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8.6 (통일의병)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
“고구려의 수도, 홀본산성, 환도산성 그리고 국내성”

 

안녕하세요?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입니다. 오늘은 오전에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인 홀본산성에 오른 후 오후에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답사하는 일정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행단은 모두 강당으로 모였습니다. 새벽 5시 30분부터 6시까지 약 30분 동안 스님의 강의가 먼저 있었습니다. 날씨가 많이 무더워서 야외에서의 설명을 가급적 피하고자 숙소에서 설명을 미리 하고 출발하기로 한 것입니다.  

 


 

스님은 고구려가 어떻게 건국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특히 주몽의 탄생 설화와 유화 부인 이야기, 소서노를 만난 이야기, 홀본산성을 첫 수도로 정한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 옛날 이름으로는 졸본에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려고 하는 홀본산성은 해발 800미터에 있습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인데 정상 부위는 평평합니다. 주위가 자연 그대로 성벽처럼 생긴 아주 독특한 산입니다. 

 


 

이런 곳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초기에 적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쫓겨와서 나라를 세웠으니까 처음에는 방어하는 것이 주축이었을 겁니다. 물론 이 산성 뿐만 아니라 평지에도 왕이 사는 성이 따로 있었겠죠. 고구려는 평지성과 산성이 항상 한 짝을 이루고 있거든요. 위기에 처하면 산성으로 갔다가 전쟁이 끝나면 평지성으로 다시 내려오고 그랬습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 위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사실은 성벽을 쌓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만 정상으로 올라가는 통로 한 곳에만 성문을 만들었습니다. 또 물이 없으면 산성이 될 수가 없는데 정말로 그 위에는 우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해발 800미터 위에는 왕과 군대만 피신을 할 수가 있지 일반 백성은 그 위에 모두 올라갈 수가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꼭대기가 아닌 팔부 능선에 해당하는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산을 끼고 성벽을 쌓기도 했는데, 여기로는 일반 백성이나 말이 피난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동쪽 성벽입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이 산을 봉우리가 5개 있다고 해서 오녀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녀산에서 산성이 발견되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오녀산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아요. 원래 이름은 홀본산성입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곧바로 아침 식사를 한 후 홀본산성으로 향했습니다. 환인시를 약간 벗어나자 옛날에 ‘비류수’라고 불렸던 ‘혼강’이 나타났습니다. 기록에는 비류수의 서쪽 언덕에 홀본산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먼저 박물관에 들러 홀본산성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한 후 산 중턱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산 중턱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스님이 설명한 우뚝 솟은 독특한 산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대중들은 ‘우와~’ 하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 홀본산성

 

버스에서 내리자 산 중턱에서 정상까지는 계단이 놓여 있었습니다. 오녀산산성이라고 적힌 비석 앞에서 오는 순서대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스님은 맨 처음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지금처럼 관광지로 개발되기 이전의 이야기였으니까 당시에는 유적지 하나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다 보니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계단도 벌써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문을 지나니 드디어 정상 부위에 도착했습니다. 땀이 콩죽처럼 흐르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의 바람에도 시원함이 느껴졌습니다. 

 

정상 부위는 아주 평평했는데, 왕궁터, 양식창고, 병영자리, 우물터, 건축유지, 점장대 등 산성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다양한 유적지들이 발굴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하나하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 천지

 


▲ 병영 유지. 온돌을 사용한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점장대는 자연석을 석대로 한 채 남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혼강과 환인저수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탄성을 내지르며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을 찍은 후 절벽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 점장대

 

절벽 아래로 내려오니 해발 600미터 지점부터는 동쪽 성벽과 동문이 나타났습니다. 동문에는 공(工)자형 성문이 남아 있어서 고구려성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동문을 지나자마자 남문이 나타났는데 남문에는 옹성이 없고 성문만 있었습니다. 스님은 남문을 끝으로 홀본산성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친 후 주차장으로 내려왔습니다. 

 


▲ 남문

 

이제 기행단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환인에서 집안으로 향하는 길은 남로와 북로가 있는데 기행단은 북로를 택했습니다. 특히 통화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에는 ‘관마산성’이라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계곡에 산성을 쌓았던 흔적이 있는 곳을 잠시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 관마산성

 

부지런히 도로 위를 달렸지만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환도산성에 도착했습니다. 

 


▲ 환도산성

 

스님은 그늘진 곳에 대중들을 모이게 한 후 ‘왜 고구려는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는지’, ‘환도산성과 국내성은 적으로부터 몇 번 침략을 받았는지’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스님은 최근에 성벽이 많이 복원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우려점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봉금 정책이 풀리면서 이곳에 사람들이 자꾸 들어와 살기 시작하고, 특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는 아예 성벽을 걷어내 버리고 도로를 내거나, 성벽에 있던 돌로 집을 짓거나, 이렇게 해서 성벽이 거의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성벽이 있던 자리에 지은 건물들은 모두 뜯어내고 기초만 복원해 놓은 곳도 있고, 일부는 인공적으로 다시 쌓아 올린 곳도 있습니다. 

 

환도산성도 저기를 보시면 새로 다시 성벽을 쌓고 있습니다. 거의 다 허물어져서 안 보이던 것을 최근에 다시 옛날 모습으로 복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복원이 또 문제가 되고 있어요. 중국 기술자들이 복원을 하다 보니 고구려식으로 복원이 되지 않고 중국식으로 복원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중국식으로 복원되는 경우에는 나중에 중국의 성이 되어버리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곳곳에서 복원 공사와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스님의 우려를 들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환도산성 입구에서는 역사기행단 150명 전체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35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얼굴에는 모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이어서 산성 안으로 들어가 우물터, 망대, 병영자리, 궁궐터 등을 차례로 둘러보며 선조들의 숨결을 차분하게 느껴보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볼수록 정말 천연의 요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 5시 해가 질 무렵에 국내성에 도착했습니다. 국내성도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축성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기단은 계단식으로 다섯 개에서 일곱 개를 쌓은 다음, 그 위로 수직으로 쌓아올린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은 국내성의 모서리 부분의 특징에 대해 특히 강조하며 설명했습니다. 

 


▲ 국내성

 

“우리는 지금 국내성의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모서리 지점에 서 있습니다.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면 각이 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각이 지면 적이 공격할 때 방어에 불리해 집니다. 적은 3면에서 공격하고, 우리는 1면에서 방어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모서리에 각을 주지 않고 둥글게 만들었어요. 여기에 양쪽으로 치를 둠으로써 각루를 방어하기 쉽도록 했습니다.” 

 

국내성의 서쪽에는 ‘통구하’라는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고구려 시대에는 물의 양도 더 많았을 것이고, 물길도 지금과는 달리 성벽 가까이로 흘러서 자연 해자의 기능을 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서쪽 성벽에서는 구불구불하게 쌓기도 하고, 배수로를 만들기도 하고, 공자형 성문을 만든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스님은 각각에 대해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서쪽 성벽을 지나 남쪽 성벽으로 접어드니 드디어 압록강이 나타났습니다. 압록강을 너머에는 북한 땅이 바로 보였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고 뙈기밭을 만든 흔적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북한 땅 같았습니다. 

 

스님은 북한의 뙈기밭과 압록강에서 보트를 타고 있는 관광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습니다. 

 


 

“저기 뙈기밭 보세요. 제가 북한동포돕기를 시작한 것도 바로 여기에서의 일입니다. 북한동포들이 굶어죽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제가 믿지 않으니까 조선족 한 분이 여기서 저를 보트에 태우고 압록강을 따라서 저 위에 만포까지를 보여주었어요. 그 때 북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조그마한 어린 아이가 영양실조 상태로 빼짝 말라 있는데, 제가 그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얘야’ 하고 아무리 불러도 아이가 대답을 안 했어요.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조선족 분이 ‘조선 아이들은 구걸할 자유도 없습니다’ 그러더라고요. 왜냐하면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워낙 교육을 받아서 나라를 망신시키면 안 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뭐라도 주려고 했지만 여기는 국경이라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때 저는 충격을 받았어요. ‘날아다니는 새도 양식이 없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와서 먹을 수가 있는데, 사람이 어떻게 한쪽에는 음식이 풍부하고 한쪽에는 굶어죽는데 음식을 줄 수가 없느냐. 그것이 국가이고, 그것이 국경이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또 ‘나는 저 멀리 인도까지 가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있었는데, 어떻게 턱 밑에 있는 아이들이 굶어죽고 있는 것을 왜 모르고 있었느냐’ 하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처음에는 저항이 많았습니다. ‘반공교육 좀 더 받아야 되겠다’ 등 온갖 비난을 들었지만, 저는 그 때마다 압록강변에서 만난 배고픈 그 아이를 늘 생각했습니다.”

 


 

저항이 많을 때마다 압록강에서 만난 배고픈 아이를 생각했다는 스님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압록강변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8시 30분부터 저녁강연이 시작됐습니다. 에어컨이 고장이 나서 마치 사우나실에 들어온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지만, 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강연을 했고, 대중들도 스님의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저녁 강연을 통해 스님은 ‘동북아지역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에 대해 서로 비교하면서 역사를 조금 더 크게 보는 시각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동아시아 대륙은 크게 두 개의 문명이 발달한 곳이라고 할 수 있어요. 황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문명이, 요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배달 문명이 발달했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환인시대에는 동북아 대륙에 중심을 두고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끼쳤어요. 환웅시대에도 역시 동북아 대륙에 중심을 두고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단군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동북아 대륙에 그 활동의 중심이 있고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다가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동북아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 국가는 사라지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국가들이 많은 국가들이 병렬하는 열국 시대가 되었어요. 그것이 점차로 5국시대, 삼국시대로 정리되다가 발해와 신라의 그것이 점차로 5국시대, 삼국시대 정리되다가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 시대를 맞게 됩니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동북아 대륙은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소수 민족들이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렇게 되면서 한반도에는 고려가 들어섰습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건국이념을 세웠지만 발해 멸망 이후 그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어요. 첫 번째로는 거란족인 요나라가 일어나서 고려와 갈등을 유지하고, 그 다음으로는 여진족인 금나라가 일어나서 고려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그 다음으로는 몽골족인 원나라가 일어나서 고려까지 복속시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려 시대에 우리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정리해본다면 우리의 역사를 너무 민족사에만 국한시키지 말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예를 들어 중국은 청나라나 원나라를 중국의 역사로 봅니다. 자기들은 한족을 중심으로 해서 중국 역사를 편제하지만 다른 민족의 역사도 역시 중국 역사의 일부로 보는 거예요. 지금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에 사는 56개 소수민족의 역사는 다 중국사의 일부라고 정의하니까 당연히 조선사도 중국사의 일부로 봅니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잡으니까 역사적 스케일이 커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좁혀서 문제에요. 예를 들어 남북한이 갈등하게 되면 북한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안 받아들이고, 발해와 신라가 다투면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안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 결과 우리의 활동 무대만 좁아진 게 아니라 역사의 영역 또한 굉장히 좁혀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역사를 조금 문명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하문명, 배달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동북아문명의 주도 세력은 바로 우리 조선족,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이렇게 주도해서 이룩한 역사를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거란족이든 여진족이든 선비족이든 몽골족이든 다 크게 보면 동북아민족의 일부들입니다. 다시 말해 중국이 우리의 이웃집이라면 이 민족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라는 이야기예요.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이 동북아 대륙을 이웃 문명, 즉 한족에게 완전히 빼앗긴 적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활동 무대를 중국 한족이 최초로 일부라도 차지한 것이 한사군입니다. 두 번째는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원이 차지하고 있던 땅을 다 명의 땅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동북아 대륙이 자동적으로 중국 땅이 된 게 명나라 시대입니다. 그 다음이 지금입니다. 지금 동북아 대륙은 다시 중국 영토의 일부로 자리 잡았죠. 그러나 문명사적으로 본다면 6천년에 이르는 전 역사를 통해서 중국 한족이 동북아 대륙을 차지한 적은 2천년 전에 한사군 때 한 번, 500년 전의 명나라,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세 번밖에 없어요. 그 외에는 늘 우리 동북아 제 민족들이 동북아 대륙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옛 5천 년 동안은 우리 민족이 주도적으로 활동했고, 근래 천 년 동안은 각 민족들이 번갈아가면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어요. 제일 먼저 거란족인 요나라가 한 번 제패하고, 여진족인 금나라가 한 번 제패하고, 그 다음에 몽골족인 원나라가 한 번 제패하고, 만주족인 청나라가 한 번 제패하고, 그 다음에 일본족인 일본 제국주의가 한 번 제패했습니다. 이렇게 전 역사로 보면 우리 아래에 있던 같은 북방 계열의 제 민족들이 번갈아가면서 한 번씩 제패를 한 역사일 뿐이지 중국이 차지한 적은 많지 않습니다.

 

이제 거꾸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중원 대륙에 들어가서, 즉 동북아 문명이 중원 대륙에 들어가서 패권을 잡은 적은 언제였을까요? 첫 번째가 은나라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나라는 중국 역사의 일부가 됐죠. 두 번째로 거기까지 내려가서 중원 대륙에 제국을 세운 것은 남북조 시대의 16국과 북위 등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원나라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몽골인 원나라가 중원까지 다 제패해서 나라를 세웠어요. 그 다음이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입니다. 청나라도 중원 대륙에 들어가서 대륙을 차지했지요. 

 

이렇게 본다면 중국과 동북아 문명권은 사실 피장파장이에요. 동북아의 민족도 중원 대륙에 들어가서 주인공을 해본 게 역사적으로 네 번이나 있었고, 중국의 한족도 동북아 대륙을 차지해서 자기들이 중심 역할을 한 것도 역사적으로 보면 현재까지 세 번 있었습니다. 동북아 제 민족은 주로 동북아에 중심무대를 두고 활동했고, 중국의 제 민족은 주로 중국에서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이 동북아 대륙을 점령하거나 우리가 중원 대륙을 점령한 것은 세 번씩 서로 번갈아가면서 한 역사적 기록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크게 보는 게 좋아요. 지난 5천 년은 우리가 동북아 대륙을 주 무대로 삼아 주도했지만, 지난 천 년 동안은 우리의 활동 공간도 반도에 갇혔을 뿐 아니라 문명사적인 주도권도 놓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나마 또 남북한이 갈려서 더 입지가 좁아졌어요. 반도에 갇힌 활동공간마저 또 절반으로 나뉘어졌으니까요.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비약적 발전 또는 도약을 하려면 사실 최고의 걸림돌이 되는 문제가 분단입니다. 분단 극복 없이는 이 문제를 뛰어넘기가 어려워졌어요. 만약 우리가 통일을 이룩해 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첫째, 인구가 7천만을 넘어서서 8천만 가까이 됩니다. 그러면 인구 규모 면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능가하게 됩니다. 둘째, 영토가 21만 제곱킬로미터가 됩니다. 지금은 영토나 인구의 규모에서 우리가 강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한계가 있는데, 통일을 하면 그런 물적 토대를 구축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인도하고는 사실 아직 규모면에서 경쟁하기 어렵지만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정도와는 충분히 경쟁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되기 때문에 세계 7위권 진입이란 것도 불가능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반드시 된다는 게 아니라 잘하면 이런 가능성은 충분히 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현재 유럽에서는 대러 전략, 아시아에서는 대중 전략을 통해 러시아나 중국이 가진 대륙간 탄도탄을 무력화시키는 MD 전략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드처럼 미사일 공격을 무력화시키려는 전략이에요. 한국이 여기에 참여하게 되면 미중 사이에 끼어서 중국이나 러시아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까지도 KMD라고 해서 방어망은 우리가 자립적으로 추진하면서 미국의 전세계적인 방어망인 MD에는 참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결국 이번에 사드를 배치함으로 해서 이제는 미국의 대중 봉쇄전략의 일부로 우리가 참여하게 되니까 중국과 러시아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것은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으로 작용할 겁니다. 

 


 

그런데 통일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처럼 미중 사이에서 남북이 분열돼서 하나는 미국의 수하로, 하나는 중국의 수하로 분열되어 갈등하며 휘둘리는 게 아니라 통일된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중국이 유리해질 수도 있고, 미국이 유리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캐스팅보드를 우리가 쥐게 되면 한국이 평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미국은 물론 중국도 일본도 동북아에서 어떤 무력 시위도 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한반도의 통일은 한반도의 평화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동북아 전체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어요. 한국의 입지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동북아 전체가 평화지대가 되는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를 크게 봐야 우리가 원래 동북아의 주도 민족인 줄을 알 수 있어요. 한반도가 어떠니 약소 민족이 어떠니 하고 우리 민족을 스스로 규정하는 표현들은 원래 우리 민족을 규정하는 표현이 아니었어요. 최근 천 년 동안 우리의 입지가 좁아진 것을 기초로 해서 우리는 마치 우리 민족이 원래부터 이랬던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바로 알고 역사의 상상력을 가진다면 미래에는 좀 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창조적인 활동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어내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국에도 이익이 되는, 나아가 세계 인민을 이롭게 하는 역할을 해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의 표상을 이렇게 그려보면 어떨까요?

 

이런 미래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지금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이지, 그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고자 이곳에 온 것은 아닙니다. 옛날 일을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현재와 미래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거냐를 생각하고, 이 선택을 위한 기반을 닦아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이곳에 지금 이렇게 와 있는 거예요.

 


 

이런 역사관을 여러분들이 스스로 한 번 정립해보면 좋겠습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우리 민족이 지난 천 년 동안 동북아 대륙의 주인 역할을 못 했지만, 조금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와 같은 북방 민족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동북아 대륙의 주도권을 잡았고, 때로는 중원 대륙까지 제패했습니다. 이렇게 문명적으로 크게 봐서 동북아의 우리의 사촌들도 우리 역사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와 함성으로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와 고구려인들이 천제를 지낸 곳인 국동대혈로 갑니다. 그리고 다시 집안으로 돌아와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5호분5회묘 등 고구려 유적들을 하루 종일 답사한 후 백산까지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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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면서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의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 계좌번호 : 국민은행 578601-01-272869

- 예금주 : (사)좋은벗들 

전체댓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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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등명

요하문명 배달문명, 즉 동북아문명의 주도세력이 조선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자긍심을 가지게 합니다. 평소 우리의DNA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해가 됩니다ㅎ

2016-08-12 09:45:57

허정원

환인 환웅 단군의 자손인 것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동북아의 주역이었던 우리 겨레가 점점 작아져서 이제 이렇게 되었네요ㅠ 조상의 얼을 되살려 강대국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면 통일한국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홍익인간의 정신을 세계에 퍼뜨려 정토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6-08-09 17:40:00

마음이

조선사 편수회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교육을 받은 나
현재도 별반 크게 변했다고 생각은 들지 않지만
우리의 고대사와 독립운동사가 언제쯤 나올지 암울합니다.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황하문명과 다른 그보다 빠른 홍산 요하문명의 진실을 감추는 동북공정세력.
환인 환웅 단군시대의 진실을 빨리 밝혀지기를 기원합니다.
환웅시대의 치우천황등 그 기록이 중국의 고대사에서 간혹 나온다 하니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역사의 말살를 주도했든 일제강점36년, 아직도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고대사중 환인시대등을 기록한 책을 위서라는 한마디로 부정하는 일이 안탑갑습니다.

2016-08-09 11: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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