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5.22 (오후) 새터민 즉문즉설


 

안녕하세요?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정토불교대학생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해준 스님은 문경 정토수련원을 나와 곧바로 공주로 이동했습니다. 

 

11시 30분에 공주 곰나루 솔밭 쉼터에 도착한 스님은 먼저 점심 식사 장소를 답사했습니다. 스님이 도착했을 때는 대중들이 사)좋은벗들 이승용님의 안내로 공주 역사기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님은 점심식사 장소에서 새터민들을 반갑게 맞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진행측이 잡은 점심식사 장소에는 나무가 별로 없어서 햇살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본 스님은 식사 준비 봉사자들에게 “이곳은 식사를 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하면서 나무가 무성한 솔숲 쉼터를 찾아주었습니다.  

 


▲ 봉사자들이 잡은 식사 장소 

 


▲ 스님이 다시 답사를 해서 찾아낸 식사 장소

 

봉사자들과 함께 밥과 국, 반찬을 부지런히 나르고, 책상을 펼쳐 셋팅까지 마치자 드디어 새터민들이 역사기행을 마치고 막 식사장소로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휴일이라 꿀잠을 잘 시간인데 엄마 손에 이끌려 부은 눈으로 나온 어린이, 손을 꼭 잡고 온 연인 등 각양각색의 새터민들이 줄을 지어 솔숲으로 들어왔습니다. 스님은 합장 반배로 인사를 하며 환한 웃음으로 새터민들을 맞이했습니다. 

 


▲ 새터민들에게 환영인사를 하고 있는 스님

 

오전에는 새터민 600여 명이 사)좋은벗들 이승용님의 인솔로 공주 역사기행을 했습니다. 공산성 성곽길을 걸은 후 송산리 고분군으로 이동해 모형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서 이곳 곰나루 솔숲으로 점심을 먹으러 온 것입니다. 

 

새터민들은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모여서 맛있게 식사를 했습니다. 개중에는 북한을 떠나온지 7년 만에 고향 사람을 만났다는 분도 있고, 처음 남한에 와서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을 때 만났던 동기를 만났다며 기뻐하는 분도 보였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은 아이들과 즐거운 게임 한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식사를 하고 있는 새터민들을 한바퀴 둘러보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새터민 여성 한 분이 “정토회가 북한보다 조직성이 더 없는 것 같다” 며 어수선한 행사 진행에 대해 농담조로 스님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그래도 남한에서 조직성 하면 정토회가 제일 나은 수준인데, 북한하고 비교하면 어떡해요?” 하며 “그럼 자기가 한번 나서서 딱 질서를 잡아봐요”라고 하며 웃었습니다. 

 


 

화끈한 성품의 새터민들은 스님을 보자 주저없이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스님도 이런 새터민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어떤 이야기도 잘 받아주었습니다. 

 

점심을 배불리 먹고 공주 문화예술회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새터민들은 남한에 정착해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많이 겪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마음껏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스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강연장으로 새터민들이 입장하고 있는 동안 무대에 오른 스님은 즉석에서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사회자의 소개를 받고 스님이 무대에 올랐는데, 오늘 새터민들 앞에서는 스님이 사회자 역할을 했습니다. 

 

새터민들은 주저함이 없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와 노래 실력을 뽐냈습니다. 고향 사람들끼리 한자리에 모이니까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는지 모두들 북한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르러 나온 새터민들은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 소개했는데, 무산, 함흥, 혜산, 해주, 회령 등 어떤 곳을 말해도 스님은 그곳이 어디인지 척척 알아듣고 그 도시와 관련된 한마디씩을 들려주었는데 새터민들도 모두 놀라워 했습니다. 

 

고향 생각을 하며 한바탕 신나게 어우러진 후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총 5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는데, 그 중에서 대한민국에 오면 잘 먹고 잘살 거라 생각해서 목숨을 걸고 왔는데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북한동포돕기 활동을 펼쳐온 스님이기에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어떤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답변이 매우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새터민들도 아주 기뻐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한국으로 올 때 한국은 지상낙원이고 천국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한국으로 오면 정말 돈이 하늘에서 뚝뚝 떨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와보니 생활이 너무 어렵고, 특히 외래어 능력이 많이 부족해서 정말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정말 마음의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그래서 저희 이탈주민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고 지칠 때 법륜 스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 있도록 좋은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한국이 지상낙원인 줄 알았다고요?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지상낙원인 줄 알고 200만 명이나 가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매년 한 번씩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교포들을 상담해 보면 다 힘들어서 죽겠대요. 

 


 

또 한국의 젊은이들은 유럽이 지상낙원인 줄 알아요. 그래서 런던에 한 5만 명, 독일에 한 4만 명, 파리에 한 3만 명이 가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재작년에 전 세계를 한 바퀴 돌아봤거든요. 유럽 29개 도시, 미국 56개 도시, 그리고 캐나다와 남미, 즉 멕시코, 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를 거쳐서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아를 거쳐서 일본까지, 장장 115개 도시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만 빼고 다 다녔어요. 그렇게 다니기 전에는 저도 잘 사는 일본,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 등에 가서 사는 한국 사람들은 참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고, 남미나 동남아 등 가난한 나라에 가서 사는 사람들은 굉장히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까 정반대였어요.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그래도 대학 나오고, 똑똑한 사람들이 주로 유럽에 가잖아요? 그런데 막상 유럽에 가서 살면 우리 나라에서 서울대를 나왔든 연세대를 나왔든 충남대를 나왔든 그게 유럽 사람들한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학벌이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유럽에 가면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아요. 거기서 중요한 건 접시를 잘 닦거나 요리를 잘 할 줄 아느냐, 다시 말해서 기술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나라에 와있는 베트남 사람이 하노이 법대를 나왔든 호치민 공대를 나왔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그저 육체노동을 잘 하거나 기술이 뛰어난 게 중요한 것처럼 말이에요. 

 

한국사람이 유럽에 왜 갈까요? 유럽은 고임금, 즉 우리나라보다 인건비가 몇 배나 비싸니까 거기 가서 일하면 한국의 임금보다 2~3배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는 거예요. 우리는 최저임금이 약 6불밖에 안 되는데 거기는 15불이니까요.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 중에 우리 교포들이 제일 하층입니다. 이해되세요?”

 

“예.”  

 


 

“그러니 교포들이 처음 유럽에 가서 한 3년 벌어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다면 돈 좀 번 격이지만 거기에서 계속 살 거라면 그 나라에서 제일 하층으로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 원룸과 같은 10평이나 15평짜리에 삽니다. 저도 세계 100강을 다닐 때 그런 곳에 침낭 가지고 가서 쪼그리고 자면서 강연을 다녔거든요. 사는 게 굉장히 궁색합니다. 가끔 의사 같이 전문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좀 잘 살지만 90%는 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아요. 

 

그러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에 사는 우리 교민들은 어떨까요? 공항에 마중 나올 때부터 다릅니다. 제가 한국에서 타보지도 못한 좋은 차를 끌고 마중을 나옵니다. 그 차를 타고 집으로 가보면 집이 대궐 같아요. 그런 나라에 간 교민들은 노동 이민을 간 게 아니라 주로 투자 이민을 갔기 때문입니다. 다만 얼마라도 돈을 가지고 그 나라로 간 뒤에 작은 가게라도 얻어서 그 나라 사람들을 종업원으로 고용해서 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가보면 한국사람들은 다 사장입니다.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대다수가 그 사회에서 잘 사는 상류층에 속합니다. 마치 미국인, 프랑스인들이 우리 나라에 외국인촌을 형성해서 부자로 살듯이 우리 교민들도 동남아나 남미에서는 그렇게 살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에 대한 접대도 다르지요. 

 

돈 1억 원 가진 사람이 1,000만 원 가진 사람들 동네에 가서 살면 부자이지요? 그런데 100억 원 가진 사람들 동네에 가서 살면 가난뱅이가 됩니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들이 북한에서 살다가 남한으로 오니까 환경은 여기가 훨씬 나아도 여러분들이 엄청 가난한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북한에서는 한 달에 50불 벌었는데 여기 오면 1,000불 벌잖아요. 북한에 살다가 중국만 가도 어때요? 월급도 많고 좋잖아요.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또 한국에 오고 싶어 해요. 지금 여러분들은 한국에 왔잖아요. 그리고 여기 와서 1년이나 2년 번 돈을 갖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면 형편이 좋은 편에 속하잖아요? 지금 당장 1만 불만 가지고 북한에 들어가면 가게 하나는 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여기 계속 산다면 여러분들은 이민자이니까 하층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요. 마치 한국에서 서울대 졸업했어도 유럽에 가서 살면 당분간 하층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10년, 20년 열심히 살다가 운 좋게 성공해서 잘 살게 될 수도 있겠지만, 다수는 어렵게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한국에 와서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 인생계획을 잘 세우셔야 해요. 한국에 장기적으로 정착할 거냐? 아니면 빨리 통일을 해서 고향으로 갈 거냐? 만약 통일이 되어서 여러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고향에서는 좀 잘된 축에 속할 거 아닙니까? 여기에서 살던 아파트 딱 정리해서 그 동안 모은 돈 보태가지고 북한으로 가면, 각자 고향에서는 부자 축에 들어가서 당 간부가 부럽지 않을 거예요. 지금 당장 갈 수 없어서 아쉽지만요. 

 

월남이 패망하고 베트남이 통일될 때 월남 사람 중에 한 400만 명이 전부 외국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우리가 탈북 하듯이 보트피플이라고 해서 미국, 호주, 유럽으로 도망을 나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베트남이 통일된 지 20년 후에 개방을 해서 투자를 받았는데, 그때 보트피플들이 미국으로 가서 막노동이라도 해서 번 돈을 가지고 다시 베트남으로 들어가면서 베트남 발전의 작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이 공산화될 때 대만이나 홍콩으로 도망갔던 사람들인 화교들이 중국이 개방을 하자 자기네가 번 돈을 가지고 중국으로 들어가서 중국의 외자유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한국에서 살기 어려운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합니다. 한국사람이 여기서 서울대 나왔어도 미국에 가서 정착하려면 접시 닦아야 되고, 채소가게에서 일해야 하는 것처럼 너무 당연한 거예요. 정착 초기에는 그런 것밖에는 할 수가 없으니까요. 서울대 나와 봤자 그걸 미국에서 써먹을 데가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김일성대학이나 김책공대를 나왔단들 한국에서 누가 알아주겠어요? 전문기술이 있으면 좀 다르겠지만요. 

 


 

그러니 여기서 여러분들이 정착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예를 들어 고추 모종도 온실에서 재배한 걸 뽑아다 밭에 옮겨 심으면 ‘사람한다’라고 해서, 잔뿌리 내리고 잎이 파랗게 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거예요. 모내기를 해도 한 열흘은 지나야 빼빼 말라 비틀어졌던 잎이 펴진단 말이에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뿌리를 내리고 살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그건 미국에 가서 살아도 그렇고, 유럽에 가서 살아도 그렇고, 어디 가서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서 돈을 엄청나게 가지고 여기 왔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몸만 왔잖아요.”

 

“주먹만 가지고 왔어요.”

 

“몸뚱이도 왔겠지, 어떻게 주먹만 와요? 주먹에 발도 안 달렸는데요.(모두 웃음) 미국 이민 1세대도 전부 몸만 가서 불법체류하면서 살았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좀 살만 했던 80년대에 광주민주항쟁이 있은 후 군부독재가 들어섰잖아요? 그때 미국으로 간 사람들은 재산을 팔아서 들고 갔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도 큰 고생은 안 했어요. 처음부터 돈을 가지고 가서 바로 가게를 얻어 정착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북한도 이런 경우가 생길 거예요. 지금 여러분처럼 난민 1세대는 다 몸만 왔지만, 지금 북한에서 간부든 뭐든 돈 좀 번 사람들이 북한에 어떤 정치적 변화가 있거나 해서 돈을 지고 남한으로 도망 오는 사람들이 앞으로 생긴다면, 그 사람들은 여기 오자마자 딱 폼 잡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난민 1세대와 2세대 사이의 갈등이 아주 심해지겠지요. 우리 미국 교민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몸만 오게 되면 정착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데, 왜 그럴까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인간관계라는 게 있잖아요. 때로는 돈이 없어도 친인척, 동향, 동문, 군대 가서 사귄 사람 등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서 내가 부족하더라도 서로 밀어 주고, 끌어 주면서 살아간단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은 북한에서는 그런 관계 속에 있다가 나무 한 포기가 뽑히듯이 뽑혀서 여기에 딱 옮겨 심어졌으니까 누구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잖아요. 그러니 고생할 수밖에요.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베트남에서 왔거나 중국에서 왔거나 외국에서 온 사람에게는 대한민국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쉽게 안 주잖아요. 그래서 그런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여기에서 불법체류해 가면서 돈 벌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오자마자 시민권, 즉 주민등록증을 딱 내주잖아요. 또 정착금도 주잖아요. 

 

옛날에 탈북이 시작되던 초창기에 여러분들과 같은 분들을 데리고 제 고향인 시골로 수련을 한번 간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 시골 아주머니가 저한테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나이 60이 넘도록 살았어도 정부로부터 땡전 한 닢 지원받은 적이 없는데, 저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뭐 한 게 있다고 오자마자 3,000만 원씩이나 주느냐?’라면서 성질을 내더라고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외국에서 왔다고 정착금 주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갔다고 정착금 주는 일 없어요. 난민으로 가도 우선 텐트촌에 좀 살도록 하다가 일자리 알선해 주고는 나가서 스스로 벌어먹고 살라고 하지 정착금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여러분들께 정착금을 주느냐면, 옛날에 남북이 한참 이념 경쟁할 때 북쪽에서 남쪽으로 간첩을 내려 보냈더니 여기 와서는 전향을 하더란 말이에요. 그럼 남쪽에서는 그 사람한테 포상을 했습니다. 그때 5,000만 원이나 1억 원씩 주던 게 전통처럼 남아서 지금 정착금이라도 주는 겁니다. 정착금뿐만 아니라 직장도 알선 해 주고, 집도 주선해 주지요. 물론 집세는 정착금에서 내지만 서울에서 집 구하기가 어려운데 집을 주선해 주는 게 어디입니까. 요즘 한국에서 태어난 젊은이들도 서울에서 집을 못 구하잖아요. 

 


 

그러니 불만을 가지면 끝도 없어요.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충성했고, 김일성, 김정일한테만 충성했지 대한민국에 충성한 적이 없잖아요. 대한민국에 세금 한 푼 낸 적도 없잖아요. 오히려 북한군으로 입대해서 대한민국에 총부리 겨누며 욕했잖아요. 그래 놓고 여기 와서는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더! 더! 더!’ 라고 하면, 그것을 다 들어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생각을 바꿔야 여기서 살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살다가 중국으로 넘어갔을 때는 잡혀서 다시 북한에 넘기지만 않아도 고마운 일이었잖아요. 제가 난민을 많이 돕다 보니까 한 젊은이로부터 이런 얘기도 들은 적이 있었어요. 

 

‘스님, 중국은 사회주의 천국입니다.’ 

‘왜? 뭘 보고?’

‘중국에 와보니 중국에서는 개도 이밥을 먹습디다’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기 주인 집 개는 이밥도 아니고, 개밥이라고 아예 따로 정해져 있는 걸 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질이 나서 주인 없을 때 ‘이 새끼, 우리도 못 먹는 걸 처먹는다’ 면서 개를 패줬대요. 이게 90년대 후반의 일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여기에서 살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유럽에 가도 어렵고, 미국에 가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살려면 각오를 해야 됩니다. 제가 난민들을 도울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돈 억만금을 줘도 북조선에서는 살기 싫고, 자유로운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는 사람은 내가 한국에 갈 수 있게 도와주겠지만,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한국에 가겠다면 내가 지금 돈을 좀 줄 테니까 이 돈을 가지고 도로 북조선으로 들어가거라’라고 말이에요. 제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고향을 떠나면 어디에서 살든 사는 게 너무 피곤한 법입니다. 돈이 좀 없어도 고향에서 살면 그래도 친인척, 친구, 안면 있는 사이, 어쩌고 해서 좀 비빌 언덕이 있지만, 고향을 떠나면 그런 게 없기 때문에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집니다.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외로움 때문에 거의 정신질환자 수준이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은 한국말이 좀 어눌해서 그렇지 말이라도 통하잖아요. 그런데 미국에서 살려면, 말도 안 통하지, 또 유색인종이라고 차별받지, 너무 힘든 거예요. 여기에서 북한사람들 차별하는 건 차별도 아니라고 할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합니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 교민들이 30년이 넘게 살아내면서 지금 교민사회가 자리를 잡은 거예요. 

 


 

그러니 제가 볼 때는 10년 내지 20년만 지나면 여러분들이 다 한국에서 중산층이 될 겁니다. 왜 그럴까요? 남한의 젊은이들은 직장에서 일이 주어지면 그 일을 할 줄은 알지만 스스로 악착같이 돈 버는 건 할 줄 몰라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 세대는 어릴 때부터 밭 매고, 낫질하고, 톱질하고, 지게질 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금방 일해서 먹고 살 궁리를 하는데, 지금의 한국 젊은이들은 태어나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공부만 하면서 스무 살 넘을 때까지 살다 보니까 직장에서 ‘이 일 해라’ 하고 시키는 것만 할 줄 알지, 직장이 없으면 서른 살이 되어도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부모가 해 주는 밥이나 얻어먹고 살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북한에서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단련이 돼 있잖아요. 그러니 여기 살면서 잘 살펴보면 고생이 좀 되더라도 한국사람들이 잘 안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처음에만 고생이지 돈 되는 일들이 좀 있어요. 그런 걸 찾아서 악착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여기서 정착해서 살든지, 안 그러면 돈을 쓰지 말고 모아놨다가 통일되면 북한으로 다 가지고 가세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중에 혹시 남북 간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북한을 욕하고 데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가 볼 때 바보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되지만, 북한에서 온 사람이 그렇게 하면 바보예요. 우리 모두가 북한이 나쁘다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북한이 나쁘다’ 라고 아무리 얘기한들 북한이 개선되는데 도움이 될까요?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계속 ‘북한이 나쁘다’라고 하니까 북한에서는 여러분들이 가족과 전화도 못 하게 하고, 송금하는 것도 막아버렸잖아요. 여러분들이 가족한테 돈을 보낼 때 옛날에는 수수료를 20%만 줘도 됐던 게 지금은 50% 줘야 가잖아요. 

 

남북관계가 좋아져서 통일이 되면 제일 이익 보는 사람이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북 간에 자유 왕래만 할 수 있어도, 투자만 할 수 있게 돼도 여러분들이 제일 이익입니다. 남한 사람은 돈이 좀 있어도 어디에 어떻게 투자해야 되는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은 그 안에서 살았으니까 잘 알잖아요. 왜 바보같이 북한 욕하고 데모하는 데 끼고 그래요? 남한 사람이 다 통일을 반대해도 여러분들만은 통일하자고 해야 할 판인데요. 

 

또, 전쟁을 통해서 통일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물론 남한이 북한보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월등히 앞서고 우방인 미국도 있어서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한이 이기는 건 당연할지 몰라도, 남북이 모두 피해를 입는 건 피할 길이 없잖아요. 여러분은 북한에 살아봐서 북한이 어떻다는 걸 알잖아요. 북한은 지더라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니까, 결과적으로 엄청난 인명피해, 재산피해를 낳을 게 뻔하잖아요. 그러니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북한이 나쁜 건 맞지만, 또 우리가 북한에 굴복해서도 안 되겠지만, 전쟁보다는 살살 달래서 통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쉽진 않겠죠.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정책이라는 거예요. 

 


 

한국에 와있는 베트남 노동자나 중국 사람들이 질문자를 보면 엄청나게 부러워할 거예요. 중국에 있을 때는 질문자가 중국 사람을 부러워했겠지만, 질문자가 한국에 오니 이제는 중국 사람이 한국 사람인 질문자를 부러워할 거예요. 여자분들도 중국으로 넘어가서 살 때는 살 방법이 달리 없어서 중국 남자랑 결혼해서 괄세 받고 살았지만, 이제 한국에 오니까 어때요? 중국인 남편이 기죽어 하지요?” 

 

“예.”

 

“한국에 오면 여자분들은 여기서 말이 통하지만 중국 남편은 말이 안 통하니까 기가 죽을 수밖에요. 그러니 여기서는 여러분들이 유리한 게 많아요. 너무 불리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유리한 걸 생각하세요. 어차피 고향 떠나 살면 괄세를 좀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한국 안에서도 마찬가지예요.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가서 살면 좀 괄세 받고,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 가서 살면 좀 괄세를 받습니다. 북한 안에서도 함경도 사람, 평안도 사람이 서로 텃세 좀 부리잖아요.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스님이 그런 마음을 이해 못해서 냉정하게 말하는 게 아니에요.(모두 웃음)

 

그러나 여러분이 자꾸 어렵다고 생각해 봐야 여기서 사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니 첫째, ‘2,000만 북한 사람 중에 내가 중국을 거쳐서 이 대한민국에 오다니 이것만 해도 행운이고 기적이다. 이런 혜택을 입은 김에 나는 악착같이 일해서 꼭 성공하겠다. 그래서 남조선 사람들한테 북조선 사람 좀 깔보지 말라고 확실히 보여주겠다’ 하는 게 필요합니다. 둘째, 그렇게 해서 꼭 성공을 하되 남북관계가 조금 나아져서 북한에 투자할 수 있게 되면, 고향에 투자해서 잘난 척하던 당 간부들한테 본때를 보여주라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런 목표가 있어야 살맛이 나지, 여기 사람들 쳐다보면서 ‘나는 언제 저렇게 돈 버나?’ 생각하면 힘들고 괴로워서 못 살아요. 질문자는 아직 젊어 보이는데, 몇 살이에요?”

 

“스물네 살입니다.”

 

“그렇게 젊은 사람이 그런 소리하면 어떻게 해요. 힘내세요!(모두 박수)

 


 

그리고 누가 물었을 때 북한에서 왔다는 걸 숨길 필요는 없어요. 질문자 스스로 ‘나 북한에서 왔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요. 그래서 누군가 ‘너 어디서 왔니?’라고 묻는다면 ‘천안에서 왔다’라고 하면 되지 ‘함흥에서 왔다’라고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고향이 어디냐?’라고 물으면 ‘함흥입니다’ 하면 되고, 또 ‘북한에서 왔어?’ 그러면 ‘예’ 하면 되지 그 사람이 이어서 뭐라고 말하든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면 고향을 숨기고 그런다던데 숨길 필요가 없어요. 미국에 가서도 ‘너 어디서 왔니?’ 물으면 ‘한국에서 왔다’ 라고 당당하게 얘기해야지 얼버무릴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난 고향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북한에서 태어나서 지금 이럴 뿐이고,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뭐가 잘나서가 아니라 어쩌다 재수 좋게 여기에서 태어나다 보니까 이런 거지요. 그러니 북한 출신이라고 열등의식을 갖거나 숨을 필요가 없고, 당당하게 경쟁해서 살아갈 필요가 있어요. 스님이 너무 인심이 박하게 얘기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힘내세요! 알았죠?”  

 

“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모두 박수)

 

“제가 여러분들 사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어렵다’, ‘힘들다’라고 하면서 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첫째, 여러분은 남한에서 악착같이 노력해서 정착에 성공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둘째, 여러분은 여기서 영원히 살 생각을 하지 마시고, 적절하게 기술도 익히고 자본도 축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을 재건할 꿈을 꾸세요. 여러분들의 힘만으로는 그런 기회를 못 만들겠지만 스님도 힘을 보탤 거니까요. 통일은 좀 놔놓고, 가능하면 평화적으로 전화나 왕래라도 하고, 투자라도 할 수 있게는 해야 되지 않겠어요? 꼭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만 통일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통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으니까요. 한국 안에서도 한번 권력을 잡은 사람은 그걸 안 내놓으려고 저렇게 상대방과 물고 차고 싸우는데, 자기 군대까지 가진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이 쉽게 권력을 내놓으려고 하겠어요? 그래서 저는 통일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되 준비는 계속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도 언젠가는 변하겠지요. 그것 또한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저렇게 인류문화의 발전에 역행하는 식으로는 오래갈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첫째, 좀 시간을 갖고 기다리는 것, 둘째, 준비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여러분께도 대박 터질 날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남쪽 사람들은 기회가 와도 개성공단처럼 돈만 엄청나게 집어넣고 별 소득도 없는 일을 잘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돈 조금만 가지고도 효과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잖아요. 여러분들은 북한에 살아봤으니까, 어디 투자하면 잘 될지, 차를 사서 어떻게 굴리면 잘 될지, 집을 어디에 사면 잘 될지, 이런 걸 잘 알잖아요. 기회만 온다면 그런 게 여러분들의 강점이 될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너무 힘든 건 알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분명히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연세 드신 분들은 ‘밥만 안 굶으면 됐다. 여기서 놀다가 죽기 전에 고향 갈 수 있으면 가고, 못 가면 그만이고’ 이렇게 생각하시는 게 좋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목표를 세워서 살아야 합니다. 남 얘기 듣지 마시고 제 말을 잘 들으면 다 성공할 거예요. 스님이 말을 좀 못되게 해서 그렇지 진심은 있어요.”(모두 웃음과 박수)   

 

스님의 경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들 때문인지 새터민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질문자도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자 다함께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네 명이 더 스님에게 질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사자성어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 분, 본인은 남한에 와서 잘 살고 있는데 어릴 때 헤어져 지금도 북한에 남겨져 있는 엄마가 힘들게 살 것을 생각하니 무척 가슴이 아프다며 울먹이는 분, 명상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달라는 분, 남한에 정착해서 열심히 일하며 잘살고 있는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는 분의 질문까지 약 두 시간 동안 즉문즉설이 진행됐습니다. 

 

특히 오늘은 즉문즉설만 하지 않고 질문 사이 사이에 새터민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답변 하나가 끝난 후 스님이 “자, 그럼 이번엔 어느 분이 나오셔서 노래를 한번 불러 볼래요?”라고 말하면, 서너 분이 무대 위로 뛰어 나와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며 흥을 돋우었습니다. 

 


 

자작시를 암송한 70대 후반의 어르신은 많은 공감을 얻어 큰 박수를 받았고, 남한의 대중가요인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한 여성분은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을 보여주어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오기도 했습니다. 

 

유익한 강연도 듣고, 신나게 노래도 불러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약속한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오늘 만남을 마무리하며 스님은 다시 한 번 새터민들을 위한 격려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방금 전에 젊은 사람이 질문한 것에 대해서는 제가 답변을 해드렸는데, 연세 드신 분들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연세 드신 분들은 언제 돈 벌어서, 언제 고향에 투자하시겠어요?(모두 웃음) 

 

그러니 아까처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이렇게 재미나게 그냥 사는 거예요. 아시겠죠? 대한민국에 충성은 안 했지만, 그래도 북한에서 충성하며 사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어요. 북한도 우리나라이고, 남한도 우리나라잖아요. 그러니 고생 많으셨어요. 그러니 한국에 살면서 절대로 기죽으면 안돼요. 아시겠죠?”

 

“예.”(모두 박수)    

 

“각 정토회에서 여러분께 자원봉사하시는 분들도 오늘 이 자리에 많이 와 계신데, 그분들 평소에 수고가 많으시지요? 그분들을 위해서 박수 한번 쳐주세요.(모두 박수) 

 


 

그리고 스님이 여러분과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모두 후원금 덕분인데요, 여러분, 혹시 배우 신민아 씨를 아세요? 여러분들의 아이들 공부 가르치는 사이숲 활동에 신민아 씨가 많은 후원을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물론 신민아씨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지원을 해주고 계십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사는 게 좀 빡빡할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도 지금 죽겠다고 아우성이니까요. 그래도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보시도 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요. 어디든 다 좋은 사람만 사는 것도 아니고, 다 나쁜 사람만 사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이 섞여있어요. 그러니 예전에 나쁜 사람들 만나서 피해 입고 차별 당한 것 떠올리면서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세상이라는 게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섞여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이해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새터민들은 정토회 봉사자들과 배우 신민아씨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가슴이 훈훈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강연의 마지막도 역시 노래로 갈무리했습니다. 스님이 “노래 한 곡 부르고 헤어지자”고 하니 세 명이 무대 위로 올라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새터민들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슬픔과 한이 느껴졌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개개인이 다 얼마나 많은 고통과 한스러움을 겪었을까요? 다행히 좋은벗들의 봉사자들이 해마다 이런 시간을 마련해준 덕분에 그나마 새터민들이 답답함을 풀어놓고 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손에 손을 잡고 부른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었습니다. 새터민들은 이 노래를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분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지금도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이 살아있기 때문에 통일은 고사하고 자유 왕래만이라도 간절히 바라는 것이 바로 새터민들일 겁니다. 

 


 

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친 후 다함께 문화예술회관 앞 계단에 올라서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만남이 너무나 좋았는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새터민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오후 5시에 공주를 출발한 스님은 곧바로 울산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내일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7주기를 맞이하여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고 헌화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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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봄,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갑니다. 강연일정 확인하시고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오세요. 강연은 선착순 무료입장입니다. 질문자 접수는 강연장에서 받습니다.

전체댓글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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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 공군 대위

법륜 스님 말씀 처럼 평화 롭게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 합니다. 새터민 분들도 그렇게 되면 북한에서 정착을 멋지게 다시 하실수 있겠습니다.

만약 전쟁 일어 난다면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식으로.
같이 달려들기에... 많게는 절반 이상이 국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 을 당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심 하면 두명중 한명은 죽는것이죠.

대신 평화적으로 통일이 된다면, 남 북의 통합된 군사력 과 위상 에 주변 중국 러시아 일본 과 미국에서 자기쪽의 외교적 동지가 되기를 구애 하며 통일 한국의 눈치를 보게 될것입니다.

2016-05-30 17:12:54

김은정

스님 말씀에 울컥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6-05-29 09:37:52

해외 통일 의병

넵 스님 해외에서 10년, 20년 현지인들 속에 거주를 하면, 법륜 스님 말씀 처럼 미국 영국 호주등 어떤 선진국이든 중진국 이든 대부분이 삶은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 한국에서 볼때 외국의 삶은 생각속에서는 이상적인 세상 일수도 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 대한민국이 평화적으로 통일 되어, 강대국으로 발돋움 하여 대한민국 이 잘 살아야지, 외국에서 대학교수 를 하든...국가 고위 공무원을 하든. .그 삶이 다수의 해외 주류 사회속에서...결국 한국인이라는것은 소수인 이기에 ..차별을 받게 되고....한계가 있는것이 보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독일내의 소수 민족으로 예 수를 못박아 살해 한 것에 대한 원죄로 픽박과 차별을 받았었지만, 결국 자신의 상대성 이론 으로 인류 과학의 역사를 비꾼후...독일 로부터 살해 위협 을 받고 주변에서 소수민족 독립 에 힘쓰는 사람들이 살해되는 것보고도...목숨 걸고. ..노력하고 결국 이스라엘 이라는 독립국가를 설립 한것처럼...아인 슈타인은 없는 국가도 만들도록 힘을 기울여 달성 했는데, 남한과 북한의 재 통일은 노력을 하면 반드시 달성 될것입니다.

2016-05-28 15: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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