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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를 맞이하여 통일의병 150여 명과 함께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천지에 올랐습니다. 저녁에는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을 본 후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오늘은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날입니다. 새벽에 눈을 뜨자 가장 먼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였습니다. ‘아, 천지를 환히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쁜 마음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5시 정각에 이도백하를 출발한 버스는 백두산 북편산문까지 약 20분 가량 자작나무와 각종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원시림을 통과했습니다. 기행단은 사람들이 붐비지 않은 이른 시간에 가장 먼저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 5시 20분부터 매표소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매표소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 백두산 원시림 속을 지나고 있는 통일의병들
6시 10분에 매표소 문이 열리자 많은 인파가 순식간에 셔틀 버스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에 순간 놀라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라고 수신기로 알려주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기 위해 셔틀 버스와 승합차 두 번을 갈아탔습니다. 마치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가파른 고개를 요리조리 꺾어가며 15분 가량을 올라가자 드디어 백두산 천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저 멀리 백두산 천지가 어렴풋이 보입니다.
하늘에는 작은 뭉게 구름이 아주 가끔 지나가는 것 외에는 너무나 맑았습니다. 한발 한발 마지막 계단까지 밟은 후 천지의 능선 위에 올라서는 순간, 푸른 빛깔의 영롱한 천지가 환하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왜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이라고 부르는지 온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 백두산 천지
경치가 좋은 곳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어 사진 한 장 찍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스님은 분주히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조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았습니다. 또 스님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적당히 틈을 보며 연이어 조별 사진을 함께 찍어 주었습니다.
통일의병들과 기념 사진 촬영을 모두 마친 후에는 전국의 140만명의 희망편지 구독자들을 위해 푸르른 천지를 배경으로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는 영상 메시지를 촬영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뒤에 경치가 좋죠? 여기가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천지의 모습입니다. 정말 맑고 웅장하고 장대합니다. 우리 민족의 시작은 이런 웅장한 곳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환웅 천왕님께서 백두산 아래에 신시를 건국하고 배날 나라를 시작한 지 6천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일제에 나라를 잃고 36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다음주면 광북 71주년이 되는 데요. 이 날을 기해서 다시는 이런 불행이 없도록 우리가 다짐했으면 합니다.
더군다나 광복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였기 때문에 분쟁과 전쟁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통일이 되어야 진정한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을 기해서 평화와 통일을 꼭 이루도록 함께 노력해 줄 것을 여러분께 당부드립니다. 백두산 천지에서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며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천지의 신령스런 기운을 듬뿍 받은 통일의병들도 천지를 바라보며 스님의 발원처럼 평화와 통일을 위해 나부터 작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함께 했습니다.
롤러코스터 같은 승합차를 다시 타고 천지에서 내려왔습니다. 꼬불꼬불한 길이 산 아래 마을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다음은 비룡 폭포로 향했습니다. 셔틀 버스에서 내려 나무 계단을 따라 1.2km를 걸어가니 군데 군데 김이 모락 모락 피어나는 온천 물이 보이고, 저 멀리 회색 빛깔의 화산 지형 사이로 새하얀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비룡 폭포가 보였습니다.
여름 햇살이 따가웠지만 스님은 비룡 폭포를 배경으로 참가자 전체를 위해 일대일로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비룡 폭포에 대해 간단한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 비룡폭포
“천지의 호수에서 물이 흘러내려오는데 물이 흘러내리는 출발지점을 ‘달문’이라고 해요. 달문에서 비룡폭포까지는 1.2km 정도 됩니다. 조금 경사지게 내려오기 때문에 물결이 일어서 하얗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승사하’라고 합니다. 승사하 끝에 바위가 하나 있어서 물줄기가 두 개로 갈라집니다. 그래서 폭포의 모습이 마치 ‘두 폭의 비단이 드리워진 것 같다’,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 라는 뜻으로 ‘비룡폭포’라고 부릅니다. 중국에서는 장백산에 있는 폭포라고 해서 ‘장백폭포’라고 부르고요.
이렇게 흘러서 주욱 내려가면 이 물은 ‘이도백하’가 됩니다. 이도백하는 송하강으로 흘러갑니니다. 송하강으로 흘러가다가 흑룡강과 합류해서 캄차카 반도의 캄차카 만으로 물이 흘러나갑니다. 반면 압록강과 두만강은 천지의 물이 흘러내려간 것이 아니고 백두산의 기슭과 골짜기에서 물이 발원해서 흘러내려간 것입니다. 동쪽으로 흘러내려가면 두만강, 남쪽으로 흘러내려가면 압록강, 북쪽으로 흘러내려가면 투도백하, 이도백하, 삼도백하,,, 오도백하 이렇게 흘러내려 송하강으로 합류됩니다. 또 서쪽으로 흘러내려가도 송하강으로 합류합니다.”
설명을 마친 스님은 역사기행 스텝들과도 기념사진을 함께 찍은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난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와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소천지에 도착했습니다.
▲ 소천지
소천지는 작은 화산호인데 모양은 둥글고 아담하며 주변에 빽?하게 둘러 있는 나무들과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이 수면 위에 영롱하게 비춰진 모습이 마치 거울과 같은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소천지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기행단은 곧이어 녹연담으로 향했습니다. 녹연담은 정말로 녹색 에메랄드빛을 발하는 연못이였습니다.
▲ 녹연담
이어서 녹연담을 나와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지하삼림으로 향했습니다. 지하삼림은 말처럼 땅 속에 숲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화산 활동의 영향으로 함몰된 넓은 면적의 땅에 숲이 형성된 것을 말합니다. 숲의 주변을 둘러싸고 절벽이 솟아 있어 마치 땅 아래에 숲이 형성된 것처럼 보입니다. 김홍신 작가님은 ‘대발해’라는 소설을 쓸 때 지하삼림을 보고 발해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 지하삼림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스님이 “백두산 보고 왔으니 백두산 노래를 다시 한번 불러보자” 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1,2,3호차 차량별로 아주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 만주벌판 말을 달리던. 전사들의 투쟁의 고향 ♬ 살아쉬는 백두산으로!”
백두산 천지를 너무나 환하게 봐서 그런지 기행단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이도백하에 도착해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전 내내 걸음을 걸었더니 다들 허기가 졌는지 밥맛이 꿀맛이라며 허겁지겁 먹는 모습입니다. 서로 먹을 것을 챙겨주며 조별로 친목도 한층 다져진 느낌입니다. 이렇게 해서 압록강과 백두산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오후에는 발해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중원 대륙의 깊숙한 한복판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고구려 영토보다 훨씬 넓은 광활한 영토를 갖고 중원을 누볐던 발해인들의 기상을 상상해보며 발해의 첫 수도였던 돈화에 위치한 동모산을 향했습니다.
버스 차창 밖으로 이도백하에만 있는 소나무인 ‘미인송’을 잠깐 볼 수 있었습니다. 미인송을 끝으로 노근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들 하나둘씩 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도백하에서 돈화까지 3시간 정도가 흐른 후 스님이 송수신기로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는 알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큰 평지에 삿갓을 덮어놓은 듯한 모양새의 낮은 산이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성을 쌓기에는 좀 밋밋해 보이는 산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방이 평지인 지형 위에 있어서 저 정도만 올라가도 주변이 훤히 보일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습니다.
▲ 동모산
동모산은 아직 발굴 중이라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대신 스님이 먼발치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 출신입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귀족들을 모두 잡아서 당나라 여러 곳에 분산 배치를 했습니다. 그 가운데 대다수는 요동성을 지나 중국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영주’라는 곳에 유배를 시켰습니다. 영주를 관리하는 사람이 평로절도사인데, 이곳에서 이진충이라는 거란족의 추장이 당시 조문예라는 평로절도사가 너무 동북 민족에 대해서 못되게 굴어서 그 사람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틈을 타서 대조영과 일부 고구려인들이 탈출을 하게 되는데, 이 때 고구려인들의 지도자가 ‘대조영’이고, 말갈족의 지도자가 ‘걸사비우’였습니다. 둘이 힘을 합해서 탈출하다가 추격 중인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결국 여기까지 도망을 옵니다. 그래서 이곳 동모산에 성을 쌓고 새로운 나라를 시작한 것입니다.
즉 수 천리를 도망 와서 여기서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까 그 주도 세력이 많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앞에 보시는 동모산처럼 이 정도의 작은 규모로도 시작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발해의 시작입니다.
나라를 시작할 때 원래의 나라 이름은 ‘진국’ 또는 ‘대진국’ 이였습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전쟁을 하다가 화친을 맺게 되었는데, 이 때 당나라에서 진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면서 ‘발해군왕’이라는 왕의 칭호를 줍니다. 그래서 발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원래 발해인들은 스스로를 ‘진국’, ‘대진국’ 이라고 불렀어요.
여기는 고구려 때 북쪽 국경 지대였습니다. 대조영이 고구려의 북쪽 국경 지대까지 도망을 온 겁니다. 그래서 이 성은 마치 발해에 있어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같아요. 적이 공격하면 여기로 들어와서 은거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평지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쪽 넓은 들판에 영승유지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가 평지성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북쪽으로 2~3km 떨어진 육정산에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면서 발해의 왕실 귀족 공동묘지도 함께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승유지를 평지성으로 아직 확정을 못하는 이유가 유물은 나왔지만 성벽이 분명하게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처음 나라를 세울 때는 산성을 쌓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방어가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동모산성을 첫 수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서 스님은 예전에 역사기행을 처음 시작한 초창기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역사기행 초창기에는 발해 유적지 답사가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지금은 많은 곳이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어 지금은 예전보다 방문지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조금은 씁쓸한 느낌을 간직한 채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뒤돌아서 나왔습니다.
원래는 돈화 시내로 들어와서 강동 24개석을 보려고 했으나 해가 지고 어움이 짙어져서 내일 아침에 보기로 하고 오늘의 기행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8시부터 ‘발해의 역사’를 주제로 저녁 강연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고구려의 패망 과정과 발해의 건국 과정, 순식간에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가 패망하는 과정에 대해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발해의 역사를 다시 갈무리 하면서 발해가 말갈족의 나라인지 고구려족의 나라인지에 대한 논란에 대한 스님의 견해를 이야기했습니다.
“사실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하지만 그 평가는 그 시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 평가마저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평가는 하되 그 기록은 사실대로 알아야 하고 또 남겨야 하는 겁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발해가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발해에 대해서 말할 때 ‘발해는 고구려가 세운 나라다’ 이렇게만 말하면 안 됩니다. ‘고구려족이 주도한 건 맞지만 민족 구성원의 다수가 말갈족이었다’ 이렇게 해야 맞아요. 고구려족과 말갈족이 처음부터 함께 하기도 했지만 영토를 넓히다 보니 흑수말갈족이 사는 영토까지 넓혔기 때문에 처음엔 인구 구성비가 5대5였더라도 나중엔 7대3이 되거나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말갈족이 다수였던 건 맞지요. 그렇게 말갈족이 다수였다면 말갈족이 왕까지는 못 올랐다하더라도 국장급이나 차관급까지는 올랐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국가경영을 배울 수 있었을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나중에 앞서 갔던 사람들이 물러나게 되면 자기네가 국가를 경영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문명이 변방으로 이동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발해를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화할 것도 없지만 발해가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은 분명하잖아요. 말갈족이 결국 여진족이 되고 나중에 금나라를 세우기도 하지만 그 당시의 말갈족은 고구려의 속민이였지 독립된 민족이 아니었습니다. 말갈족이라는 민족이 있긴 했고, 또 그들의 문화도 있었지만 어쨌든 당시 말갈족은 고구려의 구성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발해는 우리 민족사의 일부이자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문화적인 측면, 즉 그들의 매장 풍속이나 성 쌓는 방식, 신앙, 외교 관계에서 그들이 자신을 뭐라고 표현했는지 등의 정보를 보충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런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 이들은 고구려족이었구나. 상층부는 대부분 다 고구려족이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지요. 지금도 그런 유물과 유적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으니까요. 일본에 사신으로 간 발해인들 중에 말갈 성씨를 댄 사람은 거의 없었고 전부 해씨, 고씨, 또는 대씨라고 했거든요. 이것은 다 고구려 왕족의 성씨였어요. 이런 것으로 봤을 때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뿌리를 찾아가다보면 환웅, 환인까지 올라간다면, 고구려 이후는 발해로 이어졌고, 또 역사적 전통 속에서는 고려로 이어져서 오늘날 우리의 정통성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 중간 고리가 고구려입니다. 그러니 고구려를 통해서 위로도, 아래로도 역사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님의 역사관에 대해 모두 큰 박수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스님은 “내일 오전에도 강동 24개석, 요전자 24개석, 상경용천부의 성터 등 발해 유적을 계속 찾아갈 것” 이라고 하면서 미진한 부분은 내일 발해 유적지를 더 답사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대중들은 오늘 아침 백두산 천지를 보았다는 기쁨도 잠시 어느새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마친 스님은 이번 역사기행을 운영하기 위해서 곳곳에서 수고하고 있는 스텝들을 불러 모아 격려도 해주고 애로점이 무엇인지 경청하는 시간을 밤12시까지 가졌습니다.
내일은 발해의 중심이였던 상경용천부의 왕성터를 둘러보고,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위치한 흥륭사를 방문한 후 두만강 유역으로 이동해 독립운동 유적지인 봉오동 전투터를 보면서 이제 독립운동에 대한 공부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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