멀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 칠엽굴에 도착하니 동굴과 함께 탁 트인 풍경이 시원합니다.

경전에는 칠엽굴에 아라한 500명이 모여 앉아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하는데, 400명 순례객이 다 앉고도 자리가 좀 남습니다. 정말 오백 아라한이 앉았을 법 합니다.

칠엽굴은 부처님 사후 부처님 말씀을 최초로 결집한 제1결집이 행하진 터로 아난다와 우파리가 초안을 내고, 마하가섭 존자가 사회를 보고, 500명의 아라한이 초안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결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스님께서는 칠엽굴에서의 경전을 결집할 당시의 상황과 부처님 입멸 후에 불교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경전 결집이 있었습니다. 일곱 개의 나뭇잎 모양으로 동굴이 생겼다고 해서 칠엽굴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어요.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사람은 아난다(Ananda, 阿難陀)입니다. 아난다는 법문도 많이 듣고 착실했지만 깨닫지를 못했어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전 결집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아난다 개인에게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지만, 경전 결집에도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총명하고 법문도 많이 들은 아닌다가 깨닫지 못해서 참석할 수 없다고 하니까요. 아난다는 결집 전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을 해서 결집하기 전날 저녁에 깨쳤다고 전해오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아난다가 겨우 경전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모두 웃음)

결집 장소를 얘기할 때 한국의 유명한 스님들까지도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렇게 좁은 곳에 무슨 500명이 앉아서 결집을 할 수 있냐. 기록이 잘못되었다.’

그런데 여기를 보세요. 우리 순례단이 총 450명인데, 아직 빈자리도 조금 있는 것을 보니 500명 정도는 충분히 앉을 수 있겠죠?”

“네.”

“거기다가 당시 사람들은 여러분보다 덩치가 작았을 거잖아요. 그러니 500명도 충분히 앉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여기보다 너무 넓으면 마이크도 없었기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요.

경전 결집에 대해 의논한 결과, 마하가섭이 결집을 진행하는 사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안을 발제할 대표 두 명을 선정했어요. 부처님의 법문인 경(經)에 대해 발제할 사람으로는 아난다가 선정됐고, 수행자의 실천 행위 규범인 율(律)에 대해 발제할 사람으로는 우파리(德波羅, 우바리)가 선정되었습니다.

우파리는 10대 제자 중 유일하게 천민 출신인데, 아는 게 없다 보니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 따랐나 봐요. 우파리는 계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율에 대해서는 우파리가 발제자가 된 거예요.

아난다는 자기가 부처님께 들은 얘기를 해야 되니까 맨 앞에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라고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문 기사처럼 앞부분에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이런 여섯 가지 정보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금강경 첫머리를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輿大比丘千二百五十人俱

‘일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래서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은 ‘부처님이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에’라는 뜻입니다. ‘여대비구천이백오십인구’는 ‘누구에게’에 해당하는데, ‘1250명에게’라는 뜻이에요. ‘누가’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님’이 되겠죠. 이런 식으로 문구가 딱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이 형식에 따라 내용을 정리해서 초안을 발표했습니다.”

오백 대중이 모여 경전을 읊는 모습을 상상하며 경전 독송을 함께 했습니다. 칠엽굴을 내려와 마지막으로 나란다 대학을 들렀습니다.

나란다 대학, 박물관

나란다 대학은 불교를 가르치던 학교로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대학이었는데 교수만 천오백 명이었고 학생은 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현재 발굴된 것은 10분의 1도 안된다고 하니 당시에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팀을 나누어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았습니다.

나란다 대학을 끝으로 오늘 순례를 모두 마쳤습니다.

순례단은 모두 라즈길에 예약된 숙소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조별로 불편한 마음을 나누기도 하고 하루 종일 걷고 걸었던 여독을 풀었습니다.

내일은 바이샬리로 가서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올렸다는 원후봉밀터를 참배하고 8개 중 아직 3개 밖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원형 진신사리탑을 참배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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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희

칠엽굴 오르는 길이 쉽진 않았습니다.
영미보살님의 응원에 힘입어
한걸음 한걸음
기침을 쿨럭 거리며
지금 우한폐렴때가 아닌게 어딘가 싶습니다.
칠엽굴 끝까지 오른 후 내려다 본 인도 풍경은 잊을 수 없습니다.
제띠안 영축사 나란다대학 제1결집 칠엽굴 인도의 대중탕 .... 하루에 너무 많은걸 보고 느꼈습니다.
몸은 힘들었지만 2박3일같은 하루였습니다.

2020-01-29 20:39:31

임다희

전날 많이 걸었던 탓에 아침에 스님이 제띠안에서 걸어갈까요? 할 때 제발 걷지 않게 해달라고 속으로 무척 빌었던 게 기억납니다.
이 날 결국 몸이 좋지 않아 칠엽굴에 가지 못했는데 참 아쉽습니다.
죽림정사에서 나오던 중 한 아이가 물을 달라고 하여 주었는데 사진 속 아이가 그 아이인가 싶기도 합니다.
아름다웠던 죽림정사의 모습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합니다

2020-01-29 00:48:19

차나무

빔비사라왕이 갇혀 있던
감옥터에서 명상할때
가장 많은 걸 누렸던
위제히 부인의 아픔이
느껴지는듯 했습니다.
지금 이대로 행복한줄 알겠습니다.

2020-01-28 21:4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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