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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INEB(국제참여불교네트워크)에서 온 동남아 스님들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법보 사찰인 해인사와 비구니 사찰인 운문사를 방문하고 나서 한국 불교와 비구니 제도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새벽 4시, 스님은 INEB 동남아 스님들과 함께 문경 정토수련원 대웅전에서 새벽 예불을 함께 하는 것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 문경 정토수련원 대웅전
새벽 예불 후에는 발우공양에 참석해 대중들과 함께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스님이 “INEB에서 오신 동남아 스님들이 지난 2박 3일 동안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늘은 두북으로 떠나십니다. 대중 여러분들은 스님들께 삼배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라고 하자 공동체 대중들 100여 명이 모두 일어나서 삼배를 했습니다.
스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간 문을 향해 걸어나가자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송했습니다. 동남아 스님들은 “Let’s meet again next time!”이라며 대중들의 환송에 기쁜 표정으로 화답했습니다.
▲ 2박 3일 동안의 문경 정토수련원 일정을 마치고 떠나는 INEB 동남아 스님들
오늘 스님은 INEB 동남아 스님들과 함께 하루종일 시간을 보낼 예정입니다. 오전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를 방문했습니다. 해인사는 가야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주변 풍광이 아주 뛰어난데, 아쉽게도 안개가 많이 끼고 비가 내리고 있어서 풍경을 훤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해인사 곳곳을 누비며 가람 배치와 한국 불교의 역사, 팔만대장경 등에 대해 자세한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 해인사
일주문, 봉황문, 해탈문, 구광루를 지나 경내에 들어서자 높이 쌓은 석축 위에 대적광전이 크게 지어져 있어 그 위용을 보여주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어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아래 넓은 뜰에는 ‘정중탑’이라는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어 시선을 멈추게 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 대적광전을 참배한 후 다시 뒤로 난 계단을 올라가니 팔만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이 나왔습니다. 장경판전의 위치는 마치 비로자나부처님이 법보인 팔만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듯한 모양새 같았습니다.
▲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장경판전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스님의 요청으로 INEB 동남아 스님들은 특별히 출입을 허락받아 안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장경판전 앞에서 스님은 팔만대장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완성한 경판의 총 판수가 81,258매에 달하며, 84,000가지 중생의 번뇌에 대치하는 84,000 법문을 수록했다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릅니다. 1232년에서 1248년까지 16년 간 만들었다고 해요. 이 안에는 테라밧다 경전과 마하야나 경전 등 모든 경전이 다 새겨져 있습니다. 당시 원나라가 한국을 침입했는데 98년 간 저항을 했어요. 그래서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고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야 한다고 해서 왕이 강화도로 천도를 해서 그곳에서 이것을 새겼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강화도라고 하는 섬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조선왕조가 되면서 서울로 옮겼다가 다시 해인사로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여기로 옮긴지가 600년이 되었으니까 이 건물들도 다 600년이 된 겁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경판이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 나무가 썩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단단한 원목을 골라서 썼습니다. 이 원목을 바닷물에 담궈서 몇 년간 두었다가 말렸습니다. 다시 이 나무를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말렸어요. 그런 후 나무를 평평하게 잘 다듬어서 그 위에 글씨를 새겼습니다. 그런 다음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양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붙이고 옻칠을 하고 마무리 손질을 가한 다음, 마지막으로 네 귀를 동판으로 장식했습니다.
보관하는 창고에도 습기가 차면 안 되니까 통풍이 잘 되도록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마주쳐서 순환하는 곳이어야 통풍이 잘 되는데, 여기가 바로 그 위치입니다.
▲ 팔만대장경
바닥에도 습기가 차면 안 되니까 땅에다 숯과 횟가루, 소금, 찰흙을 넣음으로써, 여름철 장마기와 같이 습기가 많을 때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또 건조기에는 습기를 내보내곤 하여서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했어요. 그래서 창고 안의 온도가 바깥 온도보다 약간 낮고, 습도도 약간 낮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모든 말씀들이 기록된 소중한 유산이기 때문에 유네스코에서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옛날에는 글씨를 종이에다 써야 했는데, 이런 경판을 만들고 먹을 칠해서 여러 장을 쉽게 찍을 수가 있게 된 겁니다. 이것을 목판 인쇄라고 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경전을 볼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중국에도 이런 기술이 있었지만 현재는 인쇄물만 남아있고, 목판 자체가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 세계에서 제일입니다.
위치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새로 건물을 지어서 보관하려고도 했는데 현대 건물이 오히려 더 습도 유지가 안 되어서 이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낫다고 해서 계속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해인사를 담마 템플, 법보 종찰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사찰은 역사적으로 크게 세 번 파괴되었어요. 13세기에 몽고의 침략으로 많이 파괴되어서 다시 복원을 했는데, 16세기에 다시 일본이 침략해서 대부분 파괴가 되었어요.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한국 전쟁 때 많이 파괴되었어요. 한국 전쟁 때 이곳에 빨치산들이 숨어 있다고 해서 미군 사령관이 공군 조종사에게 폭격을 명령했는데, 공군 조종사가 불교신자여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해요.(모두 감탄)
지금보다는 못하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인쇄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담마를 접할 수 있게 한 겁니다. 목판 인쇄물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신라 시대 불국사에 있는 탑에서 발견되었어요. 금속활자를 가장 먼저 만든 것도 한국입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만든 것보다 200년이 앞섰어요. 이런 인쇄술은 모두 경전을 인쇄하기 위해서 개발된 것들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하나의 완전한 경판을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손길이 가야 했는지, 그 대규모의 까다로운 공정을 어떻게 하나처럼 완벽히 수행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인사 경내를 한바퀴 돌며 자세하게 설명을 들은 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공양간으로 향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천천히 산책길을 따라 용탑암과 홍제암을 둘러보며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용탑암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분이었던 용성진종조사를 위하여 창건된 이 암자입니다. 스님의 치아 사리탑을 수호관리하기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용탑전(龍塔殿)이라 불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용성진종조사는 법륜 스님의 직계 스승의 스승이기도 하지요.
▲ 홍제암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스님은 사명대사에 대해 소개하면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분”이라고 하자 INEB 동남아 스님들은 무척 놀라워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습니다. 남방불교에서는 승려가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해인사 방문을 마치고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습니다. 운문사는 경북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사찰입니다.
이번 참가한 INEB 동남아 스님들 중 절반이 비구니 스님들입니다. 어느 해보다 비구니 스님들이 많이 참여한 관계로 한국의 비구니 사찰인 운문사에서는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스님과 INEB 동남아 스님들이 경내로 들어서자 운문사 승가대학의 학장 스님인 일진 스님이 뛰어나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 운문사
기다리고 있던 100여 명의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도 가사 장삼을 수하고 나란히 줄을 맞춰 서서 스님과 INEB 동남아 스님들에게 합장 공경의 예를 올렸습니다.
▲ 인사하는 운문사 학인 스님들
스님은 “잠시 후 즉문즉설 시간에 보자”고 인사한 후 사무실로 들어와 운문사 학장스님과 교수스님 등 관계자 분들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서로 소개하는 시간이 끝나자 스님은 운문사 관계자 분들과 INEB 동남아 스님들이 서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준 후 대강당으로 향했습니다. 대강당에서는 운문승가대학 학인 스님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법륜 스님의 특강’이 열렸습니다.
강연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즉문즉설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스님은 학인 스님들의 안색을 살펴보더니 '화색이 다들 좋다'고 하며 반가움을 표한 후 곧바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사전에 질문지가 20여 개여서 “누구든지 가볍게 손을 들고 질문해 보세요”라며 화통하게 대화의 문을 열었습니다.
약 2시간 30분 동안 다섯 분이 스님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스님은 각각의 질문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답해 주면서 학인 스님들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하신 분은 '스님께서는 정규 교육을 덜 받은 것이 유연한 사고를 하는데 도움이 되셨다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학을 공부하실 때 어떻게 공부를 하셨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은 소승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를 모두 관통하는 통합적인 관점에서 공부해 나가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 후 특히 갓 입학한 1학년 과정에 있는 분들에게 격려 말씀을 전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이제 갓 입학한 1학년 과정에 계신 분들은 엎어지든 자빠지든, 일주일을 재우든 안 재우든,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공부를 오늘부터 한번 해보세요. 오늘 스님을 만난 공덕이 있다면 그거예요.
오늘부터 운문사가 망하든지 안 망하든지, 한국 불교가 어떻게 되는지는 놓아두고, 내가 밥 하면 밥 하는 데서 걸리지 않고, 밭 매면 밭 매는 데서 걸리지 않고, 주지스님이 와서 나무 심으래서 심고 있으니까 학장 스님이 와서 ‘거기 누가 나무 심으래! 저기 심어!’ 그러면 또 거기 가서 심고 하는 거예요.(모두 웃음) 또 큰스님이 와서 ‘여긴 잔디 심어놨는데 왜 나무 심어!’ 이럴 때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냐!’ 이러면 경계에 끄달리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냥 ‘심어라’ 하면 심고 있다가 ‘심지 마라’ 하면 놔두고 있으면 되지,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이런 생각을 하면 경계에 걸리는 거예요. 스님들이 싸우면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내버려 두세요.
저도 공부할 때 이런 경험을 했는데 봉암사 부목 생활을 하면서 정말로 성질이 났습니다. 스님들 밑에 들어가서 머슴살이를 한번 해보면 수도승이 아니라 그냥 사장이에요. 이래라 그랬다 저래라 그랬다 하며 그냥 사장이 종업원 부리듯 부리는 거예요. 제가 진짜 머슴이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머슴이 아니면서 머슴 흉내를 내려니까 속에서 불덩이가 자꾸 올라오잖아요. 확 까뒤집어서 ‘너만 중이냐? 나도 중이다!’ 하고 싶지만 그럴 때 ‘어, 내가 또 상에 집착하는구나. 내가 무엇이다는 상을 붙들고 있구나’ 이런 걸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렇게 조금씩 자유로워져가는 경험을 해야 해요. 이게 확 부딪혀야 경험이 되지, 이야기 듣는 걸로는 경험이 안 돼요. 확 집어치워버리고, 다 던져버리고 나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 한번 돌아보는 게 공부예요. 솥을 아홉 번째 걸다가 깨달았다는 구정선사 이야기 알죠? 잘못 걸었나 싶어서 다시 만들어줬더니 또 밟아버리고, 세 번, 네 번 반복하니까 성질이 확 돋을 거 아니에요. 그럴 때 자기가 자기를 봐야 해요. 그런데 그걸 못해 보고 여기서 살고 있다면 그냥 여기가 너무 살기 좋아서 지낸 것뿐입니다. 경계가 확 왔는데 그것을 탁 보고 넘었다면 여기가 좋든 나쁘든 겨울이든 여름이든 이거 하라고 하든 저거 하라고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4년 있는데 밭 매라면 밭 매고 밥 하라면 밥 하지, 밥 하는 게 밭 매는 것보다 특별히 좋을 게 뭐가 있고, 밥 하는 것보다 사무 보는 게 특별히 좋을 게 뭐 있어요?
그러니 소임이 이거 필요하다면 이거 하고, 저거 필요하다면 저거 하면 돼요. 4년 동안 어차피 굴러야 하잖아요.(모두 웃음) 시킨 대로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 일어나는 마음을 보고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져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 자유를 먼저 쟁취해야 해요. 그래야 머리를 기르고 나가도 결혼 생활을 잘 할 수 있고, 직장 다녀도 잘 할 수 있고, 뭐든지 잘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여기 4년을 하고 나면 공덕이 있는 거예요. 속퇴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못 하고 나가면 속퇴 한 걸 숨겨야 해요. 패배자가 되니까요. 패배자가 아니에요. 4년 하다 나갔잖아요. ‘다른 사람은 이 생활을 1년도 못해봤는데 나는 4년을 해봤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요. 나는 거기서 얻은 게 있으니까요.
그렇게 먼저 자기를 좀 챙겨야 해요. 여기에 내가 들어온 목적을 먼저 생각해서 내 것부터 챙겨놓은 뒤에 운문사를 고치든 한국 불교를 고치든 해야 해요. 지금 내 걸 못 챙기고 나도 못 먹고 사는 주제에 남한테 무슨 신경을 쓰겠어요? 이렇게 원래 출가한 목표를 먼저 자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딱 해서 한 고비를 넘겨야 해요. 옛날에는 그걸 넘어야 머리를 깎아줬어요. 머슴살이 3년부터 시키면서 엄청나게 애를 먹여서 다 집어치우고 가도록 해버리고, 어쩌다가 그걸 넘어선 사람만 머리를 깎아줬습니다. 그래서 ‘득도’라고 하는 거예요. 머리 깎은 것은 도를 얻었다는 징표였어요. 그런데 요즘은 스님이 부족하니까 오면 살살 구슬려서 깎아 주잖아요.(모두 웃음)
이렇게 공부를 하셔야 해요. 여러분들은 지금 이럴 거예요. ‘아, 법륜 스님이 우리 편이 좀 돼줘야 하는데 오늘 들어보니까 완전히 학장 스님, 주지 스님 편만 들어주고 있구나. 우리더러 죽은 듯이 지내라는 거냐!’. 그렇게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나예요. 부처도 아니고, 하늘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나라도 아니고, 내가 제일 중요해요. 이게 딱 잡혀야 해요. 목에 힘주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중요합니다.
이게 잡혀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저도 그게 조금이라도 되니까 이렇게 잘 사는 거예요. 제가 욕을 얼마나 얻어먹었는지 알아요?(모두 웃음) 정부 탄압으로 감옥 가고 고문당한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같은 불교로부터 탄압받고 멸시받고 천대받은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런 게 상처가 됐다면 여기까지 못 왔어요. 그런데 그런 게 상처가 안 되는 이유는 ‘욱’하다가 거기서 제가 크게 얻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은혜를 갚아야 해요. 그렇게 밟아줘서 성장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해탈, 열반의 핵심은 행복이에요. 그러니까 생글생글 웃으면서 정진하세요.”
“예!”(모두 박수)
“학장 스님이 성질을 내도 ‘저러시면 병 날 텐데’ 하고 걱정하면서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세요.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걸 시키면 인사로는 ‘알겠습니다’ 하고 안 하면 돼요.(모두 웃음) 말로라도 ‘예’ 하세요. 우리는 거꾸로 결국에는 할 걸 가지고 말로는 자꾸 안 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냥 말로는 ‘알겠습니다’ 하고 못 하면 못 하는 거예요. 어떻게 다 해요? 못 해서 야단치면 야단 좀 맞고, 구박하면 구박 좀 받고, 왕따 시키면 왕따 좀 당하면 됩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자기가 어떡할 거예요?(모두 웃음)
이건 고집하고는 성격이 좀 달라요. 그렇게 해서 여기서의 생활이 내 성장의 거름이 되도록 공부하세요. 고된 생활을 해보는 것도 좋아요. 안 고되면 여기서 못 견딥니다. 너무너무 고되어서 저녁에 눈 감으면 아침에 눈 뜰 때가 되니까 살죠. 방 하나씩 따로 주고 시간 여유도 주면 남자 생각이며 온갖 생각이 다 날 텐데, 지금은 고되니까 그런 생각할 여유가 없잖아요. 이게 나쁜 것 같지만 좋은 거예요. 그렇게 생활 잘 하시기 바랍니다. 얼굴 좀 펴고 살아요.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스님의 격려에 비구니 학인 스님들은 뜨거운 박수와 함성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니 2시간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학장 스님도 “운문승가대학이 생긴 이후로 이렇게 오랜 시간 잠시도 쉬지 않고 강연을 해주신 적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면서 열강을 해준 스님에게 합장을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스님을 비롯한 INEB 동남아 스님들 모두에게 하나씩 건넸습니다. 스님도 사인한 책을 운문사에 기증하며 초청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학장 스님의 안내로 운문사 경내를 한바퀴 돌며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사찰이 워낙 넓어서 동남아 스님들 중 한 분이 “면적이 어느 정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700만평입니다” 라는 대답에 모두들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 경내 곳곳에 정원을 정성껏 만들어 놓아서 아주 아늑하고 정갈한 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구름다리를 넘어 절의 뒤쪽으로 가니 너른 땅에 큰 호수가 있고, 호수 한 가운데에 석탑이 세워져 있는 아름다운 정원도 있었습니다.
곳곳에 사람의 손길이 닿은 정성이 느껴져서 동남아 스님들도 모두 감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도 '돈이 문제가 아니라 정원은 모두 사람이 손으로 가꾸어야 하는데, 이거야말로 대단한 것 같다' 며 소감을 말했습니다.
운문사는 동남아에서 온 비구니 스님들에게 특히 감명이 컸던 것 같습니다. 동남아에는 아직 여성 수행자에게 정식 계를 주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장 스님은 최근에는 출가하는 여성 수행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동남아는 여성들이 비구니가 되고 싶은데 못 되어서 고민이고, 반대로 한국은 여성도 비구니가 될 수 있는데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적어서 고민이고, 상반되는 모습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학장 스님과 함께 경내 구경을 마친 후 운문사를 출발했습니다. 저녁에는 두북 정토수련원에 도착해 어제에 이어서 스님과 함께하는 간담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 두북 정토수련원
스님은 오늘 해인사와 운문사를 구경한 소감이 어떤지를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역시나 비구니 스님들이 운문사를 다녀온 것이 감명 깊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 대화 중에 비구니 팔경법에 대한 문제 제기가 나왔습니다. 비구니 팔경법은 여성을 차별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오랫동안 비판을 받아온 것인데, 이것에 대해 본격적인 토론이 펼쳐졌습니다.
비구니 팔경법은 비구니가 비구를 존중하고 공경해야 할 여덟 가지 종류의 법을 말합니다. △백세 비구니일지라도 새로 계를 받은 비구를 보면 마땅히 일어나 예배해야 하고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거나 비방해서는 안 된다. 또 △비구니는 비구의 죄를 드러내거나 기억해서도 안 되며 △비구로부터 구족계를 받겠다고 청해야 하며 △승잔죄를 범하면 보름동안 마나타를 행해야 하며 △보름마다 비구에게 교수해 주기를 청해야 한다. 이와 함께 △비구니는 비구가 없는 곳에서 하안거를 해서는 안 되며 △하안거를 마치면 마땅히 비구승가 중에서 보고, 듣고, 의심한 것에 대한 삼사를 자자할 비구를 구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스님이 비구니 팔경법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문화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구니 팔경법에 대한 이야기예요. 즉 우리가 ‘붓다 담마(불법)’를 어떻게 받아들일 건가 하는 겁니다. 붓다 담마는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진리라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붓다 담마는 사회나 시대가 바뀌면 바뀔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부처님도 시대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가르침이 그 시대에는 맞지만 다음 시대에는 안 맞을 수도 있다’ 이렇게 받아들일지, ‘붓다 담마는 이 사회에 가든 저 사회에 가든, 이 시대든 저 시대든 항상 변함없는 진리다’ 이렇게 받아들일지를 우리가 먼저 논의해야 합니다.
제가 볼 때는 ‘붓다 담마는 진리이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든 사회가 바뀌든 절대로 바뀔 수가 없다’ 이것이 테라밧다(소승)의 입장이고, ‘붓다 담마는 바뀔 수도 있다. 따라서 사회나 시대가 바뀌면 바뀔 수 있다’라는 입장이 마하야나(대승)의 입장일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부처님 당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지만 한국 불교는 옷을 조금 바꿨잖아요.
그러면 이런 테라밧다의 관점에서 비구니 팔경법의 문제를 한번 살펴봅시다. 분명히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니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비구니 제도가 있어야 테라밧다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후세에 비구니를 없앤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느냐? 그러면 그건 테라밧다가 아니지 않느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잘잘못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이걸 그냥 듣지 않고 이렇게 문제제기를 합니다. 저는 젊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티벳 불교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거기는 ‘린포체’, 즉 환생자라는 개념이 있어요. 이것은 종교로서는 아주 좋은 제도이고 지금도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과연 붓다 담마일까요? 그렇다면 3천 명의 린포체가 있는데 왜 여자는 한 명도 없을까요? 그러면 ‘여자로는 환생이 안 되는데 어떻게 여자가 있겠느냐’라고 합니다. 이게 과연 남녀평등적인 입장이고 사상일까요?
그런 데서 ‘그게 정말 붓다 담마냐?’ 하는 걸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붓다 담마라면 진리여야 하는데 이게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앞으로 100년이 지나고 1000년이 지나도 이게 진리가 될 수 있을까요? 남자만 린포체가 되는 게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데서 우리가 ‘과연 무엇이 붓다 담마냐’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서로 대화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미얀마에서 온 비구니 스님이 미얀마의 현황에 대해 열변을 토했습니다.
“지금 미얀마 상황은 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는 비구니가 될 수 있지만 미얀마에서는 아직도 비구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능력 있는 여성들을 불교가 못 데려오고 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든 사람들을 데려와서 그 능력을 불교에 잘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미얀마 불교에서 많은 능력 있는 여성들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고 운을 띄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란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로 증명할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태국에서 온 비구 스님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진리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진리가 있는데, 궁극적인 최고의 진리가 있고 임시적이고 한정된 진리가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즉 남성 안에도 여성이 있고 여성 안에도 남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 역사를 봤을 때 남자 부처만 있었지, 여자 부처는 없었지 않습니까?”(모두 웃음)
여자 부처는 없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태국에서 온 비구니 스님이 다시 반대 의견을 제기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공유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법화경>에 보면 미래세에 여자 붓다가 올 것이라고 해석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건 대승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테라밧다에서는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 자체가 북쪽의 대승 국가들이 더 많이 발전되어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더 많이 깨어있기 때문에 경전을 조금 더 이런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남방불교 국가들은 아직까지는 사회의 발전 정도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게 아직은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토론은 점점 찬반 논쟁으로 흘러갈 뻔 했습니다. 처음에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예민해져서 언쟁으로 번질 수도 있었는데, 다시 스님이 중재를 섰습니다.
“일단 테라밧다에서는 ‘마하야나는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라는 비불설을 주장하니까 여기서는 우리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테라밧다와 마하야나를 섞어버리면 토론 진행이 안 돼요. 그러니 여기서는 테라밧다만 가지고 이야기합시다.”
스님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자 이 말을 받아서 캄보디아에서 온 비구 스님이 스님의 말에 공감을 표하며 다시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을 경전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수트라에서 그 궁극적인 진리에 대해 ‘네가 그것을 들었다고 해서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람들이 한다고 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열 가지를 나열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마지막 부분이 ‘네가 잘 보고 네가 잘 사유한 것만 진리로 받아들여라’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캄보디아에서 온 비구 스님의 이야기를 이어 받아서 다시 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비구니 팔경법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옛날에는 어땠다’, ‘누가 뭐라고 했다’ 이렇게 뭘 인용해서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그 신앙을 고백하고 자기의 기쁨을 표현할 때 네 가지 비유를 들었어요. 첫째,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심과 같다. 두 번째, 덮여 있는 것을 벗겨 보이심과 같다. 세 번째,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주심과 같다. 네 번째, 등불을 밝혀서 비춰주심과 같다. 이렇게 기쁨을 표현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를 깨우쳐주셨습니다, 바른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라고 부처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최초의 우바새와 우바이가 된 야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고백을 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심과 같고, 덮인 것을 벗겨 보여주심과 같고,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주심과 같고, 어두운 밤에 등불을 비춰주심과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귀의합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고백입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들을 칭찬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삼보에 귀의한 불자는 다섯 가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처님께서는 직접 당사자를 바로 설득했지 어떤 권위를 갖고 누른 게 없습니다. 그래서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또 ‘나의 손 안에 숨겨진 비밀은 없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어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어떤 의문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옛날부터 그래 왔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이렇게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뭐든지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팔경법이 과연 담마라고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일단 문제를 던져야 합니다. 진리라면 그대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로 받아들여질까요? 아니라면, 왜 이런 것이 붓다 담마 안에 들어와 있을까요? 그렇다면 후세에 기록하는 사람이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팔경법을 오직 글자대로만 받아들일 게 아니라 ‘이게 무엇을 상징하는 거냐? 지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냐?’ 이런 관점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때의 모습에서도 그런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경전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그대로 진실일까요? 진실이 아닐까요? 둘 다 아니라면 제3의 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고도 합니다. 정말 걸었을까요? 아니면 거짓말일까요? 아니면 그것이 무엇을 상징한다고 봐야 할까요? 이럴 때 이것이 종교적으로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담마라고는 하기 곤란합니다.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는 것은 인도의 전통 문화에서 보면 크샤트리아, 즉 왕족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힌두 문화에서는 브라만은 신의 입에서 태어나고 크샤트리아는 신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또 힌두 문화에서 여섯 발자국은 육도 윤회를 상징합니다.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났다, 즉 해탈과 열반을 증득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붓다 담마가 진리라고 믿는다면 붓다 담마는 우리가 여기서 검토해서 우리 모두가 다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걸 어떤 권위로 ‘이러저러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붓다 담마는 아주 분명한 거예요. ‘덮인 것을 벗겨 보인다’라는 건 누구나 ‘아, 그러네’ 하고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출가한 지 100년 된 비구니가 오늘 출가한 비구에게 절을 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그러면 그 전의 부처님 말씀하고 모순이잖아요. 우바리 비구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우바리는 석가족의 머리를 깎아주는 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석가족 왕자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하겠다며 우바리에게 머리를 깎으러 왔어요. 우바리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자라면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는데 왜 이걸 다 버리고 출가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러다 ‘왕자들도 출가를 하는데, 계급도 천하고 가진 것도 없는 내가 세상을 떠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바리는 바로 부처님을 찾아가 출가할 것을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라, 비구여’ 하고 바로 승낙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7명의 석가족 왕자들은 머리를 깎고 사리푸트라에게 가서 출가를 했습니다. 사리푸트라에게 출가를 허락받은 뒤에 부처님께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7명의 스님들은 먼저 출가한 스님들에게 절을 하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와서 인사를 하려고 딱 보니까 어제 자기들의 머리를 깎아줬던 천민이었어요. 그래서 고개가 숙여지지 않아서 머리를 들고 있었어요. 그때 부처님께서 ‘우바리에게 절을 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세상에는 네 개의 계급이 있다. 그러나 내 법 안에서는 하나로 평등하다. 세상에는 네 개의 큰 강이 있다. 그러나 바다에 가면 하나가 된다.’
그러면 카스트를 뛰어넘는 이 가르침과 남자 여자를 뛰어넘지 못하는 팔경법이라는 가르침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붓다 담마의 가르침이 진리라면, 앞에서 보았듯 카스트를 뛰어넘었다면 성차별도 뛰어넘어야 할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다는 테라밧다에서 왜 비구니 제도를 없앴을까요? 왜 스리랑카는 테라밧다인데 출가한 스님들 속에서도 카스트를 가지고 차별을 할까요? 출가해서 승가의 구성원이 됐는데 왜 여기에 지금도 카스트, 즉 신분의 차별이 존재할까요?
이런 문제를 우리가 충분히 극복하지 못하면 앞으로 서구에 불교가 들어갔을 때나 젊은이들이 문제제기를 할 때 ‘붓다 담마가 진리’라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런 도전을 우리가 어떻게 넘어설 거냐’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스님의 명료한 설명에 INEB 동남아 스님들은 그제서야 모두 수긍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물론 더 토론할 여지가 있겠지만 일단 큰 틀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후 다음 주제로 대화를 넘겼습니다. 이후에는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교류 협력을 돕고 있는 스리랑카의 여성 활동가의 고민이 제기 되면서 즉문즉설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분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많았는데, 스님은 이 분이 조금이라도 깨우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준 후 오늘 간담회를 마쳤습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 동남아 스님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내일도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야 해요. 잠이 많이 부족하실 텐데, 부족한 잠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주무세요.”라고 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동남아 스님들도 처음에는 힘들다며 탄성을 지르긴 했지만, 스님의 말을 흔쾌히 받아 안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가고자하는 높은 학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2시에 경주를 출발해 6시에 서울에 도착한 후, 오전 10시 30분부터는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즉문즉설 강연이 있습니다. 다시 대구로 이동해 저녁 7시부터는 대구어린이회관 꾀꼬리극장에서 청년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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