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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 10시 30분부터 남양주에 위치한 경복대학교에서 남양주 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저녁 7시부터는 일산 정발산 성당에서 일산 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먼저 남양주 즉문즉설 강연 소식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어제밤 진주에서 통일 강연을 마치고 새벽 2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스님은 밤을 꼬박 새며 새책 원고 집필 작업을 한 후 새벽 4시부터는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예불과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9시에는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해 즉문즉설 강연이 열리는 남양주시로 향했습니다. 차 안에서는 밤새 원고를 봤다고 하며 깊이 단잠을 주무셨습니다.
강연이 열리는 남양주시 경복대학교에는 10시 10분에 도착했습니다. 건물 1층 로비에서는 가장 먼저 총장님 이하 몇몇 학교 직원 분들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스님을 총장실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담소를 나누기 위해 총장실에 들어가기 전, 정성스럽게 자필로 방명록을 남겼습니다. 미래를 이끌어나갈 청년들이 단순 지식보다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현명한 지혜를 쌓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보였습니다.
총장실에서 환담을 나누며 총장님은 “스님을 저희 학교에 모시게 되어서 영광이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스님은 새책 ‘야단법석’을 사인해서 선물했습니다.
▲ 경복대학교 총장님과의 환담
어제 첫눈이 내린 후 갑자기 겨울의 날씨가 된 듯 칼바람이 몰아칩니다. 강연 2시간 전부터 밖에서 피켓을 들고 안내하는 분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며 밝게 웃습니다.
▲ 오늘 강연이 열린 경복대학교 우당아트홀
추위에도 물러섬 없는 봉사자들의 열정을 보며 오늘 남양주정토회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 강연을 준비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강연은 남양주법당, 구리법당, 양평법당, 포천법당, 의정부법당 5개 법당에서 90여 명의 봉사자들이 준비했습니다.
▲강연 준비로 분주한 봉사자들
이른 시간부터 강연을 기다리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50대 여성 한 분은 “그동안 유투브로만 즉문즉설을 들어왔는데, 오늘 스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가정에 돌아가 아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빙그레 웃어보였습니다.
10시 30분이 되자, 사회자의 환영 인사와 스님 소개 영상으로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이 무대에 오르자 400여 명의 관객들은 열렬한 환호로 뜨겁게 스님을 맞아주었습니다.
무대에 오른 스님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감기 걸리지 않도록 건강을 당부하고, 즉문즉설의 취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후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총 7명의 질문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질문한 20대 여성 분은 자신은 친구들과 있을 때 고민을 들어주는 입장인데 더 많은 고민을 들어주는 스님은 스스로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물었고, 두 번째로 질문자한 60대 남성 분은 7년간 막내아들의 출가를 반대하다 한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허락한 자기의 마음을 하소연 한 후 출가한 아들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고, 세 번째로 질문한 50대 여성 분은 무서움이 많아 집에서 혼자 있지 못한다며 어떻게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네 번째로 질문자한 40대 여성분은 호스피스의 직업 상 아무 준비 없이 가족과 이별을 할 때 슬퍼하는 유가족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지 물었고, 다섯 번째로 질문한 중1, 초2의 아들을 둔 엄마는, 아들 둘의 사이가 소원한 것이 큰 걱정이라며 질문했고, 여섯 번째로 질문한 40대 남성분은 개신교에는 헌금, 천주교에는 교무금, 불교에는 보시가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돈을 내야 하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사전 신청한 질문자의 마지막 질문이 끝나고 2분이라는 시간이 남자, 그 짧은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스님은 즉석에서 한사람 더 추가 질문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질문자는 기독교에 회의를 느껴 혼자 절에 다니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명쾌한 스님의 답변에 질문자들의 표정은 밝아졌고, 관객들은 질문자와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과 감동의 2시간 30분이 금새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그 중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 마지막 질문자의 물음과 스님의 답변 내용을 소개합니다. 강연장을 찾은 불교 신자 뿐만 아니라 천주교, 개신교 신자들도 이 질문에 충분히 공감을 하고 이해를 할 수 있어서 너무 명쾌했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신앙에 대한 의문입니다. 저희 집안은 다 기독교인데 저 혼자 버티면서 절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한테 빌면 원하든 대로 이뤄진다고 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고 가족들이 강요하는 것도 싫어서 교회에서 등을 돌렸어요. 그런데 저 역시 염원이 있으면 부처님께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런 기복적인 면이 불교 이치상 어긋난다고 아까 말씀하셔서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이치로 따지면 기독교나 불교나 다 어긋납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은 다 복을 받고 싶어 해요. 남의 복을 훔치는 것도 아니고, 복 달라고 한 대서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주는지 안 주는지도 확실치 않으니 그걸 굳이 나쁘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기복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인연과’에도 어긋나고, 예수님의 원래 가르침에도 어긋나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복을 받으려 들기보다는 복을 지어야 해요. 원래 기독교 가르침에 따르면 복을 짓고도 칭찬받으려 들지 말아야죠. 좋은 일을 하고 이 세상에서 대가로 받은 상은 작지만, 천국에 가서 받은 상은 매우 크다고 하잖아요. 이 말의 핵심은 많이 받고 적게 받고에 있지 않아요. 좋은 일을 하고도 칭찬받으려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셔서 나중에 천국에 오면 큰 상을 내릴 테니 이 세상에서 작은 이득에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에요.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와 같아요. ‘내가 복을 짓고도 복 받을 생각을 안 하면 그 복은 한량이 없다’ 이걸 무루복(無漏福)이라고 합니다. 표현 방법이 다를 뿐 가르침의 내용은 비슷해요.
복 달라고 빌면서 부르는 이름만 부처님, 하나님이 서로 다르지, 사람의 심리는 똑같아요. 그런데 그거 하려고 굳이 교회에서 절까지 올 필요 있어요? 개인적으로 교회가 싫어서 절에 오는 것은 괜찮지만, 와놓고 하는 행동은 똑같잖아요. (청중 웃음)
‘하나님, 복 주세요’, ‘부처님, 복 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어요. 되면‘ 가피 입었다’, ‘은혜 입었다’ 하고 좋아하지만 안 되면 ‘기도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네. 믿어봐야 소용 없네’라고 해요. 이 말은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이나 부처님에게 나를 바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종 부리듯이 부리려드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걸 내놔라, 안 내놓으면 너를 안 믿겠다’ 그건 신앙이 아니에요. 복을 비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 속내를 살펴보면 참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기독교 신자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야죠. 감사 기도를 한다는 것은 복을 이미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이미 받았기 때문에 감사 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미 복을 한량없이 받은 거예요. 이미 복을 받았으니 기도하면서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 없이 감사 기도를 하면 됩니다. 그 분은 모든 걸 다 아시는 분이니까 내 마음도 이미 다 아시거든요.
성경에 ‘기도할 때 은밀히 하라’ 이런 말씀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걸 조목조목 짚어서 이야기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마이크 대놓고 큰 소리로 기도해요. 그 분이 전지전능하다는 걸 못 믿어서 조목조목 이야기 안 하면 잊어버리고, 크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나 같은 수준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래요. 그러나 그 분은 이미 내 마음을 다 아시는 전지한 분이시잖아요.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관세음보살님은 눈이 천 개라서 다 보시고, 손이 천 개라서 다 구제하십니다. (청중 웃음)
그런 분이 왜 내 요구를 안 들어주실까요? 쥐가 쥐약 든 고구마를 먹고 싶어 안달하는데 입이 안 닿아서 ‘하나님, 부처님, 이거 좀 먹게 해주세요’하고 빌면 저렇게 간절히 원하니까 먹도록 그 소원을 들어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때로는 안 이루어지는 편이 좋을 때가 굉장히 많아요. 간절히 빌어서 결혼했는데 지금 결혼 생활도 골치 아프고, 간절히 빌어서 애 낳았는데 지금 애 때문에 죽겠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기도할 때는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해요. 전지전능하신 분이 보셔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게 나으면 그리 해주시고, 안 이루어지는 게 나으면 또 그렇게 해주세요. 그러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도 감사하고 안 이루어져도 감사하니 신앙에 어긋날 이유가 없어요. 절과 교회를 오락가락하며 전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조계사에서 대학생들 지도 법사로 있을 때 한 학생이 시위를 하다가 3년 형을 구형받았어요. 그 어머니가 날마다 조계사에 와서 ‘우리 아들 빨리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3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나왔습니다. ‘부처님 가피를 입었다’며 어머니가 크게 기뻐했어요. 그런데 그만 3개월 만에 교통사고가 나서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러자 그 어머니가 저를 붙들고 ‘내가 나오라고 빌어서 아들을 죽였다’며 울었습니다. 이게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塞翁之馬)’입니다. 감옥에서 나오는 게 꼭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더 큰 재앙을 피하려고 들어가게 된 건지도 모르잖아요.
하나님을 믿고 부처님을 믿어서 기도하는 우리는 부처님 혹은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러니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해요. 이게 신앙 고백이에요. 질문자도 교회 가서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든지, 절에 가서 절하면서 ‘부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계속 행복해지고 고민도 줄어듭니다. ‘문화가 달라서 나는 교회보다 절이 좋다’ 이런 건 자기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거니까 괜찮아요.”
“교회는 사랑이라고들 말하는데 겪어보니 이중적인 느낌이 많이 들어서 싫어요.”
“절에 가도 마찬가지예요.” (청중 웃음)
“하나님의 가르침이 거짓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한다는 하나님이 안 믿는다는 이유로 불신자들을 불에 던져버리는 이야기를 듣고 환멸을 느꼈어요. 그 신이 과연 자비의 신인가 의문이 계속 들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불교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힌두교이고, 기독교라 하지만 대부분은 유대교에 가깝습니다. 질문자가 다닌 교회는 이름만 기독교일 뿐 유대교라고 생각하면 돼요. 예수님 이후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천당에 갔을 때 스님도 와 있다면 반가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교도가 여기 어떻게 왔지? 안 믿어도 오는데 괜히 믿었다’ 이러기 쉽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천국에서 저를 만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교도도 구원하시니 참으로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이렇게 기뻐해야 합니다. 이게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청중 웃음)
크리스천들과 기독교가 그리 못 하는 건 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불교도 원래의 가르침을 잘 따르지 못해요. 그러나 이건 인간의 문제이지, 부처님이나 하나님의 문제는 아니에요. 예컨대 시어머니가 절에 지극정성으로 다니면서 정작 며느리 대하는 건 형편없다면 그 며느리는 절에 안 다닙니다. 반발심으로 교회에 가버려요. 질문자는 가족들이 교회에 극성이면서 실제 말이나 행동은 다른 걸 보고 실망했잖아요. 그건 인간의 죄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도 다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주십니다. 질문자가 절에 좀 다닌다고 해서 자비하신 하나님이 벌주시지는 않아요.
옛날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제게 했어요. ‘스님, 하나 물어볼게요. 제가 고3 손녀딸 때문에 입시 합격 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성취가 안 될 것 같아요. 손녀딸이 사실은 교회에 다니거든요.’ (청중 웃음)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부처님이 아무렴 할머니 마음 같을까요? 고등학생이 교회 좀 다닌다고 해서 붙을 시험도 떨어지게 만드는 건 부처님이 아니에요. 그러면 대자대비하시다는 표현을 안 써야죠.’
그러니 그런 거 걱정 마시고, 교회든 절이든 질문자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주옥같은 말씀 감사합니다.” (스님 웃음, 대중 박수)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질문자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청중들도 공감이 컸는지 크게 박수를 쳤습니다.
오늘은 종교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지다 보니 종교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니 2시간 30분이 지났고 드디어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이 조금 부족했는지,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변화된 시대에 우리는 종교에 대해, 세상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다가가면 좋을지 추가적으로 더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융합의 시대를 설명하면서 ‘크리스천-부디스트’라는 사람들의 등장을 이야기한 부분은 청중들의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일단 결혼하면 남편이 신혼 첫날밤에 죽어도 평생 재혼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결혼해서 아이 낳고도 이혼하고, 재혼도 할 수 있어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도 할 수 있어요. 옛날에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 되는 게 불가능했지만 요즘은 다른 나라 사람도 될 수 있고,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을 수도 있어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미국 가서 살면 ‘코리안-아메리칸(Korean-American)’이라고 해요.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예요. 옛날에는 기독교 신자는 무조건 기독교만, 불교 신자는 무조건 불교만 믿어야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 신자로 자란 사람이 불교를 믿어도 되고, 그 반대도 됩니다. 그걸 배신이라고 한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전부 배신자입니다. 조상들이 전부 유교 아니면 불교를 믿었으니까요. 나는 배신 안 했어도 어머니나 할머니나 증조할머니처럼 가족이나 조상 중 누구 한 사람은 반드시 배신했어요. 이걸 따지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뭘 해도 다 괜찮아요. 기독교 믿다가 불교로 바꿔도 되고, 불교 믿다가 기독교로 바꿔도 되고, 기독교와 불교를 동시에 믿어도 돼요. 이중국적과 같습니다. 지금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일부 허용하게 될 거예요. 그것처럼 신앙은 기독교를 믿고 마음공부는 불교를 통해 하면 ‘크리스천-부디스트(Christian-Buddhist)’라고 합니다. (청중 웃음)
미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건 너무 가혹해요. 자기가 태어나서 성장해온 토대인 기독교도 소중하고, 불법 공부도 너무 소중한 거예요. 그래서 크리스천-부디스트라는 이름이 만들어졌어요. 맨해튼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에 가보면 크리스천-부디스트들이 많이들 공부하고 있고, 그 주제에 대한 연구도 활발합니다. 저도 거기서 강연을 했어요. 한편 신앙은 불교로 가지되 기독교 실천 활동이 너무 좋아서 기독교 신자가 된다면 ‘부디스트-크리스천(Buddhist-Christian)’이 되겠죠. 그래도 괜찮아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20년쯤 전에 중국에 가보니 공산당원들은 종교를 못 가진대요. 그런데 불교사상을 이야기해보면 마르크스 철학하고 유사한 면이 있잖아요. ‘세상이 다 연관되어 있다, 고정불멸하는 것은 없다’ 이런 원리가 비슷하다고 막 감동하기에 불교 믿으라고 했더니 자기는 공산주의자여서 절대로 안 된대요. 불교 신자로서 공산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공산주의자로서 불교 신자가 될 수도 있지 않냐고 해도 절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옛날에 사회주의는 계획경제, 자본주의는 시장경제라고 해서 사회주의가 시장경제 하면 수정주의자라고 비난받았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사회주의면서도 시장경제를 하잖아요. 그러니 공산당원 하면서도 불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20년 전 당시에는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요즘은 중국 공산당원들 중에서도 불교 신자들이 꽤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허용이 안 돼도 실제로는 믿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걸 융합이라고 해요. 미래 학문의 핵심은 융합입니다. 요즘 생물과 화학을 합쳐서 생화학이라고 하듯이 인문학과 자연과학도 융합이 되고, 종교와 과학도 융합되어 새로운 것이 나올 겁니다. 미래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 창조의 시대입니다. 지금까지처럼 분열해서 장벽을 쌓는 시대가 아니라 모든 장벽을 허물고 서로 융합해서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시대예요. 이미 시대는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여러분들 머릿속은 옛날 그대로 굳어 있어요. 저는 승려이긴 하지만 불교만 고집하지 않고, 종교인이지만 종교만 고집하지 않아요. 이렇게 앞서 나가니까 여러분들이 강연장에 이렇게 찾아들 오잖아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조금 사고의 폭을 넓히세요. 그런다고 자기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예요. 불교 신자로서 성경을 얼마든지 볼 수 있어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성경인데 그걸 왜 안 봐요? 또 기독교 신자로서 불경을 봐야 해요. 인류의 귀중한 유산을 습득하지 않으면 자기만 손해예요. 앞으로 폐쇄적인 사람들과 개방적인 사람들이 경쟁하면 시간이 좀 걸려도 결국은 개방적인 사람이 승리합니다.
남북도 마찬가지예요. 북한은 폐쇄적이고 남한은 개방적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남한이 유리해져요. 그런데 개신교보다는 천주교가 앞으로 매력이 훨씬 커질 거예요. 천주교는 자기를 지키지만 그러면서도 좀 개방적이니까요. 개방적인 것은 자기와 다른 것 중에서 유리한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계를 벗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렇게 여러분들이 관점을 가져보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머리가 약간 복잡할 수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종교 다원주의’라고 해서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고들 하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너무 배타적이 되면 지금 무슬림들의 일부처럼 극단적인 근본주의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제는 한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대와 다른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도 우리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 정체성을 갖되 개방적인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개방성을 강조하다 자칫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흐지부지되기 쉽고, 정체성을 키운답시고 너무 배타적으로 하면 폐쇄적이 되어 발전하지 못해서 문제가 됩니다. 자기 정체성은 갖되 개방적이어야 해요. 그런 관점을 갖고 여러분 모두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의 명쾌한 답변 덕분에 오늘 즉문즉설 강연은 종교학 강의가 된 것 같습니다. 출가한 아들 때문에 근심걱정이 많았던 할아버지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통해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 정신이 무엇인지 깊이 새겨들을 수 있었고, 마지막 질문자의 기복 신앙에 대한 회의감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고, 변화된 시대에 어떤 관점을 갖고 종교를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가는 한 분에게 오늘 강연을 들은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저도 어릴 적부터 기독교를 믿어 왔지만 늘 의문이 들었던 점이 있었는데, 오늘 스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어요. 말끔하고 개운해진 느낌입니다. 크리스천 부디스트가 되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며 환한 웃음을 보였습니다.
중년의 부부는 “질문 하나하나가 다 우리 사는 이야기라 참 좋았다. 스님께서 명쾌하게 이야기 해주시는 데 속이 시원하고 내 머리가 다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고 말하면서 서로 마주보며 밝게 웃기도 했습니다.
이어진 책 사인회는 난방이 되지 않아 추운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밝은 얼굴로 질서정연하게 사인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한 분 한 분과 눈을 마주치며 정성껏 사인도 해주고, 환한 웃음으로 감사의 마음도 전했습니다.
▲ 책 사인회
오늘은 질문 내용 중에 진정한 보시의 의미를 물었던 내용이 있어서 그런지 준비된 책도 한권도 빠짐없이 완판되었고, 특히 스님의 새책 ‘야단법석’은 일찌감치 완판이 되면서 책을 구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구매한 책을 한아름 든 사람들이 사인을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섰습니다.
사인회가 끝나고 스님은 구리법당, 의정부법당, 양평법당, 남양주법당 순서로 봉사자들과 차례대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 밝은 표정에 보람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봉사자들은 급하게 다음 일정으로 떠나는 스님을 감사한 마음으로 배웅했습니다. 이어 강연장을 뒷정리를 모두 마치고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이 “스님의 말씀을 듣고 가볍고 행복해진 관객들의 표정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라고 하면서 “이보다 더 좋은 전법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봉사의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남양주를 출발한 스님은 곧바로 저녁 강연이 열리는 일산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3시 쯤 일산 정토법당에 도착해 원고 교정 업무와 각종 보고서들을 체크하며 업무를 보았습니다.
저녁 7시부터는 정발산 성당에서 일산 시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이어집니다...
※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전국 52개 도시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강연 일정을 확인한 후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강연장으로 오세요.
강연은 선착순 무료 입장이며, 질문을 하고 싶은 분들은 강연장에 직접 오셔서 사전 신청을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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