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9.10 전주 청춘콘서트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전주에서 열린 청춘콘서트에서 청년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어젯밤 강릉에서 출발해 서울에 새벽 1시에 도착한 스님은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 새벽 예불 

 

기도 후에는 발우공양에 참석해 공동체 대중들과 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 발우공양

 

발우공양 후에는 공동체 대중들과 새벽 일정을 함께하며 들었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몇가지 당부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선 대중공사 시간에 대중들이 참회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들었던 생각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빠서 아예 법회를 못 들었고 그래서 오늘 따로 챙겨 듣겠다는 것은 괜찮아요. 그런데 참회가 반복되는 내용 중에 법회를 듣고 마음나누기를 안 하고 올라가서 쉬었다는 것이 많네요. 몸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빠질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법회를 우리만 듣는 것이 아니고 일반 대중들이 같이 듣는데, 실무자들은 다 나누기 안 하고 빠진다면 굳이 안 해도 되는 나누기 프로그램을 자기들만 하고 있는 것이 되어버리잖아요. 

 

 

대중들은 ‘안 해도 되는 것을 왜 우리들 보고는 반드시 하라고 하느냐’ 하는 마음이 들겠죠. 또 피곤해서 올라가는 것이라면 ‘그럼 직장생활 마치고 달려와서 법문 듣는 우리는 안 피곤하냐’, ‘우리는 집에 갈 때도 한참 가야 잘 수 있는데 너희는 그냥 올라가서 자면 되지 않느냐’ 하는 마음이 들겠죠. 그래서 이건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 얘기에 속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무자는 안 해도 되고 대중은 해야 되고, 오래된 사람은 안 해도 되고 초심자는 해야 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됩니다. 오히려 대중은 빠져도 되지만 실무자는 반드시 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 갈수록 규칙이 더 잘 지켜지고 아래로 갈수록 덜 지켜질 수 있는 건데, 반대로 밑에는 지키라고 해놓고 위에서는 안 지키니까 대부분 안 지키기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군대처럼 강제에 의해서 움직이는 조직이지 자발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게 됩니다. 여러분들 개인만 봐서는 피곤할 때 올라가서 쉴 수도 있지만 대중과 같이 있을 때는 늘 대중을 같이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이 교육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른 모시고 사는 것보다 아랫 사람 거느리고 사는 게 더 어렵다고 하잖아요. 왜냐하면 다 그대로 흉내를 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토 회원들의 식사 초대에 한번 응하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식사 초대 한 번 받는 게 뭐 그리 문제가 되겠어요? 그러나 다음에 법사님이나 다른 누가 와서 식사 초대를 했는데 안 간다고 하면 ‘법륜 스님도 왔는데 왜 안 와요?’ 이렇게 나옵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비교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남이 보든지 말든지 규칙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겁니다. 몸이 아픈 환자라거나 특별한 사적인 이유는 보호해주어야 하겠지만 특히 공개된 자리에서는 위선적이여서가 아니라 대중들을 위해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공동체 대중들은 스님의 말씀을 듣고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반복적으로 참회해 오던 것에 대해 깊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공동체 대중들부터 먼저 규칙을 잘 지켜나가는 자세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예불 시간 마다 몇 일째 계속 기침을 하고 있는 행자님을 걱정하면서 몸이 아픈 사람은 어떤 자세로 수행을 해야 하는지 일러주었습니다. 

 

“계율에는 일에 집착해서 몸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계율이 하나 있고, 몸에 집착해서 몸을 사리지 말라는 계울이 하나 있습니다. 몸에 집착해서 몸을 사리지 말라는 것은 몸에 집착해서 자꾸 꾀를 내는 것입니다. 몸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은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이 100 밖에 안 되는데 120을 욕심내어서 해서 몸을 헤치는 것입니다. 몸을 함부로 할 때는 일에 집착해서 몸을 함부로 할 때가 있고, 게을러서 몸을 함부로 할 때가 있어요. 

 


 

가령 위가 나쁜데 계속 과식을 합니다. 과식을 해서 위가 계속 나빠지면 과식을 딱 끊어야 하는데, 과식을 하고 위가 나빠졌다고 하고 또 과식을 하고 위가 나빠졌다고 그러잖아요. 이렇게 반복하는 것은 수행자가 아닙니다. 수행자는 이런 행위가 나와 남을 해치는 것을 알면 멈추려고 노력을 해야 되요. 타성에 젖어서 골골골 하면서 또 술 먹고, 그래서 아파서 후회하다가 또 술 먹고 반복하는 것은 윤회를 하는 겁니다. 이런 행위를 끊자고 이곳에 들어와서 수행자가 되었는데 이런 자신의 생활 습관을 바꾸지 못해서 몸이 아픈 것은 몸을 함부로 하는 것에 속합니다. 

 

낫도 쓰고 나면 씻어서 걸어놓고 다음에 쓸 때는 낫을 갈아서 날이 잘 들도록 하잖아요. 그런데 낫을 갈지도 않고 낫이 잘 안 든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어요. 연장을 다듬듯이 자기 몸도 어느정도 추슬러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거든요. 한갓 연장도 늘 다듬고 닦고 갈아주고 하는데 어떻게 자기 몸을 함부로 팽개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병원에 다니는 것을 일상화 하면 안 됩니다.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해요. 첫째, ‘안 죽고 산 것만 해도 다행이다’ 할 정도로 아플 수 밖에 없다면 대중공사에서 ‘제 몸이 원래 안 좋으니까 이렇게라도 생활을 하겠습니다.’ 라고 공지해서 대중들의 인정을 모두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대중들은 ‘저 분은 아프신 분이니까 예불을 안 하는 것보다는 예불 시간에 법당에 내려와서 앉아만 있더라도 참여하는 것이 더 낫지’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째, 그렇지 않다면 몸을 어느정도 추수려서 대중생활에 맞추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늘 반복된다는 것은 업식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요. 부처님은 몸에 너무 집착해서 얼굴에 무엇을 바르고 붙이고 꾸미고 이런 것을 하지 말라고 했지 몸을 함부로 하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수행을 하고 일을 하려면 건강한 몸이 있어야 해요. 몸에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와 몸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얘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두 계율을 따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객관적으로 아플 수 밖에 없는데도 그 아픈 몸을 갖고도 일을 해서 기여를 한다는 것은 또 따로 높이 평가를 해야 돼요. ‘저 사람은 맨날 아프다’ 이렇게 평가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아픈 몸을 가지고도 사실은 쉬어야 하는데도 그래도 기어나와서 조금이라도 대중생활에 기여를 한다. 참 장한 일이다’ 이렇게 평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중생활을 할 때 아예 아프면 예불도 빠져야 합니다. 그러나 기어나올 수만 있으면 예불은 해야 합니다. 조금 더 움직일 수 있으면 발우공양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같이 얼굴을 보고 공양을 해야 공동체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건강이 좀 괜찮으면 공동체에 주어진 울력을 함께 해야 합니다. 청소라든지 공양 당번이라든지 이런 것을 같이 해주어야 합니다.”

 

몸을 잘 추스르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수행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몸이 아픈 사람과 그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대중들은 각각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도 함께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공부는 자발성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얼마 전 시작한 1000일 기도에도 자발적으로 임해줄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 소임 배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업무 배치에 대해서도 어떤 원칙을 가져야 하는지 알려주었습니다.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고려해서 배치할 때도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음식을 한 사람이 냄새도 맡기 싫을 정도로 싫다고 하면 99명이 이 음식을 좋아하더라도 이 한명을 배려해야 합니다. 다수가 좋아한다고 다수결로 가면 안 됩니다. 항상 다수보다는 개인이 싫어해서 못 견디는 것을을 더 고려해줘야 합니다. 이것은 소수와 다수로 계산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무엇을 하고 싶다 하는 것은 개인 취향이라고 고려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는 좋아함과 싫어함 둘 다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배려를 한다면 싫어함에 대해서는 배려를 해주어야 합니다. 두 명이 서로 너무 좋아해서 업무 배치를 같은 곳에 해달라 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러나 두 명이 서로 너무 싫어해서 만나기만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싸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 할 때는 ‘그것도 수행이다’ 하고 배치할 수도 있지만 고려해서 따로 배치해 줄 수도 있는 겁니다. 서로 좋아하는데 떨어져서 울고 불고 하는 것보다는 서로 싫어하는데 같이 만나서 눈에 불을 켜는 것이 우선적으로 고려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적 관점에서는 똑같은 문제이지만 고려를 할 때는 그 비중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강아지를 좋아해서 키우자고 하고 남편은 강아지를 싫어할 때도 어른이라고 고려하자는 문제가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고려의 우선순위로 해야 하는 겁니다. 평등은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중이 함께 모여 살 때 개인이 갖는 특성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항상 사소한 것 하나를 보고서도 그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관점과 원칙을 발견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니 수행자는 과학자와 같다는 말씀이 절로 생각이 났습니다. 

 

서울공동체는 그저께부터 행자대학원생들이 새롭게 배치되어 6개월간 NGO 실습을 하게 되었는데, 스님은 부서별로 새로 배치된 행자들 한 명 한 명을 눈으로 확인하며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발우공양 후 평화재단으로 이동한 스님은 하루 종일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과 회의를 연이어 가졌습니다. 

 

오후 3시 30분에는 서울을 출발하여 청춘콘서트가 열리는 전주로 향했습니다. 청춘콘서트가 열리는 전북교육문화회관에는 오후 6시 30분에 도착했습니다. 입구에는 벌써 대부분의 청년들이 입장을 마쳤고, 아직 좌석을 배정받지 못한 청년들이 혹시나 좌석이 매진될까봐 발을 동동 구르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전주 청춘콘서트가 열린 전북 교육문화회관

 

저녁 7시가 되자 1000여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와!” 하는 뜨거운 함성과 함께 청춘콘서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회자 오청춘씨가 나와 “행복 원로 법륜 스님을 모시고 행복 공청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고 하자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스님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노인의 특징이 뭡니까? 첫째, 말이 많다. 둘째, 했던 말을 또 한다. 저도 이제 늙었다고 ‘원로’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늙은 티를 안 낼려면 말을 많이 안 하고, 말을 하더라도 했던 말을 또 안 하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거두절미 하고 질문부터 받겠습니다.”

 

스님은 평소와 다르게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총 6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대학생인 여자 분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자기 중심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다고 물었고, 청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손을 든 고등학생의 엄마는 아들이 축구를 하고 싶어하는데 엄마가 자꾸 공부를 하라고 해서 불만인데 아이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물었고, 대학교 1학년 남학생은 행복을 너무 강조하면서 다른 가치들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북한의 영양 개선과 농업 개발에 관심이 많은 직장인 여성분은 북한 주민의 영양 개선 사업을 위해서 직업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북한에 대해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공부를 해나가야 하는지 물었고, 대학교 1학년에 재학중인 여학생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성격이 쉽게 고쳐지지가 않아서 어떻게 성격을 바꿀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각각의 질문에 대해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남과 비교하는 마음 때문에 힘들다는 여학생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스님은 늘 비교가 되는 속에서도 어떻게 행복을 찾아갈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을 들려주었습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런 방법은 없어요.”

 

“사람이면 맨날 눈 뜨고 사는데 어떻게 비교를 안 하고 살 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굳이 찾는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어요. 눈 감고 귀 막고 살면 돼요. 눈 감고 귀 막고 살면 비교를 안 하고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눈으로 항상 보고 살고 귀로 항상 듣고 살기 때문에 비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여기 물병을 쥐었는데 커요? 작아요?”

“작은 것 같아요.”

 


 

“물병을 이 책상과 비교하면 작아요? 커요?”  

“작아요.” 

 

“물병을 이 시계와 비교하면 작아요? 커요?” 

“커요.” 

 

“그럼 이 물병 자체만 갖고는 작아요? 커요?” 

“보통 아닌가요?” 

 

“이 물병을 어떤 사람은 크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해요. 크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 물병만 갖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기도 모르게 이 물병보다 작은 것을 생각해서 크다고 말하고, 작다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 이 물병보다 큰 것을 생각해서 작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다 작다는 이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존재를 인식하는 내가 크다고 하고 작다고 하는 것이지 존재 자체에는 크고 작음이 없어요. 인식을 할 때 비교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크다고 인식하고, 어떤 때는 작다고 인식하고, 어떤 사람은 크다고 인식하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인식하는 겁니다. 그래서 크니 작니 새 것이니 헌 것이니 잘났니 못났니 늙었니 젊었니 길다느니 짧다느니 하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인식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일체유심조’ 라고 말합니다. 다 마음이 짓는 바입니다. 모두 인식 상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물병을 책상 곁에 오래 두고 있으면서 늘 ‘작다, 작다...’ 고 인식하다보면 이 물병 자체가 본래 작은 것으로 알게 됩니다. 이 시계 하고만 계속 같이 두고서 ‘크다, 크다...’ 고 인식하다보면 이 물병 자체가 크다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상에 집착했다’고 하는 겁니다. 크다 작다는 객관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 상에서 일어나는 주관의 문제인데 이런 인식이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객관인 줄 착각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이것은 큰 것이다’, ‘이것은 작은 것이다’ 하고 주장을 하게 되는데 사실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언어를 빌려서 표현하면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어요. ‘이것은 큰 것인가요? 작은 것인가요?’ 물으면 묻는 사람의 언어를 빌려서 표현하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라고 대답하고, 이런 언어를 빌리지 않고 대답하면 ‘다만 그것이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를 빌려서 말하면 ‘공(空)이다’라고 말합니다.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제가 다시 물어볼게요.”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젊었어요? 늙었어요?” 

“젊지도 않고 늙지도 않았습니다.” 

 


 

“키가 커요? 작아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예뻐요? 추해요?” 

“예쁘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습니다.” 

 


 

“이 시계가 값 비싸요? 값 싸요?” 

“값 비싸지도 않고 값 싸지도 않습니다.”

 

“값이 비싸다 싸다 하는 것은 이 물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값을 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존재 그 자체로 온전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는 그대로 다 부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모두 다 존재 그 자체로 온전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크니 작니 늙었니 젊었니 부자니 가난하니 양반이니 쌍놈이니 하는 인식 상의 문제에 빠지기 때문에 우리는 열등의식을 갖거나 우월의식을 갖고 괴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교하지 않고 살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늘 비교해서 살지만 ‘이것은 비교에 의해서 생기는 인식 상의 문제이지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라는 것을 자각하면 거기에 빠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과 비교해서 돈이 적은 것이지 내가 돈이 적은 것이 아니예요. 저 사람과 비교해서는 내가 키가 작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내 자신이 키가 작은 사람은 아니예요. 저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늙은 것이지 내가 늙은 사람은 아니예요. 80세가 된 사람이 볼 때는 60세가 된 사람은 아주 젊은 거예요. ‘내가 60만 되어도 뭐든지 할 수 있을텐데’ 이렇게 말해요. 고2 학생과 고3 학생이 같이 얘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세요. 고3 학생이 ‘아이고, 우리는 늙었으니까 젊은 너희가 심부름 좀 해라’ 이렇게 말해요. (청중들 웃음) 

 


 

그래서 객관적으로 젊었다 늙었다 하는 건 없어요. 그 안에서 서로 비교가 되는 거예요. 이것을 깨달으면 불리기는 때로는 늙었다고 불리고, 때로는 젊었다고 불리고, 때로는 스님이라고 불리고, 때로는 아들이라고 불리고 하겠지만, 나는 그 무엇도 아닌 것임을 알 수 있어요. 이것을 자각하면 질문자가 원하는 늘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어요. 비교하면서도 비교하지 않는 세계에 살 수 있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도 온전할 수 있습니다. 부자라고 목에 힘 줄 것도 없고, 젊었다고 목에 힘 줄 것도 없고, 잘났다고 목에 힘줄 것도 없습니다. 반대로 못났다고 기 죽을 것도 없고, 늙었다고 기 죽을 것도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그대로 온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식의 문제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살고 있는 겁니다. 비교하지 않는 방법은 없어요. 그러나 비교해서 생긴 문제라는 사실을 본인이 자각하고 있으면 비교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안함을 자각하고 있으면 그 불안함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감사합니다.” 

 


 

물병과 책상, 시계를 예로 들어가며 명쾌한 답변을 들려준 스님에게 청중들도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질문자는 환한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님과 함께한 70분 동안의 행복공청회 시간이 끝나고 이어서 행복장관 김제동씨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김제동씨가 모습을 보이자 청중들은 여기저기서 함성을 지르는 등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스님은 주로 청년들의 고민을 듣고 상담을 해주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면 김제동씨는 부조리한 사회 문제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사회 변화를 위해 청년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주 재미있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김제동씨는 우리 사회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많지만 그 중에서 통일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청년들이 통일 세대라는 자부심을 좀 가져보았으면 하고 당부했습니다. 

 


 

“통일 한국은 10대 20대 30대 여러분들이 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세상입니다. 통일은 이제 선택 사항이 아니고 필수 사항입니다. 통일 세대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먼저 시작해 준다면 40대, 50대, 60대 모든 세대도 분열을 멈추고 통일 세대를 돕게 되고, 진보와 보수도 통일이라는 과제 앞에 여러분들을 돕게 됩니다. 그러면 남북 모두가 하나되는 길도 열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부부 싸움 하다가 힘들면 동네 술집에 가는 게 아니라 기차 타고 블라디보스토트로 가서 보드카를 한잔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청년들의 어깨가 기상으로 넘칠 수 있습니다. 그런 계기를 우리가 한 번 마련해 봅시다.” 

 

김제동씨의 패기 있고 열정 넘치는 모습에 청년들도 뜨거운 박수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배꼽을 잡고 웃었던 김제동씨와의 70분 공청회도 모두 끝나고, 마지막으로 스님과 김제동씨가 함께 무대 위에 올라 닫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사회자가 “강연장을 나가면 또다시 막막한 현실 앞에 부딪혀야 하는 청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더 해주고 싶은 말을 해달라” 고 하자 먼저 스님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스님은 베푸는 자세, 남을 이해하는 자세, 내가 먼저 사랑하는 자세를 이야기하면서 주인된 자세가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강조했습니다. 

 

“문 열고 나가면 또 골치아픈 일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등산을 할 때 몸이 피곤함에도 산행이 재미있는 이유는 자발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인생을 좀 자발적으로 사는 것이 필요해요. 이것을 불교 용어로는 ‘수처작주’라고 하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거기에 주인이 되라는 겁니다. 즉 자발적이 되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성경의 구절로 표현하면 이래요.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어라’,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어주라’. 다 같은 의미입니다. 

 


 

5리를 가자고 해서 따라가면 누가 주인이예요? 가자는 사람이 주인이고 나는 종속적이 되잖아요. 그런데 ‘내가 10리 가줄게’ 하면 내가 주인이 되어버려요.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가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해요. 

 

보통 우리는 ‘엄마는 내 맘 몰라’, ‘당신은 내 맘 몰라’ 이러죠. 남의 마음을 모르면 누구 가슴이 답답할까요? 내 가슴이 답답해요. 그런데 내가 상대의 마음을 알아서 ‘아, 엄마가 그래서 그랬구나’, ‘아이고, 여보 당신이 그래서 그랬군요’ 이렇게 이해하면 누구 마음이 시원해집니까? 내 마음이 시원해져요. 내가 상대의 마음을 모르면 상대가 답답해집니까? 내 마음이 답답해집니까? 내 마음이 답답해져요. 내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면 상대가 시원해집니까?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까? 내 마음이 시원해져요. 그러니 이해 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라는 겁니다. 이 말은 남을 위해서 좋은 일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얘기입니다. 

 


 

여기 꽃이 한 송이 있어요. ‘우와, 예쁘다’ 하면 꽃이 좋을까요? 내가 좋을까요? 어떤 사람은 둘 다 좋아요 라고 그러는데 꽃한테 좋은지 물어봤어요? (청중들 웃음) 

 


 

동해 바다에 가서 ‘우와, 파도 봐라’ 하면서 좋아하면 바다가 좋을까요? 내가 좋을까요? 내가 산을 좋아하면 둘 다 좋을까요? 상대에게 ‘당신 사랑해요’ 하면 상대가 좋을까요? 내가 좋을까요? 

 

둘 다 좋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내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 여자는 나를 싫어해요. 그럴 때 내가 ‘사랑합니다’ 하면 상대는 기분이 나쁘겠죠. 나는 좋지만 상대는 좋지 않아요. 둘 다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상대를 좋아하면 내가 좋아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면 내가 좋아요.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하면 내가 좋아요. 

 


 

내가 그 사람에게 베풀면 내가 주인이예요. 주는 자가 주인이고, 인사하는 자가 주인이예요. 그래서 사랑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라, 도움받으려고 하지 말고 도움을 주라, 의지하지 말고 의지처가 되어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푸는 것은 내가 주인되는 길이고, 사랑하는 것은 내가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이해하는 것은 내 마음이 시원해지는 길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아야 행복하다면, 남에게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다면, 남에게 이해를 받아야 행복하다면, 나는 노예예요. 그 사람이 나를 베풀어줄 때까지, 구원의 손길이 올 때까지 나는 마냥 기다려야 돼요. 그게 안 오면 나는 괴로워해야 돼요. 나는 그의 노예예요. 왜 내가 노예가 되려고 합니까? 주인이 되려고 해야지요. 그러니 행복으로 가는 길은 지금 당장 주인의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베푸는 마음을 갖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집니다. 

 


 

아까 김제동씨의 얘기처럼 통일도 우리가 주인이 되어서 해야 통일된 나라의 주인도 우리가 될 수 있어요. 광복되고 해방된 건 좋았는데 우리가 해방의 주인이 못 되었어요. 해방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제대로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외세가 주인이 되어서 분단을 시켜버렸잖아요. 그러니 앞으로 재벌이 중심이 되어 통일을 하게 되면 통일 한국은 재벌이 주인인 국가가 될 것이고, 시민이 중심이 되어 통일을 하게 되면 통일 한국은 시민이 주인인 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도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도 이런 자세로 살아간다면 금방 행복해집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절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도 이 첫발을 내딛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먼저 주인이 되고, 내가 먼저 베풀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자세가 곧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나라와 민족의 희망을 만드는 길이라는 명쾌한 말씀에 속이 뻥 뚫리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청년들도 스님의 소중한 가르침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김제동씨는 스님이 이미 너무나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따로 할 얘기가 없다고 하면서 “저도 지금 가슴이 벅찹니다. 통일은 아직 우리 눈 앞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통일을 꿈꾸는 지금 이 순간부터 통일의 기쁨은 이미 시작된 것 같다”고 말해 잔잔한 여운을 남겨 주었습니다. 

 


 

청춘콘서트의 마지막은 다함께 부르는 노래와 춤으로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재능기부로 출연한 요술당나귀와 오늘 강연을 자원봉사로 참여해 준비해 준 서포터즈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와 스님과 김제동씨와 손을 맞잡고 청춘콘서트 공식 노래 ‘행복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후렴구가 시작되자 앉아 있던 청중들도 다함께 기립해서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그 감동을 더했습니다. 정말로 청년들이 마음껏 꿈꾸고 웃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오도록, 그 세상이 바로 남북이 어우러진 통일 한국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오늘 청춘콘서트를 모두 마쳤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청년들을 위해 강연장 입구 로비에서는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스님의 통일 이야기를 엮은 책 ‘새로운 100년’을 사서 스님에게 직접 사인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사인을 하며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환한 웃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청년들도 스님에게 ‘너무 감사해요’ 라며 기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 사전 모임을 수차례 가지며 오늘 강연을 준비한 전주 청년포럼 활동가들과 서포터즈 봉사자들이 다함께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행복의 나라로 놀라와!”라고  외치는 모습 속에서 뿌듯한 보람과 밝은 기상이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자원봉사를 통해 이렇게 큰 행사를 치뤄낸 서포터즈들  한 명 한 명의 손을 꼭 잡아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김제동씨는 더 적극적으로 한 명 한 명을 꼭 안아주며 격려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봉사자들까지 꼼꼼히 챙기는 두 분의 모습은 훈훈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 수고한 서포터즈 봉사자들을 격려해 주는 법륜 스님과 김제동

 

이어서 스님은 오늘 청춘콘서트 행사장에 찾아온 정동영 전 의원님을 만났습니다. 정 의원님은 전북 순창이 고향이여서 지금 순창에서 감자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하면서 스님께 인사를 했습니다. 특히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이력 답게 통일의 꿈을 놓지 않고 씨감자 농장을 만들어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통일 씨감자’를 전문가들과 함께 배양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 스님께 인사를 하러 찾아온 정동영 전 의원

 

스님은 밝은 얼굴로 열심히 살고 있는 정 의원님을 보고 기쁜 마음을 내비치며 다음달에 다시 전라도에 내려오면 그 때는 농장을 직접 방문해 보겠다고 한 후 돌아섰습니다. 

 

밤 11시가 넘어서 전주를 출발한 스님은 새벽 3시에 울산 두북에 도착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아침 일찍부터는 그동안 못다한 농사일을 챙겨서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대전에서 김제동씨와 함께하는 청춘콘서트가 연이어 계속될 예정입니다. 

 

※ 법륜 스님과 김제동이 함께하는 2015 청춘콘서트가 9월부터 11월까지 전국 곳곳에서 열립니다. 참가를 원하는 분들은 티켓을 사전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티켓 사전 신청하기> 

 


 

우리 지역 콘서트 일정을  확인하시고 가족, 이웃, 친구와 함께 오세요. 

전체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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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 공동체대중분들께 당부하시는 말씀들속에서도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br />&lt;그런데 우리는 크니 작니 늙었니 젊었니 부자니 가난하니 양반이니 쌍놈이니 하는 인식 상의 문제에 빠지기 때문에 우리는 열등의식을 갖거나 우월의식을 갖고 괴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교하지 않고 살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늘 비교해서 살지만 ‘이것은 비교에 의해서 생기는 인식 상의 문제이지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라는 것을 자각하면 거기에 빠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gt;<br />--통일은 아직 우리 눈 앞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통일을 꿈꾸는 지금 이 순간부터 통일의 기쁨은 이미 시작된 것 같다”--는 제동님의 말씀도 너무 좋네요^^*

2015-10-03 23:38:18

주영란

상대방을 내가먼저이해 해볼려고하면?내맘상해 그사람이 잘못한것이 떠오름니다 ?스스로맘비여볼려고도 하는데?결정잘안되요?스님알려주세??

2015-09-16 15:36:42

문사수

강설아님~
이곳은 스님께서 댓글에 답을 달아주시는 공간이 아닌걸로 압니다. 힘들고, 답답하신 님의 마음은 알겠으나 도움을 드리긴 어렵겠네요. 가능하시다면, 즉문즉설 일정표를 확인해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장에 참석하셔서 직접 질문하시는것이 좋을듯 합니다.

2015-09-14 11: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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