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21. 부처님 열반일 기념법회, 경전반 수업 촬영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안녕하세요. 2563년 전 오늘,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습니다. 스님은 열반일을 맞아 정토회 서초 법당에서 ‘열반의 의미’에 대해 기념 법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아침 일찍, 평화재단에서 최근 북한 현실에 대해 전문가들과 토론을 한 후 서초 법당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0시부터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열반에 이르기까지 과정과 의미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오늘은 불기 2563년 열반재일입니다. 본래 ‘열반’이라고 하는 말은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때는 완전한 열반,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표현해요. 만약 살아있어도 모든 번뇌가 사라졌다면 열반을 증득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육신이 살아있는 한 통증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수행자가 목숨을 마치면 완전한 열반, 반열반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열반이란 용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지 2563주기가 되는 날이에요.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경전이 열반경입니다. 열반경에는 부처님의 열반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해에 부처님께서 바이샬리의 죽림촌에서 안거를 보내셨는데 병이 나서 굉장히 아프셨다고 해요. 아난존자가 혹시 돌아가시면 어떡하나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으셨습니다. 그리고 가뭄이 너무 심해서 몇 백 명이 걸식을 하면서 한 곳에 머무르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에게 한 명 씩 한 명 씩 다 흩어져 안거를 지내라고 하셨어요. 안거가 끝나고, 흩어진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간다키강을 건너 쿠시나가르를 향해 길을 떠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파바 마을에 이르러 어느 망고 나무 아래에 앉자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부처님께 찾아와 인사를 올리고 설법을 들었습니다. 그 설법을 듣고 춘다가 감동을 해서 내일 아침 식사에 부처님을 초대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승낙을 하셨는데, 춘다가 가고 난 뒤에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묻습니다. ‘저 사람은 가난해서 식사 준비를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승낙을 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걱정마라. 그는 잘 준비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춘다의 집에 가서 보니 정말 음식을 잘 차려놓았습니다. 그 해 엄청난 흉년이 들어서, 부자도 부처님 일행을 초대하기 어려웠는데, 가난한 춘다가 음식을 마련한 것을 보고 대중이 전부 놀랐습니다. 차려놓은 음식을 부처님 발우에 더는데, 그중 한 가지 음식을 부처님 발우에 덜었더니 부처님께서 그 음식을 보시고 ‘춘다여, 이 음식은 누구도 소화할 수가 없단다. 이 음식은 비구들에게 돌리지 마라. 이 음식을 땅에 묻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식은 ‘스카라 맛다바’라는 음식이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부처님께서 춘다를 위해서 설법을 해주셨습니다. 설법을 마친 부처님께서는 갑자기 배가 아팠습니다.

‘아난다여, 일어나 길을 떠나자. 배가 몹시 아프구나.’

조금 걷다가 ‘좀 쉬었다 가자’ 하고 설사를 하시고, 다시 걷다가 ‘좀 쉬었다 가자’ 하고 설사를 하셨습니다. 그 설사에 피가 섞여 나왔다고 해요. 급성 식중독을 앓았다고 볼 수 있겠죠.

카쿠타 강에 이르러 한 나무 밑에 앉아서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물으셨습니다.

‘춘다는 어떤가?’

‘춘다는 지금 몹시 걱정과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사람들이 춘다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지만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수군댑니다.’

경전에는 이렇게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정도로 점잖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더욱더 거센 비난이 있었을 겁니다.

‘제 분수를 알아야지, 어디 가난뱅이가 무리해서 부처님을 초대해서 음식을 드리나. 결국 네가 올린 음식 때문에 부처님이 돌아가시게 됐다.’

이때 부처님께서 ‘춘다를 이리 오라고 해라’라고 합니다. 춘다를 옆에 앉혀 놓고 아난존자에게 묻습니다.

‘아난다여,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 뭔지 아느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입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중에도 가장 큰 공덕이 있는 공양이 무엇이겠느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먹은 공양이고, 하나는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먹은 공양이다.’

깨담음을 얻기 직전에 먹은 공양은 수자타의 공양입니다. 수자타의 공양이 엄청난 공덕이 있는 공양이라는 건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수자타의 공양은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수자타는 부처님이 유명해지고 나서 공양을 올린 것이 아니고, 그냥 길을 가다가 길가에 쓰러진 불쌍한 사람을 보고 미음을 끓여 먹여서 부처님을 살려냈습니다. 이 공양은 부처님이 아니라 수자타를 위대하게 만든 공양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 공양과 맞먹는 공양이 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게 부처님이 하시는 비유의 묘함이죠. 제일 큰 공덕이 있는 두 가지 공양이 있는데, 하나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 올린 공양이고, 하나는 열반에 들기 전에 올린 공양이라는 식으로 대구를 이루게 하면서 논리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니 춘다의 공양이 위대한 공양이 되어버렸습니다. 단순히 ‘춘다여, 걱정하지 마라. 춘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렇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딱 비유를 들어서 누가 봐도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도록 ‘하나는 열반을 증득하기 전에, 하나는 열반에 들기 전에 먹은 공양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춘다의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은 역시 이렇게 묘한 언어를 써서 대중이 설득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고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거나, 토해버렸다거나, 아니면 독이 있는 것을 미리 알고 음식을 안 먹었다거나 하는 사례는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을 먹고, 죽음에 이르러 그 음식을 준 사람을 걱정해서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 예는 드물어요.

이것은 예수님도 비슷하죠.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에게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이 된 겁니다. 사람으로서는 그런 마음을 내기가 어렵죠. 그래서 예수는 신의 아들인 동시에 신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설입니다.

예수가 신이 된 것처럼 춘다의 공양은 붓다를 위대하게 만들었어요. 죽음 앞에서도 여여할 뿐만 아니라 독성이 든 음식을 준 상대를 도리어 염려하고 이해해서 그를 위로한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어떤 모양과 형상이 부처가 아니라, 이런 경우에 이런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부처님은 사라나무 숲으로 가셨습니다. 가사를 4겹으로 접어서 길쭉하게 깔고,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붙이고, 머리는 북쪽으로, 발은 남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누우셨습니다.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들겠노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난다는 슬픔을 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묻습니다.

‘열반에 드시려면 왜 이 외진 곳, 쿠시나가라입니까. 왕사성도 있고, 사위성도 있고, 카시성(바라나시)도 있지 않습니까. 그곳은 재가 수행자도 많고 출가 수행자도 많지 않습니까.’

‘아난다여,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먼 미래가 되면 이 곳은 성스러운 곳이 되리라.’

‘말라족(왕족)의 궁 안에서 열반에 드시지 왜 이 외진 숲 속에서 열반에 드시려고 합니까?’

‘아난다여,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내가 이 숲 속에서 열반에 들어야 누구든지 나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다 올 수가 있다. 마을에 가서 오늘 밤에 여래가 열반에 드니 여래를 친견할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친견하라고 사람들에게 일러라.’

만약 왕궁에서 열반에 들거나 브라만의 집에서 열반에 들면, 천민은 출입을 못하니까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숲 속은 아무 제한 없이 자기만 원하면 누구나, 즉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새도 올 수가 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풍악소리가 나고 꽃잎이 막 떨어졌습니다. 대중들이 이를 기이하게 쳐다보면서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갖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늘의 신들이 여래의 열반에 임해서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부처님께 어떤 신통력으로 신비로운 공양을 올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제1의 공양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제1의 공양입니다. 우리가 예불을 올릴 때도 무슨 향을 피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는 향, 선정을 닦는 향, 지혜를 증득하는 향, 해탈의 향, 해탈지견향의 향, 이렇게 오분 향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아난다는 동네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열반을 알렸습니다. 마을에서 돌아와 아난다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아난다가 슬픔을 못 이기고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이렇게 아난다를 위로합니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있으리라.’

부처님을 친견하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가족별, 친지 별로 인사를 드리게 했는데도 밤이 깊어서야 친견이 끝났습니다. 이제 조용히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를 기다리는 마지막 시간이라 대중들이 다 모이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도 물을 게 있으면 물어라.’

그런데 아무도 대답을 안 했습니다.

‘친구가 친구에게 묻듯이 편하게 물어라. 내가 열반에 든 뒤에 그때 물어볼 걸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단다. 물을 게 있으면 지금 물어라.’

또 아무도 대답을 안 했습니다. 세 번째 그렇게 말씀하시니 아난다가 부처님께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많은 법을 알맞게 설하셨고, 우리는 그 법을 이미 다 습득해서 아무런 의문이 없습니다. 그러니 안온하게 열반에 드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날의 정황을 보면, 돌아가시기 직전의 사람이 보이는 말과 행동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냥 오늘 저녁에 같이 얘기 나누다가 내일 아침에도 다시 만날 사람처럼 편안하게 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이라는 말은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은 경지, 마음속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경지를 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난 코끼리가 공격을 했을 때도, 칼을 들고 살인자가 달려왔을 때도, 대중들이 ‘거기에 가면 위험합니다’라고 하자 ‘여래에게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은 뒤에 어떻게 될까 자꾸 걱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당도 나오고, 극락도 나오고, 지옥도 나오고, 환생도 나온 거예요. 그러나 부처님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사라진 경지에 이르렀는데 무슨 죽음 뒷얘기를 하시겠어요.

오늘 우리들은 이런 부처님의 삶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부처님처럼 되지는 못하더라도, 부처님을 내 인생의 모델로 삼고 그 방향으로 하루하루 걸어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까지도 위로했습니다. 그 수준까지는 안 되더라도 내 의견에 조금 반하는 말을 하는 사람, 나에게 조금 손해를 끼친 사람 정도는 우리가 수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남도 아니고 남편이나 아내, 자식한테 죽기 살기로 대드는 것은 수행자로서의 모범은 아니에요. 그럴 때 화가 나는 것은 이해되지만, 수행자는 그걸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 따로, 내 삶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라면 부처님의 만 분의 일은 본받으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그래도 나를 합리화하지는 말아야겠다’ 이런 생각만 가져도, 참선이 더 좋느니, 염불이 더 좋느니 하는 불필요한 논쟁은 안 하게 됩니다. 이런 중심만 잡히면, 성질이 올라와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온갖 수행을 다 해도 진척이 없는 이유는 이런 삶의 관점이 안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탐진치 삼독이 있는 한 온갖 지식을 알고 온갖 얘기를 번드르르하게 해도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처럼은 안 됩니다. 여러분만 안 되는 게 아니라 저도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는 믿음과 자기 정체성,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야 그 길로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열반재일을 맞아 일주일 간의 정진을 회향하면서 그런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다짐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지난 일주일간 수고 많았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마음에 새기며 대중들은 마지막 300배 정진을 했습니다. 스님은 열반일 기념 법문이 끝나고 바로 경전반 학생을 위한 ‘일과 수행의 통일’에 대한 법문 촬영이 있어 2층 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왜 괴롭나’ 자기를 살펴보세요. 껄덕거리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사랑받으려 하고, 도움받으려 하고, 이해받으려 하고, 남에게 의지하려 하고, 칭찬받으려 하잖아요. 이게 뜻대로 안 돼서 괴로운 겁니다. 그런데 ‘내가 거지도 아니고 주인인데, 내가 줬으면 줬지 왜 남한테 얻어먹냐’ 이렇게 주인의 마음을 내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라도 더 베풀고, 이해해 주고, 좋아해 주고, 칭찬해 주고, 의지처가 되어보세요. 이런 마음을 내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불교대학에서 배운 것은 소극적인 수행 방법이에요. 여러분이 하도 껄덕거리니까 ‘그만 껄덕거리세요. 내 인생은 내가 자립해야 합니다. 남한테 맨날 끌려다닐래요?’하고 가르쳤습니다. 법문을 듣고 ‘그래, 내가 누구를 미워해봐야 나만 손해지.’하고 수행했다면, 이것은 소승적 관점입니다.

적극적인 수행방법은 참고 견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든지 적극적으로 해버리는 겁니다. 얻으려는 마음에서 베푸는 쪽으로 전환하면, 타인을 위하는 것과 나를 위하는 것이 일치되는 경지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대승적 관점이고, 일과 수행의 통일이에요. 경전반에서는 이것을 터득해야 해요. 그래서 소극적인 소승 수행과 적극적인 대승 수행을 함께해야 합니다.”

스님은 ‘일과 수행의 통일’이 무엇인지 비유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전체 법문은 경전반 수업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경전반 수업 촬영까지 마친 스님은 평화재단으로 이동하여 저녁까지 각종 회의를 했습니다. 도법스님을 비롯한 불교계 인사들이 찾아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모든 회의를 마치자 밤 10시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농사를 짓기 위해 두북 정토수련원으로 이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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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등대

ㅋ 철없는 인간들아 언제나 철이 들래. 이런 허구로 사람들 등쳐먹고 사는 너희들은 어느모로 보아도 사깃꾼들이다. 자기 목숨 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것을 목숨 바쳐가며 받드는 자들은 그저 그걸로 구실을 삼고 수단을 삼아 무지목매한 대중을 혹하여 그들의 제물을 늑탈하여 자기들의 물질적 안위를 누리려는 의도 이외는 아무것되 기대할 것이 없다.

2020-04-17 12:37:45

정명데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수행 정진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감사합니다.~~^^

2020-04-08 19:08:14

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4-04 22: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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