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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농사일을 마치고 정토회 법사님들과 함께 경주 남산을 답사한 후 저녁에는 울산 지역의 법조인 불자모임과 간담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새벽에는 얼음이 성성하게 맺힐 정도로 날씨가 쌀쌀하더니 해가 뜨자 여름 날씨 마냥 해살이 뜨거웠습니다. 오전에는 친지의 병문안을 다녀온 후 두북 수련원에서 쑥을 캐고 부추, 상치, 고소를 뜯어 쌈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었습니다.
▲ 스님이 캔 쑥
오후에는 담벼락 한쪽에 오랫동안 묵혀 둔 퇴비 무더기에서 겉표면을 걷어내고 지렁이들이 열심히 만들어 놓은 기름진 흙들을 잘 걸러서 텃밭 가까이로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거름 흙을 모두 퍼나르고 나니 퇴비 무더기가 있었던 곳이 아주 깔끔해 졌습니다.
▲ 거름 흙 퍼나르기
또 겉표면에 있던 퇴비들은 마당에 흩뿌려 두었다가 돌멩이를 골라낸 후 깔끔해진 퇴비 무더기에 차곡차곡 다시 묻어 두었습니다. 퇴비를 다시 묻으면서는 서울정토회 거사님들이 무상으로 보급하고 있는 EM 효소를 함께 뿌려 더욱 잘 발효가 되도록 했습니다.
▲ EM 효소
한편 화분에서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활짝활짝 피기 시작했습니다. 돌멩이 사이에도, 담벼락 밑에도, 곳곳에 노란색, 분홍색 꽃들이 봄햇살을 받으며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 봄꽃이 활짝 핀 화분들
▲ 돌담에 핀 꽃
지난주에 심은 채소 밭에는 벌서 작은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벌써 새싹이 돋아났다” 며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 상추밭에서 돋아난 새싹
옥수수, 토마토, 호박 등을 심은 화분 모종에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는데, 대신 스님은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난 후 문경에서 법사님들이 스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내려 온다는 연락을 받고 경주 남산으로 향했습니다. 경주 남산 자락 중에서도 제일 따뜻한 곳이 열암곡인데, 이곳에는 매년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곳입니다. 스님은 법사님들이 온다고 하자 “곧 있을 경주남산순례 답사도 할 겸 진달래꽃도 좀 구경시켜 시켜주자” 하며 열암곡으로 향했습니다.
아직 3월 말이라 꽃망울이 달린 정도쯤 되었을까 싶었는데, 입구에서부터 만개해서 곳곳이 분홍색 진달래 천국이었습니다.
▲ 경주 남산 열암곡 진달래
어떤 나무는 한 가지에 진달래 수십 송이가 꽃망울을 터뜨렸는데 스님은 이 모습을 보고 “저렇게 많이 핀 것을 경상도 말로 ‘오지게 피었다’ 이렇게 말해.”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법사님들은 “스님, 여기도 오지게 피었어요.”, “스님, 저기도 오지게 피었어요.”라며 즐거워 했습니다.
정말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여기도 진달래, 저기도 진달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오후 햇살이 산 속으로 비치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모습은 마치 분홍색 보석들이 공중에 박혀 있는 것마냥 아름답게 빛을 발했습니다. 법사님들은 ‘어머나!’ 라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이미 진달래꽃이 만발해서 경주남산순례 때는 진달래꽃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 대신 연달래꽃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컷 진달래 꽃구경을 한 후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오늘은 봄을 한껏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네요.
▲ 법사님들과 함께
경주 남산을 내려와서는 저녁식사 준비를 하러 법사님들은 일찍 두북으로 향했고, 스님은 울산 지역 법조인 불자 모임인 ‘반야회’ 구성원들과 간담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반야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법륜 스님의 반야심경 동영상 강연을 21회에 걸쳐 공부해 왔다고 합니다. 오늘 스님이 울산에 머문다고 하니 잠깐이라도 뵙고 인사를 하겠다고 해서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간담회를 주선한 분은 김용주 변호사님인데 정토회 자원활동가로서 오랫동안 스님과 인연을 맺어오고 있는 분입니다. 모임은 두북 정토수련원에서 이뤄졌습니다.
▲ 울산 지역 법조인 불자 모임 ‘반야회’
먼저 스님은 그동안 반야심경을 공부한 것이 지식에 그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불교의 핵심은 수행이라고 강조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불교의 핵심은 철학도, 사상도, 윤리도, 도덕도 아닙니다. 불교의 핵심은 수행입니다. 수행을 통해 고뇌를 사라지게 하고, 행복과 자유의 길로 인도한다는 게 불교입니다. 또 누구한테 빌거나 도움을 얻어서 그 길로 가는 게 아니라 마음의 작용 원리를 알아서 내가 체험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마치 만유인력의 원리를 이용해서 인공위성을 쏘면 그게 달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불교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어떻게 작용해서 괴로움이 생기고, 그 괴로움은 이런 모순에서 생겼기 때문에 이 부분만 수정하면 내 괴로움도 사라진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 중에 과학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무척 합리적입니다.
불교는 그런 마음작용을 논리적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을 단지 논리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논리를 불교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머리로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하다’, ‘괴롭다’ 하는 건 생각에서 오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 교리를 아무리 머리로 많이 이해해도 그것은 경험과는 다릅니다. 다만 불교를 합리적으로 이해는 했으니까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동인은 되지요. 그러나 불교 교리란 것도 결국 체험을 해야만 되는 거예요. 체험을 하는 게 수행입니다. 참선이나 염불은 수행 방법 중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운동부족입니다. 운동 좀 하세요’ 한다고 친구들한테 ‘무슨 운동을 할까?’라고 묻자 ‘운동은 축구가 제일이다’, ‘아니다. 운동은 농구가 제일이다’ 이러면서 싸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무슨 종파논쟁 같은데 개입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 논쟁은 어떤 세력을 형성해 보려고 할 때는 필요가 있겠지만요.
그러니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배우고 있다는 반야심경을 통해서 ‘불교가 이렇게 훌륭하구나’ 하는 것을 아는 데서만 끝을 낸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불교지식이 좀 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치를 탁 깨달으면 ‘아, 정말 옳고 그른 게 없는 거구나. 아까 저 사람이 나한테 틀렸다고 하니까 내가 화가 났는데, 그건 저 사람의 생각이 그렇다는 거구나’ 하고 이해가 되어서 실제 화가 안 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경험해 나가야 합니다. 다만 제가 반야심경을 강의한 이유는 사람들이 불교를 너무 허황되게 생각하니까 ‘불교는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것이니 불교를 우습게 보지마라’ 하는 관점에서 말로 설명한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정토회를 신앙공동체라고 하지 않고 수행공동체라고 합니다. 정토회는 신앙하는 집단이 아니고 수행하는 집단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라면 재가나 출가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승속을 따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스님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고,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크리스찬이 불교수행을 한다면 그 사람은 ‘크리스찬-부디스트’가 됩니다. 정토회에서는 굳이 신앙을 바꾸란 말을 안 해요. 조상들로부터 지켜오는 신앙이 있다면 그것을 가진 채로 수행을 하면 됩니다. 또 바꾸고 싶으면 바꿔도 돼요. 신앙을 바꾸는 건 개인의 자유이니까요. 그러니까 해탈의 길로 가기 위해서 신앙을 강제로 바꿔야 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종교를 갖기 싫으면 갖지 않고 수행하고, 종교를 갖고 싶으면 갖고 수행하고, 불교 신앙을 갖고 싶으면 불교 신앙을 갖고 수행하고, 기독교 신앙을 갖고 싶으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수행하면 됩니다. 신앙은 개인적 믿음이니까 개인이 알아서 하되, 다만 해탈을 하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서 정진을 해야 합니다.”
모임의 성격이 학습 모임이다 보니 자칫 지식적인 학습에만 그칠 수 있었는데, 스님의 얘기를 듣고 나니 불교의 핵심인 수행의 중요성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어서 “그동안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점이나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던 점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라고 하자 몇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 중 변호사 한 분이 오늘 스님을 직접 뵙는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 법문을 들으며 불교는 어떤 종교인지, 진리는 어떻게 탐구하는지에 대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안이 불교 집안이고, 어머님도 절에 다니시면서 제가 입시를 앞두고 있을 때는 절에 가셔서 저를 위해 기도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불교 문화에 젖어있는데, 스님 강의를 들을 때는 ‘불교의 진리란 이런 거구나’ 하다가도 생활 속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마음이 굉장히 외롭고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또 절을 찾게 되더라고요. 절에 가서 염불하고 기도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지니까요. 그래서 가기는 열심히 가는데요. 제가 일상 속에서도 마음을 다스리거나 강하게 하려면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까요?”
“기독교 신자가 교회나 성당에 가서 위로를 받듯이, 불교 신자가 절에 가서 위로를 받는 게 나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위로를 받는다는 건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거잖아요. 위로를 통해서는 해탈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나를 도와주는 존재가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내가 그 존재로부터 도움을 받는 한 나는 그 존재의 속박을 받을 수밖에 없잖아요. 예를 들어 부모로부터 내가 도움을 받으면 도움을 받는 동안에는 행복할지 몰라도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하면 내 행복은 없어지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위로는 자립적인 게 아니라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겁니다. 그건 해탈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렇다고 필요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어릴 때 다 부모의 도움을 받고 자라듯이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사정으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종교를 부정하진 않으셨지만 그건 해탈의 길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내생이 있느니 없느니, 천당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굉장히 중요한 위로의 한 요소이니까요. 그러나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해탈이란 그런 위로의 한 종류가 아닙니다. 천당 간다는 걸 극락 간다고 바꾸어 표현하는 정도가 불교는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는 ‘나의 이 두려움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를 참구해서 그 두려움의 뿌리를 찾고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즉문즉설 법문을 들으면서 ‘어떻게 저 사람들이 갈등으로부터 벗어나는가?’ 하면서 그 이치를 한번 파악해 보세요. 그리고 실제로 체험도 해 보시고요. 질문자의 질문의 요지는 ‘어떤 일로 괴로움이 생기느냐?’ 하는 건데, 그렇게 막연하게 질문하면 지식적인 얘기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질문은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질문자가 ‘남편이 바람을 펴서 화가 납니다’ 그러면 스님은 ‘남편이 바람 폈는데 왜 당신이 화가 나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 질문자는 ‘어떻게 화가 안 날 수가 있어요?’라고 하겠지요. 그럼 저는 ‘그런데 그게 왜 화가 나느냐?’ 라고 합니다. 이런 대화가 오고가면 처음에는 질문자가 답답해서 미치려고 합니다.(모두 웃음)
그런데 제가 계속 ‘바람난 남편은 그 여자를 만나서 즐거웠다는 거 아니냐? 당신 남편이 즐거웠다는데 왜 당신이 괴롭냐?’ 하면서 계속 물어 들어가면 그 질문자는 ‘바람난 남편이 나쁘고, 남편이 나를 괴롭히기 때문에 내가 괴롭다’라고 말은 하겠지만 자꾸 깊이 들어가다 보면 자신의 괴로움이라는 게 어디서 왔는지 자각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직접 해 봐야 해요. 이런 방식이 부처님의 본래 문제해결 방식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보면, 어떤 질문자가 ‘저 사람이 욕을 해서 화가 납니다’ 라고 하면 저는 ‘저 사람이 욕을 했다고 네가 왜 화가 나느냐? 그 사람이 너를 화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했느냐? 아니면 자기가 성질나니까 자기 성질대로 소리를 지른 거냐?’ 라고 묻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성질대로 소리를 지른 거란 말이에요. 그 사람은 그 사람 성질대로 소리를 질렀는데, 질문자가 끌려들어간 거예요. 자기가 성질나서 소리치는 사람한테 왜 질문자가 다가가서 그 오물을 덮어쓰느냐고요. 그냥 ‘오, 저 사람 지금 성질났구나. 성질나서 난리피우네’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사람이 성질을 가라앉힐 때까지 웃으면서 지켜보면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잘 안 되지요. 안 되니까 연습을 해야지요. 끌려들어갈 때마다 ‘오, 이번에 또 끌려들어갔다. 바보같이 내가 또 남의 쓰레기를 뒤집어썼네’ 이렇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빙긋이 웃을 수 있는 날이 옵니다. 한 바라문이 부처님한테 막 욕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 바라문을 보면서 빙긋이 웃으셨다는 얘기도 있잖아요. 부처님의 교화 사례가 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불교 공부를 통해서 부처님의 인격을 닮아가야 합니다. 어렵겠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게 수행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런 수행을 안 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지금이라도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는 수행을 통해서 부처님의 인격을 닮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첫째, 이치를 알아야 되고, 둘째, 직접 해 봐야 합니다. 그런데 해 보면 잘 안 되지요. 왜 그럴까요? 까르마 때문에 그렇습니다. 욕을 들으면 탁 화가 나는 프로그램이 짜여 있단 말이에요. 그건 마치 인공지능과 같은 거예요. 프로그램이 짜인 대로 반응을 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내가 정말 자유인이라면 프로그램이 짜여진 대로 안 놀아나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놀아나면 그건 로봇이에요. 다른 사람 같으면 프로그램 짜인 대로 반응을 하겠지만 수행자는 그렇게 반응을 하지 않고 다만 빙긋이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까르마로부터 해탈한 분이시고, 우리는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까르마의 놀음에 안 놀아나는 것, 그게 해탈이고 자유입니다.
▲ 두북 정토수련원에 핀 홍매화
그러니까 부처님 법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다 연기적인 거예요. 부처님은 모든 것이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즉 연기 되어 있다고 보셨어요. 그래서 연기법이 위대하다는 거예요. 부처님이 발견하신 12연기가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인데 그 고리가 아주 정확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 중에 ‘수’라는 고리를 알아차려서 우리가 반응을 안 하면 나머지 고리도 끊어진다고 하셨어요. ‘애’에서 고리를 끊는 것이 계율이고, ‘수’에서 고리를 끊는 것이 선정이고, ‘무명’에서 고리를 끊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런 원리에 따라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이런 위대한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이 불교인데, 기도하면 복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것은 하수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불교 공부를 하시고 나면 교만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 당당해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답답할 때 절에 가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거부할 필요도 없고, 기존의 스님들이 가르치는 것을 잘못됐다 이렇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이 달라도 신부님들, 목사님들을 존중하잖아요. 그것처럼 기존의 스님들도 모두 존중해야 합니다. 다만 부처님 법의 원칙에 의해서 본다면 이렇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비록 미약하지만 부처님의 법의 원칙에 입각해서 수행해 보려고 지금 발버둥을 치고 있어요. 법문은 거기에 견주어서 하고요. 어떤 사람들은 즉문즉설을 듣고 나서 ‘스님이 선법문을 안 하고 무슨 부부생활 상담을 해주느냐’ 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스님은 번뇌에 대해 상담을 하는 겁니다. 어떤 번뇌에 대해서도 ‘번뇌가 왜 생겼니?’ 이렇게 물어 보잖아요. ‘연애에 실패해서 괴로워요’ 하는 번뇌나 ‘남편 때문에 못 살겠어요’ 하는 번뇌나 ‘아이가 시험에 떨어졌어요’ 하는 번뇌나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하는 번뇌나 ‘화두가 안 들립니다’ 하는 번뇌나 모두 제가 볼 때는 번뇌의 종류일 뿐입니다. 8만4천 번뇌 중에 그냥 한 번뇌가 있는 것이거든요. 그 번뇌에 대해서 저는 법문을 하는 겁니다. 문답을 통해서 그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식적인 질문을 하거나 교리적인 질문을 하면 지식적인 대답을 하게 되는데, 그것조차도 진짜 법문으로 대답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저는 ‘공’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고 ‘그것이 왜 궁금한데?’ 라고 되묻습니다. ‘공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지식적인 접근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부처님 법은 아닙니다. 그것이 진리가 되려면 ‘그 번뇌가 너에게 왜 일어났는데?’, ‘왜 공이 무엇인지 궁금한데?’ 이렇게 질문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이 왜 일어났느냐를 살펴야 됩니다.
사건은 그냥 사건일 뿐입니다. 그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바르게 보면 두려움이 안 일어나고, 무지에 의해서 오해를 하게 되면 심리가 불안해 집니다. 바르게 보는 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화를 내는 이유도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못하는 것은 나의 무지 때문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무섭다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착한 사람은 어릴 때부터 늘 자기가 착하고 바르다고 얘기듣고 자랐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변호사님들이 대부분 다 그래요.”(모두 웃음)
“제 말의 요점은 우리가 ‘프로그램’, ‘까르마’,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화를 내던 상황에서 안 내는 게 해탈의 길이고, 자유의 길이라는 거예요. 거기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지는 게 수행의 핵심이에요. 죽고, 다시 태어나는 문제가 핵심이 아니에요.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지금 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원리를 설명해 놓은 게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공사상입니다. 공이라는 게 뭡니까. 정해진 바가 없다는 거잖아요. 다들 ‘운명이 정해져 있다’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공이다’, ‘정해 진 바가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수행을 통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겁니다.”
질문한 분은 활짝 웃으면서 스님의 답변에 공감을 표했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원래는 1시간 법문을 요청했는데 스님이 부처님의 일생부터 다양한 사례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니 흠뻑 몰입이 되어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스님이 참석한 법조인에게 새책 ‘행복’을 사인해서 선물하니 모두들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법조인들 중에서도 불법을 바르게 공부해서 세상에 희망이 되는 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길 기원해 봅니다.
내일은 새벽 2시에 울산 두북을 출발해 6시에 서울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침 10시 30분부터는 양재동 더케이아트홀에서 서초구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다시 대구로 내려가서 저녁 7시부터는 수성대학교 대강당에서 대구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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