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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후에 부산 중구 남포동에서 열렸던 즉문즉설 강연에 이어서 저녁 7시에는 포항에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부산 강연을 마치고 나온 시간이 오후 5시. 포항까지 부지런히 달려도 겨우 제시간에 맞춰 도착할 것 같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따로 할 겨를이 없어 이동하는 차 안에서 도시락으로 식사를 대신했습니다.
▲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스님
포항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며칠 기온이 갑자기 올라서 마치 여름 같은 더위가 이어졌는데 대지에 촉촉이 내리는 비가 아직은 봄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포스코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포항문화예술회관은 비 덕분에 먼지를 씻은 양 정갈했고, 곳곳에 아기자기한 꽃들이 방문객에게 미소를 띄우고 있었습니다.
오늘 강연을 위해 포항정토회에서 나온 봉사자 75명은 일찌감치 강연장에 집결해 준비를 했습니다. 도서판매, 안내팜플렛, 내부와 외부 안내, 좌석표 배부, 주차안내 등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많은 분들이 행복을 얻어가기를 바라는 마음과 설레임이 봄날 새순처럼 피어나는 것 같은 모습이였습니다.
90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무대 위로 오르자 대중들은 큰 함성과 박수로 스님을 환영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저녁은 드셨어요?”라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질문을 더 많이 받기 위해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총 여섯 분이 질문을 했는데요. 오늘은 그 중에서 고2 아들이 이혼한 전 남편과 닮은 모습을 보여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이 드는데 아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물었던 여성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문답이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그 내용은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스님께 질문하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가 없어서, 지금도 도망가고 싶지만 크게 용기 내어 질문해 봅니다.
저는 18년간의 결혼 생활을 4년 전에 정리하고 지금은 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고2 아들과의 갈등 때문에 이혼 후 사라졌던 화가 다시 살아나 숨을 쉴 때마다 저려옵니다. 중3 때 시작한 아들의 사춘기 때문에 저도 많이 당황했지만, 그럼에도 정토회를 다니며 제 감정을 조절했고, 힘들어하는 아들을 이해하려고도 노력했습니다. 아들은 애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기 일을 잘하여 칭찬을 받으며 자랐는데, 물론 지금도 행동이 많이 거칠거나 무질서하게 생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엄마를 무시하고, 급기야는 저더러 자기 틀에 맞춰 고치라고 합니다. 저는 아들의 그런 태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자꾸 헤매다가 지난 주말에는 결국 언쟁을 했습니다. 현재 아들은 엄마에 대한 거부감이 분명하고, 제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틀에 맞지 않게 말을 하면 그 즉시 표시를 합니다. 저는 엄마로서 당당하기보다는 힘든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제가 오히려 아들한테 맞추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애쓰다 보니까 오래 가지 못하고 ‘내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하면서 서운해집니다.
어제 저녁에 ‘스님께 질문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지금 이 문제가 아들과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들의 행동에서 남편의 모습이 보여질 때마다 저는 많이 불안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저와 전 남편 사이에 있었던 상황이 저와 아들 사이에도 생길 것 같아 두려운 마음도 들고, 나중에 내가 덜 힘들려면 ‘아들한테 정을 떼야 하나’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스님께서는 항상 ‘남편에게 참회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전 참회를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야 비로소 저 스스로에게 왜 하기 싫은지를 물어봤고, ‘너무 무서웠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무서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눈물이 흘렀고, 예전에 제가 많이 외로웠던 그 상황을 생각하기가 싫었습니다. 제가 아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님의 답변 부탁드립니다.”
“남편은 나와 다른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이렇게 다 다릅니다. 그래서 그 갈등이 다 남편 책임이라고 할 수가 없고 내 책임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질문자는 ‘내가 왜 참회를 해야 되느냐? 참회를 해야 된다면 쌍방 과실로써 너도 절반은 참회해야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저도 그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질문자가 낳았지, 데려온 자식이 아니잖아요?”
“예.”
“질문자가 자기 뱃속에서 만들어서, 낳아서, 젖을 먹여서, 질문자의 품에서 키웠잖아요. 그럼 그 아이의 모든 행동은 다 질문자를 본받지, 다른 사람을 본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질문자의 문제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한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늘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누가 낳았니?’
‘제가요.’
‘누가 키웠니?’
‘제가요.’
‘그럼 누구 닮았겠니?’
‘저요.’
그러니까 아들의 모습은 질문자의 모습입니다. 아들의 모습에서 문제가 발견됐다면 그건 질문자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자신을 모르지요. 그래서 자기가 다 옳은 줄 아는 데, 질문자가 거울을 한번 보세요. 질문자가 거울에 딱 비추인 모습이 아들로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싫다면 질문자가 싫은 거예요. 그게 잘못됐다면 질문자가 잘못된 거예요. 그게 저항을 한다면 질문자가 저항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은 마땅히 질문자가 받아야 할 과보입니다.
남남끼리 만나서 서로 사랑했지만 갈등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을 때도 그 헤어지는 과정에는 아픔이 있는 법인데, 이건 제 몸으로 낳아서 제가 키워서 제 품에 있던 게 저항을 해서 갈등이 생겼기 때문에 그 아픔은 부부 간의 갈등에서 생긴 아픔보다 10배 더 큽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과보를 나중에 안 받으려면 남편에게 참회를 해서 미리 그런 인연의 씨앗을 없애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참회는 죽어도 하기 싫다니까 10배의 과보를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10배는커녕 2배도 아직 안 받은 것 같네요. 아들이 조금 더 크면 10배를 받을 겁니다. 질문자가 그 인연의 과보와 원리만 알아도 이것은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는 10배라고 했는데 아직 10배는 안 된다. 아직 2배 밖에 안 된다’, ‘고통이 크기는 커도 아직 3배 밖에 안 된다’, ‘고맙다. 내가 10배를 받아야 되는 데 네가 아직 나한테 2배밖에 안 주니까 우리 아들 역시 착하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아이의 행동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예상만 할 수 있어도 사실은 그 일이 일어나도 큰 문제가 안 생겨요. 10배를 받으려고 각오를 했는 데 2배밖에 안 오니까 고맙잖아요.”
“예.”
“10배를 받아야 되는데, 안 오기를 원하는 것은 심보가 나쁜 거예요. 빚을 졌으면 빚을 갚아야지 그것을 하나도 안 갚겠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이자를 쳐서 좀 갚아야지요. 누군가가 빚을 받으러 오면 ‘왜 돈 달라고 그러느냐’ 라고 악 쓰지 말고 ‘그동안 잘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이자 쳐서 돈을 갚아야 되는 것처럼 항상 아이에게 ‘고맙다. 고맙다. 그래도 내가 받아야 할 과보에 비해서는 절반도 안 되네. 고맙다. 그래도 네가 그만한게 다행이다’ 이렇게 자꾸 기도를 하세요. 그럼 큰 문제 없어요.
귀가 했을 때 아들이 밤 10시에 들어오면 ‘네 아버지는 12시에 들어왔는데, 너는 10시에 들어오네.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남편은 내가 뭐라고 잔소리를 하면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래도 너는 말로만 대드는구나. 고맙다. 네 아버지가 한 것 10배를 해도 내가 다 받아야 되는데 그래도 네 아버지보다는 아직 적다. 고맙다’ 이렇게 자꾸 기도를 해야 돼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들이 아침에 안 일어나도, 안 일어날 뿐이지 일어나서 밥상을 걷어차는 건 아니니까 그것도 고마운 일이고, 밥상을 걷어차야 되는데 반찬투정만 해서 고맙고, 학교를 안 가야 되는데 학교라도 가 주니까 고맙다고 생각하면 아들한테 잔소리 할 게 없지요. 비위를 맞출 것도 없고요.
왜 엄마가 되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아의 비위를 맞춰요? 엄마는 늘 아이한테 당당해야 돼요. 아이한테 비굴하게 보이면 안돼요. 그럼 아이도 나중에 비굴해 져요. 항상 당당하되 보살펴는 줘야지요. ‘고맙다. 내가 받아야 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너 키울 때 심보를 생각하면 진짜 네가 잘못돼야 되는데, 그래도 네가 타고 난 복이 있었는지 그 정도하고 마네.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면 당장 지금부터 아무 걱정이 없어지지요. 질문자는 아이하고 싸울 때 주로 무슨 일로 싸워요?”
“지난 주말에 아들이 저한테 다 고치라고 하더라고요. 제 나름대로는 아들을 이해하고, 아들이 힘든 상황인 걸 분명히 아니까...”
“질문자가 아들한테 자꾸 잔소리를 하니까 아들이 그런 말을 했겠지요. 질문자가 가만히 있는 데 아들이 그런 말을 했겠어요? 질문자가 가만히 자는 데 와서 ‘고쳐라’ 라고 하겠어요? 그렇게 받아들이니까 남편하고도 싸울 수밖에 없었지요.”
“예, 아들이 저한테 용돈을 가불해 달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는데, 저는 가불한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 건지 아들이 얘기라도 하면 좋겠더라고요. 그런데 아들이 짧게 ‘줘!’라고만 했거든요.”
“그럼 질문자도 짧게 ‘없다’라고 하면 되잖아요. (모두 웃음) 질문자가 바보네요. 자기 돈인데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되잖아요.”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네요.(모두 웃음) 아들의 문자메시지 때문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집에서 돈을 찾아 아들한테 주면서 ‘엄마가 이번에는 주는데 다음에는 어디에 어떻게 쓰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라고 했습니다.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웃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바보라는 거예요. 남편한테도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남편하고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요. 아이가 문자로 ‘돈 줘’ 라고 보내면, 질문자는 ‘없다’ 라거나 ‘못줘’ 라고 보내고, ‘엄마, 좀 주세요’ 라고 보내면 ‘생각해 보고’ 라고 보내고, 또 ‘엄마 좀 주세요’ 라고 하면 ‘용건을 말해’ 라고 보내면 되지요. 질문자가 돈을 쥐고 있는 갑의 입장인데 왜 을한테 쩔쩔 맵니까? 그러니까 아들이 엄마를 만만하게 보는 거예요.”
“그런 것 같습니다.”
“예, 질문자가 바보같이 사니까요. 그리고 아이 마음에는 이미 질문자가 남편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형성된 저항감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질문자를 무시했듯이 아이도 그런 걸 다 봤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마음이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아이가 그걸 다 보고 엄마를 어떻게 하면 된다는 걸 알고 저를 대하는 것 같아요.”
“그건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시장에 가서 사람들이 어떻게 물건값을 깎는지 다 살펴보고 본받아서 하잖아요. 그게 세상을 배운다는 거잖아요. 아이한테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바보가 됐겠지요. 질문자는 계속 바보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럴 때는 아들을 보면서 ‘우리 아들이 똑똑하네. 그걸 금방 배웠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모두 웃음과 박수)
아이들의 특징은 ‘따라 배우기’이니까, 아들도 당연히 따라 배운 거예요.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존중하면 그런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여자를 존중하고, 남편이 여자를 무시하는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여자를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게 그 아이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아이는 배운 대로 하는 거니까요. 미국에서 자란 아이가 한국에 온다고 갑자기 한국말을 할 수 없어요. 한국에서 1년 살고, 2년 살면서 한국말이 조금씩 늘다가 나중에는 능숙해지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얘기했듯이 ‘우리 아들 똑똑하다. 배움이 빠르네. 한 번 보고 딱 배웠나 보네’ 이렇게 생각하면 그게 화날 일이에요? ‘애들 보는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옛말이 맞구나. 아이들은 그저 본대로 배워서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요. 아이가 본대로 배워서 하는데 질문자는 왜 그걸 기분 나쁘다고 해요? 아이가 어렸을 때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았겠어요? 그저 ‘엄마를 다루려면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하고 배워서 나오는 행동인데요. 만약 아들이 결혼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 마누라한테도 똑같이 하겠지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이 ‘저 집 내력이 저렇구나. 저 집 남편이 저러더니 그 아들도 똑같이 하는구나’ 하는 겁니다.
아이가 그렇게 배운 건 누구 때문이겠어요? 엄마가 그렇게 배우도록 한 거예요. 엄마가 남편한테 항상 공손하게 ‘여보, 알겠습니다’ 그랬다면 아이는 그런 공손한 태도를 배웠겠지요. 예를 들어 남편이 술주정을 한다고 아내가 악을 쓰게 되면 그것은 곧 부부싸움이 되니까 아이는 그 주정하는 모습을 그대로 배우는 겁니다. 그러나 남편이 술주정을 해도 아내가 ‘여보, 오늘 술 드셨네요’ 하면서 등을 두드려 주면서 재우면 아이는 ‘우리 엄마 아빠는 사이가 참 좋구나’ 하게 되니까 술주정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아들한테 바로 가는 게 아니라 항상 엄마라는 거울에 비춰서 가는 겁니다. 아버지의 모습은 엄마의 거울에 반사되어서 아이에게 가기 때문에 엄마가 그걸 안 비춰버리면 아이는 몰라요. 그런데 질문자는 남편의 행동을 자기 거울에 반사해서 비췄기 때문에 아이가 그대로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질문자가 책임을 져야지요. 아무튼 질문자의 아들이 똑똑하네요. (모두 웃음)
많은 엄마들이 아이한테 ‘너는 네 아버지 술주정은 배우지 마라’ 라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안 배우겠어요? 엄마가 맛있는 걸 늘 숨겨두고 혼자 먹으면서 ‘여기 맛있는 거 있으니까 너는 먹지 마. 이건 엄마 혼자 먹는 거야’ 라고 얘기해 보세요. 아이가 엄마 없을 때 금방 찾아서 먹습니다. 그것도 못 찾아서 먹는 아이는 바보입니다. 나쁜 아이가 아니고요.
지금 질문자는 아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질문자는 남편과 갈등을 일으키며 살았던 그 과보를 자식을 통해서 2배, 3배, 아니 10배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비로소 ‘아, 내가 잘못했구나.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구나. 내 성질대로 살면 문제가 되는구나’ 라고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사실은 남편하고 갈등을 일으키면서 성질을 바꿨어야 했는데, 질문자는 헤어지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제 성질 안 고치고도 살 것 같았겠지만 결국 아들이 애를 먹이는 거예요. 아들은 남편처럼 그렇게 딱 떼어내지도 못할 거고, 그렇게 딱 떨어지지도 않을 겁니다. 거머리처럼 딱 붙어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살 길은 스스로 성질을 바꾸는 길밖에 없습니다. 아들이 엄마한테 ‘고쳐라’ 라고 했다면서요? 아이가 똑똑하네요. 아이 말이 진리예요. (모두 웃음)
질문자가 딱 받아들여서 지금이라도 바꾸겠다는 태도를 취하면 가볍게 과보를 받으면서 살 것이고, 질문자가 남편에게 저항했듯이 아들에게도 저항을 해서 문제를 풀거나 버릇을 고치는 쪽으로 간다면 무거운 과보를 받으면서 살 거예요. 남편과는 헤어지기라도 할 수도 있지만 아들과는 어떻게 헤어질래요?”
“그런데 스님, 아들과 이런 상황이 될 때마다 아들은 자꾸 ‘그럼 나를 아빠한테 보내라’ 라고 합니다. 제가 보내겠다는 말도 안 했는데요.”
“그럼 보내세요.”
“그래서 제가 그동안은 아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렇게는 안 한다’ 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래. 그럼 가거라’ 라고 했더니 아들이 ‘알았다’고 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지금 안 가고 집에 있기는 있는데요.”
“가겠다는 아이한테 ‘가라’고 말하는 게 지금은 수월한 것 같지요?”
“아니요. 그게 또 아들한테는 상처가 될 것 같아서 걱정됩니다.”
“당연히 상처가 되지요. 그래서 아들은 ‘엄마는 나를 귀찮게 여기는구나’ 싶어서 남편한테 안 가고 엄마한테 붙어서 보복을 할 겁니다.” (모두 웃음)
“그럴 때는 제가 어떻게 답변을 하는 게 아들한테 도움이 될까요?”
“아이가 ‘아빠한테 가겠다’고 하니까 질문자가 ‘가라’고 말하는 건, 아이를 위해서예요? 질문자가 힘드니까 그러는 거예요?”
“아들이 저를 떠보는 식으로 말을 그렇게 하니까요.”
“그건 남편이 자꾸 ‘이혼하자’ 라고 했던 말과 같은 거예요. 남편이 이혼하자는 건 진짜 이혼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네가 무릎 꿇고 좀 빌어라’는 뜻에서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던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는 ‘그래. 이혼하자!’ 라고 하고선 헤어졌지요?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이 아빠한테 가겠다는 건 진짜 가겠다는 게 아니라 ‘엄마가 잘못했다’ 하는 말을 듣고 싶어서인데, 질문자는 ‘가라!’라고 한 거예요. 질문자는 아들하고 싸워서 이겨보겠다고 그러는 건데, 아들한테 이겨서 뭐할 거예요?”
“그럼 그럴 때 구슬리는 게 더 나은 건가요?”
“엄마가 돼서 왜 아들을 구슬려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빌어야지요.”
“아들한테요?”
“그럼요. 아들이 ‘아빠한테 간다’고 하면, 속으로는 보내고 싶더라도 ‘엄마는 널 사랑하는데, 네가 가버리면 엄마는 아들이 보고 싶어서 어떻게 살지?’ 라고 말해줘야 돼요. 아들이 간 뒤에 혼자 웃더라도 그렇게 말해야 된다는 거예요.” (모두 박수)
“제가 계속 그렇게 말해 왔어요. 그런데 아들이 자꾸 그렇게 말하니까요.”
“아들이 자꾸 그렇게 말하면 질문자도 자꾸 그렇게 말하면 되지요. 아들이 똑같은 말을 자꾸 하면 질문자도 똑같은 말을 자꾸 하면 되지요. (모두 웃음)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잖아요. 질문자의 아들이 지금은 그 정도일지 몰라도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집 나간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콱 죽어버린다’라고 할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아들한테 ‘그러면 안 되지’ 하겠지만, 아들이 자꾸 그런 말을 한다고 ‘그래, 팍 죽어버려라’ 라고 할 거예요?”
“아니오.”
“그러다가 만약 아들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할래요? 지금 질문자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스님 말의 뜻을 못 알아듣고, 스님이 물어도 즉시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왜 말이 안 나올까요? 아이하고 싸워서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이하고는 싸울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 사랑하는 자기 아이랑 싸워요? 이겨서 뭐하려고요?
왜 제 자식한테 어미가 비굴하게 싹싹 빌고 그래요? 질문자는 싸워서 이기려다가 안 되면 싹싹 빌고, 또 싸워서 이기려다가 안 되면 싹싹 빌고, 그렇게 교만했다 비굴했다, 교만했다 비굴했다 그러니까 아이는 정신분열이 일어날 정도로 힘들게 되는 거예요. 아이가 뭐라 그러든 엄마는 ‘그래, 그래, 알았다, 알았다’ 이러면서 당당해야지 아이 말에 왜 그렇게 끌려 다녀요?
그리고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니까 뭐든지 좋게 얘기해 줘야지요. 예를 들어 아들이 ‘엄마, 나 아빠한테 갈래’ 그러면 ‘왜? 아빠가 보고 싶니?’라고 대화를 해야지요. 그런데 질문자는 남편을 미워하니까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질문자가 진짜 남편에 대해서 참회를 해서 ‘내가 잘못해서 헤어졌구나. 내가 헤어져서 자식들이 고생하는구나’ 싶으면 아이가 ‘아빠한테 갈래’ 했을 때 ‘아빠가 보고 싶니? 엄마가 잘못해서 너희가 아빠랑 헤어져 사니 얼마나 아빠가 보고 싶겠니? 며칠 다녀오너라’ 하고 얘기하고 용돈도 주면서 ‘아빠한테 갈 때 빈손으로 가지 말고 과일이라도 좀 사가거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아들이 할머니 댁에 간다고 하면 질문자는 그렇게 말할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남편이 미우니까 그렇게 말을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 남편에 대한 미움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들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가 없는 겁니다. 용돈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 아빠 집에 간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그러니 질문자가 아들과 근본적으로 문제를 풀려면, 첫째, 남편한테 참회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다 맞는 얘기이네요. 당신한테 내가 악심을 품었더니 그게 멀리 안 가고 아들한테로 와서 그대로 저한테 돌아오네요. 제가 어리석어서 하나하나 악심을 갖고 따지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둘째, 아들한테 이런 마음을 가지세요.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를 생각하면 네가 나한테 10배로 해야 되는데, 그래도 엄마라고 나한테 그렇게 안 하는 게 참 고맙다. 아들아, 참 고맙다.’
그러면 아들이 어떤 말을 해도 질문자가 태연하게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세요.”
“아들과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는 스님 말씀과 같은 말이 잘 생각이 안 나요.”
“남편에게 참회를 하면 그런 말이 잘 생각이 날 겁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미움이 없으면 아들과도 대화가 자연스럽게 될 거예요.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해도 과보로 받겠다는 마음을 내고, 그저 고맙게만 생각하면 더 자연스럽게 대화가 될 거예요. 스님은 지금 아무런 미움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남편과 살면서 아주 긴 시간동안 너무 많이 억압을 받아서 억울한 마음이 많이 쌓여있거든요.”
“질문자도 지금 억울한 마음이 쌓여서 안 풀린다는 것처럼, 아이도 지금 엄마한테 억울한 마음이 쌓여 있는 겁니다. 아이가 엄마한테 대든다는 건 아이도 엄마로부터 심리적 억압을 받았다는 거예요.
질문자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어서 부모한테 대들면 ‘나는 아이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동안 아이는 심리적 억압을 받았나 보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엄마가 야단치면 속으로는 ‘그건 아닌데, 너나 잘해라’ 라고 해도 겉으로는 ‘예’ 하거나, 말을 하기 싫으면 그냥 따릅니다. 엄마 입장에서는 아이가 그러는 게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그런데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달라져요. 사춘기는 어른이 되는 과정이니까 당연히 저항을 밖으로 표현하거든요. 그럼 초등학교 때는 저항심이 없었을까요? 있었어요. 저항심이라는 게 사춘기가 되었다고 갑자기 생긴 게 아니고, 그 동안 표현을 안 하다가 사춘기 때부터 표현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 질문자가 중심만 딱 잡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질문자가 엄마로서 아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지극하면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남편은 아이의 아버지이잖아요. 아이의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면 아이가 나쁜 사람의 자식이 되잖아요. 아이의 아버지가 용서도 못할 나쁜 사람이니까 아이는 진짜 나쁜 사람의 자식이 된단 말이에요. 그런 마음이 어떻게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이예요? 부부 관계로는 나와 좀 안 맞았지만, 아이의 아버지로는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줘야 합니다. 내가 잘 맞춰주지 못해서 그렇지 그 분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마음이 들어야 아이도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남편에게는 ‘내가 고집이 세서 당신의 비위를 다 맞춰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렇게 하고, 아이가 뭐라고 해도 ‘아이고, 너희 아빠가 화를 내는 것은 엄마가 아빠의 성질을 건드려서 그래. 그러니 드러난 현상만 보지 말거라. 너희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야’ 이렇게 얘기해 줄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들어야 이렇게 말이 나오지 진심이 아니면 그런 말이 안 나와요. 그래야 내 아이도 훌륭한 아이가 될 수 있어요. 엄마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라도 아이의 아빠 또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줘야 하는 겁니다. 그럴 정도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 질문자에게는 없잖아요. 그저 내 잘났다는 생각에 자기 성질 못 이겨서 남편의 비위도 못 맞춰주고, 자식에게도 못 맞춰주고, 그렇게 계속 살면 나중에 혼자 외로워지죠 뭐.
그러면 또 이렇게 물을 거예요. ‘그러면, 스님은 할 수 있어요?’ 네, 저는 못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못하는 줄을 미리 알고 아예 결혼을 안 했잖아요.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차이입니다. (모두 웃음)
못 하는 건 못한다고 미리 아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현명한 겁니까. 질문자는 부부 생활도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뭣 때문에 결혼을 했고, 아이도 사랑할 줄 모르면서 왜 아이를 낳아서 키우긴 키웠어요?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안 지고 있잖아요. 결혼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 되고, 자식을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되는데, 지금 질문자는 남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아이한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겁니다. ‘아,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되겠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가져도 어떻게든 훌륭하게 키우려고 하고, 지적으로 부족한 아이를 가져도 어떻게든 훌륭하게 키우려고 그러는데 ,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왜 아이와 싸우고 그래요? 아이가 좀 부족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훌륭하게 키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야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 질문자는 사랑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네. 스님 말씀을 듣고 나니 저도 지금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남편에게 참회를 하겠습니다.” (모두 박수)
“제가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아직 벽에 금도 안 간 것 같아요. 참회가 과연 될까요? 참회를 하다보면 성질이 나서 염주를 그냥 짚어 던지면서 ‘내가 미쳤나. 니가 나한테 참회를 해도 용서해줄까 말까 한텐데 내가 왜 그 인간한테 참회를 해야 하나?’ 하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겁니다. 그 고비를 넘겨야 해요.
게다가 오늘부터 참회 기도를 시작해서 아이가 더 고분고분해지면 이 고비를 쉽게 넘길 수가 있는데, 오늘부터 100일까지는 아이가 지금보다 10배 더 애를 먹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마음이 안 들어요. ‘기도가 잘못 되었나, 기도를 하니 더 설치네’ 이렇게 됩니다. (모두 웃음)
이 과정을 이겨내야 해요. 그래서 제가 ‘10배의 과보를 받는데 아직 2배 밖에 안 받았네’ 하면서 이걸 이겨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야 고비를 넘길 수 있어요. 기도하면 할수록 업장이 더 날뛰어요. 그래서 대부분 기도를 하다가 그만두게 됩니다. 업장도 자기 나름대로 살아야 하니까요. 내 입장에서는 업장을 소멸하면 좋지만, 업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죽게 되니까 안 죽으려고 발버둥을 쳐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질문자는 오늘부터 남편에게는 ‘여보, 제가 당신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당신이 화가 났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되고, 아이에게는 ‘그만큼이라도 해주니 고맙다. 엄마가 잘못한 것에 비해서는 니가 진짜 잘한다. 고맙다’ 이렇게 감사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아이고, 고맙다’ 이렇게요. 고마운 마음을 가지더라도 내 형편이 용돈 10만원을 줄 형편밖에 안 되는데 100만원을 달라고 하면, ‘아이고, 미안하다’ 하면서 10만원만 주면 됩니다. 100만원 달라고 한다 해서 돈을 빌려와서 100만원을 주지 말고요. 그냥 10만원만 주면 되는 겁니다. 때려 부수고 해도 ‘아이고, 미안하다. 엄마가 돈이 없어서 그렇다. 이거라도 써라’ 이러면 되는 거예요 즉 흔들리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엄마로서는 딱 중심을 잡고 살아야 돼요. 그러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는 아이의 행동을 문제삼지 말고요. 그렇게 매일 기도를 해서 100일이 넘고 고비를 넘겨야 아이가 어떻게 하든 스님이 말한 내용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가 스님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 문답이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마침내 질문자는 그 뜻을 이해하고 밝은 미소를 내비쳤습니다. 이 모습을 본 청중들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주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을텐데요. 스님의 답변은 무엇이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것인지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해준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5명이 더 질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세 아이의 엄마인데 막내인 아들을 낳기 전에 딸이라는 이유로 유산시킨 경험으로 생긴 죄책감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물었고, 두 번째 질문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이 진행되는데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지 물었고, 세 번째 질문자는 초발심의 ‘초’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네 번째 질문자는 갑자기 연락을 끊은 친구가 연락이 왔는데 과거의 나쁜 기억이 떠올라서 괴롭고, 서울에서 포항에 온지 5일 되었는데 아직 방을 못 구했다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식구들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어서 본인과 종교가 다른 것 때문에 죄의식을 느낀다며 이런 죄의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질문했습니다.
때로는 준엄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질문자의 형편에 맞추어 진행되는 답변을 들으며 청중들은 시간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2시간 10분 동안의 강연이 끝나고 마칠 시간이 되자 스님이 정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질문자 중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질문한 분도 있었고, 청중들 중에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스님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자기 권리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우리가 찾아야 하는 권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권리는 행복할 권리예요. 그래서 늘 웃고 살아야 돼요. 남들이 ‘너는 뭐가 좋다고 웃노?’ 그러면 이렇게 도로 물어야 돼요. ‘안 웃을 일이 뭐가 있노?’ 라고요. ‘안 웃을 일이 뭐가 있는지 한 번 말해봐라’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아마 대답을 못할 겁니다. 만약 ‘한쪽 다리를 다쳤다’ 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해야 해요. ‘다리 다친 게 왜 울어야 할 일이니? 나머지 한 쪽 다리는 안 다친 것을 생각해봐라. 두 다리 다 다치는 것보다 한쪽 다리만 다치는 것이 더 낫지 않냐? 이렇게 생각하면 웃을 수 있잖아.’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겁니다.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이 말을 잘 아시죠? 매사에 감사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주님,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되고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해요.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늘 가지면 누가 행복해질까요?”
“내가 행복해져요.”
“그런데 앞에서 질문한 분들처럼 맨날 상대를 미워하고 성질을 내면 자기만 괴로운 거예요. 저렇게 사니까 얼마나 인생이 피곤해요. 어릴 때는 부모와 싸워서 힘들었고, 그래서 부모로부터 도망가려고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이 인간하고도 또 싸워서 못 살겠다고 하면서 집을 나왔더니 이제는 자식과도 싸워서 못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인생이 한탄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왜 이러노’ 하면서 점을 보러 가게 되는데, 인연 과보를 알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살아있는 것부터가 얼마나 감사한 일이예요? 남편이 안 죽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좋은 일이예요? 그러니 남편도 고맙고요. 아이들이 안 죽고 학교에라도 다녀주는 것만 해도 고맙고요. 세월호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아침에 가방 들고 나가는 아이가 없다는 것이예요. 이걸 생각하면 지금 아이가 공부 잘 하고 못 하고가 뭐가 중요해요? 아침에 가방 들고 나가고, 저녁에 가방 들고 들어오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요.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사는 게 행복해요. 행복하게 사십시오.” (모두 박수)
온갖 사연을 가진 질문자들과의 기나긴 문답 내용을 듣고 나서 그런지 마지막에 행복하게 살라는 스님의 말씀이 어느 때보다 깊게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스님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곧바로 로비에 마련된 책 사인회 부스로 이동했습니다. 로비에는 벌써 많은 분들이 책을 들고 스님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스님은 한 분 한 분과 눈을 맞추며 정성껏 싸인을 해주었습니다.
이어서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을 격려하며 단체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포항정토회, 좋아요!” 라고 외치며 활짝 웃는 모습에는 보람이 가득차 보였습니다.
사진을 찍고 뒤돌아선 스님은 봉사자들이 각각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을 하며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대부분 덕산 정토법당과 양덕 정토법당에서 정토불교대학을 듣고 있는 학생들이였습니다. 영상 수업으로만 스님을 만나뵙다가 스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본 건 처음이라는 대부분의 봉사자들은 스님의 감사 인사에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를 했습니다.
강연장을 나온 스님은 밤 10시에 포항을 출발했습니다. 부지런히 고속도로를 달려 새벽 2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잠시 눈을 붙인 스님은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연이어 미팅 및 회의 일정을 가진 후 저녁 7시 30분에는 대전시청 대강당에서 청년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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