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12.29 연말 명상수련 4일째, 즉문즉설 제1부 (수행편)


 

안녕하세요. 지난 12월 26일에 시작한 명상수련이 오늘로서 4일째를 맞이했습니다. 이번 명상수련은 매년 여름에 진행되는 일반인 명상수련과는 달리 정토회 활동가들을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활동가들은 일을 많이 하다보니 자칫하면 수행을 놓치기 쉬운데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함께 정진을 하게 되어 다시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 문경 정토수련원 대수련장

 

첫째날 입재 법문을 시작으로 문경 정토수련원 대수련장은 시작과 끝을 알리는 죽비 소리만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울릴 뿐 고요한 정적만 흐른 채 명상이 계속 되었습니다. 활동가들은 대부분 명상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번 명상수련에서는 스님도 법문을 거의 하지 않고 명상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늘 법문을 들으며 명상을 했는데 법문이 일절 없으니 몇몇 분들이 “너무 지루해요” 라고 답답함을 토로하는 건의를 해서 3일째 저녁에는 스님의 격려 법문이 한 차례 있었습니다. 스님은 명상을 꾸준히 하는 것은 수행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4일째 저녁에는 이번 명상수련을 마무리하면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즉문즉설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서 진행이 되었는데, 전반부에서는 수행과 관계된 질문을 주로 받았고, 후반부에서는 활동하면서 겪는 의문이나 애로점들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먼저 스님이 이번 시간의 취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4일간 정진 잘 했습니까? 이 시간만 묵언을 풀겠습니다. (모두 웃음) 누구든지 손을 들고 자유롭게 질문하세요. 수행하면서 느낀 점, 교리 상의 의문점, 평소 정진하다가 생긴 문제, 활동하면서 겪는 의문이나 애로점이 있으면 질문하세요. 

 

개인 질문은 하지 말라고는 않겠지만 이렇게 우리 활동가들끼리 모여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제가 보고 한두 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면 일단 넘기겠습니다. 하는 것까진 좋지만 제가 듣기만 하고 넘길 테니 그리 이해하고 섭섭해 하지 마세요. 저만 보면 그저 개인사 묻고 싶죠?” (모두 웃음)

 


 

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곧이어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간에 쉬는 시간 없이 약 네 시간 동안 10여 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명상수련의 끝무렵이여서 그런지 선정을 닦는 방법에 대한 질문이 많은 분들의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선정법과 다른 선정법의 차이점에 대해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머리로는 어느 정도 정리했지만 스님께 명확한 말씀을 듣고 싶어 여쭙니다. 오후 명상 중에 문득 부처님께서 선정주의자들로부터 선정을 배우신 뒤에 다시 나오신 게 생각났습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라 해서 다 선정 아닌 게 없다고 말하지만, 일상적으로는 고요히 앉아서 선정에 들면 괜찮아졌다가도 선정에서 깨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부처님께도 선정을 늘 할 수가 없고 선정에 들 때만 행복하다면 이건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고 생각하셨기에 선정주의를 부정하고 나오셨다고 배웠습니다. 당시 인도에도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선정법이 많은데, 부처님의 선정법은 다른 것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요? 부처님의 삶이나 계율, 전법 같은 여러 가지 활동과 결국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져서 여쭙니다.”

 

“수행을 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즉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듭니다. 첫째는 바깥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을 정갈하게 하는 것, 즉 계행을 청정히 지키는 것입니다. 다음은 그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즉 선정을 닦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아는 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율을 중시하지 않고 선정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주 들어맞지는 않지만 대표적으로 라즈니쉬 계열이 그런 편입니다. 선정을 이야기하기는 하나 계율이 그리 엄격하지 않고 인간의 욕망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때문에 특히 북미·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어요.

 

다른 한편으로 선정은 있으되 지혜, 즉 깨달음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도 선정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이렇게 오직 고요함만을 추구했어요. 부처님께서 고요함을 추구하신 것은 인도에 이미 있던 선정의 방법을 배워서 그대로 행하신 거예요. 그런데 고요함만 추구하는 것은 완전한 고요함인 열반이 아닙니다. 깨달음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어진 일정 조건에서만 고요함이 유지되지, 고요함이 일상에서 유지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스승 곁을 나와서 더 깊은 선정을 닦았지만 여전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어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다가, 우리들 대부분이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욕망을 따라간다고 한다면 선정은 그 욕망을 주로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욕망을 지나치게 억제하면 고행주의라 하고, 고행주의가 아니더라도 선정주의 또한 어느 정도 욕망을 억제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모두 욕망에 대한 반응이라는 걸 깨닫고 그 고행마저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중도(中道)를 발견하셨습니다.

 

이 중도는 붓다가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신 거예요. 당시 인도 사회의 주류였던 브라만교에서는 수행을 하더라도 욕망을 충족시키는 게 복이고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반대해서 일어난 사문류에서는 욕망에 대한 절제와 억제를 중시했습니다. 부처님은 이 비주류에서 출발했지만, 주류의 모순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비주류에도 역시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셨어요. 그래서 주류를 무조건 반대하는 개념도 놓아버리고 오직 진실이 어떠냐는 관점에서 접근하신 결과 소위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는 중도를 발견하시고, 중도의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으신 뒤의 부처님의 행보를 살펴보면 계율도 또한 잘 지키셨습니다. 불교는 계율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이 계율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서 욕망을 억압하고 억제하는 계율이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님은 보여주기 위한 계율, 예컨대 밥을 안 먹거나 잠을 안 자는 것으로 대중의 신비주의를 자극하는 계율을 금하셨습니다. 

 


 

특히 데바닷타와의 토론을 보면 이런 뜻이 잘 드러납니다. 당시의 고행주의자들은 반드시 걸식을 해야 하고, 식사 초대를 받으면 안 되며, 하루 한 끼만 먹어야 하고, 고기도 먹으면 안 됐어요. 옷은 시신을 싸서 버린 분소의만 입어야 했어요. 잠은 나무 아래나 동굴처럼 자연적인 곳에서만 자야지, 인공적으로 만든 처소에서 자면 안 돼요. 이게 당시 수행자의 기본자세인데 이제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는 때로는 식사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두 끼 먹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고기 든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새 옷을 입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집에서 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데바닷타가 계율을 좀 더 엄격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문제제기를 했을 때, 부처님은 걸식을 하는 건 수행자로서 참 모범적이고 훌륭한 일이지만 ‘걸식만 해야 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어요. 이게 차이점이에요. 계율을 지키는 건 좋지만 그 계율에 대해서 단정해버리거나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기본적으로는 그걸 지키는 게 옳지만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에요. ‘걸식할 필요 없다. 밥을 사먹어도 되고 식사 초대를 받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계율을 흩트리는 쪽으로 갔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걸식하는 것은 수행자로서 참 훌륭한 일이라고 붓다도 권유하셨고, 붓다 자신도 평생 그렇게 하셨어요. 그러나 때로는 식사 초대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식사 초대를 받았다고 해서 그걸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루 한 끼만 먹는 것은 수행자로서 참 잘하는 일이지만 그걸 딱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성년이 되기 전에 출가한 사미들처럼 아직 신체적으로 더 자라야 하는 아이들이나 영양분이 필요한 환자는 하루 두 끼를 먹을 수도 있잖아요. 채식을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걸식을 하는데 상대가 준 음식에 예컨대 생선이 들었다고 해서 먹지 않고 버릴 수는 없잖아요. 걸식은 주는 대로 먹는 게 핵심이지, 음식에 뭐가 들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불교는 채식을 주로 하지만 채식주의는 아닙니다. 채식주의는 채식 외에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니까요. 주로 걸식을 하니까 대부분 채식을 하는 편이긴 하지만, 채식만 해야 한다고 단정지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육식을 하지 말라’ 혹은 ‘채식만 하라’ 이런 계율은 없고, ‘맛에 집착하지 말라’라는 계율이 있습니다. ‘한 끼만 먹어라’ 이런 계율은 없고, ‘때 아닌 때에 먹지 말라’ 이런 계율만 있습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더라도 때가 아닌 때에 먹어서는 안 돼요. 몇 끼를 먹느냐는 형식보다는 음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서 음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옷과 잠자리도 그렇습니다. 분소의를 입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이지만 분소의가 없다면 새 옷을 입을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예컨대 분소의는 열 벌뿐인데 출가한 사람이 스무 명이라면 열 명은 옷이 없어서 수행자가 못 되거나, 벌거벗고 다녀야 하거나, 새 옷을 가져와 시신을 한번 덮었다가 벗겨서 입어야 하잖아요. (대중 웃음) 

 


 

그렇게 형식적으로 할 필요는 없으니 분소의가 없을 때는 새 옷을 입어도 좋다는 겁니다. 일부러 새 옷을 입으라는 게 아니에요. 나무 아래나 동굴에서 자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비가 오거나 할 때는 사람이 없는 빈 집의 처마 밑에서 자도 좋다고 했습니다. 수행자가 밖에서 잔다는 것은 안온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잠자리가 인공적인지 여부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계율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계율을 잘 지키되, 이렇게 열려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고행주의나 율법주의와 달랐어요. 계행을 안 지켜도 안 되고, 계행을 경직시켜도 안 되는 가운데 중도를 지키는 것이 부처님의 위대함이에요. 이렇게 계율에도 다 중도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선정을 닦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정을 닦을 때는 욕망을 따라가도 안 되고, 욕망을 억압해도 안 되고, 다만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리라는 거예요. 따라가지는 않지만 억압하면서 안 따라가는 게 아니라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가지 않는다는 형식에서는 고행주의와 같고 계율을 지킨 것과 같지만, 억압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고 즉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선정도 집중하거나 호흡을 관찰하거나 시신을 보며 명상하는 부정관처럼 바깥에서 보이는 형식은 다른 선정주의와 같지만 그 관점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관점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렇게 할 때만 자기 상태는 물론 모든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사물이 움직이는 법칙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다른 말로 ‘바르게 사물을 알아차리고 사유한다’라고 합니다. 법칙과 이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에 따른 사유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와 당시 다른 종교의 차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불교가 종교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근본불교의 수행법과 계율에 담긴 원래 가르침은 대부분 없어지고 그냥 ‘불살생’이라는 계율이나 종교의식의 형식만 남아 전해지게 되었어요. 불교의 본질 중 아주 핵심에 해당하는 10퍼센트는 잃어버리고 90퍼센트의 형식만 남으니까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이나교나 불교나 비슷해져 버렸어요. 인도에서는 힌두교나 불교도 별 차이가 없어요. 같은 인도식 건물이니까 사원 모양도 비슷해 보입니다. 외국인이 보면 우리 서원이나 절이나 다 똑같은 기와지붕 건물로 보이잖아요. 자세히 보면 물론 다르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단청이 있고 없고 정도밖에 구분 못 하는 수준이에요.

 

그래서 그런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입니다. 이미 이렇게 혼용되어버렸기에 정체성을 상당부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불교는 인도의 전통 브라만교를 반대해서 일어난 가르침이었지만, 후대의 인도 불교는 시간이 흘러 민중화되는 과정에서 인도 문화를 도로 흡수하게 됩니다. 중국 불교가 중국 문화를 흡수하고 한국 불교가 한국 문화를 흡수한 것도 마찬가지예요. 같은 문화권에 있는 형식이다 보니 자연적으로 종교화되는 과정에서는 힌두교와 큰 차이가 없어져서 수행법도 계율도 유야무야 되고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소승불교라고 해서 반드시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소승불교 역시 대부분 인도 문화권이기 때문이에요. 경전이나 계율 같은 것은 소승불교가 불교 중에서 제일 원칙을 지키고 있는 편이긴 하지만 신도들이 신앙 생활하는 형태는 힌두교와 거의 비슷해요. 예를 들어 스리랑카에 가 보면 복식 같은 건 힌두교와 완전히 달라보일지 몰라도 신자들이 지내는 제사 의식은 거의 힌두교 문화예요. 그게 곧 인도 문화니까요. 우리 한국 불교인들이 유교의 영향을 받아서 제사지내는 것처럼, 그런 문화적인 요소는 거의 비슷합니다. 

 


 

독자적인 문화를 따로 유지하지도 못했고, 인도 내에서는 이슬람교의 침입을 받으면서 원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출가해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리니까 자연히 토속신앙인 힌두교로 흡수되어 버렸어요. 조선시대에 출가를 못하게 막은 결과 오늘날 우리 한국 불교도 산신이나 칠성 운운하는 민속신앙과 융합해 비슷해져 버렸잖아요. 또 우리나라에 유교와 불교만 있을 때는 차이가 크다고 해서 유교가 불교를 탄압했는데, 훗날 기독교가 들어오니까 유교와 불교가 비슷해졌어요. 유교는 자체적인 유지를 못하고 지금은 불교 안으로 들어오다시피 해버렸습니다. 인도에서도 출가를 막고 절을 파괴해버리니까 불교가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렸어요. 힌두교는 따로 출가를 하거나 교육을 받는 게 아니라 누구나 다 나무 밑에 가서 빌 수 있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을 다 죽이지 않는 이상은 없애려야 없앨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서양 달력을 들여와서 음력설을 없앤다 해도 농민들이 계속 지키니까 어쩔 수 없이 음력설로 돌아간 것처럼, 현재 인도에서는 불교가 힌두교 안으로 흡수되어 버렸어요. 

 

정리하자면 첫 번째로는 정체성을 상실했고, 두 번째로는 외적인 탄압에 의해 다른 신앙에 흡수되어 버렸습니다.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인도의 불교가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궁금함이 모두 해소되자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습니다. 부처님이 알려준 명상법은 계율과 선정, 지혜를 함께 추구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역사를 들으면서 가슴 한 켠이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수행에 대해 질문한 전반부 시간이 다 지나가고 이어서 활동과 관련해 들었던 의문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시간이 진행되었습니다. 법사님, 처장님, 각 부서 국장님, 각 법당 총무님 등 정토회의 주요 간부들이 모인 자리여서 그런지 일반 법회와는 달리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후반부에 이어진 정토회 활동과 관련된 즉문즉설은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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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30

0/200

월광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 주시니 다시 수련을 하는 것 같습니다. <br />삼보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2016-01-02 13:48:01

박봉미

고맙습니다.
스님의 말씀으로 2016년에도 배우고 행하겠습니다.
_((()))_

2016-01-01 06:10:09

허수정

잘 읽었습니다. 올 한 해 일과 수행 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5-12-31 23: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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