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4.7.2. 동북아 역사 누비길 둘째날

오늘은 통일의병 동북아누비길 둘째날입니다. 4시 반 출발 예정이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5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환인에서 두번째 수도인 집안을 향해 약 3시간 이동하게 되는데 환인보다 따뜻하고 좀 더 살기 좋은 자연조건을 찾아간 것이기도 하겠지만 외부인인 주몽에 이어 유리왕까지 외부에서 들어오다 보니 토착 세력에 대한 왕권 강화를 위해 천도하지 않았나 추측하게 됩니다.

   
  

오늘의 첫 방문지인 장군총에 가는 길에 잠시 압록강변에 들러 강 건너 북한의 뙤기밭을 함께 보고 사진을 찍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으로 가까이 북한의 모습을 보는 참가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몇 년 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뒤 갈 때마다 입구나 주변 모습이 달라지는 장군총은 초기엔 광개토대왕릉으로 알려졌다가 실제 광개토대왕릉이 발견되자, 다시 장수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적석무덤입니다. 발견 당시의 장군총 부근엔 약 20 여호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고 대략 어느 장군의 무덤일거라 하여 지금까지 장군총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역사기행 참가자들은 시원한 그늘에 모여 가이드로부터 장군총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장군총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 하나가 계단식으로 단을 쌓되, 4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쌓아 올린 것입니다. 또한 단순히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아래층 돌에 홈을 파서 윗돌을 끼워넣어 돌이 밀려가지 않도록 한 것이 두 번째 특징입니다. 그다음에 거대한 크기의 호석을 한 면에 3개씩 받쳐 밀려나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 호석도 그냥 받쳐 놓은 것이 아니라 호석이 놓이는 바닥에 큰 돌을 박아놓고 중간에 쐐기돌을 놓아 호석도 밀리지 않도록 한 걸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또 무덤의 입구와 제단의 위치가 한족과 고구려 사이에 서로 다르다는 것을 들으니 문화의 차이가 신기했습니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문 쪽에 머리를 두게 되고 또 제단을 망자의 발쪽에 두어서 제사를 지내면 일어나서 바로 인사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반면 한족의 경우에는 제사를 지낼 때는 망자의 머리가 제단 쪽에 둔다고 합니다. 이런 특징을 안다면 설사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 몰라도 고구려인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뒤이어 스님이 보완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초기엔 천손의 상징으로 석실이 지상에 있다가 5세기 이후로는 다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지하로 들어가게 됩니다. 원효대사가 경기 지역에서 무덤에 들어가 하룻밤 자다가 해골에 든 물을 마시는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지금 얼핏 들으면 무덤에 어떻게 들어가냐 하지만은 경기도는 부여 문명을 계승한 백제 땅이었기 때문에 지하무덤이라 할지라도 입구가 있고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습니다. 신라 사람인 원효에게는 동굴처럼 보였겠죠. 이런 특징으로 고구려 무덤은 전부 도굴당하고 신라 무덤은 도굴이 어려워 금관 같은 유물이 보존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장군총 뒤편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규모의 묘가 하나 더 있는데 제 2부인의 묘로 추정됩니다.

또 발굴을 해보니 처음엔 배묘로 알려진 북쪽 편의 건축유지가 실제로는 제단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처음 왔을 때 배묘가 5개라 해서 첩이 5명이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발굴을 해보니 배묘가 아니라 제단이란 게 밝혀졌습니다. 고구려 문명이 중간에 끊기고 문화를 모르는 중국인들이 이를 해석하다보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문명을 계승하지 않으면 유적의 의미도 사실상 알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역사기행을 하면서 우리 선조들의 유적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은 터에 이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살짝 무거워집니다.

     

다음 여정은 광개토대왕릉비와 광개토대왕릉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우리뿐만 아니라 꽤 많은 중국인들도 구경하러 오는 것을 보니 왠지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했습니다.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신라에 5만의 군사를 보내 도와주는 내용을 들으면서 당시에도 동족의식이 있었나 하는 궁금증이 일어났습니다. 또 힘이 강한 패권 국가라는 것은 당대에는 위용을 자랑하지만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반드시 보복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역사에도 인연과보의 법칙이 적용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복욕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굴욕적인 항복으로 평화만을 구하는 것도 민족에게 역사의식의 상처와 열등의식이 남는다는 점에서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금관가야와 신라의 합병에 의한 통일의 중요한 의미를 스님께서 왜 그리 강조하시는지 이곳 동북아에 와서 실감하게 됩니다.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보다 2배 가까이 크게 만들어졌지만 광개토대왕 즉위와 동시에 만들기 시작한 지 22년 만에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강돌로만 쌓지 못하고 일반 돌을 사용해서 많이 무너져 있어 장군총 같은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고구려 벽화를 보기 위해 찾아간 5회분 5호묘에서는 팀을 나누어 설명을 듣기 위해 지하 무덤으로 들어갔는데 32도가 넘는 무더위에 지친 참가자들은 무덤 전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매우 시원한 기온에 환성을 지르자 일행 중 한분이 남의 무덤에 들어가면서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들 첨 본다하여 모두 웃었습니다. 그 어두운 석실 내에 가운데 남자의 관대가 있고 입구에서 봤을 때 왼쪽에 제1부인의 좀 작은 관대, 오른쪽에 제2부인의 더 작은 관대가 놓여있습니다.

사방에 그려진 그림들을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어떻게 그 안에 그림을 그렸으며, 약 천오백년이 지난 지금도 어떻게 염료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지 불가사의해 보입니다. 이미 불교가 전해진 후에 그려져서 연꽃 등의 불교 문화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5호묘를 보고 나와서는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4호묘의 벽화에 대해 스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습니다. 일월신도, 씨름도, 수렵도, 예불도, 생활도 등 다양한 그림 가운데 옷을 입은 소가 그려진 그림 아래에 중국의 농사의 신인 신농씨라고 쓰여 있는데 실은 고구려 시대의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양가 중 농사를 관장하는 우가를 그린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장군총에서의 느꼈던 것처럼 우리의 유적이 남의 땅에 있다 보니 허술하게 관리되고 잘못 해석되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다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되찾을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록 우리 땅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유적을 연구하고 그 의미를 정확하게 널리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은 사방이 둥글게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지형을 가진 환도산성으로 향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AAAA 등급으로 등재된 곳으로 망루에 올라 멀리 국내성을 바라보며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중 재밌는 것은 우리 민족이 기마 민족이라는 증거 3개를 이야기하셨는데 그 한 가지가 급한 성격입니다. 중국의 한족들은 수레 민족이기 때문에 만만디로 대부분 국도로 다니기 때문에 고속도로가 한산하다고 합니다. 두 번째 특징으로는 옷고름의 위치입니다. 옷고름이 가운데 있지 않고 한쪽 끝에 있는 것은 말을 타고 달리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버선코를 들었는데 말을 탔을 때 발걸이에 발을 걸고 달리다 보면 발이 빠져나오는 걸 막기 위해 버선코의 모양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인데도 그게 기마민족의 특징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조선족 분들은 중국 문화와 한국 문화를 다 같이 접하기 때문에 이런 특징이 보인다고 합니다.

     

환도산성과 짝을 이루는 평지성인 국내성은 몇 년 전부터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후 해마다 더욱 정리가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아직은 아파트 단지를 싸고 있지만 곧 복원이 완성되면 얼마나 멋질까 기대가 됩니다. 성벽을 따라 걸어가면서 국내성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특히 서문 특징에 대해 스님께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이제 공()자형 성문의 특징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것 같습니다.




  

남쪽 성벽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아침에 잠시 들렀던 압록강변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아침엔 압록강 건너 북한땅의 뙤기밭이 뭔가 파릇파릇한 느낌이었는데 한낮의 더위가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늦은 오후에 흙색으로 드러난 뙤기밭은 더욱 안쓰러움을 자아냅니다. 잠시 자유시간을 가진 뒤 근처에 있는 조선족 식당에 들러 즐거운 저녁식사를 한 다음 호텔로 들어가 스님으로부터 저녁 강의를 들었습니다.

 

오늘은 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역사에 대하여 강의해 주셨습니다.

우리 역사는 크게 환단시대(배달나라조선시대), 부여고구려발해시대, 고려조선시대 이렇게 3 시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환단시대는 상고사로서 이 부분이 많이 왜곡되어 있어요. 상고사 부분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중국문명의 아류 혹은 변방이라는 인식이 머릿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이게 중국에 대한 사대 혹은 열등의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있지만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해 이야기 하면 감정이 먼저 앞서게 됩니다. 현대사에 대해서는 서양열강인 미국에 대한 열등의식과 고마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에 대한 열등의식이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중국에 대해서는 상고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일본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사가, 미국에 대해서는 현대 문명을 뛰어넘어 열등의식을 반드시 극복해야합니다.“

     

더불어 오늘 둘러보았던 유적들의 주인공인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상세히 말씀해 주시면서 이번 역사기행의 의미를 명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오늘 역사기행의 의미는, 고구려가 부여를 계승했고 발해에게 계승되었다 라는 것을, 직접 손으로 만지고 발로 딛고 느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지금하고 고구려의 기상이 다른가? 어디서부터 단절이 왔기에 이러한 현상이 생겨났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합니다.이러한 부분이 정립이 되어야 통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 평화라는 소극적 의미의 통일을 넘어서서 남북이 하나 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 원래의 모습을 되살려야 된다는 의식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은 지난 100년의 역사를 치유하는 것이지만, 원래의 모습을 되살린 다는 것은 천년의 한을 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야 한다는 겁니다. 미국으로부터 전파된 문명을 대체할 새로운 문명이 동양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한다면, 그 문명은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어제, 오늘 기행을 강행군을 하며 다녀서 몸은 피곤하지만 스님 강의를 듣고 나니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야 한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습니다.

내일은 국동대혈에 가기 위해 새벽 4시에 출발합니다.

전체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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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자

함깨하지못한 아쉬움을 접고 차곡차곡
올려진글감동입티다

2014-07-08 17:20:33

연화덕

스님 하실일이 넘 많고 이끌어야 할 제자가 넘 많으니
너무과로 마시고 늘 건강하시길 발원하여 봅니다

2014-07-05 07: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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