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5.6.13 통일의병대회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께서는 메르스로 인해 정토회의 통일의병대회가 취소되었지만 원래 진행하기로 했던 순례 코스를 스님 혼자서 걸으며 통일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도 새벽 4시30분 두북 정토수련원에서 새벽 예불 및 천일결사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 두북정토수련원

 

기도를 마치고 스님께서는 “통일의병대회를 메르스 때문에 대중이 못하니까 나 혼자라도 해야겠다” 고 하시며 오늘 원래 통일의병들이 집결하기로 한 “법흥왕릉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의 염원은 남이 안 한다고 나까지 안 할 수가 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이 같이 하면 고마운 일이고, 다른 사람이 안 해도 나 혼자라도 해야 하는 일이야. 그러니 염원이라고 하지. 용성 조사님께서 다른 스님들이 독립운동 안 한다고 안 하신게 아니잖아. 다른 스님들이 친일한다고 따라하지 않았잖아. 수행자는 그것이 해야 할 일이면 남이 하든 안 하든 나는 하는 사람이야.” 

 

6시 무렵 법흥왕릉에 도착하니 새벽녘 인적이 드문 곳이라 아주 고요한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스님께서는 가사를 수하고 삼귀의 반야심경을 하면서 혼자 통일의병대회 입재식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정성껏 하셨습니다. 

 


▲ 법흥왕릉

 

기도를 마친 후 스님께서 “오늘 통일의병대회 입재식을 잘 했다. 뒤에 통일의병 900명 서 있는 거 안 보였어?”라고 하셔서 멀뚱히 스님을 바라보니 “눈에 안 보이는 통일의병들이야”라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법흥왕릉을 내려오는 길에는 함께 동행한 묘덕법사님과 김신아님에게 법흥왕릉에서 통일의병대회를 시작하려고 했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법흥왕의 가장 큰 업적은 신라와 가야의 합의통일을 이루어낸 점이야. 신라가 가야와 합병한 이후에 국호를 신라로 했다는 것은 우선 자기 아이덴티티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거든. 그만큼 자기중심성이 있었던 반면에 상대에 대해서는 포용을 해야 되니까 상대의 정신적인 이념인 불교를 공인해서 그들의 신앙이나 사상을 존중해 주었지. 그리고 상대의 신분을 보장해 주었어. 즉 가야 왕족을 신라의 진골로 모두 받아들여 준 거야. 이렇게 포용을 했다는 것이지. 그러니 우리도 통일을 하려고 할 때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통일을 하겠다는 것이 분명하면 북한을 포용해줘야 한다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해주려고 법흥왕릉에서 통일의병대회를 시작하려고 했던 거야. 자, 그럼 다음 순례 장소로 가보자.” 

 

스님의 짧은 설명을 듣고 나서 ‘과연 한국은 북한을 포용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신라가 불교 국가인 가야의 신앙을 공인해 주었듯이 과연 남한이 북한의 공산당 이념을 허용해 줄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절로 저어졌습니다. 

 

다시 황룡사지로 가는 길. “가야를 포용한 법흥왕이 참 대단하다”고 이야기하자 스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야”라고 하면서 덧붙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법흥왕도 처음부터 포용 정책을 편 것이 아니야. 처음에는 보수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어. 젊은 이차돈이 순교를 한 이후에야 불교를 공인했거든. 왕도 보수세력의 포로가 되어서 공인을 못해주고 있었는데 이차돈이 527년에 순교하면서 전세가 뒤집어져서 528년에 불교가 공인이 되었어.” 

 

그때서야 이차돈의 순교가 생각이 났습니다. 포용 정책에는 많은 반발이 따를 수 있고 그것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황룡사지에 도착했습니다. 분황사를 지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신라 당시 최고의 고승들이 설법을 했다고 하는 백고좌 강당터를 지나 대웅전인 금당터에 올라섰습니다. 스님께서는 삼존불을 모셨던 자리 앞에 서서 목탁을 손에 드시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 황룡사지 금당터

 

그리고 돌아서서 9층탑이 세워졌었던 터를 향해 잠시 기도를 한 후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탑돌이를 마친 후 스님께서는 황룡사지를 참배하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 황룡사 9층탑 주위를 돌며

 

“황룡사는 진흥왕이 신라의 국력이 한창 신장되고 있을 때 지은 절이야. 그러나 9층탑은 선덕여왕 때 외적의 침입을 막고 삼국 통일을 발원하면서 쌓은 것이고. 여기서는 대중들에게 한반도의 통일을 발원하는 얘기를 하고 통일의병들과 함께 통일 발원 기도를 하려고 했지.”

 

설명을 듣고 나니 만약 오늘 900여명의 대중들이 와서 함께 통일 발원 기도를 했었으면 장관이었을 것 같습니다. 황룡사지의 넓은 터에 가만히 서 있으니 흐린 날씨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는데 스님께서는 “오늘 통일의병대회 했으면 날씨가 기가 막힐 정도로 좋을 뻔 했다”며 아쉬움을 내비쳤습니다. 

 

황룡사지를 출발하여 낭산까지 걸어서 이동하기로 한 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이 도로는 신호가 걸릴 때 대중들이 한꺼번에 길을 건너면 된다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 황룡사지에서 낭산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나지막한 언덕에 최치원 선생이 집필 활동을 했다고 하는 독서당이 보였습니다. 스님께서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늘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했는데 오늘 한번 가보자” 하시면서 앞장섰습니다. 독서당 안으로 들어가니 이른 아침인데도 문이 열려 있어서 마당 안까지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최치원 선생에 대해서 간략히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 최치원 선생의 독서당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문장가였어. 한국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했지. 중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와서 개혁정책을 내놓았는데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낡은 왕조가 개혁정책을 안 받아주니까 결국 은둔 생활을 하다가 죽었어. 말하자면 당나라에서 대문장가로 출세를 하고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고 신라에 들어왔는데 신분적 한계가 있었던 거야. 신라는 왕족인 진골이여야 출세를 할 수 있는데 최치원 선생은 6두품이었거든. 원효스님, 최제우 선생과 더불어서 한국이 낳은 3대 역사적 인물 중에 한 분이라고 볼 수 있지.”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해외에서는 그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국내로 들어오면 기득권 세력에게 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을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차 철로를 지나 낭산을 올라가는 입구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능지탑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능지탑 앞에서도 간절히 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능지탑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 능지탑

 

“능지탑은 통일 이후 신라의 진로를 보여주는 곳이야.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대왕의 화장터에 세운 탑이거든. 문무대왕은 마지막 남은 적인 왜를 방어하기 위해서 자기가 죽어서 동해 바다의 용이 되겠다고 원을 세웠어.”

 

여기서는 지도자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어떠해야하는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우리나라가 독립국이 된다면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얘기한 대목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선덕여왕릉으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선덕여왕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소나무 숲길이 길게 나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그 거리를 재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거리 측정을 해보니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있는 숲길이 총 450m가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1m당 2명씩 앉으면 2줄로 900명이 앉아지니까 충분하네. 내가 가운데 지점에서 법문을 하면 양쪽으로 225m 되니까 송수신기로도 들을 수 있고, 법문 끝나면 그늘 아래서 간식도 먹을 수 있고” 하시면서 예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 선덕여왕릉

 

“왜냐하면 능지탑이나 사천왕사지는 그늘이 없어서 6월이면 햇볕이 뜨겁거든. 그래서 선덕여왕릉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이 숲길에 일렬로 주욱 앉아서 설명을 듣고 사천왕사지에서는 기도만 하고 가려고 했지.”

 

많은 대중들이 6월의 뙤약볕 아래에서 법문을 들으려면 힘들다는 것을 아시고 그 대책을 마련하느라 많은 연구를 하셨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덕여왕릉을 통일의병대회의 순례 코스로 잡은 이유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선덕여왕은 삼국 통일을 준비한 사람이야. 황룡사 9층탑도 쌓았고, 김유신과 김춘추를 시켜서 통일을 준비하게 했어. 김춘추는 고구려에 먼저 가서 고구려와 협력을 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잡아서 죽이려고 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춘추는 당나라로 가서 당태종과 합의해서 나당 동맹을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때가 선덕여왕 때야.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키워낸 사람이고 통일을 준비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통일을 준비한 지도자였다는 말씀에 뭔가 깊은 울림이 남았습니다. 본인이 통일의 과업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통일될 나라를 내다보고 미리 준비를 했다니 ‘우리에게도 그런 지도자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는 찰나에 ‘아, 우리에게는 스님이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사천왕사지에 도착하니 전체가 깨끗하게 벌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잘 정돈된 사천왕사지를 보니 오늘 통일의병대회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다시 한번 느껴졌습니다.

 


▲ 사천왕사지

 

스님께서는 사천왕사지에서 불상을 모셨다고 하는 법당 터를 바라보고 다시 한번 간절히 통일 염원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 후에는 왜 이곳에 통일의병을 데리고 와서 기도를 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셨습니다. 

 


 

“신라가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방이었던 당나라와도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천왕사지는 그 마지막 승리를 위해 신·불의 도움을 청하려고 기도했던 곳이야.

 

사천왕사지에서는 언제 기도를 해야 하느냐 하면, 남북 간에는 합의가 되어서 통일하려고 하는데 그 때 미국이나 중국이 반대를 할 수 있거든. 그 때는 여기 와서 기도를 해야 돼.”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우리 역사 속에는 이미 선조들이 국난을 극복해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크게 다가왔습니다. 선조들의 경험 속에서 교훈을 잘 얻는다면, 또 그 힘을 빌린다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께서는 명랑법사가 12명의 스님들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행해 당군을 수장시켰다고 하는 곳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당나라와의 전쟁 승리를 기원하면서 문두루 비법을 행한 곳이 여기 법당 뒷쪽에 있어. 이쪽에 12개의 기초석 위에는 법사님 12명이 올라서고, 저쪽에 12개의 기초석 위에는 대중부 대표 12명이 올라서서 그 때 당시처럼 문두루 비법을 해보려고 그랬어.” (웃음) 

 

옆에서 묘덕법사님이 “문두루 비법 주문은 무엇으로 해요?” 라고 묻자 스님께서도 웃으셨습니다. 

 

다음은 통일암으로 향했습니다. ‘통일암’ 이라고 해서 이름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도착하고 보니 작은 암자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암자 뒤에는 대나무와 소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넓은 공터가 자리하고 있어서 900명의 대중이 능히 앉을 만했습니다. 

 

통일암에서 걸어서 내려오니 염불사라고 하는 작은 절이 나타났습니다. 염불사 앞마당에는 큰 탑 2개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이곳에서 회향식을 하려고 했다" 하시면서 탑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간절히 통일 염원 기도를 하셨습니다. 

 


▲ 염불사

 

“여기서는 통일의병의 실천 과제로 ‘통일지향적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주고, 그러기 위해서 실천 사항을 이야기하고, 다함께 통일 발원 기도를 하려고 했지.”

 

이렇게 얘기하신 후 스님께서는 “그럼 오늘 통일의병대회는 이것으로 다 한 거다” 라고 하시면서 웃으셨습니다. 

 


 

스님 혼자서 진행한 통일의병대회 순례 코스는 대중들과 함께 할 때보다 훨씬 시간이 단축되었습니다. 아침 6시에 시작한 순례는 입재식부터 회향식까지 3시간 30분이 걸려 9시30분 무렵에 마쳤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스님께 “스님의 통일 강의를 많이 들은 사람들은 스님의 통일 비전이 너무 좋지만 막상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다고 많이 얘기한다” 고 하면서 스님의 생각을 여쭤 보았습니다. 항상 이 부분이 답답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간단하게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그래서 스님이 대안을 제시한 거야. 통일지향적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통일지향적인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지금부터 2년 간 계속 확대해 나가야지. 다른 건 의미가 크지 않아. 그러니까 하반기에는 통일을 원하는 국민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해나가야지. 그게 통일의병이야.

 

가령 이런 노래를 만들면 어떨까. 

 

‘우리는 통일을 원해 ♬ 대한민국이 통일의 중심이 되어야 해. 통일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해. 그러려면 상대편을 이해해야 해 북한을 포용해야 해. 통일 한국은 동방의 등불이야 ♬ 이제 등불을 켤 때가 되었어.’ 

 

이런 짧은 가사로 노래를 만들어서 불러야지. 요즘 젊은이들 노래가 이런 식이잖아. 또 이런 가사도 만들어 볼 수 있잖아. 

 

‘밥 먹자. 배고플 때는 혼자 먹어도 괜찮아 ♬ 그런데 배부를 때는 혼자 밥 먹으면 재미없어. 배부를 때는 같이 밥을 먹어야해 ♬ 이제 우리 북한 아이들과 같이 밥을 먹자.’ 

 

이렇게 해학적이고 재미있게 노래를 만들어 보면 좋겠어.”

 

스님 말씀을 듣고 갑자기 랩퍼가 되어 스님의 얘기한 가사를 따라 불러 봅니다. 우리들이 부르기엔 영 어색했습니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누군가가 스님의 아이디어를 받아서 통일을 주제로 한 재미있는 노래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싶은 바람이 들었습니다. 조만간 그런 날이 오겠지요. 

 

이렇게 나홀로 통일의병대회를 마치고 나서는 원래 오늘 강의를 해주기로 약속했던 경주고등학교에 잠깐 들르셨습니다. 

 


▲ 경주고등학교

 

경주고등학교 강연도 메르스 때문에 취소가 되었는데, 스님께서는 “경주고등학교 안에 6.25전쟁 전몰 학도병 추념비가 있는데 거기를 참배하고 와야겠다” 하시면서 학교로 향했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학교는 텅 비어 있었지만 추념비는 의젓하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 6.25전쟁 전몰학도병 추념비

 

6.25전쟁 때 경주고등학교 학생 320명이 안강 전투에 출정하여 전사한 이가 39명이고 실종된 이가 100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기려 추념비를 세웠는데, 비석 앞에 서서 분단의 아픔이 어린 학생들에게도 미쳤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전몰학도병들의 넋을 기리며 해탈주 삼독을 해주셨습니다. 

 

두북으로 돌아온 스님께서는 도착하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밭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당에 심어 놓은 갖가지 채소들을 뜯고 물을 준 후 중간 중간에 잡초가 난 것을 제거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8년 동안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김신아님과도 밭일을 하며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예초기와 낫, 톱을 들고 부모님 산소를 찾으셨습니다. 산소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모처럼 시간이 난 김에 벌초하고 깨끗이 정돈하셨습니다. 형체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풀이 무성했던 산소는 스님께서 예초기를 돌리기 시작한지 2시간 만에 아주 깔끔하게 변했습니다. 

 


▲ 작업 전 

 


▲ 작업 후

 

벌초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씻고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문경정토수련원으로 이동하셨습니다. 문경정토수련원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어제에 이어서 BTN에서 스님께서 꼭 보셔야 한다고 전해 준 ‘붓다’ 드라마 3회, 4회를 시청하셨습니다. 

 

원래는 문경정토수련원에서 내일 오전에 불교대학 특강수련 법문을 해주기로 약속을 해놓으셨는데 메르스 때문에 최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취소된 건 그들의 사정이고, 나는 약속을 지켜야지” 하시며 내일 새벽 예불과 발우공양을 문경에서 하고 서울로 이동하기로 하셨습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전체댓글 168

0/200

김미경

스님 존경합니다

2015-06-26 14:34:47

박노화

스님 힘내세요 응원함니다 항상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어 너무 고맙습니다 ~

2015-06-21 21:45:21

묘법심

스님 감사합니다.스님에 발자취을 따라가야겟습니다.건강하시고 성불하십시요...().

2015-06-21 20: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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