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6.5.22 (오전)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에 참가해 즉문즉설 시간을 가진 후 오후에는 새터민들과 함께 봄나들이겸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제 서울시청광장에서 청년들 1만 명과 함께한 청춘콘서트를 마치고 새벽 2시에 문경 정토수련원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눈을 붙인 스님은 새벽 6시에 정토불교대학 특강수련이 열리고 있는 대수련장에 들어섰습니다. 

 

오늘 특강수련은 경상남도, 강원도, 경기도 동부 지역에서 정토불교대학을 수강하고 있는 4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청법가와 삼배로 스님에게 법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 위에 올라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스님은 이곳 대수련장에서 하룻밤을 숙박한 대중들에게 “잘 주무셨어요? 이런 곳에서도 한번 자보는 것은 좋은 수행이예요” 라는 인사말로 잠자리가 불편했을 대중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이렇게 꼭두새벽에 강연이 잡히게 된 까닭에 대해 위트있게 설명을 해주면서 대중들의 양해를 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실천적 불교사상’에 해당하는 10회분 강의를 다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평소 궁금했던 것을 모아서 오늘 한꺼번에 질문을 받겠습니다. 사실은 매번 강의가 끝난 뒤에 바로 질문을 받는 게 제일 좋아요. 제가 여러분들 앞에 수십 군데 동시에 몸을 나퉈서, 즉 분신을 해서 강의를 하는 것은 현재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 수백 수천 명을 동시에 제 앞에 나타나게 하는 기술은 아직 제가 터득을 덜 했어요. 수행을 조금만 더 하면 곧 될 거예요.(모두 웃음)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이 공부하다가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에서 송신기능을 활용해서 ‘질문 있습니다’ 하고 메신저 같은 걸로 보낼 수가 있어요. 제가 그걸 보고 ‘질문하세요’ 이러면 여러분들은 자기 얼굴을 보여주면서 궁금한 걸 질문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을 해주는 거예요. 제 수행이 조금만 더 되면 곧 이렇게 할 수 있을 거예요.(모두 웃음) 

 

그런 기술은 이미 개발되어 있어요. 어떻게 상용화할 거냐가 문제인데, 국제회의 같은 데서는 이미 활용하고 있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정토불교대학에서도 학생들과의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질 겁니다. 그래도 아직은 쌍방향 소통이 어려우니까 오늘 이렇게 모여서 열 번 강의한 내용 중에서 궁금한 내용들을 한꺼번에 질문받는 거예요. 

 

수업 들을 당시에는 질문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서 오늘 질문을 적으려니 생각이 안 나죠?”

 

“네.”

 

“그런 질문은 원래 질문거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 건 분별이라고 해요.(모두 웃음) 들을 때 ‘에이, 뭐 저래. 저게 뭐야’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것은 물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오늘도 법문 듣는 동안 무슨 생각이 떠오를 텐데 그것도 물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자극을 받으면 항상 생각이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잘 때마다 꿈을 꾸는 것과 똑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그게 뭐지?’ 하고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의문에 속합니다. 그런 의문은 반드시 물어서 해소해야 해요. 자, 그러면 여러분들이 써낸 질문을 하나씩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질문이 서른 개가 넘어요.

 

어떤 분이 또 이런 이야기를 해요. ‘스님, 왜 새벽 4시부터 깨워가지고 피곤해 죽겠는데 강의까지 합니까? 집에 있으면 아직 잘 시간이라 졸려 죽겠습니다.’ 라고요.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요. 선택을 해야 해요. 이렇게라도 강의를 들으실래요? 그냥 강의를 듣지 않고 잠을 잘 수 있게 해줄까요? 둘 중 어느 게 나아요?”

 

“강의 듣는 게 나아요.” (모두 웃음)

 


 

“예, 이렇게라도 듣는 게 낫죠. 이렇게 새벽에 강의를 해야 하는 이유는 제가 바쁜 몸이라서 그래요.(모두 웃음) 

 

저는 하루에 두 탕, 세 탕씩 강의를 뛰어야 하는데, 여러분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묵으니까 새벽에 해도 되잖아요. 집에서 오는 사람더러 새벽 6시부터 오라고 할 수는 없는데, 여러분들은 지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에요. 스님이 여러분들을 애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에요.”

 

“예!” 

 

다들 새벽 4시에 일어나보거나 새벽 6시에 강의를 들어보는 경험은 처음인 분들이 많았는지 스님의 위트있는 설명에 공감을 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학생들이 써낸 질문지를 하나씩 읽어내려 가며 답변을 시작했습니다. 총 32개의 질문지가 올라왔지만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3시간 동안 15개의 질문에 대해서만 답변을 해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고 지켜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질문한 내용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스님은 일상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쉽고 재미있게 비유를 들어주어 대중들도 즐겁게 답변을 들었습니다. 

 


 

“스님의 정토불교대학 강의내용 중에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드립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라고 했던 어린 장금이의 대사처럼, 저는 제 뜻대로 되면 즐거운 ‘락(樂)’이 생기고 제 뜻대로 안 되면 괴로운 ‘고(苦)’가 저절로 생겨납니다. 스님께서는 이 때 ‘아, 일어나는구나’라고 가만히 지켜보라고 하셨지만, 저는 ‘아, 화가 나네’ 생각만 할 뿐 화가 나는 상대에게 뭐라고 말은 하지 않아도 가슴 속에는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는 제 자신을 느낍니다. 고락에 집착하지 않고 지켜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이 질문은 ‘윤회(輪廻)’와 ‘해탈(解脫)’에 대한 것입니다. 윤회는 돌고 돈다는 뜻이에요. 흔히들 생각하듯이 사람이 죽어서 소 되고, 말 되고, 개 되고, 부자 되고, 가난한 사람 되고, 남자 되고, 여자 되면서 돌고 돈다는 것은 인도의 전통문화입니다. 태어난 생년월일시에 따라서 운명이 정해진다는 게 중국의 전통문화인 것처럼 윤회도 인도의 전통사상이에요. 

 


 

부처님의 일생을 쓰는 사람들도 인도 사람들이었으니까 자기들의 문화 양식대로 기록을 한 거예요. 자기들 생각에서는 이렇게 위대하신 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작 6년간 수행해서 깨달았다는 건 말이 안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우리 눈에만 이렇게 보일 뿐이지 사실은 과거 생에 한량없이 수행을 해왔기에 부처님이 이생에 깨닫게 된 것이라고 기록한 겁니다. 

 

이렇게 기록한 건 거짓말로 과장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 역사적 사실도 아니고, 단지 그들의 표현 방법일 뿐인 겁니다. 그렇게 표현할 때는 그 사람들 나름대로 뭔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그렇게 표현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취득하면 되지, 그것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어도 안 되고, 다 거짓말이라고 말해도 안 됩니다. 그건 문화이기 때문이에요.

 

부처님은 ‘윤회’나 ‘까르마’ 같이 인도 전통문화에서 사용하고 있던 용어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용어는 같지만 부처님이 쓰신 용어의 의미는 인도 전통으로 내려오는 의미와는 다를 때가 많아요. 인생을 살면서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해보세요. 내가 원하는 게 이루어졌을 때 어때요? 나도 모르게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죠. 그런데 내 뜻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빠요. 이 기분 좋은 것을 ‘즐거움’, 한자로는 ‘락(樂)’이라고 해요. 기분이 나쁜 것을 ‘괴로움’, 한자로는 ‘고(苦)’라고 합니다. 이게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를 반복하면서 즐거운 게 곧 괴로움이 되기도 하고, 괴로운 게 곧 즐거움이 되기도 하면서 늘 바뀌는 거예요. 오늘만 해도 그래요. 처음에는 ‘야, 문경에 수련하러 간다’ 하고 기분이 좋았죠? 그런데 와서 새벽에 절하라니까 기분이 나쁘죠? 법륜 스님을 직접 보니까 또 기분이 좋죠? 지금은 졸리니까 ‘아이고, 빨리 안 끝나나’ 하고 또 기분이 나쁘죠? 이렇게 늘 고락이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해요. (모두 웃음)  

 


 

사람이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사람이 되고, 개 되고 하는 것을 반복하다가 그 반복이 멈춰서 더는 안 태어나는 것을 인도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났다’고 해요. 그런데 부처님이 말하는 ‘윤회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 끝났다는 거예요. 즉,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 되는 것이 멈추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즐거움은 지속가능하지 않아요. 조금 유지하다가 괴로움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즐거움으로 올라왔다가 또 떨어지면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이란 말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해요. 그래서 이 즐거움이 지속가능합니다. 즐겁거나 괴롭다고 할 때 말하는 즐거움이 지속가능하려면 원하는 욕구가 100퍼센트 다 채워져야 하는데 그렇게는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즐거움으로부터도 벗어나버린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반복하며 돌고 도는 즐거움과 괴로움, 이 둘 모두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이름 하여 ‘열반’ 혹은 ‘열반적정’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가 바라는 무엇이 이루어져서 ‘야, 기분 좋다!’ 하는 것이 지속되는 걸 말하지 않습니다. ‘기분 좋다!’ 하는 건 마음이 들뜨는 거예요. ‘기분 나쁘다!’ 하는 건 마음이 가라앉는 거예요. 이렇게 들뜨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파도타기를 하는 걸 ‘윤회’라고 하고, 이 파도타기가 없어진 걸 ‘고요적정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죠? 그렇다면 공부 좀 더해야 해요.(모두 웃음) 

 


 

그래서 이런 즐거움에 의미를 부여하면 즐거움에 빠져서 공중에 붕 떴다가 가라앉을 때는 툭 떨어지니까 또 죽는다고 아우성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늘 ‘산다’, ‘죽는다’를 반복합니다. 부부관계도 조금만 잘해주면 ‘다음 생에도 너와 살겠다. 내가 결혼 잘 했지’라고 하고, 조금만 못해주면 ‘다음 생에는 너와는 안 만나겠다. 이런 인간과 결혼하다니 내가 미쳤지’라고 합니다. 자식도 ‘내가 왜 저 자식을 낳았나’ 하다가도 ‘아이고, 그래도 자식 덕분에 산다’라고 해요. 요사스럽기 그지없어요.(모두 웃음) 

 

여러분들도 지금 불교대학 다니면서 그러고 있는 줄 뻔히 알아요. ‘불교대학 잘 들어왔다’ 했다가, ‘괜히 시작했다’ 했다가, 법륜 스님 법문 듣고 ‘좋다’ 했다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야기를 해서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스님이 왜 쓸데없이 정치 이야기 하느냐’라고 했다가, 그래서 며칠 동안은 ‘스님의 하루’도 안 보다가 또 즉문즉설 하나 읽어보고 나면 ‘아,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다’ 하면서 좋아하고, 이렇게 늘 왔다 갔다 하고 있죠? (모두 웃음) 

 


 

이걸 ‘윤회한다’고 해요.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버린 상태가 해탈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벗어날까요? ‘나는 안 즐거워야지’, ‘나는 안 괴로워야지’ 이런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건 내가 의도적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업식이라는 게 있어요. 이게 바깥 경계에 탁 부딪히면 북을 쳤을 때 자동적으로 울리듯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여기에서 나의 의지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이 업식에 끌려서 삽니다. 기분이라는 것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자기가 알아서 반응해요. 

 

내가 여기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이렇게 기분 좋음이 일어나도 그저 빙긋이 웃어야 해요. ‘아이고, 또 반응이 일어나는구나.’ 하면서요. 기분 나쁨이 일어나도 그 좋고 나쁘고에 비중을 두지 않고 ‘또 반응하는구나’ 이렇게 아는 거예요. 좋은 반응도 나쁜 반응도 다만 반응일 뿐이에요. 이런 반응을 ‘음, 또 그러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려야 해요. 

 


 

물론 우리가 알아차려도 반응은 여전히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건 포물선하고 똑같아요. 돌멩이를 던지면 이렇게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떨어지죠? 그냥 가만히 놓아두면 올라가던 돌멩이도 이윽고 떨어집니다. 여러분의 화 역시 가만히 놔둬도 언젠가는 가라앉아요. 수행을 안 해도 가라앉아요. 죽을 때까지 그 화가 지속되진 않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안 할 때는 화가 이만큼 높이 올라왔다가 가라앉는다면, 수행을 할 때는 조금 달라요. 알아차려도 화가 올라가긴 하지만 조금만 올라왔다가 금방 가라앉아요. 올라가기는 올라가지만 딱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올라가는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해요. 이렇게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걸 ‘지켜본다’ 라고 해요. 

 

여러분들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억누르고 있는 거예요. ‘화내지 말아야지’ 하고 억누르는 건 지켜보는 게 아니라 억압하는 거예요.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여러분들은 성질대로 했다가, 참았다가, 성질대로 했다가, 참았다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참으면 영원히 참으면 되는데 세 번밖에 못 참아요. 삼세번이라고 하죠? ‘두고 보자’, ‘두고 보자’ 이러다가 세 번째가 되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 펑 터지는 거예요.(모두 웃음) 

 


 

참지 말고 지켜보세요. ‘내 업식이 또 내 의지와 관계없이 자동 반응하는구나’, ‘화가 나는구나’ 이렇게 그냥 ‘봄이 오는구나’ 하듯이 바라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그래도 화가 나던데요!’라고 하겠죠. 맞아요. 그게 쉬우면 누가 못 하겠어요? 그러니 연습을 해야 해요. 원리는 원리이고, 배운 원리에 따라 연습을 자꾸 하면 상대가 화를 내도 나는 빙긋이 웃을 수가 있게 됩니다. 지금은 잘 안 돼요. 원리를 알아도 상대가 성질을 내면 나도 같이 성질이 나버려요. 저쪽에서 화를 딱 내면 이쪽에서는 자동으로 팍 하고 반응을 하게 돼요. 그런데 이걸 자꾸 연습하면 상대가 화를 내는데도 빙긋이 웃게 됩니다. ‘오, 저 사람이 저런 인식 상의 오류로 화를 내는구나. 저러면 자기 몸에만 나쁠 텐데...’ 이런 생각이 드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거예요. 욕을 얻어먹고 참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참으면 터지는 거예요.”

 

스님의 답변을 듣고 나니 어떻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지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제 직접 부딪히면서 계속 연습을 해봐야겠지요. 

 

스님의 답변에 대중들은 웃음을 빵빵 터뜨렸습니다. 졸린 눈도 금새 떠지고, 옆 사람의 웃음 소리에 깜짝 놀라 졸음이 달아난 사람도 몇몇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1시간이 지나자 졸음을 깨우기 위해 측면으로 걸어나와 서서 법문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이런 분들이 10명을 넘어서자 스님은 “자, 그러면 모두 제자리에서 일어나세요. 기지개를 주욱 펴 봅니다.”라며 대중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대중들은 “아이고, 시원하다” 하면서 한바탕 스트레칭을 한 후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대중들 중에 노래 한 곡 불러볼 사람 있으면 앞으로 나와 보세요.” 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습니다. 그런데 다들 망설이기만 하고 한참 동안 앞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한 분이 번쩍 손을 들고 나와 “제가 노래를 잘 못 부르더라도 이해해 주세요.”라며 노래 한자락을 불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노래는 정말 잘 불렀는데 늦게 나온 것 때문에 스님이 한 소리를 했습니다. 

 

“노래는 잘 하셨는데, 그렇게 노래를 잘 하면 빨리 나와서 부르지 뭣 때문에 우물쭈물 했어요? 노래를 못 불러도 이해해 달라고 그러셨는데, 우리는 자기가 노래를 못 불러도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요. (모두 웃음) 

 


 

왜냐하면 자기가 가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거든요. 스님이 ‘노래를 잘 하세요’ 라고 안 했잖아요. 그냥 ‘노래를 해보라’ 라고 했죠. 산토끼 노래를 불러도 되고, 태극기 노래를 불러도 되고, 뭐든지 부르기만 하면 되는데... 좀 잘나 보이고 싶었어요? (모두 웃음)

 

이렇게 시킬 때 안 하려고 하는 건 대부분 ‘내가 잘났다’ 하는 거예요. 노래 한번 해보라고 했는데 ‘못한다’고 하면서 10분씩 끌다가 노래하는 사람들 중에는 산토끼 노래 부르는 사람이 없어요. ‘비목’처럼 아주 어려운 노래를 해요. (모두 웃음) 

 

이건 무슨 뜻이냐면 ‘내가 잘 났는데, 노래를 하게 되면 내가 잘난 것에 좀 흠이 간다’ 는 뜻이예요. 그러니 앞으로는 ‘노래 한번 해보세요’ 라고 하면 그냥 앞에 나가서 아무거나 부르면 되는 거예요. 부르다가 가사를 모르면 그냥 그만두면 되는 거예요. 중간에 그냥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그냥 그만두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노래를 끝까지 부르세요’ 라는 말을 안 했잖아요.(모두 웃음)

 


 

그냥 아는 데까지 부르다가 그만두면 되는 거예요. 인생을 그렇게 복잡하게 사니까 괴롭죠.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그럼 스님은 왜 안하세요?’ 라고 따지는데, 저는 스님이기 때문에 계율에 음주가무를 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모두 웃음) 

 

스님의 이야기에 대중들은 또한번 박장대소를 하며 배꼽을 잡았습니다. 노래 한 곡 부르는 것 속에서도 수행을 배울 수 있다는 말씀에 ‘정말 수행이 아닌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계속된 법문에서는 대중들이 조금이라도 졸지 않게 하려고 평소에 강연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더 실감나게 비유를 들어가며 답변하는 스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내어 이곳에 모인 대중들이 조금이라도 삶의 변화를 얻게 되기를 바라는 스님의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답변을 해준 스님은 마칠 시간이 되자 다시 한 번 새벽부터 강연을 열심히 들어 준 대중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 강연이 끝나면 공주로 가야 돼요. 한국에 들어와 있는 새터민들이 살기가 무척 힘든데, 그 분들의 이야기도 들어줘야 해서 오늘 새벽부터 강연을 하게 됐어요. 양해를 바랍니다. 혹시 졸려서 죽을 뻔 했다는 분들 있었어요?”

 

“아니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대중들도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대수련장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공주로 이동했습니다. 공주에서는 낮 12시부터 새터민들과 함께 숲속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한 후 오후 2시에는 인생 고민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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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봄,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갑니다. 강연일정 확인하시고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오세요. 강연은 선착순 무료입장입니다. 질문자 접수는 강연장에서 받습니다.


전체댓글 44

0/200

김순남

명쾌하십니다

2016-05-25 14:07:11

백연아

제게 언제나 힘을 주시는 스님 사랑합니다

2016-05-25 12:58:19

이청숙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2016-05-25 08:4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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