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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서울 공동체의 발우공양에 참석해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 법문한 후, 저녁에는 청년정토회에서 주관한 희망세상만들기 강연에서 청년들을 위해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오늘 스님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 새벽4시에 법당에 내려와 혼자서 108배 정진과 명상을 먼저 한 후 5시부터 대중들과 함께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후에는 집무실에서 원교 교정 업무를 보다가 발우공양 시간에 함께 했습니다.
▲ 스님의 발우
발우공양을 마치고 나서는 수행 공동체에 들어와 상주하고 있는 대중들을 위해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 짧은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어울려 살다보면 갈등이 많이 생길 수 있는데 어떤 관점을 가져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지 소중한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 스님의 고무신
“도반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업무 등 일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방청소를 제대로 안 한다, 물건을 어지럽힌다, 머리카락을 떨어뜨린다 등 생활 문제로 갈등이 생길 수도 있고, 성격으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갈등이 생기는데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고, 자기에 대해서는 자각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 죽고 못 살아서 결혼한 부부도 같이 살면 갈등이 생기는데, 우리는 그렇게 부부처럼 사랑하는 관계도 아닌데 어떻게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월급 받고 일하는 직장인들도 동료들 사이에 늘 갈등이 생기는데 여기서 돈도 안 받고 일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갈등이 생기지 않겠어요? 또 수행이 잘 되어 있으면 이 좋은 세상에 왜 여기 들어와서 살겠어요? 다 부족한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사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서는 ‘화를 좀 낼 수도 있겠다’, ‘짜증을 좀 낼 수도 있겠다’, ‘업무를 좀 제대로 못할 수도 있겠다’, ‘보고를 좀 못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수행자라는 기준으로 상대를 보지 말고 그냥 세상 사람이라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그래도 여기 와서 수행하려고 한 것만 해도 장하고, 꾸벅 꾸벅 졸면서도 수행하려고 하는 것만 해도 장하고, 짜증내면서도 여기 같이 있어 주는 것만 해도 장합니다. 사실 세상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장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타인에 대해서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보통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그렇게 해주는 것만 해도 참 고맙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입장, 즉 세상의 기준으로 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스님이 왜 저러냐’, ‘법사가 왜 저러냐’, ‘수행자가 왜 저러냐’ 이렇게 보지 말고 그냥 ‘세상 사람으로서 그만해도 참 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마음 속에 화가 일어나거나 짜증이 일어나거나 미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저 자식 왜 저러지?’ 이렇게 화가 일어나고 짜증이 일어나고 미움이 일어나더라도 금방 돌이켜서 ‘아참, 고마운 사람이지’ 이렇게 이해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수행자’라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내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수행하러 여기 들어와 있지 않느냐’, ‘그래도 명색이 내가 수행자가 아니냐’, ‘수행자가 질투를 한다든지,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든지, 욕심을 낸다든지, 게으르다든지 한다면 내가 왜 여기 들어와 살고 있느냐’ 이렇게 자기에게는 수행자라는 자각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기의 업식을 고쳐나가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타인에 대해서는 ‘이해’ 자기에 대해서는 ‘자각’ 이 두 가지를 가지면, 우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순간순간 놓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만 그 갈등이 지속되지 않고 그것이 미움으로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놓쳤기 때문에 그 순간만 불뚝불뚝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지 꽁 하고 있지는 않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하기가 쉽습니다. 자기한테는 이해하는 마음을 냅니다. ‘그래도 내가 이만큼 사는 것만 해도 얼마인데’ 이렇게 하고, 타인에게는 ‘그래도 수행자인데 절에 들어온 지 10년이나 된 사람이 저렇게 해도 되나?’ 이렇게 거꾸로 적용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수행자들이 모여 살지만 세속과 아무 다름이 없이 갈등이 끝없이 계속 됩니다.”
타인에게는 ‘이해’하는 마음을 내고, 자신에게는 수행자임을 놓치지 않는 ‘자각’을 하라는 가르침에 모두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스님께서는 항상 이렇게 상대를 고쳐서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바꿈으로서 상대를 그대로 두고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 줍니다. 늘 못마땅하게 여겨온 도반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이라는 기준으로 이해해 본 적이 있었는지 되돌아보니 절로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당당하고 겸손하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비록 공동체에 들어와 살지만 마음이 어둡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대중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얘기해 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아,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이렇게 말했어요. 당당하기는 어느 정도까지 당당해야 하느냐? ‘이 세상에 제일 소중한 자가 바로 나다’, ‘금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재산도 아니고, 하늘의 신도 아니고, 바로 내가 가장 소중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이런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하기는 어느 정도까지 겸손해야 하느냐?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길가에 밟히는 풀 한 포기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실은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함을 꺾고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줄을 알아야 하고, 비굴한 마음이 일어날 때 당당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도 거꾸로 적용합니다. 교만할 때는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대표적으로 쓰이고, 비굴할 때는 풀보다도 더 비굴하게 굴잖아요. 이렇게 적용을 거꾸로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행을 하면서도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는 늘 거꾸로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기준을 두고, 자기에게 기준을 두고, 거꾸로 적용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니 수행자로서 정진할 때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 선배들이 어떻게 하느냐, 법사가 어떻게 하느냐는 논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도 그러지 않느냐’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가는 것이고, 못 가면 내가 반성하는 것이고, 내가 간다고 타인보고 가라고 할 필요도 없고, 내가 한다고 타인 보고 하라고 강요할 필요도 없고, 남이 못 한다고 나무랄 필요도 없고, 내가 한다고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다만 부처님과 계율에 기준을 두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면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이런 관점을 딱 가지면 세상이 어떻게 되든 게으른 사람들 속에서도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은 다 늦잠 자도 자기는 제 시간에 일어나서 자기 정진을 하면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잘한다면서 목에 힘주는 것도 아니고요.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앞에 갈 수 있도록 밀어주고 격려해 주면서 가면 됩니다. 남이 같이 가주면 고마운 일이고, 안 가면 나는 나대로 가면 됩니다. ‘남이 안 가도 나는 간다’ 이것이 소승이에요. 거기에 추가해서 ‘가능하면 남과 같이 간다’ 이것이 대승이에요. 남하고 같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적극적이냐면 내가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 가도록 돕겠다는 것입니다. ‘너도 안 가니 나도 안 간다’ 이런 태도는 대승이 아니라 중생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다 부족하니까 이렇게 모여서 살지만, 그래도 그 부족한 에너지를 모아서 좋은 일에 쓰고 있잖아요. 정말 일이 많은 것이 아닌데도 늘 밤늦게까지 일하는 습관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고, 이렇게 자기 습관 때문에 건강이 나쁜 것은 수행이 아니잖아요? 세상에서는 일을 열심히 한다고 평가받을지 몰라도 그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일에 집착하거나 자기 습관을 못 버리는 것이지요. 다리가 하나 없는데도 최선을 다한다, 눈이 하나 안 보이는데도 최선을 다한다, 체질적으로 건강이 나쁜데도 그 사람의 역량 안에서는 최선을 다한다, 이런 경우라면 비록 아프면서 일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치료를 안 하고 늘 병을 안고 골골 대고, 먹지 말라고 하는데 계속 과식해서 위 아프다고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까르마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몸에 집착해서 몸을 사라지 말라, 수행하기 위해서는 몸이 소중하니까 몸을 함부로 하지 말라, 이렇게 계율에 되어 있잖아요. 하지만 세상 속에서도 늘 자기 습관을 못 벗어나서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수행 집단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늘 자기 까르마를 고집하고 움켜쥐고 있어서 건강을 해치든지 성질을 내든지 합니다. 같이 살면서도 ‘저 사람은 성질이 저러니 좀 봐주자’ 이렇게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좋은데 본인은 그런 수준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극복해 나가야죠.
죽는 순간이 와도 얼음이 녹듯이 아무런 집착 없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과 몸을 함부로 해서 맨날 골골 대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업무를 좀 절도 있게 처리하고, 휴식이 필요하면 휴식을 하고, 주말이 되면 조금 산책도 하고요. 내년부터는 계획을 잡아서 노동을 많이 하려고 해요.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가 생산하려고요. 바쁜 가운데서도 건강을 유지하고 항상 웃고 정신을 늘 맑게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다들 지쳐서 얼굴에 웃음이 없고, 건드리면 터지기 직전이고, 화장도 안 한데다가 회색 옷까지 입고 있으니까 우중충한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속이 시커매도 겉으로는 화사한 옷 입고 얼굴에 분이라도 발라서 그래도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여러분들은 안팎으로 다 어두워요. (웃음)
그래서 좀 마음을 일신해 보세요. 조금 우울해져도 다시 마음을 내어 웃고, 자꾸 자신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만약 스님이 밖에 가서는 온갖 고민들을 다 들어주면서 정작 본인이 괴롭고 죽겠다고 하면 남들이 웃잖아요. 그런 것처럼 정토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골골대고 있는데, 밖에 가서는 너희들 그렇게 살지 말라고 얘기하면 서로 안 맞잖아요. 그래서 조금 기운을 내고 자신의 상태를 환기해 가면서 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수행자는 기본적으로 자기 마음을 가볍게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들이 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깨달음을 얻겠다’, ‘통일을 이루겠다’ 이런 원이 있으면 좀 힘들어도 뚫고 나가는 힘이 있는데, 그런 원이 없고 억지로 하니까 자꾸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고 몸이 아프게 되거든요. 그래서 아침에 절을 할 때도 억지로 하지 마세요. 예불 시간이 기쁨으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시간이 안 되고 눈을 감고 졸아가면서 억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하고 있거든요. 기도를 하고 예불을 하면서 괴로운 마음이 즐거워져야 하는데 즐거운 마음이 종만 치면 괴로워져서는 안 됩니다. 조금 마음을 전환해서 밝게 생활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이렇게 스님이 기운을 북돋워주자 서울공동체 대중들은 모두 더욱더 밝아진 얼굴이 되었습니다.
발우공양 후 스님은 곧바로 평화재단으로 이동해 기획팀들과 ‘좋은 세상 만들기’ 운동을 위한 논의를 장시간 하였습니다.
오후에는 기독교계에서 통일코리아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열심히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배기찬 이사장이 찾아와 통일 운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남북 분단을 두고 회개는 누가 해야 합니까. 북한은 당연히 회개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한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분단 70년이 되었는데도 그리스도인조차도 회개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배기찬 이사장의 평소 주장입니다. 그리고 8월에 있을 중국 역사기행 준비팀과 함께 일정, 숙소, 강의, 차량 배치 등에 대해서 마무리 점검을 하였습니다.
오후 3시에는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 청년정토회 주관으로 희망세상만들기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원래는 충남대학교에서 강연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메르스 때문에 학교 측에서 행사 주관을 많이 부담스러워해 대전 정토법당에서 강연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대전 정토법당을 가득 메운 250여명의 청년들은 소개 영상과 함께 스님이 모습을 보이자 뜨거운 함성과 박수로 환영해 주었습니다.
▲ 대전 정토법당
스님은 먼저 얼마 전 메르스 환자가 제주도 여행을 한 것으로 일어난 사회적 파장을 이야기하면서 “알고 짓는 죄가 큽니까? 모르고 짓는 죄가 큽니까?” 질문을 던지면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청중들이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스님은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얼마 전 제주도에 메르스 환자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서 많은 사람을 두렵게 했는데 그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자기는 알고 그랬어요? 모르고 그랬어요?”
“모르고 그랬어요.” (청중들 대답)
“세상에서는 모르고 한 행동은 죄가 안 되는데, 사실은 모르고 한 행동이 죄가 더 큽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중요한 질문이었어요.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스님에게 ‘알고 짓는 죄가 큽니까? 모르고 짓는 죄가 큽니까?’ 하고 물으니 ‘모르고 지은 죄가 더 큽니다’ 라고 대답했어요. 왕이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런가?’하니 스님이 왕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알고 잡는 불덩이에 손을 더 많이 뎁니까? 모르고 잡는 불덩이에 손을 더 많이 뎁니까?’ 모르고 잡는 불덩이에 손을 더 많이 데겠죠.
양심으로 따지면 알고 저지르는 죄가 나쁘고, 모르고 지은 죄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상대편한테 주는 피해는 모르고 저지를 때 더 큽니다. 본인이 알면 조심을 하게 되고, 죄를 지으면서도 눈치보면서 하게 되는데, 모르면 눈치도 안 봅니다. 그래서 제주도에 여행을 다니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식당, 호텔 등 다녀간 곳은 전부 문을 닫았습니다. 알았으면 그만큼 그랬을까요? 이처럼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도 사실은 무지입니다.
우리의 고통은 무지, 즉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누구한테 용서를 빌거나 누가 대신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지를 깨쳐야 됩니다. 즉 감은 눈을 떠야 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본래 없습니다. 죄가 있다면 그것은 무지입니다. 알지 못함에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무지로부터 벗어나면 모든 죄업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죄라고 하는 정해진 씨앗이 없다. 다만 어리석은 마음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에 이 마음의 어리석음이 사라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게 된다.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이 어리석음도 사라지고, 이 죄업도 사라지고, 둘 다 텅 빈 그 자리가 진정한 참회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것보다 더 진실한 참회는 무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의 대화도 여러분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든 어떤 의문을 갖고 있든 문제의 해결은 누구한테 용서를 빌거나 누가 대신 죄를 사해주거나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청중들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 들었지만 총 11명이 스님께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욕심이 많아서 성취하지 못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욕심도 줄이고 성취도 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청년, 5년을 사귀어서 결혼한 남편과 성격이 달라서 계속 힘든데 어떻게 편해질 수 있는지 묻는 여성, 전공을 살려서 디자인을 공부할지 지금 돈을 벌고 있는 영어 교사를 하면서 여행을 다닐지 결정을 할 수 없어 고민인 재미 교포,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푸는데 식탐을 줄일 수가 없어 고민인 여학생, 종합건강검진 결과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덜 놀라시고 잘 치료받도록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 묻는 청년, 우울증이 있는 어머니 때문에 늘 걱정인데 어머니와 인연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분, 6개월 전에 갑작스럽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찾아와서 음식을 소화할 수 없고 현재에 집중할 수 없어 고민인 남학생, 정신분석학자가 자꾸 자신을 미행하며 괴롭힌다고 하면서 우울증을 어떻게 치료해야할지 묻는 분, 성격이 급하고 지레짐작을 해서 잘못된 결정을 자주 하는데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묻는 여성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명쾌한 답변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자살하겠어’, ‘짜증나’ 등 부정적인 말을 하는 습관을 바꾸고 싶다는 한 여학생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문답을 하는 과정에서 표정이 점점 밝아지다가 마침내 유쾌하게 웃는 여학생의 모습에 청중들 모두 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저의 고민은 자꾸 ‘자살하겠다’는 말을 쓰는 겁니다. 저희 학교는 중간고사가 두 번, 기말고사가 두 번, 또 과목별로도 시험이 정말 많아요.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한 친구가 ‘교실에서 뛰어내리겠다’ 그랬는데 교수님께서 농담으로 ‘7층에서 뛰어내려야 즉사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뒤로 시험만 못 보면 장난으로 ‘우리 손잡고 7층 갈까?’ 그런 식이 되었는데 장난이 반복되니까 이제는 습관적으로 ‘자살해야겠다’ 계속 말하고, ‘아, 짜증나’ 그런 말을 계속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건 부정적인 말이잖아요. 그래서 이런 습관은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서 긍정적인 얘기를 해보려고 짜증노트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도 계속 부정적인 말을 계속 하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부정적인 말을 덜 할 수 있을까요?”
“죽으면 부정적인 말을 안 하게 되지요. 제일 완벽한 방법은 죽어버리면 겁니다. 다시는 부정적인 얘기를 안 하게 되지요. 그런데 사실은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다 살았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봐야 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살아있으니까 가능한 거잖아요. 아픈 것도 살아있으니까 아프지요. 죽으면 아파요? 그러니까 제일 긍정적인 것은 여러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니까 아프기도 하고 살아있으니까 헤어지기도 하고 살아있으니까 부모님 모시기도 하지요. 죽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가장 긍정적인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가 자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아침에 일어나서 딱 눈뜨자마자 세 번 이렇게 외쳐 봐요. ‘아이고 살았네, 오늘도 살았네, 아이고 살았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면 조금 바뀔 거예요. 한번 따라 해 봐요.”
“살았네, 오늘도 살았네. 살았네” (너무나 즐겁게 웃음)
“말해보니까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나빠요?”
“좋아요.”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내 기분도 좋아지지만 기분이 좋으면 몸의 호르몬과 여러 가지 기분 좋게 하는 물질이 분비가 돼요. 그래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이고 살았네, 오늘도 살았네, 아이고 살았네, 부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세요. 부처님 믿으면 부처님 감사합니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 감사합니다고 하면 됩니다. 조상님을 믿으면 조상님 감사합니다고 하면 됩니다.
만약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가 전복이 되어서 다 죽고 자기 혼자 살았으면 팔이 하나 부러져도 부러진 팔을 잡고도 기분이 좋을까요, 안 좋을까요? ‘나만 살았네’ 이럴 것 아니에요, 다 죽고 자기만 살아있는 기적이 매일 매일 일어나는 게 우리 인생이에요.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거예요. 매일 매일 살아있는 것이 이렇게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그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괴롭게 사는 거예요. 내가 살았다는 것만 해도 기뻐할 수 있으면 이런 건 다 괴로움 축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에요.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늙은 부모님도 모시고, 살아있으니까 두 남자도 좋아하고 그러는 것이죠. 살아있으니까 몸이 뚱뚱하니 안 뚱뚱하니 그러죠. 죽으면 그런 것도 다 없어요. 그러면 죽으면 편안하냐. 그게 아니에요. 살았다는 것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사고를 해야 된다는 얘기에요.
내가 몸이 아프지만, 밥을 잘 못 먹지만, 그래도 살아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로 보면 죽어야 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복이다’ 이렇게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은 인연의 과보는 기꺼이 받겠습니다. 죽을 과보를 받아야 되는데 죽지 않은 것은 큰 복입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내라는 겁니다. 그러면 몸 안의 전체 신경에서 긴장이 다 풀려요. 친구들이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요. 같이 손잡고 죽는다고 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그건 기분이에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살았네!’ 세 번 외치고 생활하면 돼요.”
“감사합니다.”
질문자가 환한 표정으로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한 가지 더 있다며 또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 이번엔 식탐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요즘 식욕이 늘어서 살이 좀 찐 건 괜찮은데 계속 배가 고파요. 예전에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고 했더니 어느 스님께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셔서 계속 먹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두 달 전부터 갑자기 또 식욕이 증가했어요. 그런데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그 양이 보통 사람들이랑 달라요. 피자 한 판을 먹고 다른 것을 또 먹어도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파도 안 먹으면 되지요. 단식을 해서 음식을 아예 안 먹었을 때 배가 고픈 것이 더 배가 고플까요? 한 끼, 두 끼라도 먹었을 때 배고 고픈 게 더 고플까요?
“아예, 안 먹는 것이 더 배고프죠”
“그래요. 스님처럼 아무것도 안 먹고도 배고픈 것을 견딜 수 있는데 하루에 조금이라도 먹고도 그것을 왜 못 견뎌요?”
“그런데 저는 약간 음식이 들어갔을 때부터 배가 고파지기 시작해요.”
“자기가 고프든지 말든지 그것은 육체의 증상이고, 나는 정해진 양만 딱 먹고 끊어버리면 됩니다. 나는 딱 정해놓은 그것만 먹고, 배가 고파도 더 이상 안 먹고, 먹고 싶어도 더 이상 안 먹고, 먹기 싫어도 그것만 먹고, 딱 정해놓는 겁니다. 밥 한 그릇을 정했다면 밥 한 그릇은 먹기 싫어도 꼭 먹고, 먹고 싶어도 더 이상 안 먹고, 이렇게 딱 정해놓고 하면 처음엔 미칠 거 같아도 그것만 딱 하고나면 100일만 지나가면 저절로 컨트롤 돼요. 딱 정해진 것만 먹고, 아무리 먹고 싶어도 그것만 딱 먹고 끝을 내세요. 담배 피우고 싶은 사람이 담배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피우고 싶다고 피워야 돼요, 피우고 싶어도 안 피워야 돼요?”
“안 피워야 돼요.”
“그렇게 피우고 싶은데 어떻게 안 피워요?”
“사탕을 대신 먹어요.” (청중들 웃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담배 피우고 싶다고 사탕을 먹으면 그것은 담배 끊는데 도움이 안 돼요. 아무리 피우고 싶어도 안 피워야 돼요. 그런 것처럼 아무리 먹고 싶어도 딱 정해진 것 이상은 안 먹으면 저절로 개선이 돼요.”
“감사합니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정해진 것 이상은 안 먹으면 된다는 명료한 답변에 질문자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또다시 웃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2시간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이 “벌써 2시간 반이나 됐네요. 재미있었어요?” 라고 묻자 모두들 “예”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이치를 깨우쳐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며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내가 몸이 뚱뚱해서 안 먹으려고 하는데 자꾸 먹어진다, 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끝이 안 나요. 먹고 싶으면 뚱뚱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체중이 늘어나는 것이 나한테 안 좋다면 ‘아무리 먹고 싶더라고 마약은 안 먹듯이 이것도 안 먹어야지’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꾸 얼버무리지 말라는 거예요. ‘복은 안 지어놓고 부처님 복 좀 주세요’ 하는데 복을 안 지었는데 복이 어디서 나와요? ‘죄는 지어놓고 부처님 죄 좀 안 받게 해 주세요’ 하는데 죄를 지었으면 기꺼이 받아야지요. 복을 안 지었으면 복 받을 생각을 말아야지요. 이렇게 이치에 맞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면 삶이 자유로워져요. 부처님 하느님한테 매달릴 일이 없어져 버려요. 부처님은 우리에게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이치를 가르쳤지 남에게 매달리라고 가르친 게 아니에요. 종이 되라고 가르친 게 아니에요. 네가 부처가 되라고 가르쳤지요. 그러니까 스님의 종이 되려고 하면 안돼요. 스님의 얘기를 듣고 자기가 이치를 깨쳐서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야 돼요.
어떤 경험을 가졌든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그 말은 모두 다 행복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행복하게 살 건지 안 살 건지는 자기 선택이에요. 괴롭게 살고 싶어서 괴롭게 사는 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니까 우리가 간섭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계속 먹고 뚱뚱해지는 것도 자기 선택이기 때문에 괜찮아요. 그러나 내가 뚱뚱한 것이 싫다면 먹고 싶어도 멈춰야 되요. 달리 방법이 없어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어요. 죽을 것 같아도 ‘음식을 먹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렇게 각오를 해야 돼요. 어떤 사람은 멀쩡한데도 옥상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것보다는 그래도 자신이 정한 원칙을 지켜보려고 하다가 죽는 게 더 낫잖아요. 이렇게 생각해서 하기로 했으면 ‘죽으면 죽지’ 이런 단호한 자세가 있어야 개선이 되지 안 그러면 늘 마약처럼 끌려서 살아요.
그러니 자기가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고, 자식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고, 스님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돼요. 자기가 주인이에요. 자기 행복을 스스로 찾아가야 돼요. 그런데 자기에게만 이익이 되는 길을 가면 나중에 후회가 되기 때문에 자기 행복이 훼손돼요. 그렇게 여러분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긴 시간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님을 향해 250여명의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 주었습니다.
이어서 책 사인회가 열렸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선 청년들을 위해 스님은 정성껏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행사를 위해 수고한 자원봉사자들과도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방금 전 사인회 중에 어떤 분이 예쁜 상자에 초코렛을 가득 담아서 스님에게 선물을 했는데, 기념 사진을 찍고 나서 스님은 선물 받은 초코렛을 자원봉사자들에게 모두 나눠주었습니다. 봉사자들은 스님으로부터 직접 초코렛을 받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대전 정토법당을 나온 스님은 곧바로 두북으로 향했습니다. 새벽 1시가 넘어서 두북에 도착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원래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에서 주관하는 평화리더십, 여성리더십, 청년리더십 아카데미 수료생들의 힐링 동문회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메르스로 인해 모두 취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두북에 머물면서 농사일을 할 계획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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